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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양신경세포의 저산소증모델에서 대황 물추출물에 의한 유전자 표현 변화의 microarray 분석 (Microarray Analysis of Gene Expression by Rhei Rhizoma Water Extracts in a Hypoxia Model of Cultured Neurons)

  • 이현숙;송진영;문일수
    • 생명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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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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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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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대황(Rhei Rhizoma; RR, 대황(大黃))은 Rheum officinale Baill.와 Rheum palmatum L.(polygonaceae)의 땅속부분으로 남아시아의 민속의학에서 간 및 신장의 손상을 치료하는데 널리 이용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배양한 흰쥐 해마신경세포의 저산소증모델을 이용하여 대황의 물추출물이 유전자 표현에 미치는 영향을 microarray 방법을 이용하여 조사하였다. 배양 후 10일 (DIV10)에 추출물을 배지에 $2.5{\mu}g/ml$ 농도로 첨가하고, DIV13에 저산소증(2% $O_2$/5% $CO_2$, $37^{\circ}C$, 3 h)을 유발한 후 24 시간 후에 total RNA를 분리하여 microarray에 사용하였다. MA-plot에 의하면 표현이 연화된 대부분의 유전자는 ${\pm}2$배 이내로 증감되었다. 이 가운데 Global M 값이 0.2(즉, 15%)보다 더 증가한 유전자는 472종, Global M 값이 -0.2(즉, -15%)보다 더 감소한 유전자는 725종이였다. 세포의 생존과 관련된 유전자 가운데 세포자연사 억제유전자인 Tegt(2.4배), Nfkb1 (2.4배), Veg (1.8배), Ngfr (1.6배) 등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반면에 자연사 촉진유전자인 Bad (-64%), Cstb (-66%)는 감소하였다. 스트레스를 극복하는데 필요한 유전자인 Defb3 (2.7배), Cygb (2.2배), Ahsg (2.18배), Alox5 (2배) 등도 크게 증가하였다. 그리고 세포 성장을 촉진하는 유전자인 Erbb2 (1.84배), Mapk12 (1.8배)도 크게 증가하였다. 따라서 대황의 물추출물은 세포생존에 필요한 유전자를 증가시키고, 세포사를 유도하는 유전자는 감소시킴으로서 저산소층 스트레스에서 신경세포의 사망을 억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국가지정 동산문화재의 정기조사제도 개선방안 연구 (A study on improvement of regular survey system of state-designated movable cultural heritage)

  • 이종숙;김창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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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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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6-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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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현행 문화재보호법은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가적 민족적 또는 세계적 유산으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또는 경관적 가치가 큰 것을 문화재로 정의하고, 문화재의 성격에 따라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문화재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지정주체에 따라 시 도지사가 지정하는 시 도지정문화재 및 문화재자료와 문화재청장이 지정하는 국가지정문화재가있다. 국가지정문화재의 보존 관리 정책 중 하나인 정기조사는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문화재의 현상, 관리, 수리, 그 밖의 환경보전 상황 등에 관하여 3년 또는 5년 주기로 조사하는 제도로 2006년 문화재보호법에 도입되어 현재까지 해당문화재의 훼손 손상등을 사전에 발견하고 적절한 예방조치를 취하는 등 국가지정문화재의 보존 관리에 기여한 바가 크다. 그런데 2016년 제정된 국가지정문화재 정기조사 운영지침의 일부내용은 국가지정 동산문화재 정기조사 운영에 혼란을 종종 발생시켜 국가지정 동산문화재 정기조사의 체계적 관리 및 품질 제고를 위한 수정과 보완이 필요하다. 이에, 본고는 국가지정문화재 정기조사제도의 체계와 구조, 국가지정 동산문화재 정기조사 운영실태 등을 분석한 후 국가지정 동산문화재 정기조사의 체계적 관리 및 품질 제고를 위하여 국가지정문화재 정기조사 운영지침상의 정기조사 총괄 주관 실시부서 특정, 정기조사 위탁, 정기조사 서식 및 매뉴얼의 개선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들 개선방안이 향후 국가지정 동산문화재 정기조사의 품질 제고와 맞춤형 조사 기록체계 구축에 일조되기를 기대한다.

일본 근대 '전통춤'의 발견 - 우라야스무(浦安の舞)를 중심으로 - (The discovery of the 'traditional dance' of modern Japan - mainly on Urayasu-no-mai Dance -)

  • 남성호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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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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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3-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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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1940년 침략전쟁의 소용돌이가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일본에서는 '기원이천육백년축전(紀元二千六百年祝典)'이라는 기념행사가 대대적으로 거행되고 있었다. 국민총동원을 위한 정신적 통합과 정치에 대한 국민 불만과 전쟁에 지친 피로감을 해소시키려는 의도였다. 본고는 이 축전행사의 일환으로 일본 전국의 신사에서 연행된 우라야스무가 어떻게 창작되고 보급되었는가를 검토한다. 우라야스무는 일본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아악 형식의 음악과 미코마이(巫女舞)에 기초를 둔 새롭게 창작된 춤이다. 전시상황에서 창작 보급된 우라야스무는 '만들어진 전통'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또 우라야스무야말로 근대시기 창작된 전통이자 국가이데올로기의 선전도구로 이용된 불우한 유산으로 현재까지 온존하는 예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적 경위는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채 오늘날 확산일로에 있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보다 가속화될 것이다. 즉, 강압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창조된 우라야스무가 어느새 새로운 민속으로 자리매김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당시 흥아(興亞)의 기치를 내건 일본제국주의의 흐름 속에서 유구한 역사를 강조하고 정치적 정통성 확보를 위한 국민총동원체제 구축의 일환으로 우라야스무를 창조 보급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근대시기에 창작된 우라야스무는 각 지역의 신사에서 오랫동안 계승해온 고유의 제례악무를 대신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사회의 우경화와 무관하지 않으며 문화권력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아울러 오늘날 재생산되고 확산되고 있는 전통의 재창조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조명하였다.

울산쇠부리소리의 전승 양상 (A Study on the Transmission of 'Soeburi-Song' in Ulsan)

  • 양영진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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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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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7-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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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울산 쇠부리소리는 1981년 8월 달천철장의 마지막 불매대장인 고(故) 최재만(1987년 별세)의 구술과 소리를 바탕으로 1980년대에 재연된 소리이다. 본 고는 1981년 영상 등 총 13종의 자료를 바탕으로 쇠부리소리를 음악적 측면에서 분석하고, 전승 과정에서의 변화 양상을 확인하는데 목적을 둔 논문이다. 도출된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17년 쇠부리소리 자료를 살펴본 결과, 풍물패는 상쇠, 부쇠, 징2, 북4, 장구4, 태평소1로 구성되어 있고, 장단은 질굿, 자진모리, 다드래기, 덧배기, 자진덧배기의 5종을 친다. 가창곡은 3소박 4박자의 덧배기 자진덧배기 장단에 맞추어, 또는 무장단으로 부른다. 구성음은 대부분 Mi-La-do의 3음 또는 Mi-La-do-re의 4음으로, 음역은 1옥타브를 넘지 않는다. 종지음은 모두 La로 동일하다. 1981년 발굴 이후 오늘날까지의 쇠부리소리 연행을 살펴본 결과, 크게 4가지의 변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악곡의 구성이 '긴-자진'으로 분화되고, <금줄소리>, <애기 어르는 소리>, <성냥간 불매소리>가 첨가되었다. 둘째 가창 방식은 1980년대 재연 이후 '1인 선창자+다인 후창자'를 기본으로, 1인 후창자를 별도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2013년 연행된 <자진불매소리>는 <성냥간 불매소리>의 토대가 되었다. 셋째 <긴-자진 불매소리>의 선율적 변화가 관찰되었다. 박자구조는 모두 3소박 4박자이나, 속도가 느려지고, Mi-La-do의 3음을 골격으로 높은 re와 낮은 Sol이 첨삭되어 메나리토리의 특성이 명확히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풍물 악기는 꽹과리, 징, 장구, 북의 사물이 주로 쓰이며, 공연에 따라 소고, 태평소, 요령 등을 첨가하기도 한다. 장단은 자진모리, 다드래기, 덧배기, 자진덧배기 장단을 처음부터 연주했으며, 이후 질굿 장단이 추가되었다. 이와 같은 결과를 통하여 최초 발굴 당시, <애기 어르는 소리>와 같은 단순한 형태의 <불매소리>가 남성 노동요로 목적이 바뀌고 연희성이 강해지며 하나의 공연 예술로 변화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현전(現傳) 창원 퇴촌농악의 양식적 특징과 전승 의의 (A Study on the Distinguished Characteristics and Transmittion significance of Toichon Nongak in Changwon city)

  • 양옥경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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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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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7-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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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고는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현전하는 퇴촌농악의 공연 양식적 면모와 성격을 규명하고, 나아가 전승 의의에 대해 논구해 보았다. 창원 퇴촌농악은 마을공동체의 종교적 심성을 바탕으로 제의성이 두드러지는 농악으로 출발하여 근현대 시대 새로이 쌓이기 시작한 대한민국의 경제, 사회, 문화적 토대와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한 전승사를 가지고 있다. 마을농악은 의식농악, 농사풀이 농악, 마을 연예농악의 세 성격이 종합적으로 나타난다. 현전 퇴촌농악 역시도 의식농악과 마을 연예농악의 성격이 하나의 거시적 구조 안에서 병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마을농악 양식이다. 이 농악의 유래와 배경, 목적, 연행양식 등을 종합해 봤을 때 공동 축원 형태의 동제에서 비롯된 의식농악이 본령(本領)이고, '퇴촌'이라는 특정 마을을 중심으로 현대사회의 변천 궤도 안에서 다양한 영향요인들과의 상호작용으로 세시-놀이 형태의 연예농악 양식이 확대된 변화를 담지한 농악임이 분명하다. 공동 축원 형태의 의식농악에 속하는 근거는 마을의 형성 배경과 공유하고 있는 전설, 신목(神木)과 동제의 유래 및 전개에 관한 토착민 보전 지식이 이를 뚜렷이 뒷받침하고 있다. 또, 크게 확장된 연예농악 양식은 해방이후 급속히 전국적으로 번진 '대회용 농악 공연 양식'의 출현이 이후의 농악 공연-향유 방식, 농악 학습-전승 방식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전문 농악 공연집단 뿐만이 아니라 마을단위 농악대, 일반 시민농악대에 이르기까지 연예성과 전문성을 추구하는 경향과 외부로 부터의 수혈이 맞닿은 변모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퇴촌농악 황일태(보존회장, 설장구)에 의해 연행되는 '지신밟기 고사소리'와 치밀한 의도 하에 구성된 것으로 보이는 음악구조이다. 종합적으로, 현전 퇴촌농악 공연양식은 마을농악의 시대적 변천 맥락을 그대로 투사하고 있는, 다시 말해 전통성과 변천성을 동시에 보전한 농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서울 지역사회와 의례 주도 집단의 변화 -장충동 지역과 관성묘 영신사를 중심으로- (The Study of the Regional Community and the Main Group of Ritual in Seoul during the Period of Japan's Colonial Rule of Korea - With Emphasis on Gwanseongmyo in Jangchung-dong -)

  • 김태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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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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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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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이 연구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서울 지역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지역 의례의 주도 집단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하는 점을 장충동 지역과 관성묘 의례 주도 집단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일제가 식민지 수탈과 군사 기지화를 위해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던 도시 계획 사업은 거의 모든 지역에 영향을 미치며 지역사회를 재편해 나갔다. 특히, 장충동 지역은 일본인 중심 지역으로 변모하면서 전통적인 지역사회의 구조가 크게 흔들리고 새롭게 재편되었다. 일제의 문화정치하에서 지역 공동체 의례의 경우 지역 신사로의 병합을 위해 지역 의례를 의도적으로 활용한 경우나 친일 인사들의 지원하에 지역 의례가 시행되면서 일제의 정책에 일정 정도 부합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의례의 전반적인 현황은 일제강점 전과 다름없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 중에 장충동 지역에서는 관우 신앙 집단인 '영신사'가 관성묘 의례를 주도했으며 차츰 장충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의례의 성격도 지니게 되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는 지역 공동체 의례를 주도하던 세력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과거 지역 토착 세력에 의해 주도되던 지역 의례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과 도시화, 상업의 발달, 지역의 분화 등을 거치면서 다양한 세력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특히, 관성묘 영신사의 사례는 관우 신앙을 매개로 한 신앙 집단이었다는 점에서 주도 세력의 다변화가 한층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라(新羅) 백지묵서(白紙墨書) 화엄경(華嚴經)과 칙천무후자(則天武后字) 고찰(考察) (The Study on 'characters made by Empress Wu Zetian' through The Avatamsaka-Sutra in ink on the white paper of the Shilla Period)

  • 박상국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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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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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45-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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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신라(新羅) 백지묵서(白紙墨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국보 196호로 지정된 한국에서 가장 오랜 사경(寫經)이다. 이 사경(寫經)은 당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699년에 한역(漢譯)한 주본(周本) "화엄경(華嚴經)" 80권(卷) 가운데 권 제1~10과 권 제 44~50이다. 권10과 권50의 말미에 발문(跋文)(528자(字))이 있는데, 이 발문에 의하면 화엄사 창건자인 황룡사의 연기(緣起)법사가 발원하여 754년에서 755년에 걸쳐 약 6개월이 걸려 완성된 사경임을 알 수 있다. 이 발문은 사경제작에 따른 의식절차(儀式節次)와 제작방법(製作方法)이 기록되어 있고, 사경 제작에 참여한 필사자(筆寫者)와 부처님과 보살(菩薩)을 그린 화사(畵師) 등 사경(寫經)에 관계한 19명에 대한 거주지(居住地), 인명(人名), 관명(官名) 등(等)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고문서이기도 하다. 이 사경은 발견되었을 당시 권1-10은 응고되어 펼쳐볼 수가 없는 상태였고 권44~50도 보존을 염려하여 사진 촬영이 금지되었다. 최근에 내용에 대한 실태조사가 이루어져 이 사경이 칙천무후자(則天武后字) 연구의 보고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칙천무후자(則天武后字)는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皇后)로 고종(高宗)의 사후(死後) 스스로 황제가 된 칙천무후(則天武后)(684~704재위(在位)) 가 만든 일종의 이체자(異體字)이다. 칙천무후자(則天武后字)는 무후(武后)의 치세(治世)에만 쓰이고 그의 사후에 폐지되었지만, 그 후에도 취미와 호기심에 따라 사용하기도 하였던 글자이다. 이 신라 사경에 나타난 칙천무후자(則天武后字)는 초(初), 년(年), 월(月), 일(日), 성(星), 정(正), 천(天), 지(地), 수(授), 증(證), 성(聖), 국(國), 인(人)의 자(字) 등 13종 512자로, 칙천무후(則天武后) 재위 당시에 제작된 돈황(敦煌) 사경(寫經)과 비교해 볼 때 사용된 칙천무후자(則天武后字)의 숫자나 사용 빈도에서 돈황(敦煌) 사경(寫經)보다 뛰어난 칙천무후자(則天武后字)의 보고(寶庫)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현존 최고(最古)의 화엄경 사경(寫經)으로 알려진 일본(日本) 정창원(正倉院)의 화엄경(華嚴經) 사경(寫經)(768)에는 칙천무후자(則天武后字)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볼 때, 신라 사경(寫經)은 한역(漢譯)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화엄 사경임을 알 수 있다.

중국 하북성 마을제 연구 - 하북성조현범장이월이룡패회중룡신적여인(河北省趙縣范庄二月二龍牌會中龍神的與人) - (A Study of Local Festival for the China Hebeisheng)

  • 박광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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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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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7-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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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China is a country with large agricultural areas and subject to frequent calamities. Drought is the top of them. It has been a key problem for development of agriculture in the country. In the long struggle against drought, Chinese have accumulated many rational and irrational experiences. The Dragon Kings Belief, which is popular in North China and discussed in a thesis, is one of their irrational experiences. The belief was passed together with Buddhism from India to China in the Tang Dynasty. After it settled down, it was incorporated with the local five dragons belief and a set of beliefs in dragon kings came into existence. The emergence of the dragon kings belief ended the history that the title of rain got was not clear in China and Dragon kings finally got the status. Irrigation is the lifeblood of agriculture in China. In a Chinese mind, Dragon kings are the most important gods who take charge of rain and thus offer the lifeblood. In understanding the nature and characteristics of Chinese traditional culture, it is important for us to make clear the origin and evolution of the belief, find out its nature, function and operation. In the every year beginning of February of the Fanzhuang calendar in the people of Hebeisheng Zhaoxian, would all hold a festival to offer sacrifices to the $^{{\circ}TM}^{\prime}longpai$. Longpai was regarded as the core of the temple fair, thus the native sons came to call this festival; "longpaihui". In this region the'Fanzhuang longpaihui'developed into a well knownand grand temple fair. It was able to attract numerous pilgrims with its special magic power, occupying a place in $China^{{\circ}TM}$ 'eryueer'festival with festive dragon activities. The dragon is a common totem among Chinese nationals. The belief worship of the dragon dates from the start time of primitive societies. Dragon oneself the ancients worship's thunder lightning. In the worship of the great universe, at first afterwards this belief with the tribe's totem worships to combine to become the animal spirit. In ancient myths legends, along with folk religion and beliefs all hold a very important position. The longpaihui is a temple fair without a temple; this characteristic is a distinction between longpaihui and other temple fairs. As for longpaihui must of the early historical records are unclear. The originator of a huitou system has a kind of organized form of the special features rather, originator of a huitou not fix constant, everything follows voluntarily principle, can become member with the freedom, also can back at any time the meeting. There is a longpaihui for 'dangjiaren', is total representative director in the originator of a huitou will. 'banghui' scope particularly for extensive, come apparently every kind of buildup that help can return into the banghui, where is the person of this village or outside village of, the general cent in banghui work is clear and definite, for longpaihui would various businesses open smoothly the exhibition provides to guarantees powerfully. Fanzhuang longpaihui from the beginning of February to beginning six proceed six days totally. The longpai is used as the ancestry absolute being to exsits with the community absolute being at the same time in fanzhuang first took civil faith, in reality is a kind of method to support social machine in native folks realize together that local community that important function, it provided a space, a kind of a view to take with a relation, rising contact, communication, solidify the community contents small village, formation with fanzhuang. The fanzhuang is used as supplies for gathering town, by luck too is this local community trade exchanges center at the same time therefore can say the faith of the longpai, in addition to its people's custom, religious meaning, still have got the important and social function. Moreover matter worthy of mentioning, Longpai would in organize process, from prepare and plan the producing of meeting every kind of meeting a longpeng of the matter do, all letting person feeling is to adjust the popular support of, get the mass approbation with positive participate. Apart from the originator of a huitou excluding, those although not originator of a huitou, however enthusiasm participate the banghui of its business, also is too much for the number.

경기도 향토민요 관련 무형문화재의 전승현황과 과제 (Current status and tasks of the transmission of Gyeonggi Province intangible cultural assets (folk songs))

  • 장희선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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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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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05-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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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논의는 경기도 지역 향토민요 무형문화재의 지정 및 지정 후 재현, 전승 현황을 고찰하고, 전승의 과제와 개선방안을 제시한 글이다. 1998년 지정 후 2016년까지, 경기도 향토민요 관련 무형문화재로 최대 13종 지정이후 9종으로 감소하여, 문화재 관리, 운영의 문제가 예상된다. 우선 북서부 지역 위주의 분포와 농요, 의례요 등 유사한 민요의 지정현황은 발굴 복원과정에서 일정부분 상호 전이되거나 정형화 경향과, 일부의 원형 훼손 가능성, 지정 전승 과정상의 한계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화재 종목의 '(세시)놀이'와 '민속음악'의 유형분류와 민요구성의 관계가 모호하여, 재검토가 요구된다. 민요와 놀이 의례의 연계성 등은 원형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다. 지정문화재의 명칭과 종목 번호도 올바른 문화재 지정 여부에 대한 지표가 될 수 있다. 보존회의 전수교육은 정기적인 회원 강습과 일반인 대상교육으로 구분가능하고, 원형전승과 현대적 계승의 이원화된 공연양상을 띤다. 의례(일) 과정과 연계된 다양한 유형의 소리 발굴 및 지나친 양식화에 따른 원형훼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전승의 과제와 개선방안으로, 첫째, 문화유산의 가치와 보존에 대한 인식 재고, 둘째, 문화재 지정과 해제 과정의 지표화, 셋째, 문화재의 기록화와 기록물 보존의 체계화, 넷째, 지역사회와의 연계, 다섯째, 전문인력 구성과 지원관리의 체계적 정립 등을 주요 논점으로써, 제안하였다.

고성오광대 연희용 탈의 변화 양상 (A Study on the Change of Masks for Goseong Ogwangdae Play - Before and after the designation of intangible cultural assets-)

  • 남진아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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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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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7-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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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고성오광대는 1950년대 말부터 학술조사가 시작되어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지정 당시까지는 종이탈을 사용하였으나 1965년에는 이미 나무탈로 바뀌었으며 이후 탈의 변화 양상이 매우 크다. 1960년에는 9개의 탈을 사용하였는데 문둥이, 초란이, 말뚝이, 청보양반, 젓양반, 할미, 제밀주 탈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여기에 소무는 제밀주와, 청보양반과 비비양반은 영감과 탈을 겸용하기도 하였다. 황봉사와 상주는 탈을 쓰지 않고 맨얼굴로 등장했다. 1965년부터 고성오광대 연희용 탈은 전체가 나무탈로 바뀌었다. 상주, 마당쇠, 상두꾼을 제외한 전 배역이 탈을 쓰고 있는데 비비, 홍백양반, 봉사 탈은 1964년까지는 등장한 적이 없는 탈이다. 초라니는 종가도령으로 바뀌었고 청보양반은 원양반으로 대체되었다. 1969년을 기점으로 연희용 탈은 종류가 현재와 같아지는 안정기에 들어선다. 비비양반과 소무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들이 개별탈을 사용하여 총18점의 탈을 사용한다. 양반들은 적제양반까지 확실하게 분화되어 총 7명의 양반이 등장한다. 이렇게 탈의 종류와 재질 및 표현법에 변화가 큰 것은 1세대 탈 제작자가 사망하면서 탈 제작의 전승이 끊어진 이유도 있겠으나 지정 이후 연희자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연희환경의 극심한 변화에도 그 원인이 있다. 연희자들의 자족적인 놀이였기 때문에 세부 사항에서는 엄격한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유동적인 놀이였으나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면서 점차 공연을 위한 준비로 바뀌었다. 춤이나 의상, 소품들도 점차 화려해졌고 시각적인 효과와 짜임새 있는 연출을 시도하면서 연희 전반의 변화와 함께 탈의 변화를 가져왔고 이를 보존회 내부에서도 수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