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로마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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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서의 무기발달과 전술 전략의 변화 V-로마의 번영:1~200년

  • 허중권
    • 국방과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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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호통권2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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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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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초기 시대부터 로마의 힘과 영광은 어떠한 잠재적인 적에 비교해도기술 및 효과면에서 비교되지 않을 정도였던 군사제도의 탁월함에서 기인하였다. 로마 제국 초기 3세기 반 동안에 군사제도의 여러 가지 면에서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그러한 변화 중 일부는 시간의 경과에 따른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또 일부의 변화들은 내부적인 긴장과 갈등 때문에 비롯되었고, 또 다른 변화들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고무된 것이었다. 로마 군사 제도의 우월성과 그에 따른 제국의 계속된 영광은 로마인의 실제적인 문제들에대한 실용적 및 논리적인 접근태도에 많은 부분 기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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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플리니우스의 「자연사」에 나타난 고대 로마의 정원관 연구 (A Study on the Roman Garden Vision in Pliny the Elder's the Natural History)

  • 황주영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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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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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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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본 연구는 대 플리니우스의 『자연사』 속 정원 관련 문헌을 중심으로 고대 로마 시대의 정원관을 탐색함을 목표로 한다. 고대 로마 정원의 유형과 성격, 형태 등은 이후 서양 정원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고, 플리니우스 등이 집필한 실용적이고 전문적인 문헌이 큰 영향을 미쳤다. 『자연사』와 관련 문헌, 사료를 중심으로 진행된 본 연구에서는 로마 정원의 형태나 양식적 특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들 문헌에 투영된 정원관을 탐색하였다. 『자연사』뿐 아니라 고대 로마 시대에 작성된 정원, 혹은 농업 이론서는 관념적인 자연이나 예술로서의 정원보다는 실용적인 생산 공간을 주로 다룬다는 특징이 있다. 『자연사』에서 정원 연구와 관련된 식물학 부분 또한 즐거움보다는 유용함을 위주로 기술되었고, 플리니우스 또한 실용적인 정원인 호르투스를 전제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정원은 실용적인 생산과 휴식의 공간일 뿐 아니라, 한 시대의 이상을 재현, 혹은 실천하는 장소였다. 플리니우스를 비롯한 로마의 지배세력과 지식인들은 그들이 지배하는 전 세계에 대한 앎을 포괄하고, 이를 통해 로마 대제국의 비전을 실현하고자 하는 에피스테메를 공유했다. 플리니우스는 『자연사』를 통해 당대의 유용한 지식을 로마 제국이라는 방대한 문명 세계로 포괄하고자 했고, 정원은 그 이상을 실천하는 중요한 장소였다.

고대 로마건축의 석축기법에 관한 연구 (A Study on Masonry Techniques in Ancient Roman Architecture)

  • 윤성호
    • 한국산학기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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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권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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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031-4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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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건축의 시작은 벽체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고대 로마건축에서의 석축기법은 매우 다양하며 새로운 기술의 반복적인 실험을 통하여 로마제국시대의 위대한 건축물들을 완성할 수 있었다. 본 논문에서는 고대로마의 석축기법을 양식적, 구조적, 재료적 또한 의장적인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하여 그 변화의 과정을 단계적으로 분석하였으며 심도있는 자료의 수집과 정리를 통하여 로마건축이 인류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의 일부분을 깊이 있게 파헤쳐 보았다. 아직도 우리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로마건축의 연속성을 뒷받침 하는 것은 건축의 시작인 석축기술에 있다는 것도 재확인 할 수 있었다. 다양한 실험적 정신이 훌륭한 건축물이 만들어지는 토대가 됨을 로마건축은 보여주고 있다.

고전 필사본 유랑과 도서관으로의 귀환 (The Wandering of Classic Manuscripts and Their Return to the Library)

  • 윤희윤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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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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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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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기록은 인간의 삶과 지식 세계에 대한 수상인 동시에 지문이다. 기록의 대명사로 간주되는 책은 인류 역사를 추적하는 통로이자 그것을 음미하는 창이다. 그리고 책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이고, 압권은 필사본이다. 그것은 파피루스 두루마리, 양피지, 종이 등에 기록한 원본과 그것을 번역·중역한 사본을 총칭한다. 장구한 지식문화사를 반추하면 서양 필사본은 자연적 재해뿐만 아니라 인위적 문화반달리즘과 비블리오코스트로 인하여 시공간을 유동하는 강물처럼 이합집산을 계속해 왔다. 이에 본 연구는 고대 그리스에서 중세 르네상스 시대까지 서양 필사본의 유량과 도서관 보존을 추적하였다. 그 결과, 왕조와 제국, 군주와 재상, 장군과 정복자, 귀족과 부유층, 성직자와 학자를 불문하고 고전 필사본을 수집하고 번역하는데 혈안이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석학들이 파피루스와 양피지에 지식과 지혜를 기록하지 않았으면, 중세 비잔티움 제국·이슬람 제국이 고전을 수집·번역하고 재생산하지 않았으면, 책 사냥꾼들이 고전을 추적하지 않았으면,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지적 엑소더스를 통해 고전을 복원·재해석하지 않았으면, 그리고 역사도서관이 사력을 다해 고전과 번역본을 수집·보존하지 않았으면, 현대인은 고전 지식을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필사본의 추적은 역사적 유동, 지리적 유랑, 언어적 변용으로 인해 많은 난제와 모순이 중첩되어 있는 아포리아다. 새로운 필사본이 발견·해석되면 수정과 보완이 불가피하므로 후속연구를 통한 고전 필사본의 유랑과 귀환에 대한 추적은 계속되어야 한다.

8-9세기 해로의 활성화와 지중해 해상교역 (Arab Sea Trade with the Far East and the Mediterranean in the Eighth and Ninth Centuries)

  • 정문수
    • 한국항해항만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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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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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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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8-9세기는 무슬림 상인의 주도로 페르시아만에서 남중국까지의 해로가 활성화되는 시기이다. 동서교류에서 해로가 육로를 능가하는 이 시기에는, 이 간선 해로를 따라 그 동단인 동아시아해역과 그 서단인 지중해 해역이 설정되었다. 먼저 간선 해로에 관해, 기존 연구에서 미진하게 검토한 페르시아만에서 인도 동쪽 바다까지의 왕복 항로와 아랍선박을 검토하였으며 심해항행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다음으로 이 시기에 동아시아해역의 해상무역이 장보고의 활약으로 활성화되었던 것과는 달리, 지중해 해역은 로마제국 시대의 활기를 잃고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카르스트(KARST)의 지형과 동굴보전

  • 오종우
    • 한국동굴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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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동굴학회 1995년도 관광동굴의 관리운영 워크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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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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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 카르스트라는 용어는 고대 인도-유럽어로 그 기원은 거슬러 올라간다. 암석을 뜻하는 칼라(Karra)로 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고, 그것의 파생어는 유럽과 중동의 많은 언어에서도 발견된다. 북부의 유고슬라비아에서 그 단어는 칼스(kars)를 거처 카라(Kra)로 발전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와 이태리의 국경지대인 트라에스트(Trieste)지방에서 그 지역에 대한 지역적인 명칭으로 이것이 '불모의 땅'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종종 이 지역의 자연적인 특징이 최초로 광범위하고 과학적인 연구로 받아들여진 지역으로 '고전적인 카르스트'로 언급된다. 로마시대에 지역적인 명칭은 '칼스서 혹은 칼소'(Carsus & Carso)였고, 그것이 오스트리아-헝가리(Austro-Hungarian)제국의 일부분이 되고 나서, '카르스트'(karst)라는 독일말로 정착되어진다. 뷔엔나(Vienna)의 지리학 또는 지질학술대회에서 국제적인 과학적 용어로서 그 단어가 정식으로 사용되었고, 그 용어의 기술적인 사용은 19세기 중반경에 확립되었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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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스트(KARST)의 지표지형과 동굴지형

  • 오종우
    • 한국동굴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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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동굴학회 1994년도 동굴의 개발과 보전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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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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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 카르스트라는 용어는 고대 인도-유럽어로 그 기원은 거슬러 올라간다. 암석을 뜻하는 칼라(Karra)로 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고, 그것의 파생어는 유럽과 중동의 많은 언어에서도 발견된다. 북부의 유고슬라비아에서 그 단어는 칼스(kars)를 거처 카라(Kra)로 발전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와 이태리의 국경지대인 트라에스트(Trieste)지방에서 그 지역에 대한 지역적인 명칭으로 이것이 '불모의 땅'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종종 이 지역의 자연적인 특징이 최초로 광범위하고 과학적인 연구로 받아들여진 지역으로 '고전적인 카르스트'로 언급된다. 로마시대에 지역적인 명칭은 '칼스서 혹은 칼소'(Carsus & Carso)였고, 그것이 오스트리아-헝가리(Austro-Hungarian)제국의 일부분이 되고 나서, '카르스트'(karst)라는 독일말로 정착되어진다. 뷔엔나(Vienna)의 지리학 또는 지질학술대회에서 국제적인 과학적 용어로서 그 단어가 정식으로 사용되었고, 그 용어의 기술적인 사용은 19세기 중반경에 확립되었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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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도서관 명칭의 기원과 변용 (Origin and Transformation of the Word 'Library' in the Ancient World)

  • 윤희윤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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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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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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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고대 근동 및 그리스·로마의 기록관과 연계한 도서관 명칭의 기원과 변용을 추적하였다. 첫째, 도서관이란 말의 기원은 두 갈래다. 하나는 고대 그리스어 βιβλιοθήκη에서 라틴어 bibliothēkē가 파생되었고 최초 흔적은 2세기 후반 폴룩스의 「Onomasticon」이고, 문헌 텍스트 집합으로 간주하면 1602년 립시우스의 「De Bibliothecis Syntagma」다. 다른 하나는 라틴어 libraria가 고대 프랑스어 librairie로 변용된 후 14세기 초 library로 정착되었다. 영어 library는 1374년 초서가 조어하였다. 둘째, 고대 근동의 점토판 보존소는 기록관에 가깝지만 공식 명칭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아슈르바니팔 점토판 보존소는 기록학계의 원질서 존중 및 출처주의 원칙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왕실기록관이 아닌 왕립도서관의 원형이다.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의 공식 명칭은 'Βιβλιοθήκη της Αλεξάνδρειας'이었고 'ALEXANDRINA BYBLIOTHECE'로 변용되었다. 셋째, 고대 그리스·로마에서는 기록관과 도서관이 분리되었다. 그리스 도서관은 체육관 부설 도서실 수준이었고, 독립된 명칭은 거의 없었다. 목욕탕에 많이 부설된 로마 도서관의 명칭은 βιβλιοθήκη과 Bibliotheca이 혼용되었다. 마지막으로 고대 도서관은 중세 수도원 도서관으로 계승되었고, 이슬람제국에서는 '바이트 알-히크마'로 변용되었다. 한중일에서는 19세기말 화제한어 도서관이 수용되었으나 쟁점이 많아 후속연구가 필요하다.

동서양 주요 비블리오코스트의 미스터리와 진상 (Mysteries and truth of the Major Bibliocaust in the East and West)

  • 윤희윤
    • 한국문헌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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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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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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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책은 신성과 이성, 우상과 파괴, 찬양과 저주, 오만과 편견, 진위 등이 혼재하는 삶과 기억의 각주이자 지식과 지성의 기호다. 이러한 이유로 역대 제왕과 군주, 성직자, 지배자들은 검열과 금서, 분서와 파괴 등을 통해 책을 학살해 왔다. 고대사, 고고학, 전쟁사, 문화사, 문헌정보학 등에서 많은 연구가 수행되었으나 서양사관이 지배적이고 국수주의적 접근과 논리적 비약도 있다. 본 연구는 많은 미스터리와 쟁점이 혼재하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도서관 파괴, 몽골 제국의 바그다드 도서관 파괴, 그리고 조선총독부 한국사료 20만 분서설을 대상으로 진상을 추적하였다.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은 로마 제국이 지배할 때 완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몽골 군대의 바그다드 도서관 학살은 서양의 날조와 극단적 과장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조선총독부가 35년간 강탈·소각한 한국사료는 '20만권 +α'로 인식해야 한다. 사료 발굴을 통한 비블리오코스트의 배후와 행간을 추적하여 진상을 규명하는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