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삼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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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북(崔北) 문인화(文人畵)의 광견적(狂狷的) 예술심미 (Art Aesthetic on madness and stubborn of Choi Buk's Muninhwa)

  • 김도영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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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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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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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최북(崔北)(1712~1786)은 중서층(中庶層) 출신의 여항화가(閭巷畵家)로서 시(詩) 서(書) 화(畵)를 겸비한 삼절작가(三絶作家)이다. 신분적 차별에 대한 저항적 냉소와 스스로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광방불기(狂放不羈)한 광기(狂氣), 그리고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 대한 자부심으로 인한 오만(傲慢)과 명인(名人) 의식 등을 탈속적(脫俗的) 문사적(文士的) 문인화를 통해 개성적 화풍(畵風)으로 광견(狂?)하게 발현하였다. 그의 문인화는 시화일치(詩畵一致)라는 시의도(詩意圖)가 많으며, 화법(畵法)은 근력(筋力)을 위주로 하여 불구격투(不拘格套)의 광필(狂筆)로 대상물을 묘사하였고, 파격적 구도와 필선의 간일(簡逸)함, 여백과 색채의 독창적 운용으로 한 차원 높은 예술의경을 발현하였다. 그의 문인화는 광자(狂者)의 오만한 듯한 진취적 기상과 견자(?者)의 변혁적 심미를 고수하고자 하는 예술관이 작품에 자연스럽게 투영되었다.

이정직(李定稷)의 서예론과 한(韓)·중(中) 서예가 비평 (The calligraphy theory of Lee, Jeongzic and Criticism of Korean and Chinese calligraphers)

  • 김도영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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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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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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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1~1910)은 호남(湖南) 유학(儒學)을 대표하는 실학자이자 시(詩) 서(書) 화(畵)에 능통한 삼절작가(三絶作家)이다. 석정(石亭)의 서예술 활동은 창작활동 뿐만 아니라, 서예이론 및 비평가로써의 학문 활동을 들 수 있다. 석정(石亭)은 왕희지(王羲之)를 서예의 전범(典範)으로 삼아 경완(勁婉)을 진숙(眞熟)하게 연마하여 완숙(婉熟)해지면 저절로 조화로움의 경지에 도달하여 법고창신 한다고 보았다. 한편, "연석산방미정시고(燕石山房未定詩藁)" "제서결상론오고팔수(題書訣詳論五古八首)"에서는 석정(石亭)이 역대 서예를 연마한 후 느낀 종합적 견해를 이시론서(以詩論書)의 방식으로써 중국의 역대 서예가를 비평한 오언고시(五言古詩) 8수(首)가 있다. 여기에는 왕희지(王羲之),등 중국의 역대 서예가 11인을 선정하여 특징과 장 단점을 비평하였다. 또한, "원교진적(圓嶠眞跡)" "송하진적(宋下眞跡)" "창암서첩(蒼巖書帖)"의 제발(題跋)을 통해 한국의 원교(圓嶠), 송하(松下), 창암(蒼巖) 등의 서예가에 대해서도 나름의 서예비평을 하여 자신의 서예이론을 구축하였다.

소치(小癡) 허련(許鍊)의 회화(繪畵) 연원(淵源)과 심미경지(審美境地) 고찰 (A Study on the Sochi Heo Ryeon's Painting's foundation and the stage of Aesthetic)

  • 김도영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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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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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1-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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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조선 말기 진도(珍島) 출신의 소치(小癡) 허련(許鍊)(1808~1893)은 시(詩) 서(書) 화(畵) 삼절작가(三絶作家)로서, 호남 화단의 실질적 종조(宗祖)라 불리운 대표적 화가이다. 초의선사(艸衣禪師)로부터 유(儒) 불(佛) 도(道)와 함께 회화의 기초를 배웠고, 초의(艸衣)의 소개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문하생이 되었다. 이후 추사(秋史)의 문인지향적(文人指向的) 서화정신과 화이재도적(畵以載道的) 회화심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계승하였다. 그의 생애와 예술활동의 특징은 70이 넘은 만년(晩年)까지 지속된 주유(周遊)와 다작(多作) 활동, 그리고 주유(周遊) 기간의 세부사항까지 서술한 "소치실록(小癡實錄)"의 기록이다. 소치(小癡)는 사의적(寫意的) 남종화(南宗畵)를 지향하여 예황풍(倪黃風)의 산수화에서 자유분방한 갈필(渴筆)과 소산간일(蕭散簡逸)한 충담미(沖澹美)를 발현하였다. 또한, '허목란(許牧丹)'이라 불리울 만큼 운필변용(運筆變容)의 생동미(生動美)를 자아내는 모란은 괴석(怪石)을 함께 그려 부귀공명(富貴功名)에 대한 욕망과 문사적(文士的) 취향을 동시에 만족시켰고, 이후 가전(家傳)되어 '운임산방(雲林山房)'의 대표적 화목(畵目)이 되었다. 그의 토착화된 화풍(畵風)과 회화(繪畵) 심미(審美)는 200여년의 5대(代) 직계(直系) 화맥(畵脈)을 형성하여 지금까지 현대 한국화단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의 서예관과 서화미학 고찰 (A Study on Calligraphy theory and the Calligraphy and Paintings aesthetic of GangAm, Song Sungyong)

  • 김도영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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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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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3-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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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1913~1999)은 전북 김제 출신으로서 20C 마지막 유생(儒生) 서예가이자 시·서·화 삼절작가이다. 그는 평생 보발과 한복을 유지하며 선친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과 장인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의 학문과 사상, 서화예술을 구체신용론적(舊體新用論的) 관점으로 접근하여 인격 도야 및 정심(正心)을 유지코자 하는 주체적 철학정신을 견지하였다. 법고(法古)에 대한 충실한 계승이라는 '구체(舊體)'를 근간으로 어려서는 구양순을 중심으로 미불, 동기창을 익혔고, 국전 출품기에는 황정견, 한예, 오희재, 소전체 등을 접목하였다. 이후 1965년(53세)에 전주로 이거, 추사체 등 여러 서체를 자가화하여 무대자득(無待自得)한 강암체(剛菴體)를 이루었고, 기괴적이고 파격적으로 사의화(寫意化) 한 풍죽(風竹)으로 '신용(新用)'을 창출해 내었다. 또한, 서예의 본원적 정신과 자연적 예술미를 재점검하여 정체성을 재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부단한 탐신(探新)의 미학을 추구하여 현대서화의 심미를 확장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특히 풍죽은 사의(寫意) 정신을 원리로 한 추상성이 강하며, 수양론적으로는 궁리(窮理)와 진성(盡性)을 바탕으로 하여 이소관대(以小觀大)의 고아미(高雅美)를 발현한 화이재도론적(畵以載道論的) 이학미학(理學美學)을 구현함으로써 도예일치(道藝一致)를 이루었다. 전북 서단은 강암(剛菴) 시대에 최고봉을 이루면서 20C 말 한국서예의 중심 서단으로 자리 잡으면서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