• 제목/요약/키워드: Hoeam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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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檜巖寺) 수조명분(修造名分)의 변화와 종교적 해법의 유사구조 - 자장(慈藏)의 영향을 중심으로 - (Change in Repairing Cause of Hoeamsa(檜巖寺) and Influence of Jajang(慈藏))

  • 염중섭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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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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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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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The temple Hoeamsa(檜巖寺) was repaired by Naong(懶翁), and with this the power of the temple became far greater to be the greatest Buddhist temple during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Naong's reconstruction of Hoeamsa was originated from Jigong(指空)'s teaching 'Samsan Yangsu(三山兩水)'. But it is not clear whether Samsan Yangsu really meant Hoeamsa. By the way, after 14 years, Naong suddenly remembered this word and began to repair Hoeamsa in a large scale. From this, we can guess that Naong tried to give the contemporary Buddhism some change through the repair of Hoeamsa. But, as King Gongmin(恭愍王) the greatest supporter of Naong was suddenly assassinated, the political situation changed a lot and Naong also died unexpectedly. Naong's death brought out the critical sense to Hoeamsa and, in the process to resolve the crisis, the repair of Hoeamsa began to be justified through diverse religious factors. As these were expanded and developed on and one, Hoeamsa came to be honored as the most divine temple in Korea during the early Joseon dynasty. Furthermore, into the cause structure for the Naong's repair of Hoeamsa, the influence of Jajang was added through Odaesan Buddhism. As we can well understand, late Silla situation of Jajang and the late Goryeo of Naong were very similar and the both Buddhist leaders should have derived out some religious solution for them. In other words, both of them had a similar recognition in finding the religious solution for the contemporary crises. It becomes a way to understand the Hoeamsa repairing structure taken by Naong and his disciples. Therefore, by comparing the similar religious solution structures given by Jajang and Naong and by clearer understanding on Samsan Yangsu spirit, we can see the repair of Hoeamsa and the related aspects more accurately.

회암사(檜巖寺) 수조명분(修造名分)의 변화와 종교적 해법의 유사구조 - 자장(慈藏)의 영향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hange of Cause for Rebuilding of Hoeamsa and Analogous Structure of Religious Solution - focusing on Jajang's Influence -)

  • 염중섭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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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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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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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The temple Hoeamsa(檜巖寺) was repaired by Naong(懶翁), and with this the power of the temple became far greater to be the greatest Buddhist temple during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Naong's reconstruction of Hoeamsa was originated from Jigong(指空)'s teaching 'Samsan Yangsu(三山兩水).' But it is not clear whether Samsan Yangsu really meant Hoeamsa. By the way, after 14 years, Naong suddenly remembered this word and began to repair Hoeamsa in a large scale. From this, we can guess that Naong tried to give the contemporary Buddhism some change through the repair of Hoeamsa. But, as King Gongmin(恭愍王) the greatest supporter of Naong was suddenly assassinated, the political situation changed a lot and Naong also died unexpectedly. Naong's death brought out the critical sense to Hoeamsa and, in the process to resolve the crisis, the repair of Hoeamsa began to be justified through diverse religious factors. As these were expanded and developed on and one, Hoeamsa came to be honored as the most divine temple in Korea during the early Joseon dynasty. Furthermore, into the cause structure for the Naong's repair of Hoeamsa, the influence of Jajang was added through Odaesan Buddhism. As we can well understand, late Silla situation of Jajang and the late Goryeo of Naong were very similar and the both Buddhist leaders should have derived out some religious solution for them. In other words, both of them had a similar recognition in finding the religious solution for the contemporary crises. It becomes a way to understand the Hoeamsa repairing structure taken by Naong and his disciples. Therefore, by comparing the similar religious solution structures given by Jajang and Naong and by clearer understanding on Samsan Yangsu spirit, we can see the repair of Hoeamsa and the related aspects more accurately.

회암사지 온돌의 조성시기에 관한 연구 (Rethinking the Construction Period of the Ondol Heating System at Hoeamsa Monastery Site)

  • 임준구;김영재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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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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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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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The construction period of the ondol (Korean floor heating system) at Hoeamsa Temple Site is known as Joseon. The main reason is that a large number of remains in the Joseon era were excavated from the ondol floor with an all-around ondol method. This article partially accepts the theory of the creation of Ondol at Hoeamsa Temple Site during the Joseon Dynasty and suggests a new argument that some Ondol remains were built during the Goryeo Dynasty. The grounds for them are as follows. First, through the building sites consistent with the arrangement of the Cheonbosan Hoeamsa Sujogi (天寶山檜巖寺修造記, Record of Repair and Construction of Hoeamsa at Cheonbosan Mountain), it is highly likely that the ondol remains as a basic floor was maintained during the reconstruction period in Goryeo. Second, the all-around ondol method of the Monastery Site has already been widely used since the Goryeo Dynasty. Third, some ondol remains consist of "Mingaejari" and "Dunbeonggaejari," which were the methods of the gaejari (which dug deeper and stayed in the smoke) in the pre-Joseon Dynasty. Based on the above evidence, this study argues that the building sites such as Dongbangjangji, Seobangjangji, Ipsilyoji, Sijaeyoji, Susewaryoji, Seogiyoji, Seoseungdangji, Jijangryoji, and Hyanghwaryoji were constructed during the late Goryeo Dynasty.

양주 회암사지(楊州 檜巖寺址) 4단지 문지 출토 소조편(塑造片)을 통해 본 회암사 사천왕상 (Four Heavenly Kings Statues of Hoeamsa in the Early Joseon Dynasty: Seen Through Clay-Fragments Excavated From the Yangju Hoeamsa Site)

  • 심영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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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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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8-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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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1997년부터 2015년까지 진행된 회암사지 발굴조사 중 2001년에는 4단지 문지에서 사천왕상을 장식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소조편들이 출토되었다. 회암사 사천왕상은 대대적인 중창 불사가 있었던 여말선초에 4단지 문이 건립되면서 조성되었던 것으로 본다. 따라서 회암사 사천왕상은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연원과 관련하여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이에 이 글에서는 양주 회암사지 4단지 문에 봉안되었던 사천왕상의 특징 및 도상과 조성 시기를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우선 출토 소조편을 천왕문에 봉안된 조선시대 사천왕상들과 비교하여 각 편의 대략적인 위치와 기능을 밝혔다. 또한 4단지 문지의 크기와 평면 형태를 조선시대의 다른 천왕문과 비교하여 회암사 사천왕상은 입상이었을 것이며 그 크기는 또 다른 입상인 법주사 천왕문의 사천왕상과 비례했을 것으로 보았다. 회암사 중창의 역사를 고려했을 때 4단지 문의 건립 완공 시기는 1376년과 1473년의 두 시기 중 하나로 볼 수 있고 회암사 사천왕상의 조성 시기 역시 이와 연동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출토 소조편 가운데 화염형 장식편은 조선시대 사천왕상 보관의 일반적인 장식 요소로서 고려시대에는 나타나지 않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 편의 존재는 회암사 사천왕상의 조성 시기가 고려시대보다는 조선시대일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에 유구 분석을 통한 건축사 연구에서도 4단지 문의 건립 시기를 대체로 15세기 후반으로 보는 의견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15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회암사 사천왕상은 이후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도상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새로운 전통으로서 정립되었다는 점에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는 또한 거꾸로 4단지 문지의 건립 시기를 15세기 후반으로 보는 건축사학계의 의견에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양주 회암사지 출토 범자 진언명(眞言銘) 기와의 특징과 의의 (A Study on the Character and Historical Significance of Sanskrit Roof Tiles in the Hoeamsa Temple of Yangju City)

  • 엄기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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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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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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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양주 회암사는 고려말기부터 조선초기까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크게 중창되어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특히 당대의 고승이었던 지공선사, 선각왕사 혜근, 무학대사 등과 인연을 맺으면서 여러 번 지속적으로 중창되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회암사는 조선전기 불교계의 중심으로서 불교문화를 선도하는 사찰이 되었다. 이러한 회암사는 조선후기에 소실된 이후 1997년부터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회암사지에서는 막새기와, 평기와, 특수기와 등 다양한 유형의 기와들이 출토되었는데, 이중에서 막새기와는 시대적인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그리고 다양한 범자 진언명 기와들이 출토되었다. 양주 회암사지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수막새와 암막새가 출토되었는데, 이 중에서 우수한 제작기법으로 범자 진언이 새겨진 막새가 상당량 출토되었다. 범자 진언은 1자에서 9자까지 다양한 유형의 범자 진언이 새겨졌는데, 그중에서 정법계진언과 육자진언이 새겨진 기와가 가장 많이 출토되었다. 이 진언은 도량을 청정케 함과 동시에 조선시대 들어와 육자진언 신앙이 본격화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회암사지에서는 편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범자 기와가 출토되어 다른 사찰 범자 기와의 편년 설정의 기준이 되고 있다. 이것은 회암사의 범자 기와를 제작한 와공들이 범자 진언에 대한 신앙과 이해가 높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회암사 이후 대부분의 사찰에서 범자 진언명 기와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회암사가 우리나라 범자 진언명 기와의 제작과 활용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준 사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다양한 방면에서 회암사지 출토 범자 진언명 기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14세기 원 건축의 영향과 고려의 수용 (The Architectural Influence from the Yuan Dynasty and the Acceptance of Goryeo Dynasty in the 14th Century)

  • 홍병화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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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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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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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The architectural influence from the Yuan had impact on the Goryeo Dynasty in earnest during Yuan intervention period in the 14th century. The representative examples which were influenced by the Yuan architecture are the Eungjinjeon in Seongbulsa(成佛寺) temple, the ten-story stone pagoda of Gyeoncheonsa(敬天寺) temple site, the Bogwangjeon in Simwonsa(心源寺) temple, the Hoeamsa(檜巖寺) temple and so on. Notwithstanding the changes of relationship between two countries, it can be comprehended that there was a selective acceptance of the Yuan architectural peculiarities in Goryeo Dynasty. It means that the adoption of foreign culture in Korea has not been inevitable from the unilateral demand, but been autonomous by perceiving as the advanced culture. This tendency was maintained even though the government had been changed.

회암사지 금탁(琴鐸)의 주조방법과 가공기술 연구 (Study on the Casting Method and Manufacturing Process of Bronze Bells Excavated from the Hoeamsa Temple Site)

  • 이재성;백지혜;전익환;박장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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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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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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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3점의 금탁에 대한 성분조성과 미세조직을 분석하여 조선초기 금탁(琴鐸)을 제작하기 위한 주조방법과 가공처리 기술에 대해 살펴보았다. 분석결과 구리, 주석, 납을 주성분으로 하며, 그 비율은 평균 85 : 8 : 7로 나타났다. 주성분인 구리, 주석, 납을 제외한 10개의 원소가 0.3% 이하의 적은 양으로 검출되어 비교적 잘 정련된 구리소재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검출된 10개의 미량 원소 중 황과 철은 공급된 구리소재의 원광석으로 황동광이나 휘동광 등 황이 포함된 광석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주조방법으로 사형주조법이 적용되었으며, 방법은 먼저 주물사로 틀을 만들고, 여기에 거푸집을 종 모양대로 세워놓고 구리-주석-납을 용해시킨 청동 주물을 정수리에서 하륜부 방향으로 부어 본체를 만들었다. 형태가 완성된 뒤에는 표면 가공을 위한 추가적인 열처리 없이 가질 작업을 통해 표면을 정리하였다. 모든 가공처리 공정이 마무리된 뒤에는 정수리 부분에 풍판을 연결시키기 위해 철제 연결고리를 끼우고, 그 부분에만 용해된 청동 주물을 부어 고정시켰다. 금탁의 표면에 음각된 명문의 새김법은 축조각과 모조각 기법이 각각 다르게 사용되었고, 획순과 서체에서 차이가 나는 점에 비추어 명문 조각에는 다수의 장인이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 제작기술의 변천과정을 입증할 만한 사료나 이와 관련된 연구 성과물이 매우 부족한 현 실정에서 제작 연대와 제작 주체가 명확한 금탁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연구는 향후 청동기 제작기술 체계의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