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Ha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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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안괘사의 원인(原因)에 대(對)한 문헌적(文獻的) 고찰(考察) (Reference research for the cause of facial nerve paralysis)

  • 유한철;김한성
    • 혜화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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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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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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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From the reference research, the results obtained were as follows. 1. Until the "Song" dynasty, the predominant cause of facial nerve paralysis was the attack of Pathogenic Wind to "the Stomach Channel of Foot Yangming, (St.C.); and "the Small Intestine Channel of Hand Taiyang, (S.I.C.). They recognized the facial paralysis as an aspect of palsy. 2. In the period of Jin-Yuan(金元), the predominant cause was described as "Xuexu"(the deficiency of blood) and phlegm. They recognized that the facial palsy was a palsy. However, they also acceded to the possibility that there could be other explanations. 3. In the period of "Ming & Qing", there were numerous kinds of causes. For example, the following were identified as attacking the Meridian: the Pathogenic Cold; Pathogenic Heat; "Xinxu"(the deficiency in the heart); Fire and Heat combined as a pathogenic factor; "Pixu"(the deficiency in the spleen); and, "Xinxu"(the deficiency of blood). 4. In the past, Koreans have explained the facial paralysis according to the Chinese theories mentioned. However, recently there has been an emergence of another Chinese theory; whereby, facial paralysis is classified into causes and symptoms, and then medical treatment is applied accordingly. 5. From the occident medical perspective, the facial paralysis is categorized into two causes. The first is called central facial nerve paralysis and the second is called peripheral facial nerve paralysis. The latter is mainly caused by Bell's palsy, Herpez zoster oticus, and trau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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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es" Silk People Were Silla

  • Jisoo Kim;Youngjoo Na
    • 한국의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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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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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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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Romans in the fifth and sixth centuries BC referred to the people who brought silk from the Far East via the pre-Han (漢) silk road as "Seres". The Seres' colorful silk was characterized by intricate patterns and high yarn density, markedly different than thin "China silk". This study examined geographic and genealogic records and linguistic evidence and found support for the syllogistic conclusion that the "Seres" were the early Silla people. The Seres' territory in the seventh century BC was much larger than that of the Qin (秦) or Zhou (周), extending from Xinjiang to Balhae. According to literature records, Dong-Yi (東夷) invented Geum (錦) silk in the 11th century BC around Balhae, where silkworm trees were abundant. In the Han dynasty, even thin silk was rare and expensive, but in Gojoseon (古朝鮮), Geum silk was common and less valuable than beads. The Silla delivered surplus Geum silk, fur, and high-quality iron to the West. Linguistic evidence includes historical names for Silla: "Sira," "Saro," and "Sere," as well as records naming King Ruri of Silla "Seri-Ji"; and the replacement of the word "Seres" by the word "Silk" from the Goguryeo word for "yarn winder": "sil-kkury".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의 서예미학(書藝美學) 고찰 (A Study on the aesthetic of Calligraphy on Changam, Lee Samman)

  • 김도영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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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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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9-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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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5)은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일컬어지며, '행운유수체(行雲流水體)'라는 독자적 서체를 창안하고, 호남지방에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서풍을 계승·창달시킨 대서백(大書伯)이다. 그는 '서여기인(書如其人)'적(的) 인품고(人品高)와 사고법(師古法)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통령(通靈)의 경지를 추구하였다. 저서 『창암서결(蒼巖書訣)』를 통해 기본적으로 한위(漢魏) 해서를 숙련하여 근골이 확립되면 행서와 초서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서(書)는 무릇 '자연'에서 비롯되었음을 자각하고, 법천귀진(法天貴眞) 정신을 통하여 유법(有法)의 단계, 나아가 무법이법(無法而法)의 통령(通靈)의 경지를 발현하였다. 또한, 노장(老莊)의 '우(愚)'의 철학과 거기에 근간한 '졸박미(拙樸美)'를 추구하여 신묘함을 얻을 수 있다는 심미관을 드러내었다. 이는 자연천성을 드러나게 하는 순자연(順自然)의 철학이자, 무지무욕(無知無欲)의 상태에서 자신의 진우(眞愚)를 지키는 미학이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미추(美醜)와 선악(善惡)을 불분(不分)한 순자연적(順自然的)인 우졸미(愚拙美)를 지면에 발현하였다. 한편, 창암(蒼巖)은 모든 필법에 력(力)을 통하여 천연미와 생명미를 도모하였고, 력(力)을 적절히 운용하여 힘 있게 밀고 나가는 한대(漢代)의 추전(推展)이라는 용필법을 제시하였다. 특히 『창암서정운시(蒼巖書停雲詩)』에서 일운무적(逸韻無跡)한 필의는 음양대대(陰陽對待)의 조화를 이루면서 신체비동(神體飛動)한 생명력과 기괴적(奇怪的) 역동감이 넘친다. 또한, 포역함세(抱力含勢)의 추전미(推展美)가 위이불범(違而不犯)하여 득필천연(得筆天然)의 심미경지를 이루었으니, 창암(蒼巖)이 "해동제일(海東第一) 초서(草書)의 거장(巨匠)"이라는 진면목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황제내경(黃帝內經)』에 나타난 일월성진(日月星辰)에 관(關)한 연구(硏究) (A Study on the Sun-Moon-Stars(日月星辰) appeared in Huang Ti Nei Chin(『黃帝內經』))

  • 박찬영;김기욱;박현국
    • 동국한의학연구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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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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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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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 A study on the effect of the Sun-Moon-Stars(日月星辰) in Huang Ti Nei Ching("黃帝內經") on the formation of the Yunqi theory(運氣理論) have revealed following conclusions. 1. There was a record of Stars(星辰) written by Gabgol-Character(甲骨文字) in the Yin(殷) Dynasty. But the very first documentary records of Stars(星辰) is Shu Jing("書經"). Ancient astronomy had the tendency of astrology of combined with theory of the Five Elements(五行) and finally effects the theory of formation of Huang Ti Nei Ching("黃帝內經"). 2. Shu Jing("書經") said that Junrak(錢樂) made an Armillary sphere(運天儀) in the Sung(宋) Dynasty. And in the Jin(秦) and the Han(漢) Dynasty, they already observed the stars. The Sunkiokhyung(璿機玉衡) which is machinery of star-observing, became to be called an Armillary sphere (運天儀) by the pass of times. 3. As of the theory of the Cosmos-structure(宇宙-構造論) in Ohanunhangdaeron("五運行大論"), Guiyugu(鬼兒區) announced the Hypothesis of Covering Heaven(蓋天說) but Kibak(岐伯) supported the Hypothesis of chaosheven's(蓋天說) and in the theory of atmosphere(大氣論) in Ohanunhangdaeron("五運行大論") said that the earth was in Great Empty(太虛) and it was floating in the universe by the Great Chi(大氣). 4. The knowledge about the Five stars(五星) in Huang Ti Nei Ching("黃帝內經") is presented in the section of Gemgwejineonron("金?眞言論"), Gigoupyondaeron("氣交變大論"), Youkwonjeonggidaeron("六元正紀大論").ln the method of identifying the Five stars(五星) presented the criteria of the brightness, the altitude, the colours and the orbit etc. 5. The jupiter which has twelve year's revolution cycle was the basis of determination on the Twelve constellation(12辰), the Twelve field of heaven(12次), the Twelve Houses in the ecliptic(黃道 12宮), the Twelve Earth's Branches(12支) and the Twelve fields of Earth(12分野) and also it became the origin of the duodecimals(12進法). 6. The saturn having about twenty-eight year's revolution cycle became the criterion in identifying the Twenty Eight Constellations(28宿) which was used as the coordinates of the Celestial sphere (天球). 7. By the Percussional movement(歲差運動), the position of polaris and the Vernal-Antumal equinox(春秋分点) were shifted. Therefore the ancient the Heaven Gate-Earth Door(天門-地戶) changed from the position of Sil-Byuk(室壁), Yik-Jin(翼軫). And the precisional movements brought about the concept of the WunHoyYunSe(元會運世) that is a method of dividing a period. Also the precisional movement gave three dimension(三次元) foundation interpreted the Sixty JiaZi (六十甲子) which is revolving through sixty years uniformally. 8. The Hypothesis of the Nine Houses and Eight Winds(九宮八風論) which is one field of the astrology of ancient polaris-nine Houses divination plate(太一九宮占盤) brought about the concept of deficiency and excess and the concept of the Wind Vice(風邪). In the Calendar System(曆法) presented in Huang Ti Nei Ching("黃帝內經") the tropical year of the Sun-Moon-Stars(日月星辰) and the revolution and the rotation of the earth give explanations the changes of Yin-Yang(陰陽) by the use of the ten Celestial branches(十干) and the twelve Earth branches(十二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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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산수화의 경관관이 원림양식에 미친 영향 (The Influence of Landscape Paintings in Joseon Dynasty on the Styles of Landscape Garden)

  • 김한배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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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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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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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조선시대의 산수화의 시대별 대표유형들은 지식인들이 공유하는 이상향의 역할을 해왔으며, 동시대 원림양식의 형성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쳐 왔다. 특히 조선초기의 대표적 산수화인 <몽유도원도>는 소형 계류부에 입지하면서 은둔지향적인 '도원형 원림'을 형성시키는 배경이 되었으며, 이는 지속적으로 조선조 원림의 보편적 원형의 역할을 해왔다. 조선중기에는 <무이구곡도>의 전파와 함께 '구곡형 원림'이 등장한다. 구곡형 원림은 굴곡이 많은 대규모 계류에 입지하면서 은둔형의 '곡(曲)'과 조망형의 '경(景)이 결합된 복합적 경관특성을 보여준다. 조선후기의 <진경산수화>는 승경탐사를 통해 팔경문화를 토착화 시키면서 '조망형 원림'을 촉발시켰고, 사회적으로 원림이용이 보다 개방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진경산수화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났던 민화풍의 <풍수명당도>는 '길지형 원림'을 통해 원림과 주변부 지역간의 풍수적 형국을 강화하게 하였으니, 내명당 외명당의 구조에 따르는 내원과 외원의 이중구조가 그것이다. 이렇게 조선조 전반의 원림경관은 시대별 산수화 대표유형의 영향 아래 은신과 조망의 양면적 가치를 시기적, 지역적 특징으로 부각시키면서 변화해 왔다고 판단된다.

제사공간으로서 장백산의 문화경관적 해석 (Cultural Landscape Analysis of Changbai Mountain as Sacrifice Space)

  • 허종화;성종상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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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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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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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특정한 시대에 장백산 지역에 조성된 제사공간을 문화경관의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장백산의 신성성이 역사 속에서의 변화과정과 정권의 교체와 민족의 변화 속에서도 신성성이 유지된 이유에 대하여 해석했다.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청나라에서 중화민국시기로 과도하면서 겪은 정권의 교체와 민족의 다양성, 그리고 문화의 수용성으로 인하여 장백산의 제사성격과 신적대상이 변화했다. 둘째, 청나라의 황가 제사공간인 망제전(望祭殿)은 권위적인 공간으로 만족만의 유일한 제사공간과 문화를 형성했고 중화민국 시기에는 한족의 이주와 정착과정을 겪으면서 방산인 사이에서 새로운 민간신앙이 탄생했으며 따라서 제사공간인 여래사(如來寺), 산신노파두묘(山神老把頭廟)가 조성되었다. 셋째, 제사공간과 장백산을 공간적으로 보면 망제전은 수직적인 공간으로 권력적인 공간이고 여래사와 팔괘묘는 장백산과 수평적인 공간에 입지되어 순종적인 공간으로 나타났다. 넷째, 제사의례를 보면 청나라의 망제전은 만족만의 유일한 제사의례 이지만 황권의 폐지에 따라 단절되었다. 현재는 민간제사의례가 일상화 되어있고 청나라의 제사의례는 형식적으로만 진행된다. 결론적으로 보면 역사적으로 장백산에 대한 신성성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백산 제사공간은 청나라의 단일한 제사문화에서 정권의 교체와 다민족의 문화에 대한 수용을 거쳐 변화하였다. 현재는 상호수용을 통하여 중첩된 제사공간과 문화를 형성하였다.

조선조 토지제도와 인식을 통해 본 보길도 윤선도 원림 조영 배경 연구 (A Study on the Yun Seon-Do's Garden on Bogildo Island based on the Recognition of the Land Systems in the Joseon Dynasty)

  • 이태겸;김한배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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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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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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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연구는 조선시대 토지제도 및 그 시대 사람들의 토지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고산 윤선도의 보길도 입도 배경 및 부용동 원림의 조성 특징 등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부용동 원림의 조영의도를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해석하였다. 조선시대 토지제도와 인식을 살펴보면, 산림천택(山林川澤)의 토지는 공유지였다. 그러나 금산(禁山)을 제외한 지역은 입안(立案)과 분묘의 금양 등을 통해 공유지를 사점하려는 행위가 활발했다. 조선시대 보길도는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금산으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가정원을 조성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윤선도는 병자호란 직후, 산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금산이었던 보길도에 입도하고 부용동 원림을 조성하였다. 보길도는 가문의 전장 관리를 위해 주변지역으로의 이동이 용이한 지역이며, 산림 자원이 풍부하고, 어염 등 경제적 가치가 있는 자원도 확보할 수 있는 섬이다. 이처럼 윤선도는 금산 보호라는 공적인 명분으로 보길도에 입도하였으나 산림 및 어염자원을 획득할 수 있고 가문의 전장 확대 및 관리가 용이하다는 경제적 이점도 고려하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한국 고대 건축의 부연(浮椽) 사용 시기에 관한 연구 (The Beginning of the Usage of Buyeon (浮椽) in Ancient Korean Architecture)

  • 한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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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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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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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한국 목조 건축에서 외형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요소로 지붕의 형태는 매우 중요하다. 그 가운데에서도 처마의 곡선은 한국 목조 건축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요소이다. 이 처마의 곡선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서까래와 부연(浮椽)이라는 부재이며, 특히 날렵한 처마곡을 만들어 육중한 지붕의 느낌을 보다 가볍고 역동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것은 부연이다. 부연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는 이미 알려져 있지만 처음 사용 시기와 관련해서 명확하게 알려진 바는 아직 없다. 이에 따라 본 연구는 한국 건축에서 부연이 최초로 사용된 시기를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하여 먼저 한국·중국·일본의 고대 건축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는 문헌, 발굴 유구, 현존 건축물과 건축물이 표현된 회화 및 조각 등의 고찰을 차례로 진행하고 이를 종합하여 한국 고대 건축의 부연 사용 시기를 추정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의 경우 6세기 중반 북제에서 처음 부연 사용이 나타나지만 일반화된 것은 당대인 7세기부터로 판단된다. 둘째, 일본의 경우 수도를 비조 지역에서 나라 지역으로 이전하는 8세기 중반 이후 부연 사용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중국의 당과 직접적인 문화 교류를 추진하는 시기와 겹친다. 셋째, 한국의 경우 부연 사용은 6세기 중반 중국 북제로부터 백제로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일반화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신라 통일기인 7세기 중반 중국 당과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보편화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한국적 가치 연구 (A study on the value of Korean during the Joseon Dynasty)

  • 한성구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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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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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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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가치관이란 개인이 자신 및 타인, 사회와 세계, 자연과 우주와 끊임없이 교섭하면서 갖게 되는 태도나 관점을 말한다. 여기에는 주로 어떤 것이 옳은 것이고 바람직한 것이며, 어떤 것을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지에 관한 생각들이 포함된다. 본 논문에서는 조선시대를 주요 시간적인 배경으로 삼아 한국인들이 어떤 부분에 큰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왔고, 전통적 가치관이 시대적 환경에 따라 어떤 변용을 거쳤는지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이를 근거로 현대 사회에서 계승하고 발현시켜야 할 가치 및 의미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수많은 전통가치나 윤리는 왜곡되거나 파괴되어 기존의 사회문화와 전통문화 전체가 부정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 결과로 드러난 가장 큰 문제는 자의건 타의건 간에 수백 년간 공동체를 이끌어주던 공통의 가치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공통 가치의 상실은 공동체의 분해와 상실을 초래하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 민족은 각종 '분열'에 시달리며 개인의 영달과 입신양명, 생존에만 매달려 왔다. 역사 문화적 단절과 그로 인한 정신적 공동화(空洞化) 현상을 겪은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왜곡되거나 변용된 가치와 그것의 본뜻을 모른 채 그릇된 가치를 최선으로 여기고 그것을 향해 질주하는 경향이다. 전통적 가치가 가지고 있는 본래적 의미는 시대를 떠나 보편적인 의미를 던져주는 것이며,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이정표 역할을 할 수 있다. 현대 한국인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고 추구함에 있어 역사를 반추해 우리 고유의 이상적인 가치의 의미를 자각하고 인식할 수 있다면 동양이냐 서양이냐, 전통이냐 근대냐 등의 해묵은 논의를 넘어서 의미 있는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 남부지역 출토 조선시대 노벽의 과학적 분석 (Scientific Analysis for Furnace Walls of the Joseon Dynasty Excavated in Southern Region of the Korean Peninsula)

  • 장원진;한민수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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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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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07-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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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에서는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출토된 조선시대 노벽을 대상으로 자연과학적 분석을 통해 지역 간 재료나 배합비율, 피열온도 등 상관성 및 차이점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전라지역의 김제 은곡, 남원 성산리 투구봉, 화순 쌍산 항일의병 유적과 경상지역의 고성 소을비포성지, 합천 야로 유적에서 출토된 노벽을 선정하여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소성의 정도에 따라 층위변화가 존재하며, 고성 노벽은 2개의 층위, 나머지 유적 노벽은 3개 층위로 구성되었다. 김제 은곡과 성산리 투구봉, 합천 야로 유적은 각상의 입자상, 성산 유적은 아각상, 고성 유적은 아원마상의 입자상을 보여 지역에 따라 특징적인 차이는 아니었다. 유적에 따라 피열온도는 1300℃와 1100℃ 정도로 구분되었으나 이 또한 지역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었다. 주요성분함량에서 TiO2는 대부분의 시료가 1%를 넘지 않아 사철제련이 아니거나 저티탄 사철을 사용한 노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지역 간 유사성은 크지 않으며, 유적의 성격과 제철원료, 노벽을 구성하는 원재료의 성분조성에 따라 상관성이 지어지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