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신석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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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신석기인의 묘제와 사후세계관 (The thought of Death and the Tombs in the Neolithic Age of the Korean Peninsula)

  • 이상균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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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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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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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한반도의 신석기시대는 정착생활이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수렵과 채집이 주를 이룬다. 사철 바뀌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활동범위의 공간적 영역이 매우 넓었으며, 죽음으로 인한 묘제의 축조에 노동력과 시간을 많이 투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신석기인들의 묘제는 농경사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청동기시대 이후의 다양화되는 묘제와는 다르며, 이 시기에는 지상의 묘제나 얕은 토광묘가 중심을 이루었을 것이다. 현 상황에서 한반도 신석기인들의 사후세계관에 대한 양상은 다섯가지로 요약 할 수 있다. 첫째, 신석기시대에는 피장자를 묻을 때의 머리를 두는 방향이 일정하지 않은 것 같다. 장례시에 두향문제에 대한 의례적, 종교적인 의식은 각자의 유적 내에서 일정한 규범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둘째, 매장방법에 있어서 통영 연대도에서 부신장이 보이기는 하나, 일반적으로 한반도 내에서는 앙와신전장이 주류를 이룬다. 셋째, 신석기시대에는 일반적으로 1인씩 묻는 단독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합장의 풍습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이 시기에는 무덤의 규모나 부장품의 다양성에 의해 이미 빈부나 신분, 지위의 고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째, 신석기시대 중기에 상촌리유적에서와 같이 이미 화장의 풍습이 있어 이차장이 행해졌음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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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주택난방 변천과정

  • 전국보일러설비협회
    • 보일러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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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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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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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
  •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한반도 각지에서 발굴됨에 따라 이 시대부터라는 것이 자명한 사실로 인정된다. 그러나 이들 구석기인들이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이 된다고 할 수 없는데, 구석기 시대를 뒤이은 중석기 시대의 유적발굴과, 연구의 부족으로 중석기문화에 대한 단절이 있으며 신석기 문화가 새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 한국인의 조상으로부터 시작되는 한국주거사, 나아가 주택난방의 시작은 당연히 신석기 시대부터 고찰해야 할 것이다. 본고는 조선시대까지의 한국전통주택건축의 난방설계를 이해케하며 이를 통하여 한국전통 생활사의 일부를 밝힌 고려대학교 주남철 교수의 논고 $ulcorner$한국의 주택난방 변천과정$lrcorner$을 전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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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신석기시대의 고고지자기 변동: 중서부지역 유적을 중심으로 (Archaeomagnetic Secular Variation of the Neolithic Age in Korea: Focusing on the Mid-Western Region Sites)

  • 성형미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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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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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3-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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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고고지자기 연대측정법이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여 서력기원후의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상세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의 고고지자기 변동양상을 알 수 있는 표준곡선의 개형을 작성하기에 이르렀고, 최근에 서력기원전 시기에 대한 유적조사 사례가 증가하면서 청동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대해서는 꽤 구체적인 고고지자기 변동 양상까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신석기시대 유적에 대한 조사사례가 중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됨에 따라 이를 통해 축적된 34점의 고고지자기 측정 자료를 통해 신석기시대의 고고지자기 변동 양상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아직은 자료가 부족하여 구체적인 변동 양상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대략적인 모습은 추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고고지자기 변동 양상은 청동기시대와 마찬가지로 서력기원후 시기의 변동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변동을 하고 있으며, 청동기시대 지자기 변동 모습과 비교해 보면 복각은 거의 차이 없는 범위안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나 편각은 전체적으로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있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일본 죠몬시대 자료들과 비교해 보았는데,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의 지자기 측정 자료가 복각이 좀 더 깊으며 편각은 10도 이상 동쪽으로 치우친 모습을 보인다. 다만 자료가 가장 많이 집중되어 몰려있는 부분에서는 양국의 자료가 상당부분 서로 겹쳐지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고고지자기 변동 양상은 일본의 그것과 비교할 때 전체적으로는 비슷한 변동 양상을 보이기는 하나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아산만지역(牙山灣地域)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집자리의 시공적(時空的) 위치(位置) (Temporal-Spatial Location of Dwelling Site in Asan Bay in the Neolithic Age)

  • 구자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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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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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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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아산만지역에서 조사된 신석기시대 유적 중 집자리(마을)를 중심으로 구조와 특징을 살펴본 후, 이 지역 신석기시대 집자리(마을)의 시 공간적 위치와 의미에 대해 고찰해보았다. 아산만지역의 신석기시대 집자리는 방형이 주류를 이루며, 일부 장방형 집자리와 공존하는 예가 확인되고 있어 주목된다. 아산만지역의 신석기시대 집자리는 대부분 구릉지역에 위치하나, 세부적으로는 완만하고 낮은 구릉지역과 상대적으로 높게 형성된 구릉지역으로 구분된다. 먼저 후자 유적들은 차령산맥의 영향으로 해발고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아산 천안지역의 구릉지역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부분 해발고도 50~80m 정도에 해당한다. 반면 전자 유적들은 삽교천과 예당평야가 넓게 펼쳐진 당진과 예산지역을 중심으로 확인되고 있어 비교적 해발고도가 낮고 완만한 구릉지역(해발고도 20~50m)에 위치하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입지선택은 문화내적으로는 이들 집단의 생계경제 및 기술수준과 관련되지만, 외적으로는 이들 집단이 처한 자연환경(지형)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결과이다. 아산만지역의 신석기시대 집자리 유적은 방사성탄소연대측정값과 출토유물을 통해 보면, 동시기 유적으로 필자의 신석기시대 집자리 상대편년 중 II기(기원전 3,500~3,000년)에 해당한다. 이들 신석기시대 집자리(마을)는 경기(인천) 해안지역과 금강유역(충청내륙지역)의 신석기시대 집자리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이는 대규모 마을을 이루던 경기 해안지역 집단들과 금강유역(충청내륙지역)의 대표적인 '대천리식 집자리'의 확산 및 교류에 의해 동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아산만지역은 기원전 3,5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두 유형의 집자리가 공존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환경(기후) 및 생태적 사회적 변화 등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초보적인 농경의 도입에 따른 유적의 확산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선사시대의 우리나라 건축

  • 장경호
    •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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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호통권2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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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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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
  • 우리나라에서 선사시대라고 하면 대체로 구석기 신석기시대를 비롯하여 청동기와 초기철기시대를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그 시대의 건축을 논함에 있어서는 통틀어 원시시대의의 건축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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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흥 농서리유적 출토 토기의 재료과학적 특성과 소성온도 해석 (Interpretation of Firing Temperature and Material Characteristics of the Potteries Excavated from the Nongseori Site in Giheung, Korea)

  • 김란희;이선명;장소영;이찬희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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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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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5-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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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이 연구는 기흥 농서리 유적에서 출토된 신석기, 청동기 및 원삼국 시대의 토기를 대상으로 산출상태와 물리적, 광물학적 및 지구화학적 특성을 분석한 것이다. 이 결과, 신석기시대 토기편은 사질 태토와 다량의 활석 및 운모 비짐이 특징적이며, 청동기시대 토기편은 특별한 정선과정 없이 사질의 태토를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원삼국시대 토기편은 정선된 태토를 이용하였으며, 각 시대별 토기편은 점이적으로 변화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또한 화학조성을 비교한 결과, 유적지 주변의 동일 기반암에서 풍화에 의해 생성된 원료를 이용하여 제작된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신석기시대 토기는 다량의 활석과 운모 등을 첨가하였고, 원삼국시대 토기편은 태토를 매우 정선하여 이용하는 등 제작기법에서 시대에 따른 차이를 보인다. 이들 토기편의 소성온도는 신석기시대의 경우, 대부분 $700{\sim}760^{\circ}C$, 청동기시대의 경우는 $850{\sim}900^{\circ}C$ 그리고 원삼국시대는 $900{\sim}1,050^{\circ}C$로 전체적으로 넓은 소성범위를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각 시대별 토기의 특징은 시간적으로 단절된 특징을 보이지 않으며 제작기법 상의 변화양상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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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중서부 도서지역에 있어서 사면 미지형과 옛 주거지 분포와의 대응관계 (A Relationship between Micro-Landforms and Distribution of the Ancient Dwelling Site in the Middle Western area, Korea)

  • 박지훈;최성길
    • 한국지형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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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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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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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목적은 지형학적 관점에서 한반도 중서부 도서지역인 인천 영종도에 있어서 신석기 및 청동기시대 주거지의 최적 입지환경을 밝히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현재까지 조사지역에서 확인된 주거지들 중에서 정량분석이 가능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주거지 각각 145기와 47기를 대상으로 개별 주거지들의 미지형 입지환경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신석기 및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가장 많이 밀집하는 구릉의 미지형은 각각 상부곡벽사면(64기, 44.1%)과 정부사면(39기, 83%)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것은 지형학적 관점에서 볼 때, 조사지역의 경우,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가면서 주거지 최적 입지환경이 바뀌었으며 주거지가 입지하는 구릉의 미지형의 위치도 상대적으로 약간 상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이전의 식생 간섭사 (Vegetation Disturbance of Korea during the Pre-Chosun Dynasty Period)

  • 공우석
    • 한국제4기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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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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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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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한반도에서 구석기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자연식생 간섭사를 시공간적 관점에서 복원하였다. 자연식생 간섭은 신석기시대에 본격화되었으며, 간섭은 초기에 저지와 해안에서 이루어졌으나, 후기에는 내륙으로 확산되었다. 청동기시대에는 밭의 개간이 활발해지고, 특정 수종에 대한 선택적 이용에 따른 간섭이 있었다. 철기시대에는 밭농사를 위한 개간이 한반도 전역에서 이루어져 자연식생의 파괴가 계속되었다. 삼국시대에는 별채, 목재 가공, 철제 농기구 사용, 가축에 의한 땅 갈기 등이 도입되면서 경작지 확대를 위한 자연식생의 간섭이 계속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개간이 장려되면서 다락밭이 조성되고, 땔감, 조선, 광업, 목판 인쇄, 개간 등으로 자연식생의 간섭이 심각해졌다. 자연식생 간섭을 가져온 주된 요인은 농경 및 벌채와 관련된 인간의 활동이었고, 그 외 일상생활과 산업에서도 산림 식생의 간섭은 발생했다. 신석기시대 전기의 괭이농사, 후기의 보습농사, 청동기시대의 가축에 의한 보습농사, 철기시대의 농기구를 이용한 농사와 삼림 벌채 등으로 농경에 의한 자연식생의 간섭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고구려의 밭농사, 백제의 논농사와 밭농사, 신라의 밭농사, 통일신라 때 밭의 확대 개간, 고려 때 개간 장려에 따라 다락밭이 확산되면서 전국에서 산림 훼손 피해가 심하였다 벌채는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본격화되어 후기에는 섬이나 내륙으로 확산되었다. 밭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벌채는 계속되었고,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에는 목공구가 발달하면서 자연식생의 제거가 쉬워졌다. 고구려의 밭농사, 백제의 앞선 목재 가공 기술, 신라와 가야의 광물 생산, 목재 가공, 개간에 따라 식생 파괴가 심했다. 고려 때에는 연료와 개간으로 나무가 벌채되었고, 대신 산에 소나무 등을 심으면서 마을 주변에서 소나무 숲 경관이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자연식생 간섭을 가져온 기타 활동으로는 구석기 전기의 석기와 불, 신석기시대의 정착생활과 관련된 활동, 청동기시대의 제련, 철기시대 철제 생활용구 제작, 고조선의 온돌난방, 삼국시대의 아궁이·굴뚝을 갖춘 온돌방, 신라의 많은 숯 사용, 고려의 선박 건조, 전란, 목판 인쇄, 연료, 경제작물 재배, 전면적인 온돌난방 보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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