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시대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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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 폐지에 대한 뉴스 프레이밍 비교 연구: 조선일보, 국민일보, 한겨레신문을 중심으로 (A Comparative Analysis over News Framing of the Abolition of the Family Headship (Hoju) System: Examining Three Major Korean Dailies: Chosun, Kukmin, Hankyoreh)

  • 이민규;김수정
    • 한국언론정보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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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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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2-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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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본 논문은 1990년 2월부터 2005년 7월까지 호주제와 관련된 $\ulcorner$국민일보$\lrcorner$, $\ulcorner$조선일보$\lrcorner$, $\ulcorner$한겨레$\lrcorner$의 신문기사를 대상으로 기사 수, 기사유형별, 등장인물별, 프레이밍 방식, 보도기사 형식별 프레임을 기준으로 살펴보았다. 본 연구에서는 호주제와 관련된 논의를 5시기로 구분하여 각 시기별 두드러지는 프레임과 소외된 프레임에 대해 분석했다. 분석결과에 따르면 호주제 논의와 관련된 프레임은 총 3가지 차원의 6가지 속성으로 구분될 수 있었다. 시기별로 볼 때 호주제에 관한 논의는 호주제 자체에 대한 속성적 차원에서 정치적 법적논의에 대한 차원으로, 그리고 사회적 논의와 관련된 차원으로 이행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호주제 관련 기사는 '사회변화 혹은 시대정신 반영' 프레임이 우세하나, 속성적 차원에서는 '남성중심 사회의 반영' 프레임이, 대선 및 총선에 가까운 시기에 가서는 '정치적 성향파악의 잣대' 및 '가족법 개정 및 절차' 프레임이 우세했다. 각 신문사별 특성은 조선일보의 경우 호주제를 남성중심 사회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관습으로 바라보면서 기존 전통유지를 강조하는 프레임을 보여주었다. 반면, 한겨레는 호주제를 여성 권익의 향상과 관련짓고 양성평등의 확대를 주장하고 있었다. 국민일보는 호주제 폐지는 여성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시작이며 이 같은 시대적 윤리의 변화를 수용하는 법개정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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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시대 한국 하청애니메이션에 대한 연구 - 1970-80년대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 (A Study on Subcontract Animation in Korea during the Industrialization Era - Centered around Animations in 1970-80s -)

  • 김종옥
    •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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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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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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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1966년 TBC 동화부의 황금박쥐로 시작된 한국 하청애니메이션의 역사를 1980년대 시기까지 분석하여, 한국애니메이션에서 30년 넘게 진행되어 온 하청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재조명하였다. 이를 위해 하청애니메이션 제작사 제작현황 산업의 규모 등 하청애니메이션 개괄적인 상황을 통해 당시 OEM산업의 실태를 점검하였고, 애니메이션이 하청제작산업으로 고착화된 배경을 시대상황과 연계하여 분석하였다. 또한 이를 기반으로 하청애니메이션산업이 발생시킨 문제점과 한계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 창작애니메이션을 활성화하기 위한 새로운 모색에 대한 분석을 통해 애니메이션 역사 연구의 지평을 넓혀보고자 하였다. 1970년대는 중화학공업 육성과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이 국가적 목표였던 시기였다. 70년대 후반부터 애니메이션도 해외애니메이션 하청 수주를 통해 수출 주력산업으로 주목받았다. 하청 해니메이션 제작의 확대는 당시 대중문화에 대한 국가의 정책과 칼라TV보급, 비디오 제작 시장 활성화 등의 매체 변화로 극장용 애니메이션 관객이 축소된 점에도 영향을 받았으며 경제적 논리로 자체 애니메이션 제작을 기피했던 방송사 등 플랫폼 부재도 그 원인이었다. 하청애니메이션산업은 애니메이션 인프라의 구축과 신진 인력 양성 등 애니메이션 환경을 확장시켰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술집약적인 '프로덕션' 단계 중심의 발전은 기획력 등 '프리 프로덕션'의 부재와 '포스트 프로덕션(후반작업)'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전문인력 양성에 왜곡된 구조를 만들었고, OEM산업으로 축적된 자본을 창작애니메이션 제작에 재투자하여 내수시장을 형성하지 못한 점은 부정적 측면으로 평가된다. 애니메이션은 한 나라의 문화적, 정신적 산물이다. 따라서 전문인력의 양성과 우수한 작품의 창작,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는 시장의 형성 등 창작애니메이션 활성화를 위한 체계적인 지원 정책이 모색되어야 한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산업이지만 하드웨어 중심의 제조업이 아닌 창의력에 기반한 문화산업이라는 인식은 없었다. 이러한 인식의 부재로 이 시기 한국 애니메이션은 독자적인 작품 제작을 위한 장기적인 계획과 투자를 통해 시장을 만들고, 창작애니메이션을 활성화하는 어떠한 정책 방안도 마련하지 못했다. 이러한 시도는 1990년대 이후 한국도 창작 애니메이션 보호 육성을 위한 다각적인 모색을 통해 새롭게 시작된다.

타이포그라피의 한국성 연구 - 단순 미학, 그 고유성의 근거에 대하여 (A Study on Korean Style of Typography - Aesthetic of Simplicity, the Essence of Style)

  • 유정미
    • 디자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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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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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5-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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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
  • 1970년대 후반에 소개된 디지틀 기술과 함께 우리 인류는 지금 산업화 시대로부터 '정보화 시대'로 이동해가고 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기존의 현실 인식 체계를 바꾸어 놓을 만금 놀라운 것이다. 한국은 고유한 문자와 언어를 지니고 있는 민족이다. 그러나 타이포그라피 분야는 우리만의 고유한 규범을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있으며 국제적인 보편성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대 한국의 타이포그라피는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인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체계를 지니지 못한 채 복잡하고 장식적이며 혼란스러운 양상을 자주 드러내고 있다. 심지어 젊은 디자이너를 중심으로 서구 스타일을 무분별하게 모방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철학을 확립해야 할 때이다. 다양하게 변해 가는 정보화 사회 속에서 어떻게 한국적인 고유성을 확보할 것인가? 어떻게 보편적인 국제성을 지니고 세계 문화에 기여 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한다. 이 연구에서는 한국적인 고유성을 갖는 철학의 바탕을 우리 전통 문화에서 찾고자 한다. 또한 한국 현대 타이포그라피에 적합한 통합의 방법을 모색하고자 스위스 모더니즘의 철학을 연구해 보고자 한다. 스위스 타이포그라피는 그 간결함과 단순함의 미학을 특징으로 했다는 점에서 한국 전통의 미의식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이에 본 연구는 이 두 방향간의 공통적인 철학을 토대로 우리에게 적합한 새로운 한국적 타이포그라피의 규범을 확립해 보았다. 첫째, 가독성을 우선시하는 디자인 양식의 개발. 둘째 , 내용의 핵심을 담아낼 수 있는 디자인 셋째,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디자인 태도의 견지 마지막으로 전통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닌 정신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는 세계적인 조류를 무비판적으로 따르기보다 우리 한글에 맞는 적절한 규범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한 시점이다. 우리 전통의 미의식에 대한 연구가 우리에게 '좋은 디자인'의 해답을 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객관적이고 간결한 양식인 스위스 디자인에 대한 탐구가 세계적인 보편성을 확보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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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성과 문화경관으로 해석한 태안 백화산의 다층적 종교 관성 (A Study on the Multi-Layer of Religious Inertia Represented in Sense of Place and Cultural Remains at Mt. Bak-wha)

  • 노재현;박주성;고여빈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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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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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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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는 태안 태을암 마애불사원을 중심으로 한 백화산의 장소성과 문화경관 특성을 조사 분석하여 이 지역 일대에 산재하거나 내재된 경관에 대한 표현방식과 그 의미를 논의함으로써, 백화산 일대의 경관지리코드와 종교적 장소 관성을 조명하고자 하였다. 경관대상 백화산의 입지성과 골산(骨山)으로의 특이성 못지않게 백화산을 시점장(視點場)으로 조망되는 파노라믹한 서해 조망은 관음도량으로서의 백화산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고지도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중요하게 읽혀지는 고성(古城)과 봉대(烽臺) 그리고 태을암은 조선조 백화산의 장소정체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어풍대, 영사대 등 다수의 각자(바위글씨)는 이 산의 조망성과 장소 특성에 기인한 기념성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단군 영정의 태일전 이안(移安) 사실은 백화산이 갖는 국가적 위상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삼성각에 봉안된 단군 영정 등을 통해 토착 종교와 공생하며 오랜 시간 이어져온 보편적 지역성도 공유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태을암에 모셔진 백제시대 불상인 태안마애삼존불은 관음신앙의 도량인 백화산의 존재이유이자 상징체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장소성에도 불구하고 태을암 마애불 전면에 조성된 '태을동천' 각자를 중심으로 한 계류 및 연못공간인 일소계와 감모대 그리고 그 위에 새겨진 암각바둑판과 조선 중기 이후 유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다수의 각자 흔적을 통한 도가적 문화현상 또한 동일한 무게로 읽혀지는 것은 조선말기 팽배된 유불선의 합일사상이 기저에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문화경관의 혼재사유는 백화산이 갖는 종교적 장소 관성이 꾸준히 유전하면서 시대정신에 습합해온 결과가 아닐 수 없으며, 백화산에 산재된 여러 유형의 문화경관요소는 태안 백화산의 다층적 장소성과 경관 특성을 이해하기 위한 고유의 지리코드로 이해된다.

기업정보화와 정보인권보호 (The information of the businesses and the protection of information human rights)

  • 하우영
    • 한국정보보호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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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정보보호학회 2003년도 동계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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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3-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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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기업의 정보화 추진은 첨단의 정보처리기술이 기업영역으로 흡수되면서 기업사회에 기업의 효율성 제고라는 효과와 함께 노동자의 정보인권보호라는 문제가 서로 충돌하는 위험성도 확대되고 있어 대책마련이 요구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보호에 대한 무감각은 경영의 효율성을 요구하는 왜곡된 사회구조에 의해 뒷받침된다. 자본과 언론이 경제위기의 심각성을 경고하게 되면 이 불안감에 정치권은 정보보호의 측면을 외면하고 경영의 효율성에 지향된 법정책을 채택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정보보호의 중요성은 경영의 효율성보다 작은 이익으로 평가되기 마련이며, 결과적으로 노동자의 인권침해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정보처리기술의 발전과 함께 기업의 정보화는 노동자의 행동을 보다 더 철저히 감시·통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산업현장에 새로이 파생된 정보인권 침해문제는 한편으로 정보보안의 확립과 함께 정보처리기술을 이용한 노동통제를 규제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의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정보의 활용이 많은 효율성을 가진다 해도 인권의 침해가 없는 기업생활의 보장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는 헌법정신의 구현이며 시대적 요청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정보인권 시대에 걸맞은 관련 법률의 제정과 개정 등의 정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산재된 정보보호 관련규정을 통합하고 온-오프라인의 접목 등 다양한 영역을 포괄할 수 있는 공통원리를 적용하여‘개인정보보호기본법’(가칭)을 제정할 것을 제안한다. 그 기반 위에 노동법상으로 산업현장 이라는 특수영역에서의 정보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동조합의 주도적 참여를 보장하는 등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정보인권보호 방안을 구축해 나가야 할 것이다.측면에서 매우 경제적인 Uncoupled scheme이 추천된다.는 못하였다.달팽이에서는 거의 검출되지 않은 반면 왕우렁이에서 다소 높게 검출되었다. 중성지질의 지방산 조성은 식용달팽이 경우 $C_{18:2}(16.80{\sim}17.74%)$, $C_{20:2} (12.15{\sim}12.59%)$, $C_{18:1}(9.79{\sim}10.37%)$$C_{18:0}(7.71{\sim}12.43%)$$C_{16:0}$, $C_{20:4}$ 함량이 많으나 그밖에 melanic type에서 $C_{18:3}(20.90%)$ 함량이 매우 높았으며, 또한 polyene산 함량도 가장 높게 나타났다. 왕우렁이는 $C_{16:0}(16.96{\sim}17.46%)$, $C_{18:1}(13.79{\sim}13.95%)$, $C_{18:2}(12.90{\sim}15.70%)$$C_{18:0}$, $C_{20:4}$, $C_{22:6}$이 주성분으로 type별로 그 조성이 비슷하였다. 당지질은 식용달팽이 경우 $C_{18:2}(19.01{\sim}19.72%)$, $C_{16:0}(12.89{\sim}18.76%)$, $C_{18:0}(12.68{\sim}17.52%)$$C_{18:1}$이 주요 지방산이었으나 이중 $C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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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식물 파초(Musa basjoo) 식재 양상과 그 의미 - 조선시대 옛 그림 분석을 중심으로 - (Aspects and Significance of Musa basjoo, a Landscaping Plant - Focused on Analysis of Old Paintings of Chosun Dynasty -)

  • 노재현;김영숙;고여빈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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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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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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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파초의 상징적 의미와 이미지 그리고 식재 의미를 개관하는 한편 총 77엽의 조선시대 옛 그림 속 파초의 식재경향과 식재위치 그리고 파초가 등장하는 도엽의 특성을 분석함으로써 파초 식재의 양상과 그 의미를 추찰(推察)할 목적으로 시도된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파초는 기다림과 별리(別離), 미인 등의 꽃말뿐만 아니라 부귀와 기사회생(起死回生)을 상징하는 대용물이었으며, 도교적 의미로는 선인(仙人)의 풍취를 자아내는 대상이었다. 또한 불교적 언어로는 덧없는 인간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탈속(脫俗)의 상징물이기도 하였다. 정원풍속도 및 고사인물도 또는 계회도에 빈번히 등장하는 파초는 탈속적 정취를 높이고 선비들의 아회(雅會)를 품격화하기 위한 소도구이며 장치로 보이는 바, 학과 사슴의 등장빈도가 높음은 이러한 경향을 반증한다. 또한 평생도(平生圖), 성시도(城市圖), 경직도(耕織圖) 등 특정 도상 속 파초의 의미는 부귀와 번영을 염원한 것으로 보이며, 사찰에 심겨진 파초는 인간사의 무상함을 환기시키는 탈속적 의미와 함께 '믿음의 구법'을 염원하는 의미도 함께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파초 식재를 통한 기대 효과로 '비가 내릴 때 파초 잎을 울리는 소리경관'의 체험을 추구하고자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넓은 잎을 지닌 (벽)오동나무 또한 가옥 근처에 파초와 같이 빈번히 발견됨에서도 확인된다. 한편, 파초의 식재장소는 주로 사랑채를 중심으로 한 전정이나 측정에 주로 단식이나 모아 심기한 것으로 보이며, 건물 내 파초 식재 위치는 우(雨)경관의 청음(聽音)이 용이한 침실 근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파초와 같이 등장하는 괴석 또는 암석의 표현은 일종의 의경(意景) 구축의 수단이며, 아취 있는 완상(玩賞)을 위한 소재 조합의 산물로 보인다. 또한 옛 그림 속 등장인물은 주연의 경우, 풍류 등 선비활동과 관련이 높았으며, 조연의 주요 행위는 생활활동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조선조 17 18세기 파초는 아취 있는 정원의 구성과 묘사를 위한 긴요한 상징물이었다. 파초 식재문화는 선비들의 수양론적 의미대상이기도 하였다. 우경적(雨景的) 이미지 제공 및 자강불식(自彊不息)과 기사회생의 정신을 담았던 조선조 선비문화의 퇴조와 함께 파초는 우리나라 도시공간에서도 그 궤적을 같이 하여 퇴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광제정(光霽亭) 장소 전승의 함의와 의미맥락 (Implication and Its Meaning Contact of Gwangje-jeong's Place Transmission)

  • 노재현;이석우;이정한;정경숙;김영숙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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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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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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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전북 임실군 삼계면에 소재한 광제정의 건립 배경 및 연혁 그리고 장소 및 공간특질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통해 광제정 조영 및 이건(移建)에 담긴 상징과 장소적 함의를 추찰(推察)할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옛 광제정 터와 현 광제정에 대한 '물리적 환경 인간활동 상징성과 의미'를 중심으로 해석할 때 다음과 같은 장소성과 장소전승의 의미가 도출되었다. 정명(亭名)의 '광제(光霽)'란 선비로서 혼탁한 속세에 물들지 않겠다는 매당(梅堂) 양돈(楊墩)의 지조를 상징하며, 이는 매당 생존의 시대상황과 무관치 않다. 광제정의 누정제영을 통해, 은일을 실현코자 한 매당의 심정과 광풍제월의 마음으로 우뚝 선 기상이 엿보인다. 광제정중건기를 통해 볼 때 광제정에 매화를 심고 광제라는 현판을 내건 주체가 바로 매당 자신이며 매당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광제정은 매당을 기리는 상징물로 존재해 왔는데 이는 경사지를 이용해 조성된 돈대(墩臺)와 매화 식재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광제정 입구 '숙호(宿虎)마을'과 광제정 우측으로 돌출된 '복호암(伏虎巖)'은 매당을 배향하는 공간이라는 장소성이 함축된 표현이며, 이곳에 새겨진 양집하의 5언시에도 매당을 추념하는 공간 아계사(阿溪祠)의 장소성이 잘 묘사되어 있다. 매당을 배향한 아계사가 고종5년(1868) 훼철되면서 그 유지(遺址)는 '광제정 이건을 위한 터'로의 쓰임새를 보였다. 광제정 건립 이후 최소 359년간 이어져 왔던 후천리 옛 광제정 터와 그 주변은 광제정의 이건에도 불구하고 '광제정 광제마을 광제교 광제천' 등의 지명 속에 '광제'라는 전부지명소로 남아 매당을 기리는 장소로 전승되고 있다. 광제정은 남원 양씨 종중의 '연대의 공간'이라는 뚜렷한 구심적 장소로, 전승될 수 있었던 배후에는 선조의 덕업을 숭상하며 시대적 고민을 함께한 후손과 종중 및 교우자 간의 동료의식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장소 전승의 이면에는 매당의 인품과 '광풍제월'의 기상을 기리고자 하는 추모의 정 그리고 선조의 덕업을 이어받아 지켜나가는 '봉선(奉先)'의 정신이 깊이 작용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21세기 바람직한 정부조직과 정부조직법 (The Government Organization Act and the Desirable Government Structure in the 21st Century)

  • 성낙인
    • 법제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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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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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1-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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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첫째, 정부조직은 그 출발에서부터 국가형태 정부형태와 연계되어 논의되어야 한다. 현실적으로는 정부조직 법정주의와 비법정주의의 조화가 필요하다. 우리의 정부조직 법정주의에서 정부조직의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새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새 정부가 요구하는 정부조직을 의회는 가급적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이를 통해서 정부조직 법정주의의 경직성을 완화시켜 주어야 한다. 하지만 새 정부의 정부조직이 지나치게 많은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자칫 헌법이 추구하는 정부조직 법정주의의 본질을 훼손시킬 우려가 있다. 그런 점에서 새 정부의 지나치게 자의적인 정부조직 변경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정부조직은 장기적 안정성을 담보해야 한다. 둘째, 행정각부가 아닌 일반적인 행정기관은 국무총리의 통할을 받지 아니하고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해서는 아니 된다. 헌법이 대통령${\rightarrow}$국무총리${\rightarrow}$행정각부의 하이라키를 형성해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rightarrow}$집행기관을 설치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위헌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대통령실에는 대통령비서실과 특수한 임무를 가진 기구의 설치에 한정되어야 하며, 대통령실에 일반행정기관을 편의적으로 설치하는 것은 현행헌법의 정신에 어긋난다. 셋째, 국무총리실은 명실상부한 내치의 중심축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국가의 나아갈 방향을 그리는 큰 정치에 전념해야 한다면, 국무총리실을 중심으로 한 내각은 국가의 일상적인 업무를 총괄해야 한다. 넷째, 집행기관의 두 축은 총리실과 행정각부가 된다. 잦은 행정각부의 명칭 변경에 따른 혼란을 수습하고 아울러 전통적인 행정 각부의 명칭과 권위를 복원시키고, 국가의 정통성을 회복시켜야 한다. 한국적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서는 민주법치국가의 공고화를 위한 제도적 설계가 필요하다. 또한 공안부처와 경제부처도 시대적 현실에 부응한 개혁의 필요성이 높다. 또한 시대변화에 순응하는 기술과 정책의 융합을 합리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진단의 내단이론과 삼교회통론 (The Theory of Chen tuan's Internal Alchemy and Intermixture of Taoism, Buddhism and Neo-Confucianism)

  • 김경수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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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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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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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진단은 도교 내단이론의 정립자이며, 북송 이래 사상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다른 종교의 장점을 자신의 이론체계에 받아들이고 있음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그는 도교 수련과정의 논리적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유교의 역학(易學)을 도교 비전(秘傳)의 역학으로 대치하고, 육신과 정신의 이중구조를 통합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선불교의 마음수행법을 자신의 체계 속으로 끌어들였다. 진단의 내단이론은 정기신(精氣神)의 개념에 기반하여 '연정화기' '연기화신' '연신환허'의 단계로 수련하는 도식이다. 진단이 말하는 내단수련이란, '도교 방식으로 해석한 "주역"의 근본원리에 바탕을 두고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선(禪)의 수행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고요함의 끝에서 온갖 변화에 신묘하게 통할 수 있고 지혜가 충만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미묘한 정(精)의 흐름을 간취하여 이것을 기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거쳐서 결국 복귀무극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그는 "무극도"를 그려서 표현했다. 동양철학은 인간을 '현상적 존재'와 '본원적 존재'로 구분한다. 이러한 '존재 규정'으로부터 수도론의 논리가 성립된다. '자아' 또는 '자기'라는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현상적 존재'로부터 '본원적 존재'로의 회귀 내지는 도약 방법이 결정된다. 도교 내단이론의 정립자라 할 수 있는 진단은 이런 측면에서 독특한 내단수련론과 삼교회통론의 체계를 확립한 인물이다. 오늘날은 '자아상실의 시대' 또는 환경오염으로 인하여 생기는 '난치병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자아의 회복과 건강한 삶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연결짓는 진단의 수련론에 대한 검토와, 여기에 기초한 새로운 수련법의 모색은 여전히 의미 있는 일이다.

정읍 무성서원과 선비문화 원류 최치원 (Choi Chi-won, the Originator of Jeongeup Museongseowon and Scholar Culture)

  • 안영훈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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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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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3-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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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전라북도 정읍은 한국 사상사에서 주목을 요하는 지역이다. 또한 정읍은 문학사에서 '최초'를 기록한 작품이 많은 지역이다. 백제 노래 <정읍사>가 그렇고 조선시대 사대부 가사 <상춘곡>이 그렇다. 그리고 이 지역 태수를 지낸 최치원(857~?)의 선정과 풍류의 전통이 전해오는 고장이기도 하다. 이 논문에서는 정읍의 무성서원의 성립과정과 선비문화에 있어서 최치원의 연관성을 살펴보았다. 최치원이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고을 사람들이 선정에 보답하는 의미로 태산사라는 생사당을 건립하였고 그것이 근원이 되어 후대에 무성서원으로까지 이어졌다. 최치원은 자신의 포부와 역량을 정읍에서 실현하였다. 특히 조선중기 무성서원의 건립과 사액 과정에 최치원의 역할은 결정적이었기에 최치원은 이 지역의 상징적 인물로 되살아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무성서원을 중심으로 영정의 이안(移安) 작업을 통해서 최치원의 형상도 보다 유학자, 유학적 선비의 모습으로 좌정해나가는 것도 볼 수가 있다. 최치원이 남긴 시문을 통해서도 유학적 선비(지식인)로서 자각을 읽을 수 있다. 그의 시세계가 다양하지만 특히 유학자 지식인으로서 현실에서 오는 시름과 고뇌, 비판적인 내면의식 등을 표출한 작품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최치원은 남다른 포부와 각고의 노력으로 당대의 우뚝한 문사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는 하였으나, 그 자신 주변국의 한 시인으로서의 지역적, 정신적 소외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따라서 세계인식 면에서의 치열성은 자연히 내면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그의 작품으로 하여금 강한 서정성을 가지게 한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최치원의 문집에는 당대의 말기적 현상에서 초래된 다양한 형태의 병리적 현상을 강한 어조로 비판한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는 가난하고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가 하면, 왜곡된 생산관계 속에서 결국 희생되고 마는 가련한 백성들의 삶의 실상을 형상화함으로써 당대의 잘못된 사회의 단면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로 읽을 수 있다. 선비의 사전적 정의가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특히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 또는 신분계층을 가리키는 유교용어'이고, 오늘날 의미로는 '신분적 존재가 아니라 인격의 모범이요, 시대사회의 양심으로서 인간의 도덕성을 개인 내면에서나 사회질서 속에서 확립하는 원천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할 때, 최치원의 문학에서 고뇌하는 모습은 곧 선비(지식인)의 고뇌이고 '선비(士)'로서의 책무를 자각하였기에 나오는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최치원은 가장 이른 시기의 선비(지식인)의 원류라고 보아도 크게 잘못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