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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Existence of Courtesans During the Joseon Dynasty

조선시대 기생(妓生)의 존재 양상 고찰

  • 조하나 (한양대에리카 무용예술학과) ;
  • 김미영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문화연구소)
  • Received : 2021.01.26
  • Accepted : 2021.02.27
  • Published : 2021.04.28

Abstract

This study was an entertainer who was in charge of female music in the Joseon Dynasty, but the existence of gisaengs, who were recognized as'sexual partners' of the four grandfathers, and the Joseon Dynasty, when their existence was possible. I tried to reveal the social characteristics of Therefore, the research is meaningful in that it attempted to reveal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grandfather and the gisaeng from various perspectives, and that it is possible to confirm the various social roles of the gisaeng. In the Confucian society, female musicians were not allowed to participate in Naeyeon and Chinjamrye, where women were the main pillars, so not only could the girl's music survive until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but it was enough to reveal the existence of a professional artist. The existence of gisaengs is not irrelevant to the social background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refore, it is impossible to define the Joseon Dynasty with the holy morality of modern society. It is believed that 『catching green onions is expected to enhance the aspect of a gisaeng as a celebrity, based on the interpretation that it is viewed from the perspective of an entertainer possessing an extraordinary and noble spirit rather than portraying the gisaeng in an erotic standard.

본 연구는 조선시대에 여악(女樂)을 담당한 예능인이었으나, 사대부(士大夫)의 '성(性)적 상대'로 인식되었던 기생(妓生)의 존재 양상과 그들의 존재가 가능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의 사회적 특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에 연구는 사대부와 기생의 관계를 다각적인 측면에서 드러내고자 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으며, 기생의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는 데에 연구의 필요성이 있다. 유교사회에서 여성들이 주축이 된 내연과 친잠례 등에 남자 악공들이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악은 조선조 말까지 존속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악은 전문예인이었다는 존재성을 드러내기에 충분하였다. 기생의 존재 양상은 조선시대 사회적 배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따라서 현대사회의 성모랄로 조선시대를 규정지을 수 없다. 『녹파잡기』는 기생을 색정적인 기준에서 묘사하기보다는 비범하고 고결한 정신을 소유한 예능인의 시각에서 보고 있다는 해석에 힘입어, 예인으로서의 기생의 면모를 한층 드높일 것으로 사료된다.

Keywords

Ⅰ. 들어가는말

본 연구는 조선시대에 여악(女樂)을 담당한 예능인이었으나, 사대부(士大夫)의 ‘성(性)적 상대’로 인식되었던 기생(妓生)의 존재 양상과 그들의 존재가 가능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의 사회적 특성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위해 우선 여악을 담당했던 기생의 존재 양상을 살펴보고, 또 사대부와 기생의 다양한 일화들을 통해 기생과 사대부의 관계 유형을 알아볼 것이다. 이어서 양반 사대부와 천민 기생이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사회적 특성을 살펴볼 것이다. 조선시대 기생은 사회적 신분으로는 천민계급이었으나, 나라의 중요한 행사에서 여악을 담당하며 예악을 강조하는 성리학의 나라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여악은 나라의 크고 작은 행사에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기능을 했으며, 특히 제례(祭禮) 및 조의(朝儀)와 더불어 국가의 중요한 행사였던 연향(宴饗)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사회적 신분은 비록 천민이었으나 현실에서는 국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또 한편, 그들은 양반사대부들과 풍류를 즐기며 다양한 남녀관계의 양태를 자아냈는데, 관련 일화들을 보면, 기생과 사대부와의 관계에서 기생의 존재를 사대부의 ‘성(性)적 상대’로만 일관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전 연구를 통해 이러한 점이 거론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기생과 사대부의 관계에서 ‘성적 상대’로서 회자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금까지 기생에 관한 연구는, 기생의 섹슈얼리티에 초점을 맞추어 사대부의 성(性)적 대상으로 회자되었고[1], 예능인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한 연구도 있으며[2], 기생과 관련된 소설·기녀담·​​​​​​​시조·​​​​​​​서사시[3] 등도 연구되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조선시대 기생은 전문적인 기예(技藝)를 갖춘 예능인이었으며 사대부와 풍류를 즐기며 한 시대를 풍미한 자유로운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의료인·여류작가·여형사·산파 등의 수많은 역할을 해낸 특수한 계층이었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본 연구는 여악과 사대부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 기생으로 연구 범위를 제한하여, 그들의 관계에서 기생이 ‘성적 상대’ 외에 사대부와 어떤 관계 속에 있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또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사회적 특성을 짚어볼 것이다. 본 연구는 사대부와 기생의 관계를 다각적인 측면에서 드러내고자 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으며, 기생의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는 데에 연구의 필요성이 있다.

Ⅱ. 여악(女樂)

조선시대 지배계층은 교화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성리학(性理學)의 이념 아래서 예(禮)와 악(樂)을 강조했다. 예악에 의한 교화정치의 일환이었던 궁중 연향은 국가의 중요한 행사였는데, 기생은 바로 이연향에서 여악을 담당하며 국가의 중요한 일원으로 그 역할을 했다. 연향에는 주로 장악원(掌樂院)여기(女妓)인 경기(京 妓)가 주축이 되었으나, 인원이 부족할 때에는 지방에서 가무(歌舞)에 능한 자를 선상(選上)하기도 하고, 약방기생(醫女)과 상방기생(針線婢), 심지어 무녀(巫女)까지 동원되었다. 경기는 장악원에 소속되어 악공과 마찬가지로 태평관 근처의 동리(洞里)에 거주하면서, 악적(樂 籍)[4]에 이름이 오르는 15세부터 악·가·무(樂·歌·舞)와 서화(書畵)등을 배워 전문 예능인으로서의 기량을 갖추어야 했다. 그래서 기적(妓籍)에 올라 있는 경기라 할지라도, 기예(技藝)를 시험하여 너무 못하는 자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본역을 하도록 했으며,[5] 반찬 만드는 일을 시켜[6] 경종을 울렸을 정도로 그 전문성이 요구되었다. 또한, 2품 이상 관원의 첩이 되어 자식을 낳으면 천민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연향에서 악·가·무를 하는 기역(妓役)에서 완전히 면제받지는 못했다 [2]. 이러한 사실에서 여악을 담당했던 그들의 전문성은 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악을 담당했던 기생들은 연향에서 보여줄 악·가·무 연습[7]에 게을리할 수 없었으며, 게으르면 매 맞기도 하고[3], 기생이 연습에 빠지면 기부(妓夫)까지 처벌을 받을 정도였다[8]. 이들은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매일 교습하지 않고 한 달에 6차례, 즉 초 2일, 6일, 12일, 16일, 22일, 26일을 출근하여 연습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二六會라고 했다. 이처럼 악·가·무의 전문성이 요구되었다는 것은, 기량을 쉽게 익힐 수 없었다는 점과 국가행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도 여악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조정에서 자주 거론되었으며, 이에 대한 찬반양론이 대립하며 여악의 존재가치는 자주 엇갈리는 처지에 놓였었다. 폐지론자들과 폐지반대론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여악 폐지론자들은 첫째, 예악은 정치의 대본이기 때문에 정대한 아악(雅樂)이외의 음악은 불가하다.

둘째, 중국 사신들이 여악제도를 비례(非禮)로 보았다.

셋째, 지방 관리들이 부녀의 실절자와 관기로서 거객자를 다스리는데 바빠서 정사를 돌볼 틈이 없다.

넷째, 여기로 말미암아 사람 간에 추잡한 반목이 심하다.

다섯째, 관기가 성함에 따라 유흥의 폐해가 적지 않다. 이에 대한 여악 폐지반대론자들은 첫째, 여악은 삼국시대로부터 있었고 선왕대에도 사용하였다.

둘째, 북방 변진에 주둔하는 군사들을 위안하기 위하여 여악이 필요하다.

셋째, 조정에 몸을 바치고 일을 하는 연소한 선비들이 관기가 없으면 사가의 부녀자를 탈취하는 일이 생길 때 장래 유의한 인재가 법에 걸리는 것이 애석하다.

넷째, 사신행차 때 관기가 없으면 그들을 위안할 수 없다.

다섯째, ‘관기를 갑작스럽게 폐지하고 악공으로 대치하면 음률이 잘 맞지 않는다.’[9]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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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무신진찬도(戊申進饌圖屛)부분

이처럼 여악 폐지론이 조정에서 자주 거론되고, 여악으로 인한 폐단이 강조되었음에도 여악은 조선말까지 존재했다. 여악 폐지론의 강경한 목소리에도 여악이 조선말까지 존재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의 주장이 있다. 장사훈은 ‘내외법(內外法)’으로 보고 있고, 김동욱은 관원의 완롱(玩弄)대상으로 여기를 바라보았다. 김종수는 김동욱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여악이 필수 불가 결했던 곳은 내연(內宴)과 중궁 하례 및 친잠례(親蠶禮)였으니, 내외가 엄격한 유교(儒敎)사회에서 남자 악공들이 여성이 주축이 되는 의례에 들어가 연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악이 조선조말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2]라고 주장했다. 세종 때, 변방 군사를 위한 방직기(房直 妓)의 필요성도 기녀제도를 설치하게 된 목적 중 하나였으나, 여악을 담당한 기생들이 가장 필요했던 것은 궁중 연향이라고 할 수 있다. 무신진찬도병(戊申進饌圖 屛)[10]의 부분도 과만옹 이후연(晩翁 李厚淵)의 「선루별곡(仙樓別曲)」[10]은 전문 예능인으 로써 기생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Ⅲ. 기생(妓生)과 사대부(士大夫)의 관계 유형

기생의 존재가치가 여악과 상반되게 나타나게 된 것은 바로 사대부와의 관계 때문이다. 양반계급인 사대부와 천민계급인 기생의 관계는 남녀유별을 강조한 조선 사회에서 매우 특별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였던 이들의 관계 양상을 사회적 배경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는 뺷주역(周易)뺸의 원리를 따르고 있는 성리학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가부장제 사회이면서 신분제 사회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뺷주역뺸의 가르침에 따라, 태어나면서부터 양반은 좋은 기(氣), 천민은 좋지 않은 기(氣)를 품수 받는다고 생각했다. ‘지배층 남성들은 자신들의 성적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에 일반 여성들의 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관기제도를 시행하여 기녀를 통한 밀매음의 형태를 정당화하였듯이’[9]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들은 양반 부녀자의 성(性)과 기생의 성(性)을 따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사대부들의 의식은 천한 신분인 기생과 그들의 관계를 피지배자와 지배자의 관계로 일축할 수 있었던 성리학의 이념 위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다. 앞의 여악 폐지론의 내용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조선의 관료들은 대의명분을 앞세워 여악의 필요성을 피력하고 있으면서도 그 이면에는 남성들을 위한 성적 도구로써, 기생의 필요성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처럼 기생은 성리학적 관념과 더불어 남성적인 지배 이념의 재물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기생은 그들의 미천한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고 비싼 비단옷과 장신구로 치장을 했다. 기생들이 화려하게 자신을 치장하고 꾸민 것은, 아름다워 보이고 싶은 여성의 심리를 표출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양반 사대부들의 환심을 사서 그들의 첩이 되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11].

기생이 2품 이상 관료의 첩이 되어 아들을 낳을 경우, 내연의 역할을 제외한 기역(妓役)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왕의 총애를 받아 신분상승을 하기도 했으니, 그들이 아름답게 보이고자 했던 욕구는 그만큼 더 컸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과 달리 소설과 서사시에서 절개를 끝까지 지켜기생의 신분에서 벗어나는 내용이 전하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춘향이가 있고 뺷기생 명선자 술가뺸의 주인공 해주 기생 명선이 있다. 명선은 16세 되던 해에 사또의 계씨(季氏)김진사의 아들을 낳아 그의 첩이 되면서, ‘기생이었지만 절개로서 사랑을 굳게 지켰고 끝내 행복을 쟁취한 여성’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데[12], 이를 통해 기생들이 양반관료의 첩이 되어 면천하는 것이 그들의 가장 큰 바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기생들은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대부와의 관계를 지속시키기도 했으나, 순수한 사랑을 꿈꾸기도 했고, 사랑을 완성하기도 했다.

사대부와 기생의 다양한 관계 양상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단순한 애정행각의 관계에서부터 기생을 사이에 두고 사대부들이 다툼을 벌이는 삼각관계. 또 사랑을 모르는 어린 기생과 기생을 진심으로 사랑한 늙은 병사의 일화가 있으며, 어린 나이에 만난 양반가의 남자를 잊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와는 반대로 사랑을 무기로 남자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경도 있었는데, 연산군 시절 장녹수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양반가의 남자가 과거급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결국 성공하게 한 경우처럼 남자를 출세시키기도 하는 등 다양한 사례들이 있다. 또 사회적 신분 관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천민 신분의 기생이 남편을 직접 고르기도[13]하는 일화들이 전한다. 이러한 관계 유형들은 사대부와 기생의 관계는 신분 관계에 구속되기도 했지만, 신분 관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남녀의 사랑을 완성하기도 했음을 확인시켜 준다[14].

이 중에서 자신의 사랑을 주체적으로 갈망한 기생 가련(可憐)의 일화와 몰락한 양반 남성의 뒷바라지를 통해 신분 상승을 하게 된 일타홍, 수청기의 역할을 하지 않기 위해 죽음으로 맞섰던 기생, 그리고 사대부들이 기생을 사유물로 취급했던 사례들을 살펴보면서 기생의 존재의식을 살펴보자.

함흥기생 가련은, 출중한 미모에 「출사표(出師表)」를 외우고 바둑과 쌍륙(雙陸)도 잘 두었으며, 거문고와 검무(劍舞)에 능하고 소리 또한 절묘했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재능을 갖춘 그녀가 한 남자를 만났는데, 가련은 그에게 마음이 흔들린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을 알아차리고 그를 맞이했다. 그와 시를 지어 서로 화답하고, 거문고와 노래로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고 검무를 추고 바둑을 두며 유흥을 즐기면서 가련은 그가 자신과 어울리는 짝이라고 생각한다. 밤이 되어 그와 함께 잠자리에 누운 가련은 그가 고자라는 것을 알게 되자 천고에 가인(佳人)을 만나지 못함을 통곡한다[7].

이 일화를 통해 기생 스스로 로맨스를 꿈꾸며, 자신의 마음을 움직인 남자를 선택하고 사랑을 완성하고자 간절히 바랐던 기생 가련의 주체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어서 양반 남성을 뒷바라지하여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룬 일타홍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일송(一松)심희수(沈喜壽)는 어려서 가난한 과부의 아들로, 기생 잔치에 불청객으로 참석하는 탕아였다. 재색이 빼어난 금산기(錦山妓)일타홍(一朶紅)이 심희수의 노모에게 심희수가 귀인의상을 지니고 있으니 뒷바라지를 하겠다고 하여 승낙을 받았다. 일타홍이 수년 간 온갖 시중을 들며 심희수가 공부에 열중하도록 하였으며 혼기가 차자 정실을 맞이하게 하였다. 심희수가 공부에 싫증을 내자 일타홍은 심희수가 급제한 후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출한 후 노재상댁의 양녀로 몸을 의탁하였다. 심희수가 학업에 전념하여 삼사 년만에 사마시에 급제한 수, 삼일유가(三日遊街)때 선친의 친구였던 노재상댁을 방문하였다가 일타홍과 상봉하였다. 일타홍이 부모 보기를 소원하니 심희수가 금산수(錦山守)를 자청하여 일타홍을 데리고 부임하였다. 일타홍이 본가에서 부모 친지를 모아 잔치를 성대히 베푼 다음, 사도의 안식구가 사가(私家)와 자주 왕래하다가 관가에 누를 끼칠 것을 염려하여 이후로는 발을 끊었다. 일타홍이 자기의 죽음을 미리 알리고 죽은 후 심희수의 선영에 묻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심희수가 관을 이끌고 선영으로 가다가 금강에서 비를 만나 시를 지었는데, <기아()>에 실려 있다[11].

다음은 죽음으로써 외국 사신의 수청을 거절한 기생에 관한 기록이다. ‘인조15년 11월 8일 청사신과 정명수가 연로의 각 고을에서 방기(房妓)바치기를 요구하자 여기들이 죽음으로 항거했으며, 그들의 뜻을 꺾을 수 없었는지 그 의견에 따랐다’ 는 기록이 뺷인조실록뺸에 전한다. 그 후 방기제도는 청나라가 무력으로 조선을 침공한 인조 14년(1636)이후에 여기들의 목숨을 건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사신의 강제적인 요구로 어쩔 수 없이 만들어졌다가[2] 인조 21년(1643)에 “이제 두 나라가 한집안이 되었으니 조선은 곧 우리의 백성이다.”라며, 일곱 역참의 연향 및 세폐를 줄이는 것과 함께 방기를 혁파하도록 했다고 전한다[2].

이와 같은 기록은 정절 의식이 강했던 몇몇 기생들의 일화로, 기생 전반으로 확대해 논의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기생의 내면에 근대적 주체의식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음은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은 사대부들의 욕정의 대상으로 취급받았던 기생의 예이다. 이능화가 뺷조선해어화 사뺸에서 ‘기생이 재예(才藝)가 이루어지면 토호(土豪)가 가려서 차지하고 조관(朝官)이 첩으로 삼았으니, 이 일이 법금(法禁)에 속하여 때때로 문제가 되었지만, 그 풍속이 변하지 아니하여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이다.’라고 한탄하고 있듯이, 기생을 한갓 사유물로 취급했던 일화들은 비일비재하다[13].

한 가지 예를 보자.

최한량(崔漢良)이 … 상방(上房)에 들면 마음속에서 묵념하기를 ‘오늘 밤엔 어떤 사람이 잠자리를 함께 해줄 건가?’하고, 기생이 다과를 담은 쟁반을 받들고 들어오면 또 생각하기를 ‘바로 이 사람이 아닐까?’ 반신반의하노라면 주관이 찾아와서 인사를 나누고 동헌에 술자리가 벌어진다. 내가 일어나 술을 돌리고자 하면 기생이 술잔을 받들고 들어오는데, 그 용모가 추악하여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분통이 터져 가슴이 답답하고 무료하며, 고을의 산천이 모두 무색하게 보이고 좌우의 사람들을 몽둥이질하여 내쫓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사람이 애교가 있고 아름다워서 마음에 들면, 주관의 거동이 모두 명관이 하는 것처럼 보이고 지붕 위의 까마귀마저도 예뻐 보인다. 며칠 묵노라면 낮에는 술에 취하고 밤에는 잠자리의 재미에 취하여 심신이 황홀해진다.[13]

위의 사례는 기생을 ‘성적 상대’로만 여겼던 그 당시 사대부의 내적 심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기생이 천민이었으면서도 화려하고 자유로운 인생을 살았던 모습은 풍속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러한 일례들이 몇몇 기생의 경우에 한정된 특수한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역사를 서술하는 데에 참고자료로서 회화가 가진 의의는 문헌 기록에 필적함은 물론이고 어떤 면에서는 문헌 기록보다 훨씬 뛰어날 경우도 있다.’는 푹스의 주장에 동의하며, 혜원 신윤복(申潤福, 18세기)의 풍속도 중, 을 통해 자유로웠던 기생의 일면을 들여다보도록 하겠다.

그림 2. 신윤복, <연소답청 年少踏靑>

그림 속의 기생은 자태를 한껏 뽐내며 말을 타고 가고 있는데, 옷차림으로 보아 양반 신분이 틀림없는 남성들은 기생들의 시중을 드는 듯 말을 몰며 가고 있다. 담배 붙여 대령하고 있는 모습, 마부로 자청하여 갓은 벗어버리고 마부의 벙거지를 쓰고 말고삐를 붙잡고 있는 모습은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 기생의 신분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다. 비록 이것이 특수한 경우에 한정된 경우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상황이 용인될 수 있었던 단면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위의 여러 가지 사례들을 통해, 일면 성적 도구였으며, 일면 정절을 지키고자 목숨까지 내놓았으며, 남성을 출세의 길로 인도하고, 양반들과 자유로운 풍류를 즐겼던 기생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이로 인해 제도와 신분적 한계로만 설명될 수 없는 특수한 계층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유로운 주체적 의식이 드러나는 일례들을 열거하더라도 미천했던 기생의 신분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Ⅳ. 의녀제도의 기생(妓生)역할

의녀제도는 조선시대 남녀유별을 강조했던 유교사상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15].

의녀제도는 태종 6년 허도(許衜)가 아래와 같이 건의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생원(濟生院)에 명하여 동녀(童女)에게 의약(醫藥)을 가르치게 하였다. 검교 한성윤(檢校漢城尹)지제생원사(知濟生院事)허도(許衜)가 상언(上言)하였다.

“그윽이 생각건대, 부인이 병이 있는데 남자 의원으로 하여금 진맥(診脈)하여 치료하게 하면, 혹 부끄러움을 머금고 나와서 그 병을 보이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여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원하건대, 창고(倉庫)나 궁사(宮司)의 동녀(童女)수 10명을 골라서, 맥경(脈經)과 침구(針灸)의 법(法)을 가르쳐서, 이들로 하여금 치료하게 하면, 거의 전하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라 제생원으로 하여금 그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16]

의녀는 의학적 지식과 기술의 정밀성에 따라 수의녀어의녀-차비의녀-내의녀-혜민서 의녀 등으로 위계화되었다.[14] 이처럼 의녀들의 능력에 따라 차등을 두어 의녀의 역할이 강조되기는 했으나, 그들은 진맥행위와 침구행위를 주로 했다. 그러나 의녀들은 의원역할 외에 가무와 술을 따르는 등의 행위도 했으며, 연산군 시절에는 매일 연이은 주연에 의녀들이 동원기도 하였다 [14].

이러한 폐해는 계속되어, 의녀를 데리고 자다가 발각되는 사건[17]들이 생겼으며, 드디어 중종은 의녀를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할 것을 명하기에 이른다.

“금후로 대소 인원의 연회에, 의녀(醫女) 및 창기(娼妓)를 조치하는 자를 통금하고, 헌부(憲府)로 하여금 그 절목(節目)을 마련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는데, 헌부가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논단하고, 의녀·창기도 모두 중하게 논단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리하라.’ 하였다[18].

이처럼 의녀는 의원역할과 연희의 행위자, 관료들의 성적 도구로 존재했으며, 특이한 것은 부녀자들이 관련된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수사관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의녀가 형사 역할을 처음하게 된 것은 세종 31년 (1449)에 일어난 본처와 첩의 논쟁 사건이다. 세종은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병든 부녀를 불러올 수 없으니. 여자 의원 두세사람을 시켜 그 집에 가서 묻게 할 것이고, 또 양반 부녀의 말소리를 서리(書吏)로 하여금 듣게 할 수 없다.”[19]고 명하고 있다. 이 외에도 세조와 성종, 연산군 때에도 이러한 예들은 실록에 여러 차례 그 사례를 기록하고 있는데, 영조 14년(1738)에 일어난 ‘내의녀 취섬(翠蟾)의 사건’[14]을 계기로, 18세 기경부터 의녀가 해왔던 형사의 역할을 ‘다모’가 수행하기 시작했다[20]. 의녀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는데, 최고의 상은 의녀의 신분인 천인의 굴레를 면제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면천의상은 진맥이나 조산, 간호의 일을 했을 경우에는 주어지지 않고, 침술행위시에만 받을 수 있었다[14]. 기생(장악원 여기와 의녀, 지방기도 포함)들은 나라의 각종 연회에서 춤·노래·악기연주를 담당 해야 했고, 대궐안의 부녀자들을 위해 의녀 역할(약방 기생)과 왕과 왕비의 의복을 만들고 수선하는 일(상방 기생)까지 맡았으며, 때로는 수사관의 역할까지도 해내야 했다. 더구나 지방관아를 지키는 군졸들의 의식생활과 심지어는 성생활의 상대역할, 외국 사신들의 수청기(守廳妓), 지방관원에 소속된 관기(官妓)로서 관원의 수청기, 중앙관료의 지방행차시 관료들의 수청기 등, 외국 관료와 귀족관료들의 성(性)적 도구의 역할까지 기꺼이 감내해야 했다.

Ⅴ. 기생(妓生)존재 양상의 사회적 특성

에두아르트 푹스(Eduard Fuchs)는 ‘한 시대의 도덕 행위·도덕관·도덕률은 어느 시대에서든 그 시대 인간의 성행동의 존재방식을 좌우하는 근본이 되는데, 성행동은 그 시대의 발전상을 인식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것은 그 속에 그 시대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곧 시대·민족·계급의 본질이 그 속에 가장 잘 나타나는 것’[21]이라고 했다. 또한 ‘어느 한 시대의 모럴을 다른 시대에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21]고 밝히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주장은 조선시대 기생의 존재 양상에서 드러난 ‘성적 대상’에 대해 재해석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푹스에 따르면, 유럽 절대주의 시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군주는 신이었으며, 과학이나 예술도 국왕을 찬양해야만 했다. 군주는 세력을 과시하고 여성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화려하고 거대한 궁전을 지었다. 건축의 막대한 비용과 국왕 여인들의 사치에 지불되는 비용은 모두 국민들의 혈세(血稅)였다. 궁정 귀족들의 사치를 위해 국민들의 세(稅)부담은 늘어만 갔고, 국고가 바닥나기 시작하자 관직을 경매에 붙이기까지 했다. 절대주의시대 남성은 지배자였고, 여성은 피지배자였다. 남자들의 첩은 그와 관계를 맺는 것을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했고, ‘위대한 군주라면, 과인은 첩 따위는 싫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군주는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는 신에게만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첩은 상대인 군주의 영광을 얼마쯤 받게 되는 것 같다.[21]는 법률학자 토마시우스의 『궁정철학』의 글은 절대주의시대의 지배자와 피지배자로서 왕과 첩의 관계를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절대주의시대의 특징은 조선시대에도 나타난다. 조선시대는 농업경제를 바탕으로 한 엄격한 신분제 사 회였으며, 일부일처(一夫一妻)제의 가부장적(家父長的)사회였다. 조선시대 가부장적 성문화의 근간이 되는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은 뺷주역뺸에 의해 정당화된다. 뺷주 역뺸에서는 양(陽)과 음(陰)이 하늘(乾)과 땅(坤)을 의미할 뿐 아니라, ‘건(乾)’은 남성적인 원리로서 존(尊)·귀(貴)·강(剛)·동(動)·대태(大胎)등을 의미하고 ‘곤(坤)’은 여성적인 원리로 비(卑)·천(賤)·유(柔)·정(靜)·성물(成物)등을 의미한다.[23] 조선시대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남성은 귀하고 여성은 천한 존재로 인식했다. 따라서 남성의 혈통과 가문이 중시되면서 여성은 열녀를 칭송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여성들은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불문율로 여기며 남편을 위해 수절하고 심지어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기도 했다. 현대 사회에서 일부일처제는 남녀 모두에게 부여된 도덕률이지만, 조선시대는 여성에게만 강력하게 요구되는 제도였다. 남성들은 여성들에게는 칠거지악과 정절을 지키며, 일부종사(一夫從事)를 강조했으면서도 자신들은 첩을 여럿 거느리며 기생들과 성유희를 일삼았다. 남녀의 내외(內外)를 강조하고, 군자(君子)의 예(禮)를 강조하면서 기생을 첩으로 삼는 일과 기생과 관료의 부적절한 관계가 금지되고, 발각될 경우 처벌을 받는다는 규정이 법제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생과 사대부와의 스캔들은 여전히 계속되어 법적인 기능을 무색하게 했다. 조선시대 남성은 여성을 양반 부녀자와 기생을 이중적인 성(性)으로 구분하여 인식했기 때문에 양반 부녀자가 정절을 지키며 수절한 경우에는 ‘열녀문(烈女 門)’을 세워가며 칭송했으나, 기생의 수절을 ‘우스운 일’[22] 또는 ‘가당치 않은 일’[23]이라고 일축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사유방식은 성리학적 사유 속에 자리 잡은 정(貞)/음(淫), 덕(德)/색(色)의 이분법적 지표가 신분적 위계와 결합되어 정숙한 사대부 여성, 음란한 기생과 같은 신분에 따른 섹슈얼리티의 배치를 낳게 되었다[23]. 조선시대가 ‘기녀를 천기로 보려는 기존 사회의 제도와 관념은 본래 양반 중심의 사회 질서의 소산이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양반의식의 소산’[4]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창녀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동일하게 조선시대 기생을 바라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서양사를 보더라도 어느 시대에는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조금이라도 드러내면 부도덕한 여자가 되지만, 어느 시대에는 자신의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 도덕이 되어, 옷의 가슴부분을 오려 가슴을 드러내는 것이 미덕이 되기도 했다. 즉 ‘그 어떤 것이 어떤 계급에서는 부패한 도덕의 산물인 무질서한 성관계의 결정적인 수단이 되지만 반면에 다른 계급에서는 향상된 도덕의 성숙의 산물인 풍요로운 성관계의 결정적인 수단이 된다는 증거’[21]이다. 이처럼 어느 한 시대의 성모랄은 다른 시대의 그것과 같지 않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성모랄’은 오늘날과 같지 않다. 현재를 기준으로 해서 사대부의 부도덕성을 논하고, ‘성적 도구’로서의 기생의 삶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생의 ‘성적 상대’라는 타이틀은 절대주의 시대의 지배자(양반사대부)와 피지배자(기생)와의 관계를 오늘날의 성모랄로 확대해석한 결과의 소산이라고 생각한다.

Ⅵ. 맺음말

조선시대 기생은 예악에 의한 교화정치의 일환이었던 궁중 연향에서 여악을 담당한 예능인이었다. 여악의 폐단으로 인해 조정에서는 ‘여악폐지론’이 거론되었으나, 내외가 엄격했던 유교사회에서 여성들이 주축이 된 내연과 친잠례 등에 남자악공들이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악은 조선조말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악은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없는 전문성이 요구 되었다는 점은 그들이 전문예인이었다는 존재성을 드러내기에 충분할 것이다. 또한 표면적 도덕윤리와 지배력의 행사는 서로 이율배반적인 현상을 자아내듯이, 제도 속에서는 양반 사대부가 기생을 첩으로 삼을 수 없었으나, 현실에서는 기생을 축첩하고 성적 상대로 여겼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상황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 가부장적 성문화의 근간이 되었던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이 뺷주역뺸적 사고에 의해 정당화되었기 때문이다. 뺷주역뺸에서는 양(陽)과 음(陰)이 하늘(乾)과 땅(坤)을 의미함으로써, 남성은 귀하고 여성은 천한 존재로 인식했으니. 하물며 천한 신분의 기생은 여성의 성을 양반 사대부와 기생으로 구분하여 정숙한 양반 부녀자와 음란한 기생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인식은 양반 중심사회의 소산이며, 이는 절대주의 시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음을 앞에서 확인했다. 기생의 존재 양상은 조선시대 사회적 배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따라서 현대사회의 성모랄로 조선시대를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얼마 전 안대회 교수가 발굴한 서적으로 평양의 기방문화와 더불어 당시 공연예술과 관련된 내용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고 전한 뺷녹파잡기뺸는 기생을 색정적인 기준에서 묘사하기보다는 비범하고 고결한 정신을 소유한 예능인의 시각에서 보고 있다는 해석에 힘입어, 예인으로서의 기생의 면모를 한층 드높일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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