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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불교미술에서 지표로서의 환경 (Environment as an Indicator in the Buddhist Art of Asia)

  • 이정희
    • 조형예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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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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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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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불교와 불교미술은 인도에서 발원하였지만, 그것들은 각 나라에 전파되면서 국제적인 환경을 만들어 냈다. 불교는 각 나라에 일종의 꾸러미의 형식으로 전파되었다. 예를 들면 불경, 불상과 불화의 도상과 양식, 건축과 그 기법, 복잡한 의식, 승려나 여승이 기거하는 사찰에서 건축적 요소와 그 기법들이 함께 소개되었다 불교의 시작은 인도의 아쇼카 왕조시기(reign of King Asoka)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후 각 나라의 정치적, 지적, 예술적, 종교적, 사회적, 자연적 환경, 지리적, 지질적 환경에 맞게 전개됐다. 불교미술은 토착화하면서 그 지역민을 닮은 상이 만들어 졌고, 또 지역마다 독특한 특색을 나타내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스투파(stupa)와 차이챠 홀(chaitya hall)은 수도원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곤 중앙아시아의 대상인들은 인도의 문화가 중국에 전해지는데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지나던 교역루트의 자연환경 덕분에 화려한 색채의 벽화들이 제작되고 보존될 수 있었다. 불교와 불교 미술이 중국과 한국, 일본에 전해졌을 때, 불교는 국가 제도와 사회적 조직의 일부가 되었다. 정치적 목적에 의해 거대한 불상들이 산속의 동굴에 만들어 지기도 했다. 중국은 스투파를 사각형의 기둥으로 변형시켰고, 기와를 얹은 지붕 형식의 탑을 만들어 냈다. 한국은 불교미술을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파시켰을 뿐만 아니라, 고유한 방식으로 그것을 변형시켰다. 석굴암의 깊은 명상에 잠긴 듯한 보살상들의 이미지가 그 좋은 예이다. 중국에서는 신유교 철학이 국-가의 공식적인 이념이 되면서 선종의 부흥하기도 했으며, 일본의 선승들은 신도들의 명상을 북돋기 위해 선종 형식의 정원을 만들어 냈다. 티벳의 밀교에서도 불교미술의 중요한 발전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밀교의 미술은 예술적 환경 뿐만 아니라, 지적이고 종교적인 것에도 속한다. 한편 티벳의 신들이 그들의 배우자를 안고 있는 모습은 신과 신자들의 융합을 상징하기도 한다. 불교미술은 독창적인 환경을 만들어 냈고, 여라 나라에 전파되면서, 상당한 변화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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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대 항주지역의 관음신앙 (Guanyin Faith in the Hangzhou Area during the Tang and Song Dynasties)

  • 김성순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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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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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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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이 논문에서는 인도의 관음신앙이 중국불교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항주지역 불교계를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관련된 교의와 실천을 구조화하고, 이를 수용하는 방식에 대해 고찰했다. 항주지역은 운하를 활용한 상업과 해상무역으로 축적된 부로 인해 불교교단들도 크게 성장했으며, 특히 송대에 이르러 선종교단이 왕성했다. 항주 천태교단의 지의(天台智顗)는 관음 관련 경전에 대한 재해석을 바탕으로 『청관음경소(請觀音經疏)』를 저술하고, 천태교학과 관음사상을 융합하여 '청관음참법(請觀音懺法)'을 체계화했다. 또한 자운준식(慈雲遵式)은 관음참법을 대중들의 수준에 맞게 일상의 의례로 재생산한 '청관음참(請觀音懺)'을 정비했다. 북송대 항주지역의 선종 교단인 법안종(法眼宗)의 영명연수(永明延壽)는 그의 저술 『지각선사자행록(智覺禪師自行錄)』을 통해 관음신앙을 '108事'라는 일상의 작은 수행 안에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불교에서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승려를 보살의 화신으로 숭배하는 현상도 나타나는데, 십일면관음보살로 믿어졌던 남조 제량(濟涼)의 보지(寶誌)화상이 바로 그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항주지역의 천태교단과 선종교단의 승려들은 이러한 신이승(神異僧)의 관음화현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관음신앙을 통해 신도들을 흡수하려 했던 송대 불교의 일면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도쿄 오쿠라슈코칸 협저보살좌상(東京 大倉集古館 夾紵菩薩坐像)을 통하여 본 한국 협저불상의 제작기법 (The Production Techniques of Korean Dried-lacquer Buddha Statue seen through the Seated Dried-lacquer Bodhisattva Statue in Okura Museum of Art in Tokyo)

  • 정지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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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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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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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논문은 도쿄 오쿠라슈코칸(東京 大倉集古館)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협저보살좌상(夾紵菩薩坐像)의 연구를 통하여 한국 협저불상에 나타나는 제작 기법과 재료에 관하여 고찰한 것이다. 연구방법으로는 먼저, X-ray 데이터와 현장조사결과를 종합하여 이 상에 나타나는 제작기법과 재료의 특징을 분석하였다. 이것을 기초로 제작과정에 대한 가설을 세운 다음, 검증을 위하여 실제 제작과정을 재연하고 각 공정에 적용된 기법의 특징과 재료에 대하여 상세히 서술하였다. 특히, 협저기법과 재료 부분에 있어서는 육안관찰 결과를 토대로 문헌자료와 비교 검토하며 추정하였는데, 칠예기법의 교과서격인 명대(明代) 황성(黃成)이 편찬한 "휴식록(?飾?)"의 기록을 중심으로 적용하였으며, 한국의 전통나전칠기 제작기법에 사용되고 있는 재료도 참고하였다. 그 결과, 오쿠라슈코칸상에 나타나고 있는 제작기법과 재료의 특징은 호놀롤루 미술관(Honolulu Museum of Art)에 소장되어 있는 송대(宋代) 원부2년명(元符二年銘 1098) 협저나한좌상(夾紵羅漢坐像)과 많은 부분에서 유사성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원형(原型)의 흙과 심목을 제거한 후 새로 심목을 제작하여 넣지 않아 상의 내부가 텅 비어 있는 점이나, 소상(塑像)의 단계에서 완전한 형태를 만들어 베 바르기를 하는 점, 소상의 흙과 심목은 상의 아랫부분을 통해서 제거하는 점, 모델링(Modelling) 작업 단계를 거치지 않으며 마감층이 매우 얇다는 점 등이 공통된 특징이다. 그 외에도 보발과 영락 등 장식물을 가소성 재료로 따로 만들어 상을 장엄하는 것은 송대에 크게 유행하였던 기법으로, 오쿠라슈코칸상이 송대의 협저불 제작기법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에 대해 시사한다. 한국 협저불상에 대해서는 기원과 역사에 관한 명확한 기록이 전하지 않으며, 현존하는 작품도 매우 한정되어 있다. 원풍연간(元豊年間 1078~1085)의 협저불상 전래를 알 수 있는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의 기록도 최초의 전래시기로는 보기 힘들다. 또한 현재 남아 있는 협저불상들을 통해 제작기법의 전래경로를 명백하게 찾아내기도 그리 쉬운 상황만은 아니다. 그러나 본 연구를 통해 오쿠라슈코칸상을 위시한 현존하는 한국의 협저불상들은 적어도, 협저불상 제작기법의 정설처럼 알려져 있던 기존의 일본 탈활협저불상의 제작기법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음을 밝혀낼 수 있었다.

천수관음의 수인에 나타난 의미 분석과 시각화 (Semantic Analysis and Visualization on Mudras of Sahasra-bhuja Aryavalokitesvara Bodhisattva)

  • 김영덕;김경덕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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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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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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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논문에서는 유형문화재인 오대진언집에 기술된 천수관음 42수에 대한 의미 분석과 그에 따른 응용으로 시각화 콘텐츠를 구현한다. 천수관음은 각 손에 다양한 지물을 가지면서 내포하는 상징적 의미가 차이가 있으므로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미 분석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천수관음의 수인을 밀교의 기본적인 불보살 분류법인 5부에 따라 각 수인을 분석하고, 시각 콘텐츠로서 42수 의미에 따른 관음상을 나타내는 디지털 콘텐츠를 구현한다. 이러한 콘텐츠의 저작은 천수관음 수인에 대하여 일반인들의 접근성을 용이하게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수인의 응용으로는 게임 콘텐츠 및 전통문화 콘텐츠 개발 등이 있다.

CT 조사를 통한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소조보살상의 제작 기법과 재료적 특성 연구 (A Study on the Production Techniques and Raw Material Characteristics of Clay Bodhisattva Excavated from the Neungsan-ri Temple Site Using CT)

  • 신연홍;노지현;김지호;박학수
    • 박물관보존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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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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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3-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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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소조상은 흙을 이용해 형상을 새기거나 빚어서 만든 것으로 특히 백제의 소조상은 주로 사찰과 관련된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어, 백제의 불교미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백제 소조상과 관련한 연구는 출토 위치에 따른 백제 사찰의 성격과 소조상의 역할, 지역별·형태적 특징 비교를 통한 제작 기법 연구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소조상의 제작 기법에 관한 연구는 육안 관찰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으로 보다 상세한 제작 기법과 사용 재료 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밀한 과학적 분석이 필요하다. 본 연구에서는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소조보살상을 대상으로 컴퓨터 단층촬영을 진행하고, 소조상의 제작 기법과 재료적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소조보살상은 얇은 나뭇가지 또는 갈대류 여러 개를 지푸라기 등으로 묶어 원통형으로 만든 심을 사용하여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수비 과정을 거친 매우 고운 태토를 사용하였고, 태토의 내부에는 태토 간의 접착성을 높이고 수축 과정에서의 균열과 갈라짐을 방지하는 초본류가 존재했었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입자가 고운 태토는 소조상의 내부와 외부의 밀도가 다르게 관찰되었는데, 이를 통해 소조보살상은 원통형의 심을 중심으로 태토를 접합하여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다시 태토를 덧바른 다음, 세부 형태와 문양을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과 기록자료로 본 황해도 성불사(成佛寺)의 불교조각 (Buddhist Sculptures from Seongbulsa Temple in Hwanghae-do Province as Seen through Gelatin Dry Plates and Archival Materials from the Collection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허형욱
    • 박물관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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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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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8-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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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일제강점기의 유리건판 사진과 조선총독부박물관 공문서는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북한 지역 소재 문화유산이 큰 피해를 입기 전의 모습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이에 최근 유리건판과 총독부박물관 문서를 활용한 북한 지역 불교조각 연구가 증가하고 있으며, 본고에서는 황해도의 대표적 사찰 중 하나인 황주 성불사의 불교조각에 대해 기존 성과를 바탕으로 몇 가지 새로운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문헌기록을 토대로 성불사의 연혁을 정리하고 현황을 짚어본 후, 유리건판 속 존상별 제작시기와 조성배경 등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성불사 불교조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1945년 해방 이전 성불사의 불교조각은 보살상 2건, 여래상 4건, 삼존상 1건의 총 7건이 확인된다. 제작시기에서는 고려 전기 2건, 고려 후기 1건, 조선 전기 3건, 조선 후기 1건의 분포를 보인다. 이 가운데 오늘날 실물이 남아있는 2건이 주목된다. 먼저 성불사 응진전에서 촬영되었다는 고려 전기 석조약사여래좌상이다. 이 상의 당시 대좌 실측도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현재 정방산 내금강 골짜기의 옛 상원암 터에 전하는 머리없는 석조약사여래좌상 및 대좌 부재와 일치함을 알 수 있었다. 이 판단이 맞다면 북한 지역에 전하는 고려 전기 불교조각의 작례를 새롭게 확보하는 것으로서 의의가 크다. 다른 하나는 성불사 극락전에서 발견된 조선 1454년(단종2) 작 금동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다. 이 상은 현재 사리원력사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조선 전기 이북 지역에서 확인되는 소형 금동불의 기년작으로서 중요하다. 본고는 성불사라는 단일 사찰에 초점을 맞추어 북한 지역 불교조각을 고찰한 사례 연구이다. 앞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자료가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된다면 우리나라 불교조각사의 연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광주 점복(占卜)문화의 실상과 특징 (The Real States of Affairs and Features of Fortune-Telling in Gwang-Ju)

  • 표인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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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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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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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요즈음은 세습무계가 약화되고 강신무 계열의 무속인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게 되면서 강신무인 점쟁이도 굿을 주재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점쟁이가 공공성과 정치성을 지녀 그 위상 또한 상당했을 것으로 보이고, 오늘날은 점쟁이를 하나의 직업인으로서 인식해 가는 추세이다. 점쟁이는 부업이 아니라 주업으로써 활동하는 경우가 많고, 전반적으로 그들의 학력은 낮은 것으로 판단되지만, 대졸도 11명이나 된다는 점에서 학력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것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점집의 성격은 점치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다른데, 점집의 상호명을 통해서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점쟁이 가운데는 신내림을 받은 사람이 많은데, 대부분 개인 신당을 소유하며 신당에는 주로 조상신류, 장군신류, 불교신류, 자연신류(천신, 용신 등), 도교신류, 기타 등을 모시고 있다. 그리고 점집의 상호를 보면, '${\bigcirc}{\bigcirc}$보살' 혹은 '${\bigcirc}{\bigcirc}$사(寺)'나 '${\bigcirc}{\bigcirc}$암(庵)'이라는 명칭이 많은데, 불교와 종교적인 친연성도 있겠지만 무속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을 희석하기 위해 불교적인 색채를 덧입힌 것으로도 보인다. 점집이 집단화된 지역을 보면 계림동 오거리, 양동 닭전머리, 중흥동 향토문화거리를 들 수 있다. 먼저 계림동 오거리권은 계림동과 산수동에 인접한 곳으로 주변에 계림시장과 대인시장이 있으며 점집이 72개로 15%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양동 닭전머리권은 월산동과 양동에 가까운 지역으로 배후에는 양동시장을 끼고 있는데 점집이 96개로 19%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중흥동 향토문화거리권은 중흥동과 우산동에 인접하며 인근에 북구청과 전남대학교 그리고 말바우시장이 자리하는 곳으로 점집이 106개로 21%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점치는 방법은 학습을 통하여 점치는 점쟁이와 강신을 통해 점치는 점쟁이에 따라서 큰 차이가 있다. 전반적으로 점책에만 의존하여 점치는 경우는 22%이고, 어떤 식으로든 영력에 의존하여 점치는 경우가 72%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면, 대다수 점쟁이는 영력을 이용하여 점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점의 종류는 일생의례와 관련된 것으로 궁합 결혼 이혼 등 애정운이 있는가 하면, 가족과 관계된 것으로 작명 취업 진로 입시 사업 병고 액막이 등 가족운이 있고, 조상과 관련된 묏자리 이장 이사 등이 있다. 점치는 과정은 준비 단계, 점사를 공수하는 단계, 점사의 결과를 실천하는 단계로 이루어지고, 이들은 서로 순차적이면서 단계별로 연계되어 있다. 첫 번째 준비 단계는 다시 의뢰자의 기본정보를 확인하는 과정과 신의 강림을 청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의 강림을 청할 때 주로 사용하는 점구는 징과 방울이다. 두번째 공수단계는 강신의 점쟁이가 영적인 힘을 얻어 공수를 주는 과정이고, 학습의 점쟁이는 점책을 확인하여 점사를 의뢰자에게 일러주는 때이다. 공수단계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점구로 쌀과 엽전을 들 수 있다. 세 번째 실천단계는 점사의 공수 내용을 실천하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점사 후 처방하는 절차를 말한다. 점쟁이의 처방으로는 굿을 하도록 권하는 경우가 많고, 그 다음으로 부적을 써 주는 순이었다. 광주지역 점복문화의 특징을 보면, 먼저 점쟁이와 보살의 역할이 병행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으며, 점집이 굿당의 역할까지 함께 수행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점집은 집단화되고 있는데, 주거환경개선사업의 영향으로 점집들이 밀집된 곳으로 이동해가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학습 계통의 점쟁이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고, 젊은 층의 점집 이용이 증가하고 있으며, 가족적인 것보다는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점집을 찾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심향사 극락전 협저 아미타불의 제작기법에 관한 연구 (A Study of the Dried-lacquer Amitabha Buddha Statue from Simhyangsa Temple)

  • 정지연;明珍素也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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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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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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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논문은 전라남도 나주시 대호동 심향사의 극락전 내에 안치되어 있는 협저아미타불상의 구조 및 제작기법에 관해 고찰한 것이다. 연구방법으로는 X-ray 투과촬영 데이터와 2차례에 걸친 현장조사결과를 종합하여 검토하였으며, 파손된 부분에서 박락된 시료를 분석하여 바탕층의 구조와 재료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사 결과, 심향사상은 심목을 상 내부에 짜 넣지 않은 완전히 텅 빈 상태의 협저불상이며, 외부 옷주름의 요철(凹凸)과 동일한 옷주름이 내부에도 뚜렷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에 원형(原型)이 되는 소조상(塑造像)을 조성하는 단계에서 거의 완전한 형태로 만들어 협저층을 올린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원형의 흙과 심목(心木)을 제거하기 위해 정수리에서 뒷목까지 사선으로 절개하였으며, 다른 부분에서는 절개선이 확인되지 않는다. 머리를 절개한 부분에는 꿰맨 흔적이 없고 접착제(칠(漆) 혹은 호칠(糊漆))를 사용하여 접착한 것이 관찰되었다. 눈의 검은자위 부분에 구슬을 감입하였고, 양쪽 귀와 손, 치마(裙)의 띠와 매듭은 나무로 제작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후기 제작으로 알려진 선국사 협저불좌상이나 동경 오쿠라집고관 협저보살좌상, 그리고 조선초기 작품인 죽림사 협저아미타불좌상, 불회사 협저비로자나불좌상, 실상사 협저아미타불좌상 및 협저보살입상 등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바탕층 분석결과에 의해 회칠층(灰漆層)과 주칠층(朱漆層)은 제작 당시의 층으로 판단되었다. 특히 회칠층에 사용되어진 골분은 고려시대 나전칠기의 제작뿐만 아니라 불상의 회칠층에도 이용되었음을 밝힐 수 있었으며, 불상에 금박을 붙이기 위한 바탕층에는 주칠을 올렸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근대에 들어서만도 두 차례 이상의 개금불사가 행해졌던 것이 관찰되었으며, 여러 차례의 개금불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작 당시의 층은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명주지역 나말여초 불교조각과 굴산선문 (Buddhist Sculpture of Late Silla and Early Goryeo Period at Myeongju and the Gulsan School of Seon Buddhism)

  • 최성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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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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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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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굴산사(?山寺)는 신라하대에 통효대사 범일(梵日, 810~889)에 의해 개창된 이래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파(??山派)의 본산으로서 크게 융성하였다.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위치한 굴산사지에는 거대한 당간지주를 비롯해서 고려시대 석조부도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2구 전해오고 있으나, 범일과 그의 제자인 개청(開淸, 854~930), 행적(行寂, 832~916)이 활동했던 나말여초기 굴산사를 알려주는 불교조각은 전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나말여초기 굴산선문의 불교미술을 살펴보기 위한 시도로서 굴산선문의 영역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강릉, 오대산, 동해시 등지로 범위를 넓혀 나말여초기 명주지역 불교미술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범일과 그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시기 굴산선문의 불교미술을 유추해 보았다. 강릉지역의 석조물 가운데 강릉시 오죽헌박물관에 옮겨진 무진사지(無盡寺址) 석탑의 부조 사방불상과 사천왕상은 신라 중앙이나 양양 진전사지, 선림원지 석조미술과 양식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나말여초기 명주지역 불교미술이 당시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말해준다. 범일의 제자인 개청이 주석했던 보현산 지장선원[普賢寺]에 전해오는 석조대좌의 부재(部材)는 팔각연화대좌의 하대 복련좌(覆蓮座)를 받치고 있던 팔각의 받침석으로 안상(眼象)에 사자(獅子)가 새겨져 있어 나말여초기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던 지권인 비로자나불좌상의 대좌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편, 국립춘천박물관과 강릉 오죽헌시립박물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는 한송사지(寒松寺址) 석조보살좌상 2구는 대리석이라는 재료를 비롯해서 머리 위에 쓴 원통형의 고관(高冠), 양손의 검지를 곧게 뻗은 수인(手印), 다리를 편히 놓은 서상(舒相)의 좌세 등, 독특한 밀교계 요소를 보여준다. 이러한 밀교계(密敎系) 도상(圖像)은 굴산선문 승려들의 당 유학(遊學)을 통해 명주지역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활발했던 굴산선문 승려들의 국제적 활동은 지역 미술에 큰 영향을 주면서, 선진성을 고양하였을 것이다. 동해시 삼화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시무외 여원인의 수인을 결(結)한 화엄계 노사나불상 표현은 당시로서는 예외적인 도상으로서 명주지역 미술이 전통성을 고수했던 면도 있었음에 주목하게 한다. 굴산선문 불교미술은 중앙지역과 같이 하는 양식 수준, 활발한 대당(對唐) 교류의 결과로 나타나는 선진문화의 수용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선진성과 국제성은 나말여초기 굴산선문 불교미술의 기본 성격으로 생각된다.

조선 정릉(貞陵) 사각 장명등(四角長明燈) 양식의 원류와 전개 -사찰 석등과의 비교를 통해 - (The Origin of the Square-Shaped Jangmyeongdeung of Jeongneung Royal Tomb and Its Stylistic Development -In Comparison with the Buddhist Temple Stone Lanterns-)

  • 김지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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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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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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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장명등은 능묘의 능침 앞 중앙에 놓여 사자(死者)를 지키고 밝혀주는 상징적인 기능과 함께 뛰어난 조형성으로 능역을 장식하는 역할도 담당했던 중요한 석물로서, 석등의 한 범주에 속한다. 정릉 장명등은 조선왕릉 장명등 중 최초로 조성된 장명등이며, 조선 전 중기 왕릉 장명등 가운데 유일한 사각 장명등(四角長明燈) 형태를 이루고 있다. 대석, 화사석, 옥개석 형식이 기본적으로 사각을 이루고 있어 팔각 장명등(八角長明燈)형식과는 완연하게 구분된다.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을 1매의 통석으로 마련하고, 화사석은 1매의 통석으로 전후로 화창을 표현하였다. 정릉 장명등은 고려 현 정릉 장명등의 전통을 그대로 따랐으나, 이보다 뛰어난 조형성을 보이고 있어 조선 개국 이후 최초로 조성되었던 왕릉 장명등으로서의 격조를 무리없이 보여준다. 본고에서는 정릉 사각 장명등 양식의 원류를 파악하는 데 연구 목적을 두고 고려 왕릉 장명등과 더불어 사각 장명등의 연원이 되는 사찰 사각 석등과의 비교 고찰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고려 말 회암사지 지공선사 석등 및 나옹화상 석등, 조선 초 회암사지 무학선사 석등 및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석등과 다음의 공통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대석, 화사석, 옥개석 등이 기본적으로 사각을 이루고 있는 점, 둘째, 간주석이 낮아지면서 대석부분이 안정적인 형태를 이루는 점, 셋째, 화사석의 경우 대석 위에 양측으로 석재를 세워 자연스럽게 전후로 화창을 구성하는 방법, 넷째, 옥개석이 사모지붕 형태를 하고 있는 점 등이다. 한편 정릉 장명등에는 불교적 요소가 다분히 내제되어 있는데, 간주석의 삼주문(三珠文)표현이 그것이다. 삼주문은 밀교와 관련된 상징물의 하나로서,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불화 및 조선 초기 보살상의 보관에 표현된 예가 확인된다. 정릉 장명등은 이후 묘 사각 장명등 조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데, 15세기 후반 이후부터는 점차로 정릉 장명등의 영향에서 벗어나 팔각 장명등 형식이 보다 많이 가미된 경향으로 변모해 나간다. 정릉 사각 장명등은 고려왕릉에서 조선왕릉으로의 능제 계승, 사찰 사각 석등 양식의 수용, 그 시대 불교사상의 반영 등 당대의 시대상과 문화의 흐름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담겨진 산 증거물로서 의의가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