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친잠례(親蠶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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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친잠례의 디지털 재현 (Digitalization of Chin-Jam-Rye (Queen's sericultural ceremony) in Joseon Dynasty)

  • 이유경;이용환;박성실;간수진;이영희
    • 한국정보처리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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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정보처리학회 2003년도 춘계학술발표논문집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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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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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지식정보화시대인 21세기는 문화가치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으며, 전통문화에 첨단기술을 적용(CT: Culture Technology)하여 디지털화하고 이를 대중화, 상품화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본 연구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왕비가 손수 뽕을 따고 누에를 쳐서 양잠을 장려한 궁중의식으로 위민정신과 민본사상이 담겨져 있는 친잠례(親蠶禮)와 친잠의궤(親蠶儀軌)를 동영상과 3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고, 멀티미디어 개발 시스템을 통하여 하이퍼미디어 정보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를 통하여 한국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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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원 내 친잠(親蠶)문화의 배경과 공간적 특징 (Backgrounds and Spatial Characteristics of Sericulture in the Rear Garden of Palace in Joseon Dynasty)

  • 허선혜;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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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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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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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조선시대 궁궐 내에서 일어났던 친잠문화의 배경과 공간적 특징에 대한 탐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조선은 유교적 중농주의 국가로서 국초부터 농업 못지않게 양잠업 장려에 열의를 보여 양잠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진행해 왔다. 그러한 노력의 일면으로 조선 왕실은 궁궐 내에서 친잠활동을 하게 되었다. 조선은 초기 태조 연간부터 궁원 곳곳에 뽕나무를 심었으며, 세조는 동궁(東宮) 근처에 잠실(蠶室)을 설치하여 세자를 비롯한 궁중 사람들에게 양잠의 중요성을 수시로 알게 했다. 성종 연간에는 조선 최초로 창경궁 후원에 채상단을 만들어 친잠례를 거행하였고, 이후 채상단은 위치를 달리하며 광해군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 후 영조 연간에는 경복궁에 채상단과 정해친잠비(丁亥親蠶碑)를 건립하였는데, 이는 경복궁 유지에 대한 영조의 애착과 양잠의 권면에 대한 적극적 의지의 산물이었다. 경복궁 유지에서 터가 고르고 뽕나무를 심기 적합한 동편이 선택되어 채상단을 축조했으리라 가늠해 볼 수 있는데, 이 장소는 세종 연간 잠실이 있던 장소이기도 하다.

정해 친경·친잠과 김수장 시조 (ChungHae Chingyeong·Chinjam procedure and Kim Sujang Sijo)

  • 신경숙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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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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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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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이 글은 정해년(1767)에 있었던 친경, 친잠의식을 축하한 김수장 가곡이 어떻게 해서 창작되었는지를 살폈다. 논의는 크게 다음 네 가지로 진행되었다. 첫째, 1767년 2월26일에 거행된 왕이 주관하는 친경의식을 살폈다. 친경의식은 동적전(지금의 전농대 일대)에서 거행되었다. 둘째, 1767년 3월10일에 거행된 왕비가 주관하는 친잠의식을 살폈다. 친잠의식은 폐허인 경복궁 옛터에서 거행되었다. 셋째, 김수장은 친잠의식 하루 전날인 3월9일 축하가곡을 창작했다. 이 창작 날짜는 김수장이 친경례 안에 들어와 있는 친잠례임을 확실히 인식했음을 말해준다. 넷째, 김수장은 병조 서리를 거쳐 몇 가지 산직 노직을 거치는 가운데, 정해 친경친잠의식 때에 이들 행사에 관여하게 되고, 그 결과 이들 축하 시조를 창작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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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기생(妓生)의 존재 양상 고찰 (A study on the Existence of Courtesans During the Joseon Dynasty)

  • 조하나;김미영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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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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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33-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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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조선시대에 여악(女樂)을 담당한 예능인이었으나, 사대부(士大夫)의 '성(性)적 상대'로 인식되었던 기생(妓生)의 존재 양상과 그들의 존재가 가능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의 사회적 특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에 연구는 사대부와 기생의 관계를 다각적인 측면에서 드러내고자 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으며, 기생의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는 데에 연구의 필요성이 있다. 유교사회에서 여성들이 주축이 된 내연과 친잠례 등에 남자 악공들이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악은 조선조 말까지 존속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악은 전문예인이었다는 존재성을 드러내기에 충분하였다. 기생의 존재 양상은 조선시대 사회적 배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따라서 현대사회의 성모랄로 조선시대를 규정지을 수 없다. 『녹파잡기』는 기생을 색정적인 기준에서 묘사하기보다는 비범하고 고결한 정신을 소유한 예능인의 시각에서 보고 있다는 해석에 힘입어, 예인으로서의 기생의 면모를 한층 드높일 것으로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