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묵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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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의 『양아록(養兒錄)』에 나타난 조손(祖孫) 갈등(葛藤)에 대한 일고(一考) (A Study on the conflicts between the grandfather and the grandson contained in Mukjae Lee Mun Geon's 『Yangarok』)

  • 정시열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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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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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9-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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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양아록(養兒錄)"은 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1494-1567)이 손자를 양육하면서 남긴 기록물이다. "양아록"의 저자인 이문건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발(子發), 호는 묵재(默齋), 휴수(休?)이다. 그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겪었으며, 그 과정에서 경북 성주에 20여 년간 유배되었다가 결국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16년간의 기록인 "양아록"은 크게 3단 구성을 보인다. 먼저 제1단에서는 묵재 본인의 자서(自序)와 손자 출생 시의 기쁨을 담은 율시 한 수, 출생 당시의 상황과 개명(改名)에 대해 언급한 산문 한 편, 성주 목사와 조카 이섬(李?)이 보내준 축시가 등장하며, 제2단에서는 본격적인 양아의 내용을 35제의 시로 담아냈다. 그리고 마지막 제3단에서는 음주에 대한 경계, 가족에 대한 소개, 세계(世系), 축원문, 자신의 성품에 대해 자책하는 글로 마무리 했다. 본고에서는 "양아록"에 나타난 조부와 손자의 갈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양아록"의 여러 측면 가운데 유독 조손 간의 갈등에 초점을 둔 것은 서술의 주체인 묵재의 마음에 자리한 애증의 양가감정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양아록"에는 묵재의 심리적 추이가 잘 나타나 있는데, 특히 손자에 대한 사랑과 기대가 갈등과 실망으로 이행되는 모습을 보노라면, 인간관계에 존재하는 애증(愛憎)의 거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연구 목적에 맞는 정확한 논의를 위해 제2장에서는 조손 갈등의 근본적 발생 요인에 대해 살펴보았으며, 제3장에서는 조손 갈등의 구체적 양상에 대해 고찰했다. 갈등의 원인과 양상에 대한 검토를 바탕으로 제4장에서는 성찰의 자료로서 "양아록"이 현대인들에게 주는 전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16세기 『묵재일기』에 나타난 낙폭지 재활용에 관한 분석 (A Study on the Recycling of Nakpokji in Mukjae Diary in the 16th Century)

  • 김은경;김지원;이소영;정재민
    • 한국자원식물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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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자원식물학회 2023년도 임시총회 및 춘계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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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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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본 연구는 16세기 과거에서 낙방한 시권(試紙)인 낙폭지(落幅紙)가 어떻게 재활용되었는지에 대해 고 찰하는 것이 목적이다. 과거 시험 답안지는 시권, 시지(試紙), 명지(名紙), 과지(科紙)라 하였으며 두껍고 품질 좋은 종이가 사용되었다. 국가의 특별한 경사가 있거나 왕이 친림한 과거 시험의 경우 응시자에게 국가에서 시지를 제공하였으나, 그 외 3년마다 치르는 정기시험인 식년시(式年試)는 개인이 별도로 마련하였다. 전국 각 도와 한성부에서 치러졌던 초시(初試)를 비롯한 복시(覆試), 별시(別試), 증광시(增廣試), 춘당대시(春塘臺試) 등 과거 응시자의 수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증가하였다. 이 때문에 시지 마련은 응시자 개인뿐 아니라 국가의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과거에 합격한 시지는 응시자에게 돌려주었으나 불합격한 시지의 경우는 돌려주지 않고 국가에서 재활용하였다. 낙폭지는 북방 군사들의 추위를 막는 방한용 의복인 지의(紙衣)로 사용되었으며, 화전(火箭), 가슴을 가리는 갑옷인 엄심갑(掩心甲), 비를 막는 장막용이나 우의(雨衣)로 사용되었다. 낙폭지는 건물 내부 도배 재료로 초배(初褙)에 이용되었으며, 그림이나 책의 배접용으로 활용되었다. 16세기 『묵재일기』에는 이문건이 32년간 성주 지방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인근 지역 관인(官人)과 지인들을 통해 주기적으로 낙폭지를 입수했던 기록을 살필 수 있다. 지방의 종이 제작 정도, 종이 수급 현황, 낙폭지 재활용에 대한 구체적인 양상을 통해 일상 속 종이 재활용 상황을 파악하는 단서를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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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재일기(默齋日記)』 속 상한(傷寒) 및 『상한론(傷寒論)』에 대한 인식 연구 (A Study of the Concept of Cold Damage and The Shanghanlun (Treatise on Cold Damage) as They Appear in The Diary of Muk-Jae)

  • 조성환;김동율
    • 한국의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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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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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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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The Diary of Muk-Jae is a historical record that describes many social aspects of the Joseon period in the 16th century. It records many scenes of its author, Lee Mun-Geon, treating patients. This paper uses The Diary of Muk-Jae to examine changes in the perception of the concept of cold damage and the text of the Shanghanlun (Treatise on Cold Damage) in the Joseon period in the 16th century. In The Diary of Muk-Jae, cold damage is understood in connection with two categories: 'dangerous disease' and 'disease caused by cold'. The Diary of Muk-Jae also presents the Shanghanlun not as a work limited to the concept of cold damage, but as a medical text that could be widely used for many different diseases. Thus, The Diary of Muk-Jae may represent a point of transition between in the perception of cold damage as seen in the Uibang Yuchui (The Collection of Medical Procedures) of the 15th century and the Donguibogam of the 17th century.

이문건 시묘살이를 통해 본 조선중기 유자(儒者)의 상례(喪禮) 고찰 (Confucians Funeral Rituals during the mid-Joseon Dynasty Lee Mun Geon'Mourning beside His Mother's Grave)

  • 조은숙
    • 고전문학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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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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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3-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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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고는 묵재 이문건(1494-1567)이 어머니 고령 신씨(高靈申氏; 1463-1535)의 시묘살이를 하며 기록한 상례(喪禮)에 대한 고찰이다. 상례는 죽음에 대한 의례이다. 이문건이 행한 죽음의례, 즉 시묘살이 상례(喪禮)에 개인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참여하였는가에 초점을 두어 살펴보았다. 즉 이문건이 실천한 시묘살이 상례의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그 의례가 지향하는 바의 의미와 조선중기 사대부 일기의 글쓰기를 통해 당대인의 효의 실천과 죽음에 대한 제반 인식을 유추해보는 데 그 의의를 둔다. 조선중기 사대부들은 법제화에 의한 상례 준수로 인식변화를 끊임없이 시도하지만, 기나긴 역사의 밑바탕에 깔린 인간의 의식세계를 완전히 개조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중국과 조선은 문화적 배경이 달랐음을 인정해야만 하였다. 중국의 제도인 "주자가례"를 조선에 끼워 맞추려고 한 것은 처음부터 문제를 배태하고 있는 것이다. 신주(神主) 중심의 조상 제사와 가묘(家廟) 설립의 중요성을 "주자가례"에서 백 번 강조하지만, 조선중기 사대부는 무덤 속에 누워 있는 부모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이다. 사당과 시제(時祭)보다는 무덤과 묘제(墓祭) 및 기제사(忌祭祀)가 조선중기의 사대부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다. 이런 모순 속에서 조선중기 사대부는 죽음에 대한 의례로서 시묘살이 상례를 수용하고 실천하였다. 고대인 혹은 중세인이 아니라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 죽음에 대한 지배적 생각, 즉 현세와 정신적 물질적 생활을 지속한다는 계세사상(繼世思想)을 뿌리 채 뽑아버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만약 이 사상이 없다면 인간의 죽음 역시 고속도로 위에서 차에 치여진 동물의 사체와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시간이 변해도 형태는 바뀔지언정 죽음에 대한 의례 자체를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중기 사대부의 시묘살이는 효의 실천과 죽음에 대한 의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