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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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능비(陵碑)의 건립과 어필비(御筆碑)의 등장 (Formative Stages of Establishing Royal Tombs Steles and Kings' Calligraphic Tombstones in Joseon Dynasty)

  • 황정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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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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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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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논문은 조선 초 중기, 조선후기, 대한제국기 세 시기로 나누어 조선왕릉에 건립된 신도비와 표석의 시기별 건립추이와 양식적 특징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 왕실 능비(신도비와 표석)는 일반 사대부가와 달리 건립한 시기와 주체, 후계왕의 의도에 따라 시기별 차이를 보이며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15~17세기는 왕릉 신도비의 건립과 재건이 이루어진 시기, 18세기는 신도비가 표석으로 대치되어 다수 건립되었고 국왕의 어필을 직접 돌에 새긴 어필비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이며 대한제국기는 황제국으로 격상됨에 따라 조선 개국자인 태조와 왕후, 선조들에 대한 추숭(追崇)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표석 중건이 이루어진 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본다면, 결국 우리나라 능비의 역사는 조선후기를 기점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왕릉 신도비의 형식은 삼국시대의 부정형한 석비의 초보적인 형태에서 벗어나'귀부이수'형의 당비(唐碑) 형식을 수용한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 말 탑비의 퇴화된 양식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15세기 건립 당시부터 선왕에 대한 숭모 예를 표현하고자 하는 국왕과 왕의 치적이 국사(國史)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므로 신도비를 별도로 세울 필요가 없다는 신료들의 입장이 대치되면서 건원릉 제릉 헌릉 구 영릉 4곳에만 건립된 채 왕릉에는 한동안 석비가 건립되지 않았다. 신도비 건립이 중단된 이후 17세기에 이르러 왕릉에 아무런 표(表)를 해 둘 수 없다는 의견이 제기됨에 따라 형식이 간소한 표석이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1682년 작 영릉(寧陵)의 표석은 최초로 왕릉에 건립된 표석이자 장대한 규모,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왕릉의 능표는 영조 재위 기간인 1740년대부터 대규모로 건립되었다. 열성(列聖)에 대한 추숭과 어필간행 등을 통해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전통성을 공표하고자 했던 영조는 제릉의 신도비를 재건하는 한편, 의릉(懿陵)을 비롯하여 총 20곳에 달하는 곳에 표석을 세우는 역사(役事)를 추진했고, 처음 친필 글씨를 돌에 새긴 어필비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어필비 제작 현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소실된 어필을 보존하려 한 숙종의 신념을 계승한 영조에 의해 제도적으로 추진되면서 어필을 새긴 능비가 등장한 배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시대사적으로 주목할만하다. 이러한 표석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다시 한번 다량 제작된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고종은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태조의 조선 건국에 두고 태조와 그 4대 선조에 대한 추숭과 기념물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고 전면과 후면 모두 자신의 글씨로 채움으로써 역대 어느 왕보다 통치자로서 권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었다. 이상 언급한 왕릉의 신도비와 표석의 건립 추이는 동시대 원 묘에 건립된 신도비, 표석과 비교 고찰을 통해 시대별 특징과 왕실 조각품으로서 성격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날 것으로 생각한다.

국가기준점 관리시스템 분석에 관한 연구 (Management System Analysis of National Control Points)

  • 권찬오;송준호;조현구;이영진
    • 한국GIS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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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GIS학회 2008년도 공동추계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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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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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국가기준점은 국가의 주요 인프라시설로서 시설 및 데이터를 일관된 체계를 갖고 유지, 관리되어야 하며 각종 표석기준점 데이터 및 GPS상시관측망 데이터의 체계적인 관리 및 효율적인 활용을 위하여 연계, 통합하고 유지 관리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상시관리 서비스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본 연구는 기존의 국가기준점 관리시스템을 분석하고 새로운 국가기준점 관리시스템 구축의 방향제시를 목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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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무심천과 남석교에 관한 역사지리적 고찰 (Historical Geography of Mu-Sim River and Nam-Suk Bridge in Chongju City)

  • 예경희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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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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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7-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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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통일신라시대의 서원경성의 위치는 청주읍성 지역이 되고 있다. 청주의 매장 문화재인 남석교는 신라 진흥왕 19년 무인년(588년)에 수선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남석교의 원조는 그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고 그 후에 수차에 걸쳐 개축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청주읍성의 남북 주축도로는 남문을 통과하고 있고 남문 밖의 시장의 발달로 인하여 남문 밖의 무심천에 위치한 남석교의 역할은 지대할 수밖에 없다. 남석교에서 유래된 대교천의 명칭은 조선 철종 12년(1861년)까지는 대교천으로 불렸고 고종 8년(1871년)에는 무성천으로도 불렸으며 광무 2년(1902년) 이후에는 무심천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짐작된다. 청주는 풍수지리와 무심천의 지명유래 등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기도 하였지만 점차 긍정적인 이미지로 변화되고 있다. "남석교 사적비"는 1907년까지는 존재하였지만 "표석"과 더불어 유실되었고 "남석교"는 $1931{\sim}1932$년 간의 석교동 제방공사 때문에 매몰되었으며 이러한 문화재들은 가치가 매우 크므로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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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릉 석물의 재료와 제작 방법 변화에 관한 연구 - 신도비와 표석, 상석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hange of Materials and Fabrication Techniques of Stone Figures in Royal Tombs of the Joseon Period - Focusing on Shindobi, Pyo-Seok, and Sang-Seok -)

  • 차문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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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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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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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비석은 상례문화의 보고이자 서예사의 정수로서 시대사·사회사를 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지만 그 연구는 아직 미미하다. 특히 비각의 제작 방식에 관한 것은 아직 미증유의 분야로 남아 있어 연구가 절실한 편이다. 비석의 제작은 석재의 탁마 과정과 조각, 그리고 글씨를 새기는 북칠 과정으로 대별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의 사실을 밝히고 있다. 첫째, 신과 관련한 의물(神儀物)인 상석, 혼유석, 비석에는 정교한 마정(磨正) 작업을 가한다. 이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영향으로 인한 유교적 상·제례의 정착과 전파로 혼유석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기인한다. 둘째, 영조 때 오석(烏石)의 비약적인 확산과 사저취용(私儲取用)은 사회·문화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상품(上品)의 강화석이 고갈되자 사대부에서 사용하던 오석을 천릉한 장릉에 사용한 이후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퍼지게 된다. 특히 오석의 사용과 마정 작업은 화학적·물리적 손상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셋째, 비석의 각자 기술은 북칠(北漆)에 있다. 효종 영릉 천릉 시에 송시열의 지문을 북칠한 이후부터 북칠 과정은 동아시아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성행했고 제도화된 점은 특기할 만하다. 북칠은 오석의 검은 색으로 인해 흑묵보다 붉은 당주를 이용하면서 더욱 정교화된다. 넷째,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각자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영조 연간까지 각자는 획의 두께에 따라 각의 깊이를 결정해 음영을 표현하고 양감을 나타냈다. 물론 이 같은 기법은 모든 표석이나 신도비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나 내수사에 소속된 뛰어난 경공장들의 전습에 의해 유지되었다. 따라서 비석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숙석, 연정, 마정, 정간, 초도서입, 중초, 입각, 교정, 장황의 단계를 거쳐 하나의 완성품이 이뤄진다. 이러한 것은 묘주에 대한 존경심과 공업을 알리는 목적이지만, 이를 통해 공예 기능의 분업과 협업에 바탕을 둔 작업이 표석의 전체 제작 과정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효율적인 국가기준점 관리를 위한 CDMA기반 모니터링 웹 시스템 개발 (Development of CDMA Based Monitoring Web System for Efficient Management of National Control Points)

  • 오윤석;이영균
    • 한국GIS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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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GIS학회 2007년도 추계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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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5-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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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국가기준점은 측량을 위한 주요 시설물로서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국가기준점이 설치되어 있는 환경은 측량을 위한 시야 확보가 필요하기 때문에 삼각점의 경우 산 정상이나 인근 기준점과 시통이 가능한 위치에 설치하며, 수준점의 경우 도로변이나 하천변에 설치한다. 국가기준점은 화강암으로 된 표석 형태로 설치되기 때문에 이렇게 외부환경에 노출될 경우 자연 풍화, 인위적인 훼손, 파손 등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현황 파악을 위하여 주기적인 방문관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약 22,000개 가량 설치되어 관리가 어려운 실정이다. 본 연구에서는 국가기준점 관리의 효율성을 높이고 기준점 정책 수립을 위한 통계자료수집을 위한 국가기준점 모니터링 시스템을 개발하였다.본 시스템은RFID가 부착된 국가기준점을 사용할 경우 RFID를 인식하는 단말기는 실시간으로 CDMA 망을 이용하여 모니터링 시스템에 정보를 전송하고, 웹 시스템 상에서 실시간으로 현재 사용중인 기준점이 표시된다. 사용중인 기준점의 사용용도 및 사용자의 현황도 화면에 표시된다. 이러한 정보는 이력관리가 되며, 사용 및 관리에 관한 이력정보 보고서, 기준점별 사용 빈도 및 사용 목적별 빈도 등이 저장되어 기준점 설치, 관리 대상 기준점 선정 등을 위한 기준점 정책 수립을 위한 통계자료를 생산할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 개발을 통하여 실시간 기준점 모니터링이 가능하며, 관리대상 기준점 선정, 전산화된 이력관리 구현 등으로 인하여 관리비용을 절감하고, 관리인력을 최소화 하는 효율적인 기준점 관리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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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거리측정 시설을 이용한 지상라이다 성능 평가 (Performance evaluation of Terrestrial Laser Scanner over Calibration Baseline)

  • 이인수;이재원
    • 한국측량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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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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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9-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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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는 시간차방식(TOF: Time of flight)과 근적외선 파장대역(760-3000nm)을 사용하는 지상라이다를 이용해서 다양한 사용자 타깃에 대해 반사도와 거리정확도를 테스트하였다. 특별히 사용자 타깃에 대한 측점군의 반사도는 실내에서 독일 Gretag Macbeth사의 i1 분광광도계로 측정되었다. 그리고 지상라이다의 성능 평가를 위해 정밀 EDM 검기선장에서 지상라이다를 이용해서 타깃을 스캐닝 하여 기준표석간 이격거리를 측정하여 표준거리와 비교하였다. 테스트 결과로서, 약 10m 와 170m 기준표석간 이격거리에 설치된 흰색 수지 타깃을 제외하고, 실험에 이용된 다른 타깃들의 거리측정값은 기준거리와 수 mm 정확도 차이를 보였다. 향후 대기보정, 장비보정, 부가상수와 같이 거리정확도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 된다.

위치정보 제공 서비스를 위한 유비쿼터스 기준점 설계 연구 (Design of Ubiquitous Reference Point for Location Service)

  • 박재민;오윤석;강진아;김병국
    • Spatial Information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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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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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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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현재 우리나라에는 전국에 약 21,000점의 측량용 국가기준점이 표석 형태로 매설되어 있으며, 대부분이 시통을 위해 산 정상에 매설되어 있어 일반인들의 사용과 접근이 어렵다. 최근 유비쿼터스 환경이 구축되어 감에 따라 위치정보 및 위치정보 기반의 정보를 일반인들에게 손쉽게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가 요구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RFID 태그와 2차원 바코드를 이용하여 위치정보를 손쉽게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기준점 프로토타입을 제작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개발된 인텔리전트 기준점을 실용화하여 실제로 서비스하기 위해 필요한 사항에 대해 고려하여 보았으며, 실제 테스트를 통해 사용 가능성을 검증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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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ID를 이용한 국가기준점 원격 모니터링 웹 시스템 개발 (Development of Remote Mornitoring Web System for National Control Points using RFID Tags)

  • 오윤석;이영균;박재민
    • Spatial Information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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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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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7-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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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약 22,000개의 국가기준점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국가기준점의 위치정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기준점 성과표가 필요하며, 국가 주요시설임에도 불구하고 산 정상과 같은 야외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보호시설이 없는 상태에서 현장점검을 통해서만 관리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국가기준점 표석에 부착할 수 있고, 국가기준점이 설치된 환경을 고려한 특수 RFID 태그를 제작하였으며, CDMA 통신이 가능한 PDA기반 모바일 Web 시스템과 국가기준점 관제시스템을 개발하였다. 본 시스템 개발을 통하여 기준점 정보를 현장에서 파악할 수 있고, 국가기준점 관리자가 기준점의 관리 상태 및 사용 이력 등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본 시스템을 적용할 경우 전국에 산재해있는 국가기준점 정보를 누구나 손쉽게 확인할 수 있고 정보의 변화에 따른 빠른 대응이 가능하며, 관리의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다. 향후 유비쿼터스 사회가 도래하면 위치정보의 중요성이 높아질 것이다. 따라서 일반인의 위치정보 확인이 용이한 RFID를 이용한 국가기준점은 측량전문가와 같은 기준점 사용자 및 관리자에게 유용할 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위치기반 부가서비스 창출할 수 있을 것이며, 절대위치 정보 제공 측면에서도 중요한 국가 인프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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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종료 채석장 부지를 활용한 해외 복합 개발 사례에 대한 고찰 : 영국과 호주 사례 (A Study on Mixed-use Development Cases Using Closed Quarry Site of Overseas; the UK and Australia)

  • 조승연;임길재;이진영;지상우
    • 자원환경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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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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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05-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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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21세기 들어 영국, 호주 등 해외에서도 대도시권의 주택가격 상승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이들 정부는 대도시 인근에 위치한 개발종료 채석장 부지를 택지로 적극 활용하여 주택부족 문제를 해소하고자 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 검토한 영국의 Erith Hill Quarry (The Quarry)나 Plymstock Quarry, 호주의 Lilydale Quarry (Kinley)와 Bombo Quarry는 모두 도시 계획적 제도를 통해 개발이 종료된 채석장을 주택, 상업 등 복합용도로 개발한 사례이다. 영국은 도시계획제도의 틀 안에서 Section 106이라는 계획허가 제도를 통해 지방정부가 개발종료 채석장 부지의 복합개발을 허가하는 대신 지역에 필요한 학교 등의 공공시설과 저렴한 주택을 공급하도록 하고 있다. 호주는 채석장의 토지이용을 산업에서 복합용도로 변경할 수 있도록 지방정부의 허가권한을 활용하고, 개발계획에 저렴한 주거 외에도 도시기반시설, 오픈 스페이스 등이 포함되도록 하고 있다. 특히, 호주의 사례에서 개발계획을 사전에 수립하고, 단계적 개발방식을 통해 상부 표토 및 표석을 채굴적을 메우는 충전재로 활용한 것은 사업비를 절감하는 효과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국과 호주 모두 개발종료 채석장 부지를 택지로 공급하는 것이 신규 녹지를 훼손하는 것보다 미래세대를 위한 지속가능한 친환경적 개발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경직된 우리의 도시개발 제도에 정책적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장승의 기원과 옹중석 (The Origin of Changseung and Ongjung Stone)

  • 정승모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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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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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0-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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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우리가 '장승'이라고 부르는 조형물들은 그 기원이나 역사, 또는 기능이 서로 달라 엄밀한 구별이 필요하다. 이 글은 장승의 기원과 함께 역사적인 변화과정을 더듬어 이 구조물이 갖는 두 가지 다른 측면을 구분하고 이에 기초하여 소위 '석장승'의 다양한 기원과 기능을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고려시기에 사찰에서는 장생, 또는 관련 석물을 세웠는데, 이 중 '통도사국장생석표'는 석표(石標)라기보다는 석비(石碑)의 기능을 갖는다. 석비에 음각된 명문을 보면 이전의 판아(判兒)처럼 다시 세우라고 하였는데, 판아란 역귀(疫鬼)를 쫓는다는 종규(鍾郡)를 말한다. 명문 내용은 통도사의 영역을 장생으로 표시하였다는 것이다. 허목의 "월악기(月嶽記)"에 실려 있는 한준겸(韓浚謙)의 기사를 보면 도갑사 국장생의 규모가 매우 커서 이러한 추정을 가능케 하며 '국장생'이나 '황장생'이라고 새긴 입석은 장생이 아니라 표석, 즉 장생표(長生標)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정(里程) 기능을 하는 후를 장생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사찰 장생과는 달리 나무로 만들어 사찰 장생의 생(生) 자에 나무 목(木) 변을 붙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요즈음과는 달리 조선시기에는 비보 성격을 갖는 사찰 석상이나 읍성풍수물을 장승이라고 부른 경우는 찾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제주도 '돌하르방'을 두고 장승이라고도 불렀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 "탐라기년(耽羅紀年)"에 의하면 제주목사 김몽규(金夢奎)가 성문 밖에 옹중석(翁仲石)을 세웠다고 했는데, 옹중석은 대개 고대 제왕(帝王)이나 대신(大臣)의 능묘 앞에 세운 석인상(石人像)을 지칭하는 말이다. 옹중석은 엽승[壓勝]을 위한 풍수물로도 나온다. "광주읍지(光州邑誌)"(1899년간)에는 수구(水口)를 만들고 석옹중 2기를 마주 세워 그 기를 진압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전라북도 부안읍치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2기씩 세워진 석물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읍성풍수물인 이것 역시 석장생이나 장승, 또는 당산으로 불릴 이유는 없다. 도교적인 개념인 상원(上元)과 하원(下元)이 붙은 주장군이나 당장군은 이후 사찰 석상의 명문으로 자주 등장하고, 이후에는 이표 장승에도 붙는다. 사모를 쓴 북한산성 옹중석을 지금은 볼 수 없는 것처럼 많던 옹중석들은 어딘가에 묻혔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제주의 옹중석과 부안 읍성의 석상은 위치 이동이 적어 옹중석의 기능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설립된 석상들은 고려시기에 조성된 장생(長生)과 기능상 가장 관련이 깊은 듯하다. 즉, 과거의 장생처럼 18세기 초중반의 석상들은 읍성, 또는 사찰의 비보물이면서 동시에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사찰 석상의 설립시기는 양전사업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때이기도 하지만 속세에서는 산송(山訟)이 활발해지는 때라 사찰에서는 비보와 함께 영역 표시를 위해 석상들을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장승으로 통칭되는 목인과 석상들은 각자가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이유로 세워진 것들이다. 그 출발은 고려시기 사찰의 장생(長生)으로 비보물이면서 동시에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는 석물, 또는 석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