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16세기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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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음 노출 전후의 기니픽 N1-N2 오디오그램의 비교 (Comparison between Nl -N2 Audiograms of Guinea Pigs pre and post loudtone exposure)

  • 장순석
    • 대한의용생체공학회:의공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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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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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71-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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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 기니픽 고막에의 격음 노출 전후에 N1-N2 오디오그램의 변화를 검사하였다. 격음 노출은 106 dB SPL의 세기와 10KHz의 주파수를 가진 연속 격음을 10분 동안 노출시키는 방법이였다. 격음 노출 전후의 N1-N2 오디오그램들을 비교한 결과, 격음 노출된 달팽이관이 그의 기능을 영구적으로 상실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가장 두드러진 한계치의 이동이 12-13.2KHz 사이에서 발생하였다. 격음 노출후의 달팽이관 기능의 변화는 격음 손상 이전의 달팽이관 상태에 따라 달라졌다. 좀 더 예민한 달팽이관이 덜 예민한 달팽이관 보다 격음 손상이후 그 기능면에서 더욱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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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기록된 15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중반의 복식금제(服飾禁制) (Regulations on Dress and Its Ornaments in the True Record of Joseon Dynasty between the mid-15th Century and mid-17th Century)

  • 박경자;고부자
    • 복식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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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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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48-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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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This study was initiated out of necessity to inquire into the trend of costume regulation between the mid-15th century and mid-17th century, and what influence the change of dress and its ornaments had on the people at the time. As for the resources this study was based on, the True Record of Joseon Dynasty, which was the historical record of official compilation, was used as basic material, and the excavated relics at the time were referred to. The forbidden dress and ornaments mentioned in the records from the time of King Seonjong to the time of King Hyeonjong were classified into textiles, clothes, ornaments and dresses, according to the objects. It was designed to identify the laws and ordinances or regulations enacted by the state and the contents of discussions, which were caused by the extensive consumption of silk gauze and fabrics and the luxury in dress and ornaments, and the phenomenon induced by the consumption desire of the social class with economic power, and to help understand the cause. So to speak, the law and ordinance or regulations were established to solve the social problems caused by the failure in controlling dress and ornaments wearing based on social position, during the process in which the king and court officials were making effort to intensify their political power in each reg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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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를 전후한 반가(班家)의 형식변화(形式變化)와 가예(家禮) (Family Ritual and the Plan Change of the Yangban Houses in the 16th Century)

  • 김기주;김성우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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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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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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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
  • Most of the studies on Yangban Houses dealt with the existing houses which were constructed, in most part, after the 17th century. Therefore it is important to identify the actual process of change from before the 17th century which is critical in understanding the history of residential architecture of the Chosun Dynasty. This study aims to clarify that the architectural condition after the 17th century is the result of the major change in sound the 16th century, and the prime motivation of that change was initiated by the family ritual which become very important social and idealogical base of the change. To be able to practice the family ritual, the spatial arrangement had to be changed, Man's quarter had to be enlarged, which a stone-floored room was added on one side of the centural wooden floor of the lady's quarter. Also, family shrine was erected on eastern side of the site. Thus, unless the major change in the 16th century, which was caused by the practice of family ritual, is understood, the study of historical background of Yangban houses can never be compl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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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수학교육의 아버지 이상설(李相卨)이 쓴 19세기 근대화학 강의록 『화학계몽초(化學啓蒙抄)』 (19th Century Chemistry Book of Korean Mathematician Sang-Seol LEE)

  • Son, Yongkeun;Kim, Chae Sik;Lee, Sang-Gu;Lee, Jae Hwa
    • Korean Journal of Mathema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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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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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1-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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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원고는 한국 근대 수학교육의 아버지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이 자연과학-화학-에 기여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상설은 "수리(數理)"를 쓴 시기를 전후하여, 같은 시기에 붓으로 총 46쪽에 달하는 "화학계몽초(化學啓蒙抄)"를 필사하였다. 분석해 본 결과 그 원전은 영국인 H. E. Roscoe(羅斯科, 1833-1915)가 1876년 발간한 Science Primers: Chemistry를 영국인 선교사 Joseph Edkins(艾約瑟, 1823-1905)가 번역하여 1886년에 간행한 "화학계몽(化學啓蒙)"으로 "서학계몽(西學啓蒙)" 16종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 '고방파(古方派)' 의학에 관한 연구

  • 박현국;김기욱;정경호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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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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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1-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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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재일본규주황한의학적전통의학지전신취시중국전통의학적지식(在日本叫做皇漢醫學的傳統醫學之前身就是中國傳統醫學的知識). 16세기이래(16世記以來), 일본불단수도이개조중국의학적최신성과(日本不斷收到而改造中國醫學的最新成果), 동양원류우부동홍류적한방의학체계점점형성적과정전후(同樣源流又不同洪流的漢方醫學體系점점形成的過程前后), 출현료4개학문유파(出現了4個學問流派). 저취시(저就是)"후세파(后世派)"."고방파(古方派)"."절충파(折衷派)"."고증파(考證派)". 소우호세파(소于호世派), 논자이경재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적제19권3호상보고료(논者已경在大한한의학原典학회紙的第19卷3호上보告了), 본논문시연속적연구성과(本논文是연속的硏究成果). 종이재본논문상(종而在本논文上), 이한국적이정환(以한국的李政桓), 백유상(白裕相), 정창현등적연구여중국양영적연구위기초(丁彰炫等的硏究與中國梁嶸的硏九爲基礎), 요개략지보고일본의학방면상적‘고방파’(要槪略地報告日本의학方面上的'古方派'). "고방파"지칭부정근세송명의학이지지지한대장중경적"상한잡병론"지일본의가("古方派"指稱否定近世宋明醫學而只支持漢代張仲景的"傷寒雜病論"之日本醫家). 일반"상한론"전파우일본적실정시대(一般"傷寒論"傳播于日本的室町時代), 명응년간(明應年間)(1492${\sim}$1500)판정운재명유학후(阪淨運在明留학후), 타회도일본적시후(他回到日本的시候), 종명수입(종明수入)"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 이후일본후세한의칭송료이관동지역적영전덕본(以후日本후世漢醫칭송了以關東地域的永田德本)(1513-1603)위(爲)"고방파적선구자(古方派的先구者)". 도강호시대재일본학술계출현료복고사조(到江戶時代在日本學術係出現了復古思潮). 이등인제(伊藤仁劑)(1627${\sim}$1705)앙망료유학적경전(仰望了儒學的經典), 이차적극지주장료의학적복고(而且積極地主張了醫學的復古), 이후적생조래(以후荻生組徠)(1666${\sim}$1728)대우복여성인적학문부단노력(對于復與聖人的學問不斷努力). 인차복고적학문재덕천시대성위일대학파(因此復古的學問在德川時代成爲一代學派), 18세기상반기시전성시기(18世紀上半期是全盛시期). 주요의가시명고옥현의(主要醫家是名古屋玄議)(1628${\sim}$1696), 후등양산(後藤양山)(1659${\sim}$1733), 산협동양(山脅東洋), 병하천민(병河天民)(1679${\sim}$1719), 송원유악(松原維嶽)(1689${\sim}$1765), 향천수암(香川修庵)(1683${\sim}$1755), 타문복고적유학영향도흔다의학방면(他문復古的儒學影향到흔多의학方面). 중요의가길익동동(重要醫家吉益東洞)(1702${\sim}$1773)도후대피평위고방적'태두'(到后代被평위古方的'泰斗'), 동시'마귀'(同시'魔鬼'). 인차본논문소우황한의학지중"후세파"여반대후세파적"고방파"(因此本論文소于皇漢醫學之中"后世派"與反대后世派的"古方派"), 통과학파명칭여역사지위(通過學派名稱與歷史地位), 주요의가적생애(主要醫家的生涯), 학술적요지(學術的要旨), 저서등(著書等), 이연구병보고타문적학문주장(以硏究병報告他們的學問主張). 이차진저차궤회(而且진저次机회), 상회고아문한의학연착여하역사적궤적(想回고我문韓醫學沿着如何歷史的軌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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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조절방사선치료(IMRT)로 치료한 비소세포폐암 환자에서의 방사선 폐렴 (Incidence and Prognostic Factors of Radiation Pneumonitis in NSCLC Treated with Intensity Modulated Radiation Therapy(IMRT))

  • 김명세
    • Radiation Oncology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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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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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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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목적: 세기조절방사선치료로 치료한 비소세포폐암 환자에서 방사선 폐렴의 발생률과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대상 및 방법: 2004년 8월 1일부터 2006년 11월 30일까지 비소세포폐암으로 확진되고 세기조절방사선치료로 치료한 환자 105명을 대상으로 하였다. 평균연령은 62.9세였고 편평상피암이 81명(77%)이었고, III기 환자가 66명으로(62.9%) 가장 많았으며 우측 폐에 병소를 가진 환자는 59명, 좌측 폐는 46명이었다. 수술 전 방사선 치료로 3,060 cGy를 조사받은 환자는 27명, 수술 후 방사선치료로 5,040 cGy를 조사받은 환자는10명이었고 7,020 cGy의 근치적 방사선치료를 받은 환자는 68명이었다. 치료계획은 CORVUS 시스템이 68명, ECLIPSE 시스템이 37명이었다. 결과: 방사선 폐렴 혹은 방사선 치료와 관련된 병리학적 이상 소견으로 본원 영상의학과에서 진단된 환자는 21명(20%)이었으나, 증상이 있어 치료를 받은 사람은 7명(6.7%)이었다. 치료받은 환자는 기관식도누공(1명), 재발(2명), 뇌전이(1명), 반대 측 폐전이(2명)를 동반한 환자였고, 항암제 치료중 원인 불명으로 화장실에서 사망한 1명을 포함 7명 모두가 사망하였으나 방사선 폐렴만이 사망 원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영상의학과에서 진단된 21명중 CORVUS 시스템으로 치료 계획한 환자가 16명(23.5%), ECLIPSE로 계획한 환자는 5명(13.5%)이어서 CORVUS로 치료한 환자 군에서 폐렴의 발생이 유의하게 높았다. 수술 전 방사선 치료환자 27명중 5명이, 수술 후 방사선치료를 받은 환자 10명중 3명이 방사선폐렴을 보여 수술이 시행된 군이 수술이 시행되지 않은 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 선량임에도 불구하고 폐렴 발생률이 높았다. $V_{20}$은 우측에서 10% 이상인 환자, $V_{10}$은 우측에서 20% 이상인 환자에서 통계학적인 유의성을 보였다. 결론: 영상의학과에서 폐렴으로 진단된 환자는 21명이었으나 증상이 있어 치료를 받은 환자는 7명(6.7%)으로 세기조절 방사선치료가 정상조직의 손상을 줄여 합병증을 줄이는 데 기여하였다고 생각된다. 통계학적으로 유의한 예후인자로는 치료 전후의 수술, CORVUS 시스템으로의 치료계획, 우측, $V_{20}$이 10% 이상, $V_{20}$이 20% 이상인 경우 였고, 비교적 적은 방사선량을 조사받은 수술 전, 수술 후 방사선치료 환자에서 높은 비율의 증상을 동반한 폐렴을 보인 것은 향후 세심한 치료계획이 필요함을 나타내었다.

경주읍성 성곽시설의 원형고증에 관한 연구 (A Study on Historical Research of Archetype of Kyeong Ju Castle)

  • 김홍곤;김영모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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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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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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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에서는 경주읍성의 성벽과 성곽시설을 대상으로 그 간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고 구체적인 규모와 구조를 밝히기 위하여 원형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확인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경주읍성의 위치와 규모를 고증하기 위하여 일제강점기 지적도 현재 지적도 현재 수지형도 발굴조사 유구 현황도를 도면중첩(over-lay) 한 결과 정확한 성곽유적의 위치와 규모를 확증할 수 있었다. 둘째, 문헌적 고증과 근현대의 연구사료 일제강점기의 유적조사 기록 보수정비 기록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 고증한 결과 체성과 치의 규모 및 구조를 고증할 수 있었다. 셋째, 조선시대의 여장규식과 관련 문헌기록을 통하여 여장의 원형을 고증한 결과 문종원년(1451)의 초기 경주읍성의 여장과 임진란 전후(16세기 경)의 경주읍성 여장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었다. 넷째, 성곽 유적 대부분이 멸실된 상태이나 경주읍성의 문헌적 고증과 근현대 연구 사료(발굴조사 보수 수리기록 현장조사)의 조사내용을 토대로 규모를 산정하고 구조를 추정하였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향후 복원정비의 기초자료로서 개별 유적의 원형복원도를 작성 제시하였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학교교육론(學校敎育論)과 그 도덕교육적(道德敎育的) 함의 (Yeoheon Jang Hyeongwang's perspective on schooling and the implication of moral education)

  • 박학래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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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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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5-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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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고는 퇴계(退溪)와 율곡(栗谷) 이후 조선 성리학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학교 교육, 특히 향교(鄕校) 교육(敎育)에 대한 입장과 구체적인 활동을 검토하고, 그것의 도덕교육적 의미를 정리한 것이다. 16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구체화된 향교 교육의 폐단에 대해 퇴계와 율곡은 모두 그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처방에서는 구별되는 입장을 드러냈다. 퇴계가 향교 교육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유학교육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서원(書院)의 건립과 위상 강화에 주목하였다면, 율곡은 관학 교육기관으로서 향교의 교육 개혁에 보다 관심을 기울였고, 이를 통해 학교 교육의 면모를 일신하고 인재 양성과 윤리기강의 확립을 추구하였다. 본고에서는 퇴계와 율곡의 구별되는 학교 교육 개혁에 대한 입장에 유의하면서 여헌의 학교 교육에 입장을 고찰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향촌 사회의 도덕 질서 회복에 주목한 그의 문제의식이 어떻게 향교 교육과 연결되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분석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그의 향교 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을 그가 제시한 인동 향교의 교육 조목을 통해 체계적으로 정리 분석하였으며, 이를 통해 그가 의도한 향교 교육의 내용과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도 함께 검토하였다. 나아가 여헌의 향교 교육에 대한 관심과 활동이 도덕교육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살피고, 현재 교육 현실과 연관하여 어떤 시사점을 주는지 시론적(試論的)인 입장을 제시하였다.

우리나라 과실류(果實類)의 역사적(歷史的) 고찰(考察) (A Historical Study on Fruits in Korea)

  • 강춘기
    •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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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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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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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
  • 한국(韓國)에서 농경(農耕)의 시작은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말기(末期)에서 부분적으로 시작되어 보편화된 것은 B.C 4000년경으로 보고 있다. $B.C\;8000{\sim}B.C\;6000$년 전쯤의 어느 신석기(新石器) 유적(遺蹟) 중에서 농경(農耕)에 쓰였던 석기(石器)들과 함께 도토리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유사이전(有史以前)의 한국인(韓國人)들의 조상(祖上)들은 도토리와 개암 아가위 등 야생식물(野生植物)의 열매를 따서 이용했을 것이다. 부족국가시대(部族國家時代)의 마한(馬韓)에서는 밤을 재배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복숭아, 오얏, 배, 매화(梅花)를 재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中國)의 기록(記錄)을 보면 신라(新羅)에서는 잣, 호도, 석류, 백제(百濟)에서는 밤이 유명하다. 발해왕조(渤海王朝)에서도 오얏과 배, 잣이 유명하였다. 고려시대(高麗時代)에 복숭아, 오얏, 매화, 앵두, 잣, 살구, 포도, 대추, 배, 귤, 유자, 은행 등을 재배 이용하였다. 조선초기(朝鮮初期)의 지리서(地理書)인 $\ulcorner$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Ircorner$(1454)와 $\ulcorner$新增東國與地勝覽$\Ircorner$(1492)에는 개암, 아가위, 복분자(覆盆子), 비자, 잣, 은행, 대추, 밤, 감, 석류, 살구, 복숭아, 호도, 모과, 귤, 유자, 앵두, 포도, 능금 등 우리가 현재 재배하고 있는 과실나무가 거의 재배되고 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온 과실(果實)로써 위의 지리서(地理書)에 없는 과실(果實)로는 비파(枇杷)와 무화과(無花果)이다. 비파는 조선초기에 들어온 듯하여 무화과(無花果)는 16세기 전후에 들어온듯 한데 이들 두 종류의 과실나무들은 내한성(耐寒性)이 약한 종류(種類)이기 때문에 지금도 제주(濟州)와 전남(全南), 경북(慶北) 등지에만 재배되고 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 와서는 많은 농서(農書)들이 출간(出刊)되었는데 거기에는 과수재배법(果樹栽培法)과 이용법(利用法)도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900년 전후해서 西洋에서 피칸 양앵두 뿐만 아니라 최근 키위 등이 수입되어 상당히 이용되고 있다. 또 이외에도 과실(果實)의 약리적(藥理的)인 면을 이용하여 모든 과실을 한약(漢藥)으로써 의료면(醫療面)에도 널리 이용(利用)되었다. 과실(果實)은 우리들의 식생활(食生活)을 풍성하게 하기 때문에 과실의 소비량은 생활수준(生活水準)의 척도(尺度)가 된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통하여 과수(果樹)들을 개량(改良)하고 도입(導入)하면서 재배(栽培) 이용(利用)하여 온 과실류(果實類)의 지위는 우리의 食生活史에 확고하게 유지(維持)되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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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혁화의 그래픽 콘텐츠 연구 (A Study on the Graphic Contents of Hyuk-Wha in the late Chosun Dynasty)

  • 이명구;남인복
    • 디자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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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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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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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조선 후기인 18세기 전후에는 각종 민화(Min-Wha)들이 민중들의 생활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면서 소재나 기법에서 독특하고 다양한 작품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민화 가운데에서 특이한 표현 양식 중 하나로 혁화(Hyuk-Wha)를 들 수 있다. 혁화는 그 기법으로 볼 때, 서예의 표현 양식의 하나로 분류되는 비백서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는데, 버드나무 껍질이나 갈대류의 줄기를 바르게 펴서 붓 대용품으로 써서 작업한 비백서의 다소 거친 질감과는 시각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혁화의 발전 과정은 민화 전체의 발전 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도교적인 길상문자 문자도 및 유교적인 효제문자도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형식의 창의적이고 차별화 된 문자도 형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문자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한자의 뛰어난 조자력을 상징적으로 조형화 한 혁화는 오늘날 그래픽 분야의 워드 마크(Word Mark)나 브랜드 로고타입(Brand Logotype) 등에 응용되는 픽토그래피(pictography)와도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민중의 집안을 꾸미고 장식하는 용도로 성행했던 혁화는, 오늘날 다양한 장식용품의 등장과 현대화된 주택의 발달로 그 용도는 거의 소멸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동안 민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고 서예 및 문자도 와 더불어 발전해 온 혁화가 서구에서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는 현시점에 비추어 볼 때, 그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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