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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분석을 활용한 딥러닝 기반 전공과목 추천 시스템 (Major Class Recommendation System based on Deep learning using Network Analysis)

  • 이재규;박희성;김우주
    • 지능정보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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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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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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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대학 교육에 있어서 전공과목의 선택은 학생들의 진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산업의 변화에 발맞춰 대학 교육도 학과별 전공과목의 분야가 다양해지고 그 수가 많아지고 있다. 이에 학생들은 본인의 진로에 맞게 수업을 선택하여 수강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본 연구는 대학 전공과목 추천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개인 맞춤형 교육을 실현하고 학생들의 교육만족도를 제고하고자 한다. 모델 연구에는 대학교 학부생들의 2015년~2017년 수강 이력 데이터를 활용하였으며, 메타데이터로는 학생과 수업의 전공 명을 사용했다. 수강 이력 데이터는 컨텐츠 소비 여부만을 나타낸 암시적 피드백 데이터로, 수업에 대한 선호도를 반영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학생과 수업의 특성을 나타내는 임베딩 벡터를 도출했을 시, 표현력이 낮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점에 착안하여, 네트워크 분석을 통해 학생, 수업의 벡터를 생성하고 이를 모델의 입력 값으로 활용하는 Net-NeuMF 모델을 제시한다. 모델은 암시적 피드백을 가진 데이터를 이용한 대표적인 모델인 원핫 벡터를 이용하는 NeuMF의 구조를 기반으로 하였다. 모델의 입력 벡터는 네트워크 분석을 통해 학생과 수업의 특성을 나타낼 수 있도록 생성하였다. 학생을 표현하는 벡터를 생성하기 위해, 각 학생을 노드로 설정하고 엣지는 두 학생이 같은 수업을 수강한 경우 가중치를 가지고 연결되도록 설계했다. 마찬가지로 수업을 표현하는 벡터를 생성하기 위해 각 수업을 노드로 설정하고 엣지는 공통으로 수강한 학생이 있는 경우 연결시켰다. 이에 각 노드의 특성을 수치화 하는 표현 학습방법론인 Node2Vec을 이용하였다. 모델의 평가를 위해 추천 시스템에서 주로 활용하는 지표 4가지를 사용하였고, 임베딩 차원이 모델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해 3가지 다른 차원에 대한 실험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기존 NeuMF 구조에서 원-핫 벡터를 이용하였을 때보다 차원과 관계없이 평가지표에서 좋은 성능을 보였다. 이에 본 연구는 학생(사용자)와 수업(아이템)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기존 원-핫 임베딩 보다 표현력을 높였다는 점, 모델을 구성하는 각 구조의 특성에 맞도록 임베딩 벡터를 활용하였다는 점, 그리고 기존의 방법론에 비해 다양한 종류의 평가지표에서 좋은 성능을 보였다는 점을 기여점으로 가지고 있다.

화엄사 대웅전 목조비로자나삼신 불좌상에 대한 고찰 (A Study on the Wooden Seated Vairocana Tri-kaya Buddha Images in the Daeungjeon Hall of Hwaeomsa Temple)

  • 최성은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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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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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0-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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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정유재란을 겪으며 전소(全燒)된 화엄사는 벽암각성(碧巖覺性)(1575~1660)의 주도 아래 재건이 이루어졌다. 대웅전에는 목조비로자나삼신불상이 봉안되었는데, 1634년에 완성하여 1635년에 점안·봉안되었다. 2015년에 석가불상 복장 <시주질>과 노사나불상 대좌 내부 판재(板材)에 적힌 <묵서명>이 조사되고, 2020년에 노사나불상의 복장 <시주질>이 조사되어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조성에 참여한 청헌, 응원, 인균을 포함한 열여덟 명의 조각승들이 밝혀졌고 선조(宣祖)의 아들 의창군 이광(李珖)을 비롯한 왕실과 종친, 천명이 넘는 승속(僧俗)의 시주자들이 동참한 대규모 불사였음이 알려졌다. 비로자나삼신불상의 본존은 높이 2.76m의 장육불상으로 당시 불교조각에서 널리 유행하던 장신형의 비례감이 아닌 두부가 크고 어깨가 좁은 고식(古式)의 단구형(短軀形) 비례감을 보인다. 주먹 쥔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싼 비로자나불의 지권인(智拳印)과 보관을 쓴 보살형의 노사나불상은 북송대에 고려로 전해진 전통적인 도상(圖像)이며, 석가불상이 결한 독특한 항마촉지인의 형식은 명(明)에서 전래된 경(經) 변상도에 나타난 도상이 불교조각에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화엄사 비로자나삼신불상에서 나타나는 신구(新舊) 양식과 도상의 혼재는 화엄사 불사(佛事)를 맡았던 조각승들이 고려시대 불교조각의 귀족적 전통을 계승한 조선초기 불교미술에서 화엄사 삼신불상의 범본을 구하려했던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전란으로 소실된 고려시대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원(原) 모습에 가깝게 복원되기를 바라는 화엄사 산중대덕(山中大德)들의 기대가 불상조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화엄사 삼신불상의 노사나불상은 고려시대 비로자나삼신불상과 도상적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고려시대의 화엄사에 이와 유사한 도상과 양식의 비로자나삼신불상이 봉안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만우 휘헌의 『화엄사지』(1924)에 따르면, 화엄사는 고려 왕실의 축성의례를 거행해온 사찰로 여겨지는데, 이 전통이 조선후기까지 이어져 화엄사 재건 불사에서 새로 조성된 대웅전 비로자나삼신불상 역시 조선왕실의 축성의례를 위한 예배대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화엄사 재건에 왕실과 종친이 시주자로 참여한 점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강희제(康熙帝)의 「승덕 피서산장(避暑山莊) 36경」에 담긴 황가원림의 경관 특성과 함의 (A Study on the Landscape Characteristics and Implications of the Royal Garden through 「The 36 Scenery of Seongdeok Summer Mountain Resort」 by Kangxi Emperor)

  • 노재현;맹자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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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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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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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문헌연구와 고서화 도해 그리고 현장연구를 통해 중국 강희제가 읊은 「승덕 피서산장 삼십육경(承德 避暑山莊 三十六景)」(이하 「강희36경」) 제영시(題詠詩)의 분석과 해석(解釋)을 통해 「강희36경」에 담긴 경관 특성과 함의를 추적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강희36경」은 팔경시의 외연(外緣)을 연장한 것으로, 기존의 「팔경시」나 <팔경도>와 비교해 볼 때 '대상 중심'이 아닌 '시점(시점장) 중심'의 경관 형상화가 두드러진다. 그 결과 전(殿)과 정(亭) 등 9개 유형의 건축물을 시점으로 구조화된 경관 틀짜임을 지향하였다. 특히 호박구에 입지한 여의주는 중국의 저명한 원림과 산수시 및 산수화의 정수(精髓)만을 모은 집금식(集錦式) 배치와 구성을 통해 원중원(園中園)의 성격을 부여하였다. 표제어 분석 결과, 제영시에 등장하는 경관요소는 수체류(水體類) 14개 경(38.9%), 지형지모(地形地貌)와 관련된 산체류(山體類) 13개 경(36.1%)으로 이들 요소의 비중이 월등히 높았으며, 건축·토목류는 3개 경(8.3%), 천공류(天空類)는 2개 경(5.6%)으로 분류되었다. 제영시에서는 기후풍토요소에 대한 경관어휘(景觀語彙)의 언급이 압도적으로 두드러졌는데 특히 표제어에서는 구름(雲)과 바람(風)이 대표적 경관어휘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운(雲)·수(水)·천(泉)·청(清)·파(波)·류(流)·풍(風) 그리고 무서(無暑) 등과 같은 '청량(淸涼)'을 상징하는 시어가 높은 빈도로 출현하고 있음은 우연이 아니며, 이는 열하(熱河)의 지역성 및 피서산장의 장소성과 강하게 밀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계절 배경이 확인된 23개 경중에서 하경(夏景)이 과반수로 비중 있게 묘사되는 점이나 피서산장 일원의 청랭성(淸冷性)으로 집약되는 기후풍토요소가 입체적이고 다의적으로 묘사되고 있음은 경관 주체인 강희제의 원림 향유 시기와 관련 깊은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제영시에 등장하는 다수의 동식물 경관은 휴양은 물론 관상과 수렵의 공간 속성과도 동일한 맥락으로 보인다. 한편 제영시에는 고시(古詩), 전고(典故), 고화(古畫) 등을 통해 명인(名人)과 명저(名著)를 인용한 경이 33개(91.7%) 경에 이를 정도로 상고성(尙古性)의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는 경관 주체인 강희제의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와 자부심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추론된다. 「강희36경」에는 가경(佳景)에 의탁(依託)된 심정에 대한 서경적 묘사뿐만 아니라 근정애민(勤政愛民) 정신, 자강불식(自强不息)과 권학(勸學) 정신 그리고 모친에 대한 공경(恭敬)과 효(孝)의 정서가 깊이 내포되고 있다. 궁극적으로 「강희36경」은 피서산장의 실경(實景)은 물론 의경적(意境的) 차원을 다층적이고 입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황가원림의 품격과 문인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 황제로서의 기개(氣槪)를 드러내고자 한 제황적(帝皇的) 집경(集景)이라 할 만하다.

러시아 박물관의 발해사 전시 변화와 전시 내러티브의 특징 - 아르세니예프 V.K. 국립극동역사보호지구 통합박물관을 중심으로 - (Changes in Exhibitions on the History of Balhae in Russian Museums and the Characteristics of Exhibition Narratives - with the focus on the Federal State Budgetary Institution of Culture "The Vladimir K. Arseniev Museum and Reserve of Far East History" -)

  • 정윤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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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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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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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본 연구는 한국의 발해학계에서 박물관 전시를 인식하는 논점이 중국에만 편중되어온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작성되었다. 따라서 러시아 박물관에서 개최된 발해사 전시구성 및 운영정책의 특징과 변화를 분석하여, 국가 간 발해사 이해를 넓힐 수 있는 해석과 표출에 대한 자료를 공유하고자 한다. 이에 러시아의 발해사 전시를 대표하는 아르세니예프 V.K 국립극동역사보호지구 통합박물관의 상설전시 및 기획전시를 대상으로 시론적 연구를 시도해보았다. 우선 전시구성을 살펴보면, 상설전시는 지역사의 통시적 구성으로, 제1회 및 2회 기획전시는 러시아과학원 주요 소장유물을 포함한 발해사 주제별 구성으로 기획되었다. 전시 운영정책은 박물관 운영규정, 전시 운영인력, 전시 홍보전략을 통해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전시가 개최된 배경과 역할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 발해사 전시 개최 분기에 따른 지역사회의 정치·사회·문화적 이슈를 검토하였다. 그 결과, 상설전시 개편분기에는 국제정상회의 개최지역에 대한 역사인식을 제고하고, 제1회 기획전시 분기에는 다양한 정책주체들에 의해 한·러 합작 문화관광 현안을 견인하였으나, 제2회 기획전시 분기에는 국내외적 외교전략 변화 등과 맞물려 홍보 및 연계행사가 활성화되지 않은 것으로 추론해보았다. 마지막으로, 전시 내러티브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지역사 교과서 및 발해사 개설서를 분석틀로 삼고 전시 내용과 상호 비교해보았다. 그 결과, 시대별 내러티브에서는 교과서에서 분리되었던 말갈족과 발해국의 통합 연출이 확인된다. 주제별 내러티브 중 정치사 주제에서는 변방의 말갈족 전사 대신 발해의 중앙 관리로 연출된 변화를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발해 영역도는 실증적인 조사자료 축적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물질문화 주제에서는 농업·수렵을 보여주는 동식물유체 자료의 보강을 제안해보았고, 대외 관계 주제에서는 통일신라 교류와 투르크계 주민 구성을 시사하는 내러티브를 살펴보았다. 사상문화 주제에서는 고구려 국가제사의례와 관련된 내러티브가 나타나는데, 이는 한국학계에서 아직 주목하지 못했던 새로운 자료이므로 추후 논의가 필요함을 지적해보았다. 결론적으로, 본 연구는 러시아 박물관의 발해사 전시 연구에 대한 공백을 메우고, 전시가 변화해온 맥락과 전시 내러티브의 특징을 고찰하여 시사점을 제시했다는 의의가 있다.

장무이묘 출토 명문전(銘文塼)의 고고학적 검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An Archaeological Review of the Inscribed Bricks Excavated from the Tomb of Jang Mui: A Focus on the Collection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이나경
    • 박물관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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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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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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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황해도 봉산군에 위치한 장무이묘에서는 피장자의 이름과 직책, 축조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명문전이 출토되어 조사 초부터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전돌에 찍힌 '대방태수장무이(帶方太守張撫夷)'와 '무(戊)', '신(申)'과 같은 명문은 한강 지역에서 황해도 봉산군 일대로 대방군 치지가 옮겨 왔다는 이동설의 근거가 되었으며, 장무이묘는 지탑리 토성과 함께 조사 초기부터 대방군의 유적으로 소개되었다. 장무이묘 출토 명문전은 여러 지면을 통해 사진 및 탁본 자료가 공개되어 명문의 해석을 중심으로 축조 연대, 피장자의 성격에 대한 연구가 주로 이루어져 왔으나, 도쿄대학교 공학부 건축학과 소장품을 제외하고 실물 자료가 거의 공개되지 않아 명문전의 종류나 명문 내용에 대한 일관된 연구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외에 장무이묘의 구조와 축조 재료 등을 재검토한 선행 연구 이후 장무이묘의 축조 시기를 대방군 멸망 이후인 348년이라고 보는 견해가 주를 이루게 되었지만, 출토 유물의 전부를 차지하는 전돌에 대한 충분한 검토는 아직까지 부족하다. 장무이묘를 포함한 대부분의 전실묘 출토 전돌은 명문전과 문양전만 수습되었으며, 이 중에서도 측면에 찍힌 명문과 문양만 자료화되어 전돌 자체에 대한 연구는 극히 미진한 상태이다. 이에 이 글에서는 장무이묘 출토 전돌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11종 61점을 중심으로 명문 내용을 재정리하고 형태를 중심으로 분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성형과 건조, 소성에 이르는 제작기법을 검토하여 건축 부재로서의 장무이묘 전돌을 살펴보았다. 이 결과를 2~4세기에 걸친 낙랑군·대방군, 그리고 낙랑군·대방군 축출 이후 전실묘 전돌과 비교하는 구체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장무이묘 전돌에 대한 관찰 결과, 기본적인 제작기술은 낙랑 전돌 제작기술을 계승하고 있으나 크기나 석회 사용, 명문전의 수량 등에서는 4세기 중반 경 축조된 전실묘 혹은 전석혼축묘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요소가 확인되어 장무이묘 축조시기를 348년으로 본 기존의 견해가 타당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무이묘는 전실묘라는 기존의 묘제를 고수하고 있지만 천장은 석재를 사용하여 마무리하였고, 낙랑·대방군의 제작 기법을 이은 전돌을 사용하였지만 그 위를 석회로 덮어버리는 등 기존 낙랑·대방군의 전실묘 전통과 새로운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이러한 모습은 대방군 축출과 고구려의 진출이라는 당시 정치적 상황과도 맞물려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무덤의 구조나 재료, 무덤의 축조 위치와 같은 고고학적 자료로 보면 고구려와의 관련성이 높다. 그러나 명문전의 형태나 명문의 내용 등은 오히려 3~4세기대 강소성과 절강성 지역의 전실묘와 유사한 점이 많다. 향후 석회의 사용이 고구려의 영향인지 아니면 대방군 지역의 전통이 이어진 것인지에 대한 검토, 그리고 동시기 석개천장묘와의 비교 검토 등과 같은 추가 연구가 이어진다면 보다 선명하게 '장무이(張撫夷)'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주요(主要) 고농서(古農書)를 통(通)한 조선시대(朝鮮時代)의 도작기술(稻作技術) 전개(展開) 과정(過程) 연구(硏究) - IX. 도작기술(稻作技術)에 대(對)한 종합고찰(綜合考察) (A Study on Transition of Rice Culture Practices During Chosun Dynasty Through Old References IX. Intergrated Discussion on Rice)

  • 구자옥;이숭겸;이은웅;이홍석
    • 한국잡초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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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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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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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
  • 조선왕조초기(朝鮮王朝初期)부터 농업초기정책(農業初期政策)은 지역농업(地域農業)의 현실적(現實的) 조건(條件)과 결부(結付)된 농사직설(農事直說)과 같은 농서(農書) 발간(發刊)에 의해 부여(附與)되었다. 그 책(冊)들은 새롭고, 집약적(集約的)인 농업기술(農業技術)을 제공(提供)하였다. 이 농서(農書)는 그 당시(當時)에 농촌지역(農村地域)에서 경험(經驗)된 우수한 농업기술(農業技術)을 수집(蒐集)하여 만든 것이다. 농사직설(農事直說)에 따르면 벼 재배(栽培)는 무삶이(담수직파법(湛水直播法)), 건삶이(건답직파법(乾畓直播法)), 이앙법(移秧法) 그리고 산도법(山稻法)(육도법(陸稻法))으로 분화(分化)되었다. 이들 농법(農法)에 구비된 고도기술적특성(高度技術的特性)은 과학적제초기술(科學的除草技術)과 적극적인 시비법(施肥法), 축력(畜力)과 인력용(人力用)의 농기(農機)로 일관되게 체계화(體系化)시킨 농작업방법(農作業方法)에 근거(根據)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해안(海岸)의 습지(濕地)와 황지(荒地)의 개간(開墾)은 화경(火耕)와 윤목(輪木)이라 칭하는 제초장비(除草裝備)로 인하여 가능케 되었다. 또한 벼의 묘령단계(苗令段階)에서 토양(土壤)의 간인(間引), 토기작업(土寄作業)과 동시에 섬세한 제초작업(除草作業)을 할 수 있도록 분화(分化), 발달(發達)된 호미가 있었다. 직파(直播)벼재배(栽培)는 저류지(貯溜地)와 소택(沼澤)을 만들어 평야수전(平野水田)의 직파재배(直播栽培)를 가능케 하였으며, 곡간지답(谷間地畓)은 보(洑)를 만들어 개간했다. 이들은 관수(灌水)에 의해 제초를 쉽게 하는 동시에 관수중(灌水中) 무기영양(無機營養)을 통(通)한 토양비옥도(土壞肥沃度) 유지 및 벼의 생리적(生理的) 호조건(好條件)을 부여하여 논의 생산성(生産性)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또한 이앙(移秧)을 하면 더욱 성력재배(省力栽培)가 가능하였을 것이지만 전국적인 물의 사용제약성(使用制約性)때문에 이앙법(移秧法)을 원칙적으로 금해 오지 않을 수 없었다. 건전재배(乾田栽培)에서 직파재배(直播栽培)가 수립되었으며, 수도(水稻)가 직파(直播)되고 유묘기까지 건토(乾土)에 재배(栽培)되었으며 농사직설(農事直說)에서처럼 비올때 관수토양(灌水土壤)에 재배(栽培)되었다. 조선중기(朝鮮中期)(AD 1495-1725)에는 벼 농사(農事)에서의 제초효율(除草效率)과 편리성(便利性) 때문에 정조식(正條式) 이앙법(移秧法)을 포함한 탁월한 성력농법(省力農法)(한정록(閑情錄))과 벼 이앙에 근거(根據)(농사직설(農事直說))하여 못자리(묘대) 기술(벼의 조기이앙(早期移秧)이 강조(强調)되었다. 비료분(肥料分)을 다량투입(多量投入)하고 우력(牛力)을 이용(利用)하여 심경(深耕)해야 한다는 일련(一連)의 기술(技術)들은 토지(土地)와 노동생산성(勞動生産性)을 향상 시키는 것이었다. 농가집성(農家集成)때보다 산림경제(山林經濟)때에 발전된 사항은 오늘날의 육묘대법(陸苗垈法)과 마찬가지인 건앙법(乾秧法)을 개발하여 이앙재배(移秧栽培)하게 만든 것이며, 답이모작(畓二毛作)을 확립(確立)시켜서 답작(畓作)의 노동(勞動) 및 토지생산성(土地生産性)을 높이게 된 것이다. 이결과 소경영생산양식(小經營生産樣式)을 경영형(經營型) 부농적(富農的) 생산양식(生産樣式)으로 변화시켜 광작농법사회(廣作農法社會)를 태동(胎動)시켰다. 우하영(禹夏永)(1741-1812) 은 천일록(千一錄)을 통하여 당시의 광작농(廣作農)이 갖는 폐단을 집약적(集約的) 농법(農法)으로 개혁하고자 하였고, 그가운데 탁월한 견해로서 농지(農地)를 토질(土質)에 따라 이앙법(移秧法)과 grooving 파종법(播種法)(전(田))으로 땅(토지(土地))의 이용을 구분한 것이다. 특히 서유가(徐有架)(산림경제(山林經濟))가 주장한바 이앙(移秧)의 유리성(有利性)은 제초노력이 절감되고 묘대(苗垈)와 본답(本畓)의 토지기력(土地氣力)을 얻기 때문에 벼의 좋은 생육(生育)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는 벼를 뽑았다가 다시 심기 때문에 새롭게 기력이 얻어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앙법(移秧法)에 앞선 재평가(再評價), 이모작(二毛作)의 한계성(限界性), 반답법(反畓法)의 제약론(制約論), 광작(廣作)의 폐단에 처한 금지론(禁止論)이 있었다. 그당시 이지연(李止淵)에 의해서 벼의 수도수분생이(水稻水分生理), 토지(土地) 및 제초(除草)의 편리성(便利性)을 고려한 수도직파재배법(水稻直播栽培法)이 쓰여 졌는데 그것은 가장 안정한 농가소득을 확보하는 창조적인 작부체계(作付體系)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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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환경이 인터넷 경로를 포함한 다중 경로 관리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게임 이론적 접근방법 (The Impact of Market Environments on Optimal Channel Strategy Involving an Internet Channel: A Game Theoretic Approach)

  • 유원상
    • 한국유통학회지:유통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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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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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9-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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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지난 십년동안 인터넷을 통한 전자상거래는 빠른 속도로 성장해 왔다. 이러한 인터넷의 발달은 기업들의 사업방식에 많은 변화를 유도했으며, 그 중에서도 마케팅경로의 구조와 경로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에 중요한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각 기업이 처한 시장환경은 다양하며 이 다양한 시장 환경은 인터넷 경로가 각 시장에 미치는 효과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시장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선행연구들은 각기 특정한 하나의 시장상황(unique setting)을 상정하여 인터넷경로 도입이 그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데 그쳐왔다. 이러한 기존 연구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본 연구는 시장의 다양성을 소비자의 지리적 분포, 시장의 인터넷 수용도의 측면에서 살펴보고 이러한 시장 환경이 인터넷 경로 도입 효과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조사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다양한 소비자들의 지리적 분포, 경쟁강도, 소비자의 인터넷 상거래에 대한 수용도 등을 포함한 다양한 시장 환경을 수요모형에 반영시켜 그 영향력 분석을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다양한 시장 요소를 모형에 반영하는 과정에서 수요모형이 복잡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이 문제를 극복하고 게임이론의 균형해를 도출하기 위해 Newton-Raphson algorithm을 사용한 numerical search 방법을 사용하였다. 분석결과 두 종류의 경로에 대한 소비자선호의 분포에 따라 생산자의 가격차별정도, 생산자와 독립소매상 간의 경로이윤 배분율, 그리고 인터넷경로 도입이 각 경로주체의 이윤 향상에 도움이 되는지의 여부, 소비자잉여 등이 달라질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 끝으로 연구의 학술적, 실무적 시사점과 한계점 및 향후 연구방향도 논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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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행동 기반의 사회적 관계를 결합한 사용자 협업적 여과 방법 (Incorporating Social Relationship discovered from User's Behavior into Collaborative Filtering)

  • 타이쎄타;하인애;조근식
    • 지능정보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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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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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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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소셜 네트워크는 사용자들의 공통된 관심사, 경험, 그리고 일상 생활들을 함께 공유하기 위해 소셜 네트워크 상 사람들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거대한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이다. 소셜 네트워크상의 사용자들은 포스팅, 댓글, 인스턴스 메시지, 게임, 소셜 이벤트 외에도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다른 사용자들과 소통하고 개인 정보 관리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소셜 네트워크 상의 풍부한 사용자 정보는 추천시스템이 추천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필요한 큰 잠재력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어떤 상품을 구매하기 전 가까운 관계이거나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의사 결정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소셜 네트워크에서의 사용자 관계는 추천시스템을 위한 사용자 선호도 예측을 효율적으로 높이는데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소셜 네트워크에서의 사용자와 다른 사용자들 사이의 상호작용 즉, 소셜 관계(social relationship)와 같은 소셜 데이터가 추천시스템에서 추천의 질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하고 있다. 추천시스템은 아마존, 이베이, Last.fm과 같은 큰 규모의 전자상거래 사이트 또한 채택하여 사용되는 시스템으로, 추천시스템을 위한 방법으로는 협업적 여과 방법과 내용 기반 여과 방법이 있다. 협업적 여과 방법은 사용자들의 선호도 학습에 의해 사용자가 아직 평가하지 않은 아이템 중 선호할 수 있는 아이템을 정확하게 제안하기 위한 추천시스템 방법 중 하나이다. 협업적 여과는 사용자들의 데이터에 초점을 맞춘 방법으로 유사한 배경과 선호도를 가지는 사용자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여 사용자들의 선호도 예측을 자동으로 발생시킨다. 특히 협업적 여과는 근접한 이웃 사용자들에 의해서 목적 사용자가 선호할 수 있는 아이템을 제시하는 것으로 유사한 이웃 사용자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이웃 사용자 발견은 사용자와 아이템을 고려하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각 사용자는 아이템 즉, 영화, 상품, 책 등에 자신의 선호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평가 값을 입력하고, 시스템은 이를 바탕으로 사용자-평가 행렬을 구축한다. 이 사용자-평가 행렬은 목적 사용자와 유사하게 아이템을 평가한 사용자 그룹을 찾기 위한 것으로, 목적 사용자가 아직 평가하지 않은 아이템에 대하여 사용자-평가 매트릭스를 통해 그 평가 값을 예측한다. 현재 이 협업적 여과 방법은 전자상거래와 정보 검색에서 적용되어 개인화 시스템에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초기 사용자 문제, 데이터 희박성 문제와 확장성 그리고 예측 정확도 향상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 많은 연구자들은 하이브리드, 신뢰기반, 소셜 네트워크 기반 협업적 여과와 같은 다양한 방법을 제안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전통적인 협업적 여과 방식의 예측 정확도와 추천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소셜 네트워크에 존재하는 소셜 관계를 이용한 협업적 여과 시스템을 제안한다. 소셜 관계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중 하나인 페이스북 사용자들이 남긴 포스팅과 사용자의 소셜 네트워크 친구와 의견 교류 중 남긴 코멘트와 같은 사용자 행동을 기반으로 정의된다. 소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소셜 네트워크 사용자의 포스팅과 댓글을 추출하고, 추출된 텍스트에 불용어 및 특수 기호 제거와 스테밍 등 전처리를 수행하였다. 특징 벡터는 TF-IDF를 이용하여 전처리된 텍스트에 나타난 각 단어에 대한 특징 점수를 계산함으로써 구축된다. 본 논문에서 이웃 사용자를 결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사용자 간 유사도는 특징 벡터를 이용한 사용자 행동 유사도와 사용자의 영화 평가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 방법의 유사도를 결합하여 계산된다. 제안하는 시스템은 목표 사용자와 제안한 방법을 통해 결정된 이웃 사용자 집단을 기반으로 목표 사용자가 평가하지 않은 아이템에 대한 선호도를 예측하고 Top-N 아이템을 선별하여 사용자에게 아이템을 추천하게 된다. 본 논문에서 제안하는 방법을 확인하고 평가하기 위하여 IMDB에서 제공하는 영화 정보 기반으로 영화 평가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예측 정확도를 평가하기 위해 MAE 값을 이용하여 제안하는 알고리즘이 얼마나 정확한 추천을 수행하는지에 대한 예측 정확도를 측정하였다. 그리고 정확도, 재현율 및 F1값 등을 활용하여 시스템의 성능을 평가하였으며, 시스템의 추천 품질은 커버리지를 이용하여 평가되었다. 실험 결과로부터 본 논문에서 제안한 시스템이 보다 더 정확하고 좋은 성능으로 사용자에게 아이템을 추천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소셜 네트워크에서 사용자 행동을 기반으로 한 소셜 관계를 이용함으로써 추천 정확도를 6% 향상시킴을 보였다. 또한 벤치마크 알고리즘과의 성능비교 실험을 통해 7% 향상된 추천 성능의 결과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용자의 행동으로부터 관찰된 소셜 관계를 CF방법과 결합한 제안한 방법이 정확한 추천시스템을 위해 유용하며, 추천시스템의 성능과 품질을 향상시킬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朝鮮王朝) 왕릉(王陵) 문인석상(文人石像)의 복식형태(服飾形態)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ostume Style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Erected at Tombs of the Kings for Yi-dynasty)

  • 권용옥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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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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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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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
  • A costume reveals the social characteristics of the era in which it is worn, thus we can say that the history of change of the costume is the history of change of the living culture of the era. Since the Three States era, the costume structure of this country had been affected by the costume system of the China's historical dynasties in the form of the grant therefrom because of geographical conditions, which affection was conspicuous for the bureaucrat class, particularly including but not limited to the Kings' familities. Such a grant of the costume for the bureaucrat class (i.e., official uniform) was first given by the Dang-dynasty at the age of Queen Jinduck, the 28th of the Shilla-dynasty. Since then, the costume for the bureaucrats had consecutively been affected as the ages had gone from the unified Shilla, to the Koryo and to the Yi-dynasty. As the full costumes officially used by government officials (generally called "Baek Gwan") in the Yidynasty, there existed Jo-bok, Gong-bok and Sang-bok. Of such official costumes, Gong-bok was worn at the time of conducting official affairs of the dynasty, making a respectful visit for the expression of thanks or meeting diplomatic missions of foreign countries. It appears no study was made yet with regard to the Gong-bok while the studies on the Jo-bok and the Sangbok were made. Therefore, this article is, by rendering a study and research on the styles of costumes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erected at the Kings' tombs of the Yi-dynasty, to help the persons concerned understand the Gong-bok, one of the official costume for Baek Kwan of that age and further purports to specifically identify the styles and changes of the Gong-bok, worn by Baek Gwan during the Yi-dynasty, consisting of the Bok-doo (a hat, four angled and two storied with flat top), Po (gown), Dae (belt), and Hol (small and thin plate which was officially held by the government officials in hand, showing the courtesy to and writing brief memorandums before the King) and Hwa (shoes). For that purpose, I investigated by actually visiting the tombs of the Kings of the Yi-dynasty including the Geonwon-neung, the tomb of the first King Tae-jo and the You-neung, the tomb of the 27th King Soon-jong as well as the tombs of the lawful wives and concubines of various Kings, totalling 29 tombs and made reference to relevant books and records. Pursuant. to this study, of the 29 Kings' tombs the costume styles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erected at the 26 Kings' tombs are those of Gong-bok for Baek-gwan of the Yi-dynasty wearing Bok-doo as a hat and Ban-ryeong or Dan-ryenog Po as a gown with Dae, holding Hol in hand and wearing shoes. Other than those of the 26 tombs, the costume styles of the Ryu-neung, the tomb of the Moon-jo who was the first son of 23rd King Soon-jo and given the King's title after he died and of the You-neung, the tomb of the 27th King Soon-jong are those of Jobok with Yang-gwan (a sort of hat having stripes erected, which is different from the Bok-doo), and that of the Hong-neung, the tomb of the 26th King Go-jong shows an exceptional one wearing Yang-gwan and Ban-ryeong Po ; these costume styles other than Gongbok remain as the subject for further study. Gong-bok which is the costume style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of most of the Kings' tombs had not been changed in its basic structure for about 500 years of the Yi-dynasty and Koryo categorized by the class of officials pursuant to the color of Po and materials of Dae and Hol. Summary of this costume style follows: (1) Gwan-mo (hat). The Gwan-mo style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of the 26 Kings' tombs, other than Ryu-neung, Hong-neung and You-neung which have Yang-gwan, out of the 29 Kings' tombs of the Yi-dynasty reveals the Bok-doo with four angled top, having fore-part and back-part divided. Back part of the Bok-doo is double the fore-part in height. The expression of the Gak (wings of the Bokdoo) varies: the Gyo-gak Bok-doo in that the Gaks, roundly arisen to the direction of the top, are clossed each other (tombs of the Kings Tae-jong), the downward style Jeon-gak Bok-doo in that soft Gaks are hanged on the shoulders (tombs of the Kings Joong-jong and Seong-jong) and another types of Jeon-gak Bok-doo having Gaks which arearisen steeply or roundly to the direction of top and the end of which are treated in a rounded or straight line form. At the lower edge one protrusive line distinctly reveals. Exceptionally, there reveals 11 Yang-gwan (gwan having 11 stripes erected) at the Ryu-neung of the King Moon-jo, 9 Yang-gwan at the Hong-neung of the King Go-jong and 11 Yang-gwan at the You-neung of the King Soon-jong; noting that the Yang-gwan of Baek Kwan, granted by the Myeong-dynasty of the China during the Yi-dynasty, was in the shape of 5 Yang-gwan for the first Poom (class) based on the principle of "Yideung Chaegang" (gradual degrading for secondary level), the above-mentioned Yang-gwans are very contrary to the principle and I do not touch such issue in this study, leaving for further study. (2) Po (gown). (a) Git (collar). Collar style of Po was the Ban-ryeong (round collar) having small neck-line in the early stage and was changed to the Dan-ryeong (round collar having deep neck-line) in the middle of the: dynasty. In the Dan-ryeong style of the middle era (shown at the tomb of the King Young-jo); a, thin line such as bias is shown around the internal side edge and the width of collar became wide a little. It is particularly noted that the Ryu-neung established in the middle stage and the You-neung in the later stage show civil servants in Jo-bok with the the Jikryeong (straight collar) Po and in case of the Hong-neung, the Hong-neung, the tomb of the King Go-jong, civil servants, although they wear Yang-gwan, are in the Ban-ryeong Po with Hoo-soo (back embroidery) and Dae and wear shoes as used in the Jo-bok style. As I could not make clear the theoretical basis of why the civil servants' costume styles revealed, at these tombs of the Kings are different from those of other tombs, I left this issue for further study. It is also noted that all the civil servants' stone images show the shape of triangled collar which is revealed over the Godae-git of Po. This triangled collar, I believe, would be the collar of the Cheomri which was worn in the middle of the Po and the underwear, (b) Sleeve. The sleeve was in the Gwan-soo (wide sleeve) style. having the width of over 100 centimeter from the early stage to the later stage arid in the Doo-ri sleeve style having the edge slightly rounded and we can recognize that it was the long sleeve in view of block fold shaped protrusive line, expressed on the arms. At the age of the King Young-jo, the sleeve-end became slightly narrow and as a result, the lower line of the sleeve were shaped curved. We can see another shape of narrow sleeve inside the wide sleeve-end, which should be the sleeve of the Cheom-ri worn under the Gong-bok. (c) Moo. The Moo revealed on the Po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at the age of the King Sook-jong' coming to the middle era. Initially the top of the Moo was expressed flat but the Moo was gradually changed to the triangled shape with the acute top. In certain cases, top or lower part of the Moo are not reveald because of wear and tear. (d) Yeomim. Yeomim (folding) of the Po was first expressed on civil servants' stone images of the Won-neung, the tomb of the King Young-jo and we can seemore delicate expression of the Yeomim and Goreum (stripe folding and fixing the lapel of the Po) at the tomb of the Jeongseong-wanghoo, the wife of the King Young-jo, At the age of the King Soon-jo, we can see the shape of Goreum similar to a string rather than the Goreum and the upper part of the Goreum which fixes Yeomim was expressed on the right sleeve. (3) Dae. Dae fixed on the Po was placed half of the length of Po from the shoulders in the early stage. Thereafter, at the age of the King Hyeon-jong it was shown on the slightly upper part. placed around one third of the length of Po. With regard to the design of Dae, all the civil servants' stone images of the Kings' tombs other than those of the Geonwon-neung of the King Tae-jo show single or double protrusive line expressed at the edge of Dae and in the middle of such lines, cloud pattern, dangcho (a grass) pattern, chrysanthemum pattern or other various types of flowery patterns were designed. Remaining portion of the waist Dae was hanged up on the back, which was initially expressed as directed from the left to the right but thereafter expressed. without orderly fashion,. to the direction of the left from the right and vice versa, Dae was in the shape of Yaja Dae. In this regard, an issue of when or where such a disorderly fashion of the direction of the remaining portion of waist Dae was originated is also presented to be clarified. In case of the Ryuneung, Hong-neung and You-neung which have civil servants' stone images wearing exceptional costume (Jo-bok), waist Dae of the Ryu-neung and Hong-neung are designed in the mixture of dual cranes pattern, cosecutive beaded pattern and chrvsenthemum pattern and that of You-neung is designed in cloud pattern. (4) Hol. Although materials of the Hol held in hand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are not identifiable, those should be the ivory Hol as all the Baek Gwan's erected as stone images should be high class officials. In the styles, no significant changes were found, however the Hol's expressed on civil servants' stone images of the Yi-dynasty were shaped in round top and angled bottom or round top and bottom. Parcicularly, at the age of the King Young-jo the Hol was expressed in the peculiar type with four angles all cut off. (5) Hwa (shoes). As the shoes expressed on civil servants' stone images are covered with the lower edges of the Po, the styles thereof are not exactly identifiable. However, reading the statement "black leather shoes for the first class (1 Poom) to ninth class (9 Poom)," recorded in the Gyeongkook Daejon, we can believe that the shoes were worn. As the age went on, the front tips of the shoes were soared and particularly, at the Hong-neung of the King Go-jong the shoes were obviously expressed with modern sense as the country were civiliz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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