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Brick chamber to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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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한 지역 전축분(塼築墳) 연대의 하한 재검토 -기년명전(紀年銘塼)을 중심으로 (Re-examination of the Latest Dates of the Brick Chamber Tombs in the Western Region of North Korea: A Focus on Dated Inscribed Bricks)

  • 장병진
    • 박물관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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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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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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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서북한에서 출토된 명문전에서 낙랑·대방군이 완전히 축출된 314년 이후의 연호, 심지어는 5세기 초의 연호가 확인되었다. 2군 소멸 이후에 전축분 조영의 전통이 1세기 동안 이어진 셈인데, 전축분은 고구려 지배층의 묘제로 채택된 바가 없다. 348년 조영된 장무이묘나 353년에 제작된 동리묘는 전형적인 전축분 양식에서 벗어나 석실분의 요소가 가미된 사실이 지적되었고, 장무이나 동리와 비슷한 성격의 존재인 동수의 무덤(안악 3호분)은 357년 석실봉토분으로 조영되었다. 그럼에도 반세기 동안 전축분 조영이 계속되었다는 것은 다소 의문이었다. 기년명전이 중요한 근거가 되었지만, 선행 연구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했던 문제가 있었다. 357년 이후로 파악했던 일부 기년명전의 경우에는 연호 해석에 오류가 있었음이 지적되기도 했다. 전진 시기인 386년으로 파악했던 '대안(태안) 2년' 명문전은 서진 혜제 시기인 303년으로, 후연 시기인 407년으로 파악한 '건시 원년' 명문전도 301년 서진 혜제를 몰아내고 사마윤이 잠시 제위를 차지했던 시기에 사용한 연호라는 견해였다. 이들 사례를 제외하면 357년 이후에 제작되었다고 알려진 기년명전은 '원흥 3년' 명문전만 남는다. 그런데 명문전을 재검토한 결과 '원흥'은 '영흥'의 오독임을 확인했다. 영흥 3년은 서진대인 306년이나 후조대인 352년에 해당하는데, 306년의 가능성이 크다. 4세기 말, 5세기 초까지 전축분이 조영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사라진 셈이다. 결국 장무이나 동리의 무덤은 서북한 지역에서 조영된 가장 늦은 시기의 전축분으로 볼 수 있으며, 안악 3호분이 조영될 무렵을 기점으로 서북한 지역에서는 더 이상 전축분의 조영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당대의 역사적 상황에도 부합한다.

장무이묘 출토 명문전(銘文塼)의 고고학적 검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An Archaeological Review of the Inscribed Bricks Excavated from the Tomb of Jang Mui: A Focus on the Collection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이나경
    • 박물관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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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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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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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황해도 봉산군에 위치한 장무이묘에서는 피장자의 이름과 직책, 축조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명문전이 출토되어 조사 초부터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전돌에 찍힌 '대방태수장무이(帶方太守張撫夷)'와 '무(戊)', '신(申)'과 같은 명문은 한강 지역에서 황해도 봉산군 일대로 대방군 치지가 옮겨 왔다는 이동설의 근거가 되었으며, 장무이묘는 지탑리 토성과 함께 조사 초기부터 대방군의 유적으로 소개되었다. 장무이묘 출토 명문전은 여러 지면을 통해 사진 및 탁본 자료가 공개되어 명문의 해석을 중심으로 축조 연대, 피장자의 성격에 대한 연구가 주로 이루어져 왔으나, 도쿄대학교 공학부 건축학과 소장품을 제외하고 실물 자료가 거의 공개되지 않아 명문전의 종류나 명문 내용에 대한 일관된 연구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외에 장무이묘의 구조와 축조 재료 등을 재검토한 선행 연구 이후 장무이묘의 축조 시기를 대방군 멸망 이후인 348년이라고 보는 견해가 주를 이루게 되었지만, 출토 유물의 전부를 차지하는 전돌에 대한 충분한 검토는 아직까지 부족하다. 장무이묘를 포함한 대부분의 전실묘 출토 전돌은 명문전과 문양전만 수습되었으며, 이 중에서도 측면에 찍힌 명문과 문양만 자료화되어 전돌 자체에 대한 연구는 극히 미진한 상태이다. 이에 이 글에서는 장무이묘 출토 전돌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11종 61점을 중심으로 명문 내용을 재정리하고 형태를 중심으로 분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성형과 건조, 소성에 이르는 제작기법을 검토하여 건축 부재로서의 장무이묘 전돌을 살펴보았다. 이 결과를 2~4세기에 걸친 낙랑군·대방군, 그리고 낙랑군·대방군 축출 이후 전실묘 전돌과 비교하는 구체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장무이묘 전돌에 대한 관찰 결과, 기본적인 제작기술은 낙랑 전돌 제작기술을 계승하고 있으나 크기나 석회 사용, 명문전의 수량 등에서는 4세기 중반 경 축조된 전실묘 혹은 전석혼축묘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요소가 확인되어 장무이묘 축조시기를 348년으로 본 기존의 견해가 타당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무이묘는 전실묘라는 기존의 묘제를 고수하고 있지만 천장은 석재를 사용하여 마무리하였고, 낙랑·대방군의 제작 기법을 이은 전돌을 사용하였지만 그 위를 석회로 덮어버리는 등 기존 낙랑·대방군의 전실묘 전통과 새로운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이러한 모습은 대방군 축출과 고구려의 진출이라는 당시 정치적 상황과도 맞물려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무덤의 구조나 재료, 무덤의 축조 위치와 같은 고고학적 자료로 보면 고구려와의 관련성이 높다. 그러나 명문전의 형태나 명문의 내용 등은 오히려 3~4세기대 강소성과 절강성 지역의 전실묘와 유사한 점이 많다. 향후 석회의 사용이 고구려의 영향인지 아니면 대방군 지역의 전통이 이어진 것인지에 대한 검토, 그리고 동시기 석개천장묘와의 비교 검토 등과 같은 추가 연구가 이어진다면 보다 선명하게 '장무이(張撫夷)'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축조기법 기원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Origin of Stone Pagoda Construction Techniques at Stone Brick Pagoda of Bunhwangsa Temple in Gyeongju)

  • 김인수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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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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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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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Bunhwangsa Stone Brick Pagoda, constructed in 634, is Korea's oldest stone pagoda. As a prototype of the Silla Stone Pagoda, the pagoda was constructed using flagstones. Since it was constructed with flagstones, it has been known to be a pagoda that replicates the brick pagoda until now. The latest research suggests that it copies the India Stupa or the Stacked Stone Pagoda more than the Brick Pagoda. However, the Bunhwangsa stone brick pagoda has a significant difference in terms of construction technique and shape compared to Brick Pagodas, India Stupas, and Stacked Stone Pagodas. Therefore, it is worth paying attention to the stone building technique used in Silla. Through this study, I would like to clarify that the Bunhwangsa stone brick pagoda is a stone pagoda that creatively reflects the existing Silla stone building techniques such as stone fortresses and stone chamber tombs.

백제 후기 능묘와 능원의 특성 (A Study on the Latter Baekje Dynasty Royal Tombs and Boundary of the Royal Tomb)

  • 김용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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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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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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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백제의 능묘는 금강유역으로 천도 후 송산리식의 횡혈식석실묘 ${\rightarrow}$ 남조식의 전실묘 ${\rightarrow}$ 능산리식의 횡혈식석실묘로 변천하였다. 이 변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천장 구조의 변화이다. 천장은 궁륭천장(송산리식) ${\rightarrow}$ 터널천장(전실묘와 능산리식 과도기) ${\rightarrow}$ 집지붕천장(능산리식으로 제형, 삼각형, 평천장 세 아류의 형식)으로 변천했다. 이러한 변천과정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능산리식 횡혈식석실로 이는 백제에서 창출된 특수한 형식이다. 백제의 능묘는 봉분을 중시하지 않아 현저하지 않았다. 이는 개별 능묘를 과시하여 표지하고자 하는 의도보다는 능원의 영역을 중시하는 가족공동체적인 성격이 강화된 것이고 남조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백제의 능원은 백제가 남천한 후 왕가의 능원에서 단독의 독립능원으로 변천한다. 전자는 송산리와 능산리의 능원이고, 후자는 익산의 쌍릉이다. 전자는 완벽한 풍수지리와 함께 남조의 영향으로 볼 수 있고, 후자는 중국이 재통일된 수와 당초의 능원제 영향이다. 왕가의 능원에는 왕릉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와 관련된 인물을 배장하였다. 그리고 능원에는 제의시설이 존재했다. 송산리 능원에는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시조묘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능산리 능원에는 공동의 능묘에 대해 제의를 시행할 수 있는 노천의 제의 공간이 마련되었고, 이 제의를 담당하면서 선왕에 대한 명복을 빌기 위한 능사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배치나 구조는 신라의 서악동 능원과 아주 유사하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公州 宋山里 古墳群)에서의 물리탐사와 무령왕릉(武寧王陵)의 구조분석 (Geophysical Exploration of Songsalli Ancient Tombs and Analysis of King Muryeong's Tomb Structure, Gongju)

  • 오현덕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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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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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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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공주 송산리 고분군(公州 宋山里 古墳群)은 7기의 무덤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7호분인 무령왕릉(武寧王陵)은 1971년에 5호분과 6호분의 배수로 공사 중 발견된 전축분이다. 당시 발굴조사는 무덤의 입구와 현실 내부의 측량조사, 유물수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봉토부 조사에서 호석의 일부 잔존상황과 석회혼합토층을 확인하였으나 봉토를 더 깊이 제거하여 전축분의 외형구조까지는 조사하지 않았다. 발굴조사 후 6호분과 7호분에서 벽돌 손상, 습기와 곰팡이로 인한 벽화 손상이 발견되었다.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공주대학교가 1996년부터 1997년까지 물리탐사를 포함하여 송산리 고분군에 대한 종합 정밀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1999년에 보수공사가 이루어지고 문화재보존을 목적으로 5, 6, 7호분은 영구 보존 조치되어 현재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번 연구의 목적은 송산리 고분군 5, 6, 7호분의 지표 위에서 3차원 전기비저항 탐사, GPR 탐사를 실시하여 보수공사 이후의 지하의 상태를 파악하고 무령왕릉의 내부에서 GPR 탐사를 실시하여 전축분의 벽체의 두께와 외형적 구조를 파악하는 데 있다. 지표에서의 탐사결과, 3기의 고분 주변의 토양은 $5{\sim}90{\Omega}m$ 의 낮은 전기비저항 값을 나타내고 있어 토양이 갖는 함수율이 보수공사 이전처럼 여전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GPR 탐사결과, 무령왕릉 현실의 벽체 축조방식은 약 35cm 길이의 벽전을 길이방향으로 두 장 잇댄(2B 벽돌쌓기) 약 70cm 두께임을 알 수 있었다. 반면 연도부는 약 80cm 두께로 측정되어 현실의 벽체와 같은 두 겹 구조에 눈썹아치가 복합된 구조로 추정된다. 그리고 천장의 외형은 내부의 모양과 같은 아치 구조임을 탐사결과를 통하여 추정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장무이묘의 발견과 조사 (The Discovery and Exploration of the Tomb of Jang Mui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 정인성
    • 박물관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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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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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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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일제강점기에 발견되어 조사된 장무이묘는 문헌 속의 대방군을 황해도 사리원으로 비정하는 결정적인 고고자료가 되었다. 무덤 축조에 사용된 전돌 중에 대방태수라는 관직명이 찍힌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무이묘의 발견은 1909년에 발견된 대동강변 벽돌무덤군을 낙랑군과 관련된 유적으로 확정 짓는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이래로 대수(帶水)와 대방군의 위치를 둘러싼 논란이 고고학적으로 정리된 일대 발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고대사와 고고학 연구에서 이토록 중요한 유구임에도 불구하고 그 발견 경위와 조사 내용이 제대로 검토되었다고 할 수 없다. 1912년 세키노의 발굴에서 출토된 문자 전돌과 기와류는 현재 도쿄대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다수의 장무이묘 출토 전돌이 소장되어 있는데 개별 자료의 조사 주체는 아직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노모리 등의 조사에서 수집된 자료에는 이를 명시한 주기가 있음을 확인한 정도이다. 이 외에도 도쿄국립박물관과 일본의 몇몇 대학에도 관련 문자 전돌이 반출되어 있다. 이들 자료를 망라한 종합 보고서가 작성되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장무이묘는 무덤의 구조에 대한 재해석(정인성 2010)을 바탕으로 그 시기를 4세기 중엽인 348년으로 보는 설이 우세해 졌다. 대방군 시기의 무덤이 아닌 것이다. 대방군과 군치의 위치를 둘러싸고 가장 유력한 고고학 증거가 사라진 셈이다. 관련하여 대방군과 군치문제 등을 둘러싼 논의의 활성화를 기대한다.

부여 능산리고분군 동하총 석재의 암석기재적 특성과 안구상편마암의 역사적 활용성 고찰 (Consideration for Historical Application of Augen Gneiss and Petrographic Characteristics for Rock Properties of Donghachong Tomb from Royal Tombs of Neungsanri in Buyeo, Korea)

  • 박준형;이규혜;이찬희
    • 자원환경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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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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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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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능산리고분군 동하총은 바닥을 포함하여 15면으로 이루어졌으며, 가장 많이 사용한 암석은 복운모화강암으로 7면(46.6%)에 활용하였다. 또한 안구상편마암 3면(20.0%), 화강섬록암, 편마상화강암 및 우백질화강암을 각각 1면(6.7%)으로, 모두 판석으로 구성하였다. 현실과 전실 바닥의 각섬석편암(13.3%)은 모전석으로 사용하였다. 이 암석들은 모두 부여 일대에서 산출되며 주로 금강변에 산지가 분포한다. 당유인원기공비는 뚜렷한 편리와 안구상조직을 갖는 전형적인 안구상편마암이다. 이 암석은 동하총, 산직리 고인돌 및 세탑리 오층석탑의 일부 석재에 활용한 안구상편마암과 같은 종류이다. 이 안구상편마암은 부여 증산리에서 공주 덕지리로 연장되는 대규모 암체로 분포하며, 현재 정원석과 조경석 및 골재용 채석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여일대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안구상편마암을 활용하기 위한 공급지가 있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이는 암질이 약해 가공에 수월성은 있으나, 어두운 색을 띠어 벽화의 바탕과 각자에는 단점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인들이 거리와 지형 및 효율성과 수월성을 두고 어떤 운송체계를 선택했을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