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조선(한국)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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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학교 본관과 건축가 김한섭의 상관성에 관한 고찰: 1940~50년대를 중심으로 (A study of correlation between Architect, Kim Han-sup's Architecture and the main building of Chosun University in the 1940's to 1950's)

  • 김명선;김용춘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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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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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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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For the proper preservation and utilisation of Regional Modern Heritage Buildings, it is necessary to study the history of local modern architecture based on a broad understanding of the region and also to architectural history. The aim of this study is expand the awareness and multi-faceted interpretation of modern architecture in Kwangju in the 1940's to 1950's, by exploring the origin of regional modern architecture from new perspectives. As a part of the discussions of the perspectives, this study will be therefore explained with the regional correlations between the architect Kim Han-seop's works and activity, influential politicians, strong enthusiasm of education,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the main building of Chosun University, architecture schools and association in Kwangju. Then, it will be finalised that Kim Han-seop and the main building of Chosun University are directly and indirectly correlated and affected each other strongly.

친환경.첨단.명품 건축 박람회, 9th HOMEDEX 2007

  • 하유정
    • 주택과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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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2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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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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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코엑스에서 미래의 건축 주거 문화 구현을 목표로 조선일보가 주최한 '2007 홈덱스'가 개최됐다. 건축 자재, 인테리어, 가구, 홈 네트워크 등을 선보여 새로운 주거 트렌드를 미리 볼 수 있는 박람회였다. 참신하고 다양한 건축 자재.인테리어 및 전원 주택을 볼 수 있는 홈덱스 전시회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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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산릉의 여성공간, 나인가가(內人假家)의 변화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hange of NaInGaGa(Female Space) at the Royal Tomb in the Late Joseon Dynasty)

  • 신지혜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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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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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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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On behalf of the royal women, SangGung(尙宮:The head of female servants in the palace) and NaIns(內人: Female servants caring for royal families in the palace) were dispatched in order to attend a funeral at the royal tomb. The NaInGaGa(內人假家) is the temporary building for SangGung and NaIns in the royal tomb. It is comprised of lodgings for them and also workrooms and warehouses to prepare ritual offering for the dead King or Queen.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NaInGaGa was utilized until a funeral at the royal tomb. Since 1674, NaInGaGa for the 3 years-period lamentation was started constructing separately. At these processes, the plan and placement of NaInGaGa was changed. This study based on the SanReungDoGam-EuiGwae (山陵都監-儀軌: The report on constructing royal tomb). The SanReungDoGam-EuiGwae written since 1800 have illustration about NaInGaGa. The illustration and explanation about NaInGaGa become a important clue that make suppose detailed space of NaInGaGa.

1930년대 중반 박길룡의 기능주의 건축론과 경성건축 비평 (Park Kilyong's Functionalist Theory of Architecture in the Mid-1930s and Critique of Gyeongseong (Seoul) Buildings)

  • 김현섭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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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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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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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This research aims to investigate Park Kilyong's architectural theory and critique of Gyeongseong (Seoul) buildings, expressed in his 'Overview of Modern Buildings in Gyeongseong' and 'Critique of Gyeongseong Buildings' (Samcheolli, Sept. and Oct. 1935); and 'Architectural Form of the 100% Function' and 'The Modern and Architecture (1)-(4)' (Dong-A Daily, 28 Jul. to 1 Aug. 1936). As a result, it is confirmed that Park had the functionalist theory of modern architecture, which suggests that Korean architects of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were accommodating the contemporary trend of world architecture. However, Park shows his fundamental limitations in the fact that the main content of his articles was a verbatim translation of two Japanese references (Kurata, 1927; Ishihara, 1929) without proper indications. Despite the limitations, his texts are still meaningful since he formed his own architectural theory on the basis of what he translated; and indeed his critique of Gyeongseong buildings, however simple, was based on the theory. This research makes a critical analysis of Park's functionalist theory from both the 1930s' and present points of view and compares his commentaries on Gyeongseong architecture with those by Ko Yu-seop (1932) and Hong Yunsick (1937), illustrating how Korea perceived architecture and modernism in 1930s.

유니버설디자인을 적용한 선박 거주구 개선에 관한 연구

  • 박진;이한석
    • 한국항해항만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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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항해항만학회 2019년도 춘계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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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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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유니버설디자인을 선박 거주구 공간에 적용하여 해상에서 재난 시 약자의 대상을 일반인으로 적용해 유니버설디자인 이론과 형태를 통해 선박의 거주구 안전이 강화되고 개선된 연안여객선 거주구 디자인을 제시한다. 연구에서 제시하는 선박에 적용되는 유니버설 디자인 10원칙을 통해 사용자 중심 디자인의 중요성을 이루고 이러한 연구를 통해 다가오는 여객선 크루즈 시장을 대비해 디자인 기초연구자료를 마련하고 고부가가치 조선업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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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이훈우에 대한 연구 (A Research on Architect Yi Hunwoo)

  • 김현경;유대혁;황두진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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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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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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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This research focuses on the life and works of architect Yi Hunwoo, who was active in early 20th century. Yi has been previously mentioned in a few research documents, but not as a main subject of interest. Thanks to digitalized historic databases, the authors of this research were able to access more information about Yi. It was discovered that he was born in Korea in the late 19th century and then attended the Nagoya Higher Technical School in Japan. After repatriation, he participated in a few public projects in Korea as an in-house architect at the Governor-General's office, then started his own practice and produced his individual projects. He also contributed articles on innovations in residential design to newspapers. Chronologically, his activities as an architect preceeded those of Park Gilyong, who has been conventionally regarded as the first Korean modern architect so far. This research would like to establish Yi Hunwoo as a historic figure whose professional career spanned the earlier stage of the Korean modern architecture, based on the records of his life and professional activities. The authors do not wish to present the architectural analysis nor evaluation of his works, which will be subject to future researches.

<온천행궁도(溫泉行宮圖)>(1795)의 온천(탕실) 건축 고찰 (A Study on the Hot Springs(Tangsil Building) of Temporary Palace(Onyanghaenggung) according to the <Oncheonhaenggungdo>(1795))

  • 이정수;김일환;이경미;지원구;최재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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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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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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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온양행궁은 <온천행궁도(溫泉行宮圖)>『온궁사실(溫宮事實)』(1795), 『영괴대기(靈槐臺記)』 및 <영괴대도> 등의 문헌자료와 영괴대(靈槐臺), 신정비(神井碑)로 왕의 온행을 확인가능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1906년 헤르만 산더(Hermann Sander)가 촬영한 사진을 통해, 조선시대 온양행궁의 온천(탕실)이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온양행궁 관련 문헌 및 <온천행궁도>(1795)에 기초하여, 온양행궁 탕실의 건축형식을 밝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첫째 온양행궁 및 탕실의 변천을 살펴보고, 둘째 왕의 목욕문화 및 행태를 고찰한 후, 셋째 <온천행궁도> 온천(탕실) 건축을 「온궁수리」를 통해 정리하고, 넷째 일제강점 초기 헤르만 산더(Sander)의 사진과 비교하여 조선 후기 마지막 온양행궁 온천(탕실) 건축 형식을 고찰하였다. 이상의 연구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온양행궁 온천(탕실)은 현종 초 온정실(溫井室, 8칸), <온천행궁도> 온천(탕실)로 이어지면서 조선 후기 『호서읍지』(1871)까지 유지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초기 헤르만 산더(1906) 및 <1912년 충남 아산시 온양온천>(한국저작권 위원회) 사진 건축물과 일치하고 있다. 둘째, 조선시대 국왕의 목욕법은 목욕평상(沐浴平床) 또는 교의(交倚)에 앉아 세두, 유두, 목두 등을 시행하거나, 온천수 증기를 직접 쐬는 훈세, 탕정 앞에 목판을 깔고 앉아 물에 발을 담그는 침족 또는 침세, 그리고 배꼽 아래만 물에 담그는 반신욕인 체욕, 좌탕 등의 다양한 목욕방법을 채택하였다. 셋째, 온양행궁 온천(탕실)은 온천수가 상탕 서북쪽에서 분출되어 동쪽으로 꺾여 중탕으로 들어가고 남쪽으로 꺾어지면서 바깥으로 나와 하탕이 되는 구조로서, 탕체 주변부는 태안에서 실어 온 바둑돌을 탕실 바닥에 깔았다. 이상의 고찰로부터, 어실로부터 왕의 접근동선, 왕의 목욕법과 목욕도구, 입대하는 의관과 목욕보조 인력 등 목욕행태와 「온궁수리」에서 언급된 각 실 등의 구성을 헤르만 산더의 사진과 비교하여, 온양행궁 온천(탕실) 건축물을 추정할 수 있다.

한중 목조건축 도리 결합방식 변천(變遷)에 관한 비교연구 (A Comparative Study on the Transition of Purlin Coupling Method of Korean and Chinese Ancient Wooden Constructions)

  • 차주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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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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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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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는 한중 고건축 내부 가구(架構) 중 소슬재의 위치와 도리와 보의 결합 형태를 분석하여 동아시아 목조구조 체계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적인 연구이다. 동아시아 국가인 한국과 중국의 고대 목조건축은 서까래와 도리, 그리고 보를 결합하여 건물의 윗부분을 구성하고 기둥과 결합하여 건물의 기본 골격을 형성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목조 구조 체계의 원리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세부적인 기법상의 차이가 지역성과 시대성, 국가성을 띠고 있다. 중국건축 내부 가구 중 도리와 보의 결합 형태와 차수(叉手), 탁각(托脚)의 지지점 위치가 시대에 따라 차이점을 보이고, 역사적으로 다양한 왕조에 따라 세부 수법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이후 건축에서는 차수와 탁각이 없어지는 현상을 보이며 특히, 탁각은 명대 관식건축에서는 완전히 없어졌으며 주된 이유는 도리와 보의 결합 방식의 차이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5세기 이전에는 도리와 보가 서로 떨어져 결합되고 있었으나, 15세기 이후는 도리와 보가 서로 결합하고 보의 단면적이 비약적으로 커져 도리 좌굴을 방지하는 수법이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탁각의 경우 당 오대 시기에는 탁각의 상부 위치를 봤을 때 도리와 직접적인 결합은 없으며, 도리의 좌굴을 방지하는 부재보다 내부 가구의 안전성을 유지하는 부재라고 볼 수 있다. 송대 이후 원대까지도 송 "영조법식"의 기록과 다른 건축물이 많은 것으로 보아 탁각의 적용 여부는 지역, 혹은 장인의 수법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원대 이전 우진각 지붕의 측면 도리 부근과 팔작 지붕 합각 아래 구조에서도 탁각이 있는 것 보아 종단면과 횡단면에서 모두 볼 수 있는 부재이며, 지지점의 위치를 보아 도리를 직접 지지하는 부재라기 보다 우진각 지붕의 측면 구조나 팔작 지붕의 측면 합각 구조의 안전성에 기여하는 부재로 보인다. 한국건축 중 고려시대에 반 'ㅅ'자형 소슬재(중국명: 탁각[托脚])가 유행하지 않은 이유는 도리의 좌굴을 방지하는 기법(도리 받침재)이 널리 유행하여 반 'ㅅ'자형 소슬재를 사용하지 않아도 도리가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을 선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도리는 도리+장혀+도리 받침재+보의 구성을 보여 도리가 직접 보와 결구되지 않는 특징이 있으며, 조선시대 이후 도리가 보의 단면적의 범위에 속해 도리가 좌굴 되는 현상을 방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15세기 이후 중국건축에서도 같은 모습을 보이며, 15세기 이후 도리 좌굴에 대한 세부 기법이 한중 양국의 지역성과 국가성을 뛰어 넘어 보편성을 가진 예라 생각된다. 조선중 후기 건축에서 지붕부의 하중을 줄여 주는 방법인 덧걸이 수법이나 덧서까래 사용은 도리에서 보로 전달되는 하중을 줄여주어 도리 좌굴을 감소시켜 주는 효과가 있으며, 이는 조선시대에 건물을 영조하는 장인들의 도리 좌굴을 방지하는 또 다른 기술이라 할 수 있다. 한중 고건축 도리와 보의 결합 구조와 소슬재의 연구는 고려시대 이전 건축을 복원, 설계하는 연구에 기초적인 연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年代) 한국근대주택(韓國近代住宅)에 나타난 속복도형(複道型) 일식주택(日式住宅)의 영향(影響) -한국인 건축가의 주택개량안과 "조선과 건축(朝鮮建築)"에 수록된 주택평면을 중심으로- (A Study on the Influences of Central corridor type Japanese dwellings on the Korean modern dwellings and Korean architects' proposals for modern dwellings in the time of 1930's)

  • 안성호;김순일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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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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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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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a searching out the characteristics of Japanese dwellings implanted into Korea in the time of the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and its influences on Korean modern dwellings especially in the time of 1930's. At the early stage of the colonial time($1905{\sim}1919$), the central corridor type Japanese dwellings were implanted into Korea for the Japanese official residences. The central corridor type Japanese dwelling was an urban modern dwelling compromised between Japanese style and western style and distinguished by an outer-court type plan, Japanese entrance hall, central corridor and western style reception room. After the 1920's the central corridor type Japanese dwellings have spreaded itself and became a prototype of a modern dwelling in Korea. The characteristics of the central corridor type Japanese dwellings have influenced on the Korean high class dwellings and Korean architects' proposals for modern dwelling in the time of 1930's. By the implantation and spread of the central corridor type Japanese dwellings, Korean modern dwellings at the same time have affected and undergone transformation. The aspects of transformation were ; The outbreaking of the Japanese style entrance and central corridor, the transformation of MaDang from the inner court with a function of circulation into the outer court garden with plants and the transformation of Korean dwellings from the rural inner court type into the urban outer court type. The central corridor type Japanese dwellings implanted into Korea in the time of the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makes function as a precedent of a modern urban dwelling to Korean and makes Korean dwellings transform from the rural inner court type into the urban outer court ty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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