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조선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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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곳체(C. Gottsche)의 조선 기행과 그 지리적 의미 (C. Gottsche's Journey through Korea in 1884 and Its Geographic Implications)

  • 손일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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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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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9-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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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독일인 지질학자 카를 곳체(C. Gottsche)는 1884년 당시 조선의 통리아문 협판이던 묄렌도르프의 초청을 받아 한반도 내륙을 조사하였다. 그는 138일에 걸쳐 2,550km의 거리를 주파했는데, 귀국 후 당시 답사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의 지리와 지질에 관한 3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들은 근대 지리학과 지질학을 정식으로 훈련을 받은 야외과학자가 한반도 전역을 실제로 답사하고 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지구과학 논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가 쓴 3편의 논문 중에서 특히 "조선의 지리(${\ddot{U}}ber$ Land und Leute in Korea)"(1886)는 조선의 지질과 광물에 주목한 다른 2편의 논문과는 달리, 야외과학자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이 논문이 지닌 사료적 가치도 높다. 이 논문은 아직 국내 학술논문에 소개된 바 없어 19세기 말 서구인들의 조선 인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료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지리학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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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상국립공원 뇌호내해의 역사기행

  • 이우세
    • 공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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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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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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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
  • 이 원고는 지난 8월초 일본국립공원과 일본국립공원협회등을 시찰한바있던 본회 이우세이사가 평소 보고싶었던 뇌호내해해상국립공원을 돌아보고 듣고느낀가운데 특히 12차례, 최고 5백명에 이르는 조선통신사의 왕래 모습을 그린 역사기행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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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반도팔경 선정과정을 통해 본 경관인식 (A study on the perception of landscape through the selection process of Bandopalgyong - eight beautiful scenary in Korea - within Japanese colonial period)

  • 김해경;안경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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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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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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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는 다양한 매체가 창간되었고, 발행 부수 확보를 위한 미디어 이벤트를 실시했다. 이중 "삼천리"는 1929년 창간호에서 문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을 통해서 '반도팔경'을 선정하는 미디어이벤트를 기획했다. 이에 반도팔경의 선정과정과 선정된 반도팔경에 대한 분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반도팔경의 선정은 당시의 지식인에 해당하는 문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이다. 팔경으로 선정 가능한 경승지에 대한 구체적인 조건은 명시하지 않았다. 젊은이 계몽, 민중 계몽, 아름다운 경승지 소개가 목적이며, 문인들의 반도팔경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었다. 둘째, 반도팔경에 선정된 경승지는 금강산(金剛山), 대동강(大洞江), 부여(扶餘), 경주(慶州), 명사십리(明沙十里), 해운대(海雲臺), 백두산(白頭山), 촉석루(矗石樓)이다. 선정된 팔경은 경승지의 규모나 영역에서 일관성이 없으며, 일부 문인은 선정되지 못한 경승지를 거론하면서 교통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셋째, 기행문으로 발표된 반도팔경 경승지인 백두산과 부여 낙화암에 대한 경관인식이다. 백두산 경관에 유구한 역사와 민족 정기를 대입시켰으며, 조선시대를 부정하면서 부여는 고도 백제로 빈 공간이라고 했다. 기행문은 실제 답사를 다녀온 후 작성된 것이 아니라 기존 발표한 내용을 재편집했다. 넷째, 김동환의 편집으로 1941년 기행문 형식의 "반도산하"가 발간되었다. '사적'과 '경승'으로 구분하여 팔경을 선정하였으며, 보존해야 할 경관과 향유하는 경관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본 연구는 1929년 선정된 반도팔경의 분석을 통해서 일제강점기 지식인인 문인의 경관 인식을 도출했다. 이는 미디어 이벤트를 통한 새로운 선정 방식과 기행문을 통한 경관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실증적 연구로써 의의가 있다.

식물원에 대한 개항기 한국 지식인의 인식 고찰 (A Study on the Perception of Korean Intellectuals on Botanical Gardens during the Open Port Period)

  • 김정화;조경진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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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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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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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창경궁 내 식물원이 조성되기 이전에 나타난 한국 근대 식물원의 효시를 찾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1876년부터 1910년의 개항기에 일본, 러시아, 영국에 파견된 사절단이나 윤치호 및 유길준과 같은 해외 유학생이 작성한 기행문 형식의 글을 실마리 삼아 당시 한국 지식인들이 식물원을 이해하고 전유하는 양상을 읽어내려 하였다. 연구 결과, 식물원에 관한 내용은 18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기행문에 등장하지 않았다. 여러 식물원을 안내하려고 했던 일본 측의 계획과 달리 일본에 파견된 조선 사절단들은 식물원을 방문하지 않고 관련 기록도 남기지 않는 등 식물원에 대한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반면, 1890년대 이후 러시아, 유럽, 미국 등지에 파견된 사절단이나 유학생들은 식물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식물원을 문명국인 서구의 대표적 문물이자 필수품으로 판단하고 학문 발전과 계몽의 도구로서 국내에 도입하고자 노력하였다. 비록 개항기 한국 지식인들의 식물원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및 주장이 실제 식물원 조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으나, 이들의 기록과 견해는 문명의 표상으로서 식물원의 이미지를 공고히 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본 연구는 한국 근대 식물원 개념의 태동을 구체화하고 1909년 창경궁 내 식물원의 설립을 이해하는 데 밑거름을 제공하는 기초연구로서 의의를 갖는다.

시(詩)의 변주, 시의도(詩意圖)와 서발(序跋) -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 <음중팔선도(飮中八仙圖)>, <음중팔선도서(飮中八仙圖序)> - (Variations of the poem Song of Eight Drunken Celestials by Du Fu - Paintings Expressing the Poetic Ideas and the Preface and Postscript to the painting)

  • 강경희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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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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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9-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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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와 이를 화제(畵題)로 삼아 회화화(繪?化)한 시의도(詩意圖) 3편과, 원텍스트를 패러디한 <음중팔선도(飮中八仙圖)>를 다시 원텍스트로 삼아 패러디한 세편의 서발(序跋)을 살펴보면서 시라는 양식의 원텍스트가 그림이라는 양식으로, 다시 산문이라는 양식으로 그 모습을 바꾸면서 패러디되는 모습을 보았다. 개원(開元) 천보(天寶) 연간에 취중기행(醉中奇行)로 유명했던 여덟 명의 기인(奇人)을 노래한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는 많은 화가들에 의해 사랑받는 화제(畵題)가 되어 송(宋) 원(元) 명(明) 청(淸), 조선(朝鮮), 일본(日本) 등지에서 <음중팔선도(飮中八仙圖)>로 다시 태어났다. 이처럼 화가가시에 대한 해석을 회화적으로 재창조한 것을 시의도(詩意圖)라고 하는데 시의도(詩意圖)는 이미 존재하는 시를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이 둘 사이에는 원텍스트와 패러디 텍스트라는 관계가 성립한다. 두보의 마음에 공명한 화가들의 그림 3점, 명대(明代) 우구(尤求)의 <음중팔선도(飮中八仙圖)>, 조선(朝鮮) 김홍도(金弘道)의 <두보시의신선도(杜甫詩意神仙圖)>, 일본모모야마(桃山)시대의 가이호유쇼(海北友松)의 <음중팔선도(음중팔선도(飮中八仙圖)>를 살펴보며 원텍스트를 반복하면서도 각 화가의 개성에 따른 차이를 고찰하였다. 언어로 표현된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를 원텍스트로 삼아 패러디한 시의도(詩意圖) <음중팔선도(飮中八仙圖)>는 문인들이 그림에 부친 서문(序文) 및 제발문(題跋文)을 통해 다시 언어화된 텍스트로 패러디되었다. 화가의 마음에 공명한 조선의 세 문인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이봉환(李鳳煥)의 서발(序跋)을 통해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가 어떻게 변주되는지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원텍스트와 연속적인 관계에 의한 반복과 각 작가의 독자적인 해석에 의한 차이를 알 수 있었는데, 이덕무(李德懋)는 집정자에 대한 경계로, 이봉환은 회재불우(懷才不遇)한 현인(賢人)으로, 박제가는 현세의 규율을 초월한 천연(天然)스러운 선계(仙界)를 꿈꾸게 하는 대자유인으로 음중팔선(飮中八仙)을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영남좌도 통신사 교방춤에 나타난 문화예술적 특징 (Cultural and Artistic Characteristics of a Gyobang Dance Displayed in Tonshinsa from Yeongnam Jwa-do Province)

  • 양지선;강인숙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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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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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9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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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논문은 영남좌도 통신사 연향에서 교방(敎坊)의 기녀들이 춘 교방춤을 연구한 것이다. 이 연구를 위해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을 다녀온 후 기록한 28권의 기행문을 엮은 "해행총재(海行摠載)"와 문집류를 분석하였다. 통신사가 왕명을 받들고 일본으로 가는 길은 영남의 좌도(左道)를 이용했고, 임무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은 영남의 우도(右道)를 이용했다. 나라에서는 통신사들의 항해에 대한 불안감을 덜어주고 무사안일을 기원하기 위해 성대한 연향을 베풀었다. 연향은 통신사들이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으로 가는 하행길인 영남좌도에 집중되었다. 통신사들의 기록을 살펴본 결과 통신사 연향(宴享)은 영남좌도의 안동 영천 경주 밀양 부산 등에서 나타났다. 통신사 연향에 나타난 교방춤은 검무 황창무 처용 천도 무동 입춤 중춤이다. 통신사행을 통해 영남좌도는 '조선통신사 길'이 형성되었고 통신사 연향을 통해 교방춤의 예술성이 집대성되었다. 그러나 현재 영남좌도는 영남우도에 비해 전승되고 있는 교방춤이 현저히 적은 편이다. 이러한 이유로 영남좌도의 교방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연구자는 조선통신사 길을 통해 형성된 영남좌도의 통신사 연향에 나타난 교방춤의 문화예술적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다.

1788년 김응환의 봉명사경과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 (Kim Eung-hwan's Official Excursion for Drawing Scenic Spots in 1788 and his Album of Complete Views of Seas and Mountains)

  • 오다연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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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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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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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은 금강산과 해금강, 관동팔경을 그린 60점의 실경산수화와 51편의 기문(記文)으로 이루어진 화첩으로 규모와 화풍에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그림의 특징은 화면을 가득 채운 구성과 남종화풍을 따르면서도 거칠고 파격적인 화법, 산석(山石)의 기하학적이고 입체적인 표현 등이다. 1973년의 특별전, '한국미술이천년(韓國美術二千年)'을 처음으로 화첩의 일부만 공개되었던 작품은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에서 그 전모가 공개되었다. 《해악전도첩》이 김응환(金應煥)(1742~1789)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화첩의 마지막 장에 쓰여진 관지(款識)와 현재 행방이 묘연한 <칠보대>에 찍힌 '복헌'이라는 도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응환을 지시하는 관지와 도장은 모두 후대에 더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본 연구는 화첩을 둘러싼 여러 요소를 고찰하여 제작자를 재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해악전도첩》 제작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18세기 금강산 기행사경도의 전통과 봉명사경을 살펴보았다. 정선(鄭敾)(1676~1759)의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1711)을 비롯하여 심사정(沈師正)(1707~1769), 김윤겸(金允謙)(1711~1775), 최북(崔北)(1712~1786 이후), 강세황(姜世晃)(1713~1791) 등은 조선 후기 최고의 여행지였던 금강산을 유람하고 기행사경도를 제작하였다. 화가들은 이전의 전통을 계승하여 내금강의 명승명소를 주로 그렸고, 자신들이 경험한 장소를 새롭게 시각화하였다. 이러한 기행사경도는 여행을 기념하며 동행자나 후원자를 위해 여러 장면을 담을 수 있는 화첩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개별적인 금강산 기행사 경도의 제작이 증가하는 가운데 1788년에 정조(正祖)(재위 1776~1800)가 도화서 화원인 김응환과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에게 영동9군과 금강산의 명승(名勝)을 그려오도록 명한 일은 공적 업무였다. 정조는 이들의 관계 및 지방관으로서의 경력, 서로 다른 화풍 등을 고려해 봉명사경의 화원으로 선발하였다. 김응환과 김홍도는 영조(英祖)(재위 1724~1776)조부터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하며 선후배이자 동료로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나아가 이들은 영남 지역의 찰방(察訪)으로서 지방관의 업무를 수행한 경험이 있었다. 두 화원의 화풍은 서로 달라 김홍도는 부드럽고도 섬세하게 필선을 운용한 반면, 김응환은 굳세면서도 울창한 풍치를 잘 표현했다. 두 명의 화원은 각자의 개성으로 봉명사경 기간 동안 100여 폭의 초본을 그렸고, 이를 선별하여 60~70여 폭의 화첩 혹은 두루마리를 완성하였다. 이들의 그림은 18세기 전중반에 내금강과 관동팔경 위주로 제작된 금강산 기행사경도의 전통을 더욱 풍부하게 했고 영동과 외금강의 명승명소를 새롭게 발견하며 소재를 확장시켰다. 현재 《해악전도첩》은 원(元), 형(亨), 이(利), 정(貞) 4책으로 이루어졌는데, 원(元), 형(亨)책은 내금강의 그림 29점이며 이(利)책은 외금강의 장면 17점, 정(貞)책은 해금강과 관동팔경 14점으로 구성되었다. 비단 위에 그려진 각 그림은 기하학적으로 산석을 표현했으며, 연백으로 금강산의 암봉을 흰색 혹은 회청색으로 표현했다. 《해악전도첩》의 구도와 화법은 정선, 강세황, 심사정, 정충엽(鄭忠燁)(1725~1800 이후), 김응환, 김홍도의 화법과 비교할 수 있어 18세기 후반의 시대 양식을 갖는다. 특히 화첩의 일부 그림은 김홍도의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1788)과 구성 및 회화적 모티프가 매우 유사하여 두 화첩간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반면에 <영랑호>, <해산정>, <월송정> 등은 김홍도의 그림과는 구별된다. 이를 통해 화가가 김홍도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적인 화첩을 제작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해악전도첩》에는 다른 화첩에는 등장하지 않는 <자운담>, <백운대>, <안문점망비로봉>, <백정봉>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각 장면마다 경물의 특징을 구체적이고 참신하게 묘사하였다. 특히, 화가는 산석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하고 선과 면을 도드라지게 하여 입체감을 강조하였다. 그는 남종화풍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화법을 확립했고 이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면서 화면에 동적인 리듬감을 부여했다. 이처럼 60점의 그림은 거칠고 파격적으로 보이지만 나름의 질서 안에서 일관성을 견지하고 있다. 본고는 화법과 봉명사경의 정황을 종합해 《해악전도첩》의 제작자를 김응환으로 추론하였다. 나아가 김하종(金夏鍾)(1793~1878 이후)의 《풍악권(楓嶽卷)》(1865년 이후)과의 친연성은 《해악전도첩》의 화가를 김응환으로 추정한 또 하나의 이유였다. 《해악전도첩》은 김홍도의 《해산첩》과는 달리 후대에 미친 영향력이 미비한데 김하종의 《풍악권》만이 《해악전도첩》의 소재와 화법을 따르고 있다. 김하종은 《풍악권》에서 50년 전, 춘천부사 이광문(李光文)(1778~1838)을 위해 제작한 《해산도첩》(1816)과는 전혀 다른 화법을 구사했다. 그는 김응환의 《해악전도첩》과 유사한 구성과 회화적 요소, 화보식 인물표현을 따르면서 사의적인 분위기를 강조하였다. 개성김씨의 일원이자 김응환의 종손인 김하종은 가문에 전해지는 《해악전도첩》류의 그림을 감상했고 이를 새롭게 번안했다고 추측된다. 화첩에 포함된 51편의 기문은 그림 다음 장에서 그려진 장소를 설명하고 있어 각 그림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기문은 그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앞의 장소로부터의 이동 정보, 이름의 유래, 지형적 특징, 관련 정보 등이 서술되었다. 이와 같은 백과사전식 혹은 지리지와 같은 기문은 19세기 전반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금강산 화첩류에 더해졌다. 《해악전도첩》의 백화암 기문에는 1845년의 암자에 대한 중건 내용이 기록되어, 기문의 연대를 추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김하종에게 《풍악권》을 주문한 이유원(李裕元)(1814~1888)도 각 그림에 글을 붙였는데 이 글들은 김응환의 화첩에 포함된 기문 51편과 내용 및 서술방식이 흡사하다. 이유원의 기문은 《해악전도첩》의 기문이나 그 초고(원본)와 관련성이 높지만 두 화첩의 기문 필사의 선후관계를 판정하는 데에는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해악전도첩》은 김홍도의 봉명사경 초본 및 김홍도의 영향으로 제작된 19세기의 금강산 화첩과는 구별된다. 이 화첩은 화원 김응환의 회화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을 넓히고 18세기 후반 실경산수화의 또 다른 층위를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희춘이 판각을 주도한 서적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Books Engraved under the Auspices of Yu Heui-Chun)

  • 배현숙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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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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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7-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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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본고는 조선조 중기의 관료이며 학자인 미암 유희춘의 일기를 통해 당시 서적 간행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미암 유희춘은 만년에 관직생활을 하면서 일기를 남겼으니 이 $\boxDr$미암일기$\boxUl$에 일상의 일이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서적, 가정사까지도 알 수 있다. 본고는 이 일기를 통해 미암의 서적과 관련된 여러 일 가운데 미암이 주도적으로 간행하려고 노력한 서적을 밝혔다. 아울러 당시에 편성된 책판목록에 수록되었는지의 여부도 확인하였다. 미암이 개인적으로 간행하고자 한 서적은 2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외조부 금남 최부의 문집인 $\boxDr$금남집$\boxUl$과 중국기행문인 $\boxDr$표해록$\boxUl$이다. 다른 하나는 아동용 도서로 문해용의 $\boxDr$신증류합$\boxUl$과 도덕교육용의 $\boxDr$속몽구$\boxUl$이다. 이들 서적을 인출하기 위해 판각한 당시의 책판은 당대의 책판목록에 수록되어 있어야한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누락되어 있다. $\boxDr$미암일기$\boxUl$를 통해 책판목록에 누락된 서적을 보완할 수 있으므로 $\boxDr$미암일기$\boxUl$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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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계(漁溪) 조려(趙旅)의 은둔과 문화경관 (The Eyogye Cho Lyeo and His Secluded Cultural Landscapes)

  • 이행렬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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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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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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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어계 조려 선생의 시작품과 그의 세거지 및 후대에 조성된 문화경관 요소들을 통하여 조선전기 은둔자로서, 선비로서 지켜 나갔던 은둔문화 경관의 특징을 파악하는데 연구의 목적을 두었다. 연구대상지로는 그의 세거지였던 원북재, 채미정, 고마암, 묘소 등을 중심으로 하였다. 연구방법으로 "어계집(漁溪集)" 등과 같은 관련 고문헌의 조사와 현장조사를 통하여 세거지에 나타난 경관요소의 파악, 그리고 조려의 은둔문화 경관 특정 분석, 시문에 나타난 의경미학의 분석 등으로 구분하여 진행하였다. 연구의 결과, 1) 조려는 단종의 폐위와 함께 성균관에서 고향으로 은둔하여 세상과 결별하면서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2) 그의 출처관에 영향을 주었던 인물로는 성균관 동학이었던 류계분, 배중후 등과 생육신으로 교분을 나누었던 원호, 김시습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과 은둔관을 같이 했다. 3) 조려의 은둔이 갖는 의미는 호 '어계'에서처럼 어부로서의 은둔관을 표명한다. 이러한 은둔문화는 독특한 행동양식으로 나타나는데, 행동의 집중화 현상, 절대 은둔의 기행, 산천유람과 풍수지리학의 조예, 은둔의 고집스런 지속성, 실천효행의 유가적 자세 등이 있다.4) 은둔문화의 경관영역을 네 곳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특징을 살펴본 바, 조려 당대의 은둔문화 경관과 후손과 사람들에 의해 전승되어진 경관전승으로 파악할 수 있다. 5) 시문에 나타난 의경미학을 분석한 결과, 경물로는 식물, 자연요소와 인공요소 등이 있었으며, 표현되어진 주제의식으로는 '유가적 은둔', '아취있는 은둔', '충절의 은둔' 등으로 나타났다.

한국고전문학을 활용한 체험형 게임 관광프로그램 개발 사례 : 중인가객 김수장과 『해동가요』를 대상으로 (A Case of Development of Experiential Game Tourism Program Using Korean Classical Literature)

  • 박보연;김태웅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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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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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48-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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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이 논문에서는 한국고전문학을 활용한 체험형 게임 관광프로그램을 개발하고자 하는 과정의 첫 번째 시도로써 중인가객 김수장과 그의 가집 『해동가요』를 대상으로 1차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를 위하여 관광콘텐츠로서 체험형 게임과 한국고전문학의 가치에 대한 이론적 검토를 먼저 진행하였다. 이후 프로그램의 수요층을 가족, MZ 세대 및 연인, 외국인의 세 분류로 설정하였으며, 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각 수요층의 성격 및 프로그램 선호도를 확인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가집 『해동가요』와 김수장이 창작한 7수의 시조 작품에서 분석틀에 따라 각각의 역사문화자원으로서의 주요 가치를 발굴하고, 대상과 관련된 수요층의 선호를 분석하였다. 이에 따라 가족 단위는 모험플롯으로, MZ세대 및 연인의 경우에는 사랑플롯으로, 외국인의 경우에는 모험과 사랑을 혼합한 플롯으로 구성하여 각 수요층에 맞게 서사구조를 차별적으로 조직하였다. 이 글은 스토리텔링적인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잘 활용되지 못한 한국고전문학, 그 중에서도 김수장이라는 인물과 그의 작품에서 스토리를 발굴하고, 이를 체험형 게임 관광프로그램으로 발전시킴으로써 한국고전문학의 측면에서도, 관광학의 측면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자 하였다. 이후로도 다양한 조선의 문학인들을 발굴하여 지속적으로 스토리텔링을 진행한다면 고전 문학 기행 콘셉트의 여행상품군의 활성화를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