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축조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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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묘의 입지특성과 축조방식에 대한 지형학적 고찰 - 효산리·대신리를 중심으로 - (A Geomorphological Study on the Locational Characteristics and Construction Method of Dolmens in Hyosanri·Daesinri)

  • 박철웅;김인철
    • 한국지형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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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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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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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그동안 고고학이나 역사학의 관점으로만 바라보았던 지석묘(支石墓)의 입지와 축조방식에 대한 문제를 지형학적 관점으로 고찰하여 지석묘가 입지하게 된 이유 및 특성과 지석묘를 축조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 일대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지석묘군(群)을 연구대상으로 선정하였다. 효산리 대신리는 지석묘 상석의 장축방향 및 주변의 자연 암괴와 암편 들의 장축방향이 사면의 방향과 일치하고, tor나 block stream 등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토양의 성분은 silt >sand >clay의 순으로 분포하며 silt질이 높은 토양과 angular, sub-angular 수준의 원마도 및 illite를 중심으로 하는 1차 점토광물의 높은 피크와 빈도를 보인다. 사면의 상부에는 단애가 위치하고 사면의 중 하부에 지석묘가 분포하는 바, 상석 및 주변 암석과 토양시료의 규반비, 규철반비, CIA등의 풍화지수를 구하여 살펴본 결과 한랭습윤한 환경에서 동결융해의 반복으로 기계적 풍화가 우세하였으며 화학적 풍화가 진전되지 못한 환경이었음을 파악하였다. 지석묘 축조에 사용된 암석은 solifluction과 같은 mass movement에 의해 사면의 아래로 이동하여 제 위치에 놓여 진 것을 청동기인들이 이용한 것으로 보이며, 지석묘를 축조하는 과정도 사면의 상부에 놓여 진 암괴를 이동하지 않고 암괴의 하부를 파내고 굄돌을 돌려가며 먼저 받친 후, 남은 흙을 파내어 유구를 넣고 막음돌로 막은 후 흙으로 덮은 것으로 추정하였다.

첨성대축조 규준방식과 드잡이기술에 대한 기술사적 접근 연구 (The Study on the Construction Criteria and Dujabee Technique of the Construction of the Cheomseongdae)

  • 김덕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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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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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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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고건축 기술사적 관점에서 첨성대 축조당시 가설공법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독특한 구조와 형태로 이루어진 첨성대는 그동안 많은 관심을 끌며 연구되어왔으나 고건축 기술사적 측면에서 접근한 사례를 보기 어렵다. 더욱이 첨성대 축조기술에 관한 연구는 고건축 기술사적 고찰기반이 취약한 추론으로 전개되어 있으므로 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여러 가지 의문점 가운데 가설공법에 대한 논의는 고건축시공 규준방식과 드잡이에 관한 기술사적(技術史的) 고찰을 결여한 추론으로 전개되어 있으므로 신빙성 있는 역사적 사실규명으로 보기 어렵게 한다. 연구결과 첨성대축조 가설공법에 대한 규명은 실제유구가 남아있지 않아 직접 고찰에 한계가 있었으나, 그간의 오류 폭을 좁히고 기초자료 제공에 의한 기술사(技術史) 연구 활성화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주요 연구결과는 세 가지로 정리되었다. 1. 원통형 구조로 이루어진 첨성대축조 규준방식은 또한 +자먹 규구법과 다림추를 이용한 준승방식에 기초한 중심축 규준을 적용하였음으로 고찰되었다. 2. 첨성대 축석공사는 규구준승에 기초한 규준방식과 부합하는 드잡이공사 방법으로 녹로사용 가능성이 고찰 검토되었다. 3. 첨성대축조 규준과 드잡이기술에 대한 고찰 결과 규구준승에 의한 규준방식과 녹로(??)를 이용한 드잡이공사는 축석공사에 별도로 운반을 위한 비계가설을 요하지 않는 고건축 시공기술로 고찰되었다.

경복궁 건물 유형에 따른 적심 연구 (The Study on Foundation Remains(Jeoksim) According to Types of Buildings of Gyeongbok Palace)

  • 최인화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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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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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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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현재 경복궁에 대한 연구는 건축사 문헌사 미술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와 같은 연구는 현전(現傳)하는 건물과 기록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음으로 궁궐 전체를 연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양호한 상태로 잔존해 있는 경복궁 건물지 유구, 특히'적심(積心)'은 이러한 연구의 공백을 채워줄 수 있는 중요한 고고(考古)학 자료라 할 수 있겠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경복궁의 '적심'에 대하여 분석하여, 형태 규모 재료 축조방식에 따라 그 형식을 분류하고, 이것이 건물 기초로써 상부 건물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궁궐 건물 유형별 사용된 적심을 검토하고, 시기별 변천양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경복궁 건물지 적심은 총 21가지 형식으로 구분되는데, 각 건물 유형에 따라 건물의 기초 즉 적심도 달리 축조되며, 시기별로도 적심의 축조방식 및 재료 등이 변화하여, 특정 시기에 유행하는 적심의 형식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복궁 적심은 평면 형태에 따라 원형(I), 말각방형(II), 세장방형(III), 방형(IV), 통적심(V)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다시 축조방식과 사용된 재료에 따라 21가지 형식으로 세분된다. 특히 조선전기 14~16세기에는 원형 잡석 적심(I-1), 말각방형 장대석(II-1), 말각방형 잡석+와전(II-2a) 세 가지 형식의 적심만 축조되다가, 조선후기 19세기에 들어 21가지 분류한 모든 적심이 다양하게 축조된다. 19세기 고종연간 내에서도 연대별로 각기 다른 형식의 적심을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재료에서 두드러진 차이점이 확인된다. 경복궁을 재건한 고종 2년(1865)~고종 5년(1868)에 축조된 적심 10가지 형식 중 무려 7가지가 와전편을 섞어 넣은 형식인 반면, 고종 10년(1873)과 고종 13년(1876) 혹은 고종 25년(1888)에는 축조된 5가지 형식 중 3가지가 강회를 섞어 넣은 사질토를 사용한 형식으로 대조를 이룬다. 궁궐 건물은 '주인의 신분과 용도'에 따라 건물의 서열이 정해지고, 건물의 이름 뒤에 가장 중요하고 격이 높은 순서대로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누(樓), 정(亭) 등의 명칭이 붙어 그 유형이 구분되며, 그 격에 맞추어 건축물이 축조된다. 이 건물 유형별 사용된 적심을 검토한 결과, 건물의 유형(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누(樓), 정(亭))에 따라 그 기초, 즉 적심도 달리 축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 자료의 한계 상'전', '당', '각', '방'등 일부 건물 유형만 확인되었는데, '전'과 '각'의 경우 장대석으로 축조한 방형 적심(IV)이, '당'과 '방'의 경우 기와와 잡석을 사용하여 축조한 말각방형 적심(II)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기타 건물명을 알 수 없는 경우는 대부분 조선전기 선대(先代) 건물지의 적심임으로, 조선전기에 원형 잡석 적심(I-1)이 많이 축조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주인의 신분이 높고 격이 높은 건물일수록 건축물도 격이 높듯이, 그 기초부, 즉 적심 또한 가장 견고하고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당'과 '방'은 같은 말각방형 적심이 사용되었지만, '당'은 잡석과 와전편을 주재료로 사용한 II-2a(잡석+와전편 말각방형 적심)형식이, '방'은 II-2a형식의 상면에 15~20cm 가량 와전편을 깐 II-2b(와전편+(잡석+와전편 말각방형적심)) 형식이 많아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건물 유형별 적심은 시기별로 축조되는 형식에 변화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전'과 '각'의 경우 모두 14~15세기 조선전기에는 I-1형식(원형 잡석)의 적심을 축조하다가, 19세기 조선후기에는 다양한 형식의 적심이 축조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방형 적심(IV)이 많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의 경우 조선후기의 변천양상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고종 4년(1867) 축조된 적심은 잡석과 와전편을 섞어 넣은 형식의 적심이 많이 축조되고, 이후 고종 13년(1876) 혹은 고종 25년(1888)에는 다른 건물 유형에서 확인되지 않는 강회사질토 및 탄축 적심이라는 독자적인 형식이 사용되었다. 본 연구를 통해 조선전기에 비해 후기에 적심의 다양한 축조방식과 재료가 개발되었음을 알 수 있었으며, 이는 당시 궁궐건물 기초 축조 기술 수준의 변화가 있었음을 대변해 준다. 또한 건물 유형별로 사용되는 적심의 형식이 다른 것이 확인되어, 건물의 기초를 축조할 때 미리 계산된 건축 공법을 적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삼국시대 봉토분의 호석에 대하여 - 성주 성산동고분군의 신자료를 중심으로- (A Study on the Stone Circles of the Mound Tombs Dated the Three Kingdoms Period -A New Discovery from Mound Tombs at Seongsan-dong, Seongju County-)

  • 김세기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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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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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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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영남지역의 삼국시대 고분은 대형 봉토분이 지역별로 군집을 이루고 분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봉토분들은 일반적으로 봉분 기저부에 원형 혹은 타원형의 호석을 설치하고 있다. 호석은 봉토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하여 분묘 둘레에 구축한 시설이면서 분묘의 범위를 나타내는 경계선이기도 하다. 이러한 호석 시설은 수혈식 석실의 봉토분 및 횡혈식 석실분은 물론이고 경주의 적석목곽분에도 설치되고 있어 삼국시대 봉토분의 일반적인 축조방식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봉토분의 호석들은 현재는 대부분 봉토 속에 묻혀 있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원래는 봉분의 밖에 노출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필자는 성주 성산동고분군의 삼국시대 봉토분 28기와 기존에 조사된 4기 등 32기의 기저부를 조사하면서 호석의 형태를 면밀히 관찰하게 되었다. 이번에 조사한 32기의 봉토분 중에서 호석을 가지고 있는 고분은 27기었으며, 호석이 없는 고분은 5기에 불과하였다. 즉, 성산동고분군의 봉토분들은 대부분 타원형 호석이 설치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성산동고분군의 호석들은 대개 원형 혹은 타원형의 봉분 외연 전체를 둘러 설치하였고, 축조방법은 자연석이나 할석으로 2단내지 3단을 옆으로 뉘어 바깥 면을 정연하게 쌓은 것이 가장 많고, 할석 1단을 옆으로 돌린 것도 있다. 호석의 높이는 1단 10cm로부터 4단 1m까지 있으나 2$\~$3단 30$\~$50cm가 일반적이다. 이와 같은 축조방법이나 축조양상으로 볼 때 삼국시대 봉토분의 호석은 대부분 봉분의 밖에 노출되어 축조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외곽 호석 관습이 통일신라 이후에 왕릉의 12지상 호석으로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호석이 있는 삼국시대 봉토분을 복원정비 할 때에는 호석을 봉분 밖으로 노출시켜 복원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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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대 복원을 위한 외형 연구 및 복원 모델 제시

  • 이민수;전준혁;김상혁;이용삼
    • 천문학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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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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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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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세종대 간의대(簡儀臺)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대규모로 수행된 천문 관련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축조된 조선시대의 국립천문대이다. 지금까지 세종대 간의대에 대한 선행 연구는 주로 궁내 위치 및 변화, 개보수 상황 및 중수 여부, 규모와 관련한 주척(周尺) 또는 영조척(營造尺)에 대한 논의 등에 천착하고 있으나 간의대의 외형, 구조, 기능, 역할 등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이 중 간의대의 외형에 대한 선행 연구들에서는 원대(元代) 북경 사천대(北京 司天臺, 1279년 전후 축조) 또는 명대(明代) 북경 관성대(北京 觀星臺, 1442년 축조, 現 古觀象臺) 등을 간의대의 원형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 간의대 복원을 위하여 외형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1997년 소더비(Sotheby) 경매 출품본 "경복궁도(景福宮圖)"를 비롯한 각종 경복궁 궁궐도(宮闕圖)를 분석하였다. 또한 구조와 축조 방식의 규명을 위하여 제단(祭壇) 등의 각종 석축물(石築物)을 분석하였으며, 이와 함께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사료(史料)에 대한 조사를 병행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하여 원대 북경 사천대 또는 명대 북경 관성대와는 다른 세종대 간의대의 독자적인 모델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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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5대 궁궐 건물지 기초의 고고학적 연구 (An Archaeological Study on the Foundations of Five Palaces of the Joseon Period)

  • 최인화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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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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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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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조선시대에는 5개의 궁궐이 있었다. 태조 4년(1395) 경복궁이 창건되고, 그 후 역사적 상황에 따라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덕수궁), 경덕궁(경희궁)이 추가로 중건되었다. 궁궐은 당대 최고의 건축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궁궐은 수차례 중건과 소실을 반복하며 조선왕조 500여년 건축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조선시대 5개 궁궐의 발굴 현황을 검토하여 건물의 기초인 건물지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건물 기둥의 하중을 지탱하는 핵심 시설인 '적심(積心)'에 대한 분석을 통해 궁궐 건물지가 가지는 궁궐·시기별 특징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또한 적심의 편년을 통해 시기별 궁궐 건물 기초의 변화 양상을 확인하였다. 적심은 총 23개 형식이 확인되는데, 전반적으로 5개 궁궐 모두 I~V 형식의 일정한 적심 축조 방식을 가지고 있어 조선시대 궁궐 건물 기초 축조 방식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14~17세기에는 일정하게 통일된 재료와 축조 방식(원형 잡석 적심(I-1))이 주를 이루다가 18세기 정조대를 기점으로 다소 다양해지는 양상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19세기 고종대에는 다양한 재료와 축조 방식으로 22가지 형식의 건물지 적심이 축조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궁궐 건물지 연구는 발굴조사가 많이 이루어진 경복궁 건물지가 주가 되어, 임진왜란 후 중건이 중단된 17~18세기 건물지의 편년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연구를 통해 다른 궁궐의 건물지들을 함께 비교 검토함으로써 14세기 말~20세기 초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궁궐 건물 기초 축조 방식의 시대적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건축정보모델링 방식에 의한 숭례문 부재 개발과 3D 복원 (Development of Architectural Components for Soong-Rye Gate And 3D Restoration with Building Information Modeling)

  • 안은영
    • 한국멀티미디어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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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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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08-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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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최근에 문화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고건축에 대한 3차원 복원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새로운 IT기술과 장비를 활용하여 디지털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3D 스캐너를 이용한 3차원 복원방식은 외관에 관한 매우 정교한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지만 대용량의 데이터를 처리해야 하고 목가구에 대한 세부 정보의 부재로 인해 디지털 콘텐츠로 활용하는데 제약이 따른다. 우리나라의 전통 목조건축은 특성상 연결부재의 사용과 이들간의 결구방식이나 축조방법은 그 시대의 건축문화를 알아보는 중요한 자료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목가구 방식에 의한 설계 도구를 개발하여 3차원 디지털복원은 물론, 기존의 방법에서 간과되었던 결구방식이나 축조방법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한 눈에 보여줄 수 있는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3D 복원방법을 제안한다.

백제 한성기 토성의 축조기술 (Construction Techniques of Earthen Fortifications in the Hanseong Period of Baekje Kingdom)

  • 이혁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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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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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8-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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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이 글은 삼국시대 토성 가운데 가장 많은 조사가 이루어진 백제 한성기 토성을 대상으로 축조기술을 살펴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를 위해 토성의 축조공정을 '입지선정과 기저부 조성', '체성 축조', '공정의 마무리와 증축 및 보수'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백제 한성기 토성의 축조에는 다양한 기술이 동원되었음이 분명하게 확인된다. 지형조건에 따라 알맞은 기초보강기술이 적용되었으며, 본격적인 체성의 축조에도 여러 가지 기술을 활용하였다. 특히 체성축조 기술의 경우 성토기법과 판축기법으로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다. 성토기법(A식)은 20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인식된 기술로, 판축에 비해 고식적인 기술로 추정된다. 판축구조물을 사용하지 않은 기술로, 복잡한 토층선, 교호성토 방식, 토제 및 토괴 활용, 타원형 성토단위의 연접 등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성토기법은 삼국시대 성토구조물 사이의 적극적인 기술 공유와 응용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판축기법(B식)은 판축구조물을 이용하여 성벽을 구축하는 기술로, 판축구조물의 높이와 규모, 확장방식을 기준으로 B1식과 B2식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B1식이 선행하며, 한성기 말기에 B2식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판축기법은 서울 풍납토성을 시작으로 하여 남한지역 각지로 확산된 것으로 판단된다. 성토기법과 판축기법은 등장시점부터 공존하였으며, 점차 판축토성 위주로 변화하였다. 성토기법과 판축기법은 토층 양상이 판이하며 축조 순서 또한 정반대이다. 따라서 양자는 기술 계통이 서로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한성기부터 시작된 토성의 축조기술은 웅진·사비기에도 계승 및 발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는 다른 국가와의 활발한 상호작용이 있었을 것이다. 최근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토성 조사사례가 증가하는 추세이므로, 백제를 포함한 주변 국가와의 비교·분석이 입체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벽골제의 수공학적 능력 평가 (Evaluation of water engineering ability for the Byeokgolje)

  • 장명호;김민환
    • 한국수자원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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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수자원학회 2021년도 학술발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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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6-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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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벽골제는 전북 김제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고대 저수지이다. 벽골제는 고대 농경사회의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건설되었다. 약 2.5km의 제방이 현존하고 있다. 축조 시기는 삼국시대 서기 330년이다. 이후 통일신라 원성왕(AD.790)과 고려 현종 및 인종 때 보수되었으며 조선 태종(AD.1415)에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세종 2년(AD.1420)에 심한 폭우로 유실되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 1925년에 김제 간선수로로 개조함으로써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 벽골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고대 저수지로서 중요하다. 벽골제의 축조방식(부엽공법)과 측량기술은 일본 오사카부의 사야마이케(저수지)에 영향을 주었다. 사야마이케는 고대저수지로서 원형이 보존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 유적으로 등재하기 위한 준비가 충실하게 진행되어 왔다. 본 연구에서는 벽골제가 고대저수지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보존하기 위해 발굴되고 있다. 더불어 벽골제의 수공학적 능력 평가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벽골제 유역을 대상으로 현재 지형과 최근이 수문자료를 이용하여 평가하였다. 발굴된 벽골제를 기준으로 유역을 설정하였다. 벽골제 유역 특성을 토대로 강우 분석을 수행하여 홍수량과 벽골제를 기준으로 수면적과 용적을 산정하였다. 벽골제에는 5개 수문이 있으며 3개는 Sluice Gate 형식(장생거, 중심거, 경장거)이고 2개의 월류형 형식(수여거, 유통거)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근에 수여거는 발굴 중이며 유통거는 미발굴 상태이다. 발굴된 수문의 규모를 토대로 수문 개방 정도에 따라, 웨어의 첨단고에 따라, 제내지의 수위를 조합하여 시나리오를 구성하였다. 시나리오에 따라서 최고수위를 산정하여 벽골제의 능력을 평가하였다. 이를 근거로 벽골제의 붕괴 원인을 추정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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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서탑 축조의 구조 원리에 관한 기초 연구 6~7세기 전반 목탑과의 비교분석을 중심으로 (Basic Study on the Building Principles of Structure in Mireuksaji Stone Pagoda)

  • 조은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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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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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6-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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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미륵사는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 창건한 사찰로 이와 관련한 창건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제이(第二) 무왕조(武王條)에 언급되어 있다. 서원의 미륵사지서탑은 해체 전 6층까지의 일부가 남아있었으며 미륵사지 내의 유일한 현존 건축물로서 최근 사리장엄 발견으로 639년이라는 건립연대가 밝혀졌다. 또한 백제 사찰의 발굴조사 자료가 축적되고 동아시아의 학술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미륵사지서탑의 조영을 당시 불탑 건축의 발전 과정과 연관시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미륵사지서탑의 축조에 적용된 구조원리와 1층 평면의 형성을 중심으로 6~7세기 불탑 건축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대형의 불탑건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기초적 연구를 시도하였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륵사지서탑은 내부와 외부가 독립적인 개념으로 축조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고층 불탑건축에서 나타나는 구조원리의 표현으로 보여진다. 영녕사 목탑지에서 확인된 탑실심체와 같이 내부의 구조체를 형성하는 개념과 유사하게 내부 적심을 형성하고 외부 부재를 부가하는 방식으로 축조된 것이라 판단된다. 둘째, 미륵사지서탑에서는 상부의 적심부와 동시에 심주석이 동시에 존재하는 혼합 구조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의 영녕사 목탑과 같은 실심체의 구조보다 발전된 것으로 조팽성 불사의 심초석과 항토 실심체의 구조와 유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혼합 구조는 황룡사 목탑이나 일본의 목탑과 같이 내외진을 전부 목구조로 형성하고 심주가 독립적으로 지지되는 구조 방식보다 선행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미륵사지서탑의 경우 1층에 십자형의 공간이 형성된 것은 심주석에 위치한 사리 봉안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심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4방향의 구심적 공간이며 사리의 본질적 의미에 기인하여 백제 6~7세기의 횡혈식 석실분과 유사한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횡혈식 석실분의 축조기법은 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상징적 공간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인 동시에 석재를 사용하여 축조된 서탑에 있어서 재료적 동일성으로 인하여 수용이 더욱 용이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