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tle/Summary/Keyword: History of Gory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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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불교 석조미술 연구 (A Study on the Buddhist Stone Arts of Mt. Bukhan)

  • 이서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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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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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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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논문은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이 북한산이라는 문화 영역에서 갖는 의의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북한산은 불교가 전래된 이후부터 불교문화가 성행했으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사찰이 건립된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다. 조선 후기 북한산 승영사찰(僧營寺刹)의 건립은 기본적으로 신앙 기도처로서 사찰의 기능을 가졌지만 북한산성 축성이 중요 배경으로 작용한 만큼 북한산의 지정학적 위치, 교통로, 관방체계와도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는 점이 매우 주목되는 북한산 불교문화의 특징이다.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을 유형별로 살펴보면 석조부도, 석탑, 마애불, 석불, 탑비(석비), 석등, 당간지주, 마애사리탑 등으로 구분되는데 비교적 다양한 유형이 남아 있다. 시대별 특징은 신라 불교미술이 경기지역까지 확산되었음을 보여주며 고려 전기와 조선 후기에 석조미술이 가장 많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부터 북한산 일원 사찰은 왕실 원찰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북한산성 축성이 불교 석조미술 증가에 가장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분포 현황을 보면 통일신라 석조미술은 남쪽에서부터 등장하며 고려 전기까지는 북한산 서쪽에 주로 조성되었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 후기까지는 북한산 동쪽지역에 다수 조성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초기에 한강을 이용해 서해안 방향으로 진출하고자 했던 신라의 군사적 목적과 조선 후기 북한산성 축성에 따른 도성 방어 목적으로 변화하면서 북한산의 중심 사찰도 변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은 불교 도입 이래 다양한 유형이 꾸준히 조성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새로운 도상과 유형이 등장하고 사례가 많지 않은 특징적인 양식이 등장한다는 점, 고려 후기와 조선 후기 분사리 부도의 건립, 조선 후기 불교신앙 흐름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와 가치가 매우 높다.

우리나라 종이접기 공예품에 대한 역사적 고찰 (Historical Review on the Korean Paper Folding Crafts)

  • 전철
    • 펄프종이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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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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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8-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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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The history of paper folding had continued before that the paper manufacturing technique was spread in the 3rd century and it was used for witchcrafts and rituals. Fold means as was used with the word Cheop and Jeopji.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the conical hat with fabric spread as customs, then it was made of the paper that led the popularization of paper folding form the early Joseon Dynasty. Paper crafts and living things with paper are mostly derived from fabrics except the paper written for saint's name related God. In the period of the tribe nation, witchcrafts and rituals brought to Japan via the Korean Peninsula, as a result Kami which means God in Japanese that becomes the paper. The first folding fan was made to develop from the fan, Baekseopsun in the end of Goryeo Dynasty. It was an outstanding application of paper folding crafts. Since the early Joseon Dynasty, paper flower folding has considered as the virtue of savings and has developed one of the Korean traditional paper arts. Paper folding has also developed in the practical uses like the other Korean paper arts but paper folding that was developed as seasonal customs, playing or religious purpose showed a different trend from Korean paper arts.

Daytime Visibility of Halley's Comet in 1222

  • Choi, Go-Eun;Lee, Ki-Won;Mihn, Byeong-Hee;Ahn, Young Sook
    • 천문학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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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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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0.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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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We reexamine the Goryeosa (History of the Goryeo Dynasty, A.D. 918-1392) account that Halley's Comet was seen during the daytime on September 9, 1222. To verify whether the referenced "daytime" refers to twilight or daylight (i.e., when the Sun is above horizon), we determine the absolute magnitude and heliocentric power-law exponent for Halley's Comet using observations made around the perihelion in 1986 and a formula considering the brightness enhancement by forward-scattering. We then apply the results to estimate the light curve of Halley's Comet in the 1222 event and find that the total visible magnitude could reach a maximum of -1.7 on September 8, one day before the Goryeosa's account. Therefore, we think that Halley's Comet with a coma of -1.7 mag and tail-length of about $20^{\circ}$ was actually observed during the day on September 9 because the observational conditions on that day were so good that Venus was visible in daylight. Furthermore, we think that the event might have been witnessed in the morning sky because the contents of Venus's culmination (occurred around September 9.07 TT) continue on the same day acco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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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cient Korean Costume Speculated on the Samguk-yusa (三國遺事)

  • Kang, Min-Hye;Cho, Woo-Hyun
    • International Journal of Costume and Fash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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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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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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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The Samguk-yusa(三國遺事) is one of the two classics of Korean ancient history together with the Samguk-sagi(三國史記); however there has not been any positive attempt to analyse clothing culture centering on the Samguk-yusa until now. Thereupon, this study aims to find the records related to fabrics, color and fashion appearing in the Samguk-yusa, and to analyse the fashion culture of the three kingdoms projected in the Samguk-yusa, referring to the Samguk-sagi and ancient Chinese reference books. According to the records in the book, the fabrics used for clothing of those days included Jikgeum-wimun(織錦爲紋), Geum(錦), Chaebaek(彩帛), Osaek-geumchae(五色錦彩), Geumbaek(錦帛), Geumsam(錦衫), Ma(麻), Neung(綾), Geum-su-neung-ra(錦繡綾羅), Poh(布), Daecho, Bira-geumjeom(緋羅金點), Gyeon(絹). Japchoe(雜綵), Robtyeom(羅緋染). Chimilpoh(緻密布), Gi(綺) and Whan(紈), and they had colors such as brown black(緇), black(黑), purple(紫), yellow(黃), blue(碧), clear white(素), white(白), five colors(五色). There is substantial amoung of report on Buddhism, and the terms used for Buddhist clothing included Beobeui(法衣), Nabeui(衲衣), Bangpoh(方袍), Gasa(袈裟) and Yueui(由衣). It is also ascertained that Gasa had a variety of Bira-geumjeom-gasa(緋羅點袈裟), Manap-gasa(摩納袈裟) and Geumra-gasa(金羅袈裟).

한국 주심포식건축의 처마구조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Eaves Structure of Korean Jusimpo-type Architecture)

  • 양재영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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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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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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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lassify types of the eaves structure of buildings with the Jusimpo-type structure and to analyze the characteristics of each eaves structure. For this objective, forty buildings were selected and investigated. The results of analysis ar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the main members of framework which handle a load burden on the long-rafter(長椽) are classified as the Jusim-dori(柱心道里) and the Oemok-dori(外目道里). Based on the method of handling a load, the eaves structure is classified into three types; the Jusim-processing-type(柱心中心形), the Oemok-processing-type(外目中 心形), and the Oemok-processing-variant-type(外目中心變異形). The Jusim-processing-type is the set where the internal length of a long-rafter is longer than the length of the eaves on the basis of the center of a column. The Oemok-processing-type is the set where the external length of a long-rafter is longer than the internal length of it. And the Oemok-processing-variant-type is the set where the internal length of a long-rafter is longer than the external length of it, but it is shorter than the length of the eaves which includes the extruded length of a Buyeon(浮椽). Second, the Jusim-processing-type had been generally adopted in the Jusimpo-type structure of the Goryeo Dynasty. But since the 17th century, the Oemok-processing-type had the highest application rate. Third, the change from the Jusimdori-processing-structure to the Oemokdori-processing-structure means that the long-rafter is moved to the direction of outside of the building, and thus the Jung-dori(中道里) is gradually moved to the column center. And, the change of the eaves with the Jusimpo-type structure was not a process for increasing the length of the eaves but a process for adopting the advantages of the Dapo-type structure by changing the arrangement of purlin. Fourth, the change from the Jusimpo-type structure to the Dapo-type structure could be understood as a process for moving the main point for handling a load from the Jusim-dori to the Oemok-dori.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 희랑대사상(希朗大師像)의 특징과 제작 의미 (Characteristics and Significance of the Huirang Daesa Sculpture at Haeinsa Temple in Hapcheon)

  • 정은우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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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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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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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희랑대사상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상으로 높이 82.4cm, 무릎폭 66.6cm, 앞뒤 최대폭 44cm에 이르는 등신상에 가까운 크기이다. 제작 기법은 승상의 앞면과 뒷면을 건칠과 나무를 접합하여 만든 것으로 동아시아의 유일한 사례로 주목된다. 유사한 기술이 나말여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에 이미 적용된 바 있어 이 시기의 특징으로 이해된다. 희랑대사상에 대해서는 18세기에 쓰여진 가야산을 여행하면서 쓴 기행문에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즉 승상의 가슴에 있는 구멍과 힘줄과 뼈가 울퉁불퉁하다는 등의 독특한 특징은 현재의 희랑대사상과 정확하게 부합된다. 가슴에 있는 구멍은 신통력의 상징으로 3~4세기에 활동한 서역의 승려 불도징(佛圖澄)의 가슴에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에는 흑칠 상태였으며, 19세기에 현재와 같이 채색되었음도 알 수 있다. 봉안 전각은 해인사의 해행당(解行堂)과 진상전(眞常殿)이었으며, 이후 조사전과 보장전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 승상의 제작과 봉안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문헌 기록에 등장하지만 현존하는 작품은 매우 드문 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승상의 초상조각은 고려시대의 희랑대사상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제작된 나옹과 의상대사상 등 모두 네 구뿐이다. 이 가운데 희랑대사상은 고려 초기 10세기경에 제작된 상으로서 최고의 제작 기술과 사실적인 재현 그리고 내면의 인품까지 표현한 점에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다. 승상을 제작하여 숭배하고 신성시하는 전통은 한국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다만 재료와 제작 기술에 대해서는 나라마다 차이와 특이성을 보이며 발전하였다. 중국은 육신불(肉身佛)이 많은 편이며 일본은 건칠, 나무, 흙 등 시대마다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많은 승상을 제작하였다. 저마다 다른 재료와 기법을 사용했지만 동아시아 각국의 승상 제작은 승려의 참모습과 정신성의 성공적 표현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고려 강도(江都)의 성곽과 궁궐 재고찰 (A reevaluation of the castles and palaces of Goryeo Gangdo (江都) using GIS)

  • 강동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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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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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4-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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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강도는 39년간 고려의 수도였으며, 이는 개경의 재현이었다. 하지만 몽골군의 침입이라는 급박한 전시 상황과 강화도의 지형적인 특징 등으로 인해 개경과는 다소 다른 성곽 체제와 궁궐의 배치를 이루고 있었다. 강도의 성곽은 외성-중성-내성으로 구성된 3중성(重城) 체제로 이해할 수 있다. 외성은 가장 먼저 완성한 성곽이었으며 몽골군의 침입을 최전선에서 최우선으로 방비하기 위해 축조된 것이었다. 그 구간은 조선시대 외성의 휴암돈~화도돈이었다고 추정된다. 중성은 강화산성 외곽의 토축성인 현 '중성'으로 볼 수 있다. 이 성곽은 고고학적 조사에서 확인된 축조 수법의 정교함과 견고성을 통해 볼 때 치밀한 계획 하에 축성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중성은 강도의 도성으로서 궁궐, 관청, 민가 등을 보호하기 위해 18년이라는 장기간의 축성 과정을 거쳐 『고려사』에 기록된 바와 같이 '비로소' 완성되었던 것이다. 내성은 궁성적 성격을 지닌 성곽이었다. 조선시대 강화부의 '구성(舊成)'이 이에 해당하며 개경 구성의 규모와 거의 일치하였다. 내성은 궁궐을 포함한 주요 관부와 부속 시설이 위치한 궁성과 황성의 통합, 즉 복합적 기능 공간을 이루고 있었다. 한편 궁궐은 개경에 준하였다는 문헌 기록에 근거하여 개경 궁궐도와 중첩한 결과, 승평문-선경전에 이르는 건축물의 중심축이 김상용 순절비각-고려궁지와 일치하였다. 따라서 강도의 궁궐은 기본적으로 개경과 동일한 건축물 배치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내전과 부속 건물 등은 강화의 지형 조건을 감안하여 배치되었을 것이며, 이는 관청리 '궁골' 일대로 추정된다.

예천지역 왕실의 태실조성과 지역사적 의의 (Formation of Taesil of Royal Family in Yecheon Area and Its Significance in the Light of Local History)

  • 이재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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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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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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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이 연구는 예천지역이 고려와 조선왕조의 태실로 이용되었던 배경과 지역적 연관성을 살펴봄으로써 왕실 태실이 지니는 지역사적 의의를 찾고자 한 것이다. 이 연구로 예천지역의 태실은 소백산에서 금당실마을 사이 권역의 돌혈에 해당하는 곳에 조성되었으며, 해당 고을은 태주의 즉위와 더불어 승격되어 왕실의 지원과 보전관리의 책임이 부여되었다. 왕실의 태실조성은 지역의 중요한 사건으로, 지역민들은 태주의 왕위등극과 함께 지역의 위상을 강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실의 태실지 선정은 폐비윤씨의 사례와 같이 태주의 출생지, 지역과 왕실 간의 관계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정조의 사례와 같이 효행의 대상물로서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었다.

월정교의 복원적 고찰 (Restoration Study of Woljeong-gyo)

  • 남시진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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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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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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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According to documentary records Woljeong-gyo(stone bridge) is built in 760(Silla the 35th King Gyeongdeok 19) and used as original function until 1280(Goryeo the 25th King Chungryeol 6) as Chunyang-gyo. But in those days "Donggyeongjapgi" was published in 1669(Joseon Hyeonjong 10) we assume that it was lost its original function. There are four pier in the type of a ship with the same distance in the middle of river. We can see it is the site of bridge as parts of stonework of bridge are remained. In 1975 the abutments and piers are surveyed and in 1984 stone investigation twice and excavation three times which were to plan restoration were done. Now the restoration of abutments both ends are worked. For restoration of Woljeong-gyo studied documentary records and excavation recoeds were collected and examined. It helped to see the bridge in southern China twice to restore the bridge. Unearthed articles such as yeonham(a kind of member to support roof tiles) and giwa(roof tile) gave decisive clues to assume upper structure of the bridge and from Chinese bridges are helped to type of the bridge. It is certain Woljeong-gyo was ranggyo which means that upper structure was made with wooden members and the stone piers shaped of a ship below and near the abutments both ends another buildings were. Youngjocheok(the architectural measure) of this bridge is similar to gokcheok(the metal measure, 301.84mm) used now that the length of piers is 46choek(尺), the width of that is 9choek(尺), the length between two piers is 42choek(尺), the length between abutment and pier is 38choek(尺). Also we can see that entirely the length of the bridge is 210choek(尺), width is 40choek(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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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문(記文)으로 본 세조(世祖)연간 왕실원찰(王室願刹)의 전각평면과 가람배치 (Architectural Plan And layout of Buddhist Temples(Wangsil-Wonchal) on through the Study of Records about Temple's Foundation during King Sejo(世祖) Period)

  • 이경미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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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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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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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The study on Buddhism architecture in early Joseon dynasty was inactive. The period of King Sejo is important for studying the trend of Buddhism architecture in early Joseon, that was transmitted from the end of Goryeo dynasty, but it was difficult to know its exact situation due to lack of related records. The records were all written by Kim Su-ohn, which are Wongaksabi' 'Sangwonsajungchanggi' 'Bongseonsagi 'Geonginsajungchanggi'. The main hall was mainly second floor and there were necessarily annexed buildings at the right and left of the main hall. So the plane figure of $\Box\Box\Box$ was shown. It was a main stream for main hall. This layout may be referred to search for the origin of the layout in courtyard based structure(中庭形) in the late Joseon dynasty. Most of temples had 3 gates. Some part of horizontal corridor was used as 2 gates and the outer gate, far from main hall, was without corridor. The gate leading to front yard of main hall was called front gate, the next middle gate and the outer gate was Oisamun(外沙門) or Samun(沙門). Im most of the temples, people could enter into the front yard through pavilion which had the function of bell tower. The pavilions were located between front gate and first corridor. It is thought that this layout of the place for making bean curd outside the temple area will contribute to different studies on temples making bean cure in the future. The records about temples's foundation studied above are a little different between temples, but have more similarities. There common denominators represent the architecture tendency of Buddhist temples in the related period. It is thought that such a tendency was also shown on architecture of other temples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as well as Buddhist temp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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