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임진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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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실지조사기록 검토를 통한 임진정계 경계표지물 분포 복원 (A Reinvestigation on Key Issues Associated with the Yimjin Boundary Making and Demarcation(1712~1713): Reconstructing the Distribution of Boundary Markers Based on Actual Survey Documents)

  • 이강원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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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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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7-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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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이 논문의 목적은 임진정계(1712) 경계표지물에 대한 역대 실지조사기록을 검토하여, 1712~1713년에 만들어진 경계표지물의 분포를 복원하는 것이다. 허량 박도상(1713), 김우식(1883), 이중하(1885), 오록정(1907), 오소네 세이지(1907), 유건봉(1908), 일제지형도(1933), 청진교원대학 백두산탐사대(1948), 길림성 장백산 여행단(1957)의 실지조사기록을 검토하였다. 이를 통하여, 1713년 최종 완성된 임진정계 경계표지물의 분포를 도표와 지도로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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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정계 경계표지 토퇴의 분포와 목극등 지도에 표시된 '수출(水出)'의 위치 (A Reinvestigation on Key Issues Associated with the Yimjin(1712) Boundary Making and Demarcation: The Distribution of Soil Piles and the Location of 'Suchul(水出)' written on the Mukedeng's Map)

  • 이강원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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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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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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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논문은 현존하는 임진정계 경계표지 토퇴들의 분포와 특징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그를 통해 목극등 지도에 표시된 '수출(水出)'의 위치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흑석구 동남안을 따라 설치된 토퇴들 중 마지막 토퇴의 위치는 대략 북위 $42^{\circ}04^{\prime}20.09^{{\prime}{\prime}}$, 동경 $128^{\circ}16^{\prime}08.42^{{\prime}{\prime}}$이다. '도화선 도로변 토퇴군'의 서쪽 시점은 대략 북위 $42^{\circ}02^{\prime}20.14^{{\prime}{\prime}}$, 동경 $128^{\circ}18^{\prime}53.40^{{\prime}{\prime}}$이며, 동쪽 종점의 좌표는 대략 북위 $42^{\circ}01^{\prime}32.97^{{\prime}{\prime}}$, 동경 $128^{\circ}21^{\prime}24.59^{{\prime}{\prime}}$이다. 서쪽 시점에서 약 2.1㎞ 지점까지는 대체적으로 "서-동"의 방향이며, 그 이동은 대체적으로 "서북-동남" 방향이다. 도화선 도로변 토퇴의 총 분포 길이는 실제거리 약 4.2㎞ 정도이다. 목극등 지도에 표시된 '수출'의 좌표는 대략 북위 $42^{\circ}01^{\prime}30.36^{{\prime}{\prime}}$, 동경 $128^{\circ}21^{\prime}3.62^{{\prime}{\prime}}$이다. 동쪽 마지막 토퇴의 동남 방향 지도상 평면 직선거리 약 222m 지점이다. 이러한 결과를 근거로 임진정계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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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정계시 '입지암류(入地暗流)'의 위치와 '토문강원(土門江源)'의 송화강 유입 여부 (A Reinvestigation on Key Issues Associated with the Yimjin(1712) Boundary Making and Demarcation: Location of 'Yipjiamlyu' and the Confluence of 'Tomungangweon' into the Sungari River)

  • 이강원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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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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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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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연구결과 다음과 같은 점이 확인되었다. 첫째, 목극등 지도의 '입지암류(入地暗流)'는 지리학적으로 '복류시작지점'을 의미하며, 오늘날 대각봉 북북동의 흑석구 하도, 해발고도 약 1,840m 지점이다. 둘째, 임진정계시 '토문강원(土門江源: 두만강원)'[흑석구]은 송화강에 유입되며, 목극등과 조선측 임진정계 참여자들도 1712년 5월 17~18일경 이 사실을 알았다. 이러한 두 가지 사실에 입각하여 임진정계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목극등은 정계비를 압록강 송화강 최상류 분수계 부근에 세웠다. 압록강 토문강(두만강)의 최상류 분수계를 찾는다는 그의 의도대로라면, 정계비는 대연지봉에 세웠어야 한다. 5월 12일 그는 자신이 '토문강원(두만강원)'[흑석구]이라고 간주한 하도에서 '입지암류'를 발견했으며, 이곳으로부터 하도를 따라 복류하는 물이 다시 용출하여 토문강(두만강)이 된다고 생각하고, 5월 15일 정계비를 세웠다. 그러나 5월 17~18일경 이 하도가 토문강(두만강)이 아닌 '서류하천'(송화강 지류)에 연결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5월 19일 그는 다시 조선측이 가리킨 두만강(토문강) 용출처로 향했으며, 도중에 물이 나오는 것('수출(水出)')을 발견하고 자신이 '토문강원(두만강원)'이라고 생각한 물줄기가 다시 용출한 것이라고 지목하였다.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물줄기가 '입지암류' 지점에서 복류하기 시작하여 '수출'에서 다시 나와 토문강(두만강)이 된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는 "정계비-'토문강원(두만강원)'-'입지암류'-'수출'-토문강(두만강) 본류"로 물이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이를 조 청 국경으로 삼았으며, 그중 "정계비-'토문강원(두만강원)'-'입지암류'-'수출'"을 따라 경계표지물을 설치할 것을 조선측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목극등 귀국 후인 8월초 조선측 경계표지물 설치 실무자들은 목극등이 지목한 '수출'이 두만강(토문강) 수계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조선측 실무자들은 "정계비-'토문강원(두만강원)'-황화송전자 부근-'수출'"을 목극등이 설정한 경계로 이해하고 경계표지물 설치작업을 하다가, 자신들이 확인한 두만강(토문강) 용출처까지 경계표지물을 연결하였다. 조선정부도 1713년 3월 이를 추인하였고, 이후 이러한 실무자들의 견해에 따라 중간의 경계표지물 미설치 구간에 대한 공사를 진행하였다. 경계표지물 설치에 대한 목극등의 요구와 조선측의 실행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조선측 실무자들이 이렇게 경계표지물을 설치한 것은 황화송전자 부근을 목극등의 '입지암류' 지점으로 이해했고, 자신들이 확인한 두만강(토문강) 용출처가 진정한 두만강(토문강) 용출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진정계시 조 청 모두 압록강과 두만강(토문강)을 국경으로 인식하고 정계에 임하였다. 문제는 두만강(토문강) 수계를 잘못 이해했다는 점이다. 압록강에 대한 수계 판단은 비교적 정확했으나, 두만강(토문강)에 대한 수계 판단에서 유일하게 옳았던 것은 조선측 실무자들이 발견한 두만강(토문강) 용출처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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