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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에서 나타나는 '전이'와 배우의 '심리적 경계'에 관한 연구 (Study on the Performer's Transference and Mental Borderline in a Performance)

  • 김종구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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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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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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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일반적으로 공연을 준비하는 배우들은 처음 텍스트(희곡)를 접하면서 배역과 배우 자신과의 경계를 허물려는 노력을 통해 일상의 공간에서 극중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심리적 전이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전이'는 실제로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데 무대에 서기전까지 분장실이나 윙(무대에 등장하기 직전의 공간), 그리고 무대(관객을 접하는 공간)라는 물리적 공간이 그것이다. 공연을 하는 배우는 공연기간이 완전히 종료되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심리적 물리적 공간들을 이동하게 된다. 이렇게 각각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은 '전이'이며, 이 '전이'과정 속에서 배우들이 경험하게 되는 심리적 변화의 지점을 '심리적 경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심리적 경계'는 실제 배우들이 각각의 공간에서 전이되는 순간 느끼는 심리적 양상들을 통해 그 존재 자체를 유추할 수 있다. 배우의 '심리적 경계'를 알 수 있는 변화 양상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긴장', '불안' 등으로 표출되는 '무대공포'인데, 연구에 따르면 가장 많은 수의 배우가 무대에 등장하기 직전의 공간에서 이 같은 심리적 양상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즉 회피의 감정이 높게 나타났다. 본 연구는 공연을 완성해 무대에서 구현하기까지 과정 중에서 배우가 경험하게 되는 심리적 물리적 공간과 이를 관통하는 전이과정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경계'와 배우의 심리적 변화에 대한 관계를 규명해보고자 한다. 첫째, 선행연구를 통해 심리적 경계개념을 이해하고 이를 기반으로 배우가 경험하는 '공간'과 그 전이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경계'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하였다. 둘째, 공연과정에서 나타나는 '전이영역'을 물리적 공간과 심리적 공간으로 재분류하여 개념 정리를 하였다. 셋째, '심리적 경계'를 체험하는 배우들의 실제 사례 분석을 통해 긍정적 요소로 작용가능한 '경계'의 다각적인 활용방안을 모색해 본다. 공연을 하는 배우가 경험하는 심리적 현상은 무대공포 등의 부정적인 측면이외에도 긍정적인 측면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전이 영역에서 일어나는 긴장이 배우에게 긍정적이고 에너지화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이'와 '심리적 경계'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통해 공연중 배우가 경험하는 '심리적 경계'에서 실제 배우가 어떤 변화를 일으키며 심리상태가 유지되어 공연의 전 과정을 수행하는 것인지를 분석하여 무대공포, 부끄러움 등으로 발생하는 스트레스와 집중력을 확인하고 이를 기반으로 정체성의 다변화와 방어기제로 활용되는 무대 현존의 긍정적인 요소를 찾아본다.

『춘추』 왕력(王曆)➂ - 주력(周曆)에서 하력(夏曆)으로, 그리고 공자의 "행하지시(行夏之時)" (『Chūn-qiū』Wáng-lì(『春秋』王曆)➂ - from Zhōu-lì(周曆) to Xià-lì(夏曆), and "Xíng-xià-zhī-shí(行夏之時)" Mentioned by Confucius)

  • 서정화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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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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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3-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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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선진시기에 고육력(古六曆) 등 다수의 역법 체계가 존재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그 중 특히 주력(周曆)과 하력(夏曆)의 논의들이 주가 된 것은, 공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춘추"에서의 역수 체계와 공자가 직접 제자에게 말했던 "행하지시(行夏之時)"에서의 역수 체계가 서로 다른 것에 따른 의혹으로 불거진 수많은 쟁론들에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동짓달을 세수(歲首)로 하는 주력은 태음력 체계이며 하력은 건인월(建寅月)을 세수로 삼은 절기력(節氣曆) 체계이다. 이 두 가지 역법은 그 세수와 계절명 그리고 태음력과 태양력이라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공자가 위방(爲邦)의 방편으로 하력 이행을 권장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천정(天正) 지정(地正) 인정(人正)이라는 3정(三正) 중에서 사람이 중시된 인정을 기준해야 한다는 철학적인 우주관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농업생산성 향상이라는 현실적인 국가 경제 정책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공자가 비록 위정자들에게는 이상적인 도덕적 무결점을 강조한 반면, 대민 정책에 있어서 그가 얼마나 위정자의 현실에 바탕을 둔 책무를 역설하고자 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장르 드라마에서의 표정연기연구 - 드라마 '보이스2'를 중심으로 - (A Study on Facial Expression Acting in Genre Drama - with Focus on K-Drama Voice2 -)

  • 오윤홍
    • 한국엔터테인먼트산업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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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권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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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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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영상연기자들에게 표정연기는 '억지표정'이나 '오버액팅'이 되기 쉽고, 또 지나치게 절제를 강조하면 감정이 부족한 '밋밋한 연기'가 된다. 이러한 표정 연기 방법에 관한 문제제기를 통해서 상업적 색채가 짙은 장르 드라마에서의 배우들의 표정연기를 분석하였다. 결론적으로, 장르 드라마의 배우들의 표정연기 방법은 일종의 전형(典型)적인 방법으로 수행되고 있었다. 이는 영상연기의 시각적 관습에서 미적 기준이 배우들의 표정연기에서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르 드라마에서 인물의 감정은 주로 클로즈업 숏에서 발현된다. 클로즈업 숏 안에서 '확대된 얼굴'중 가장 중요한 표현 매체는 '눈동자'이며, 눈과 눈 주변의 근육 움직임을 통한 감정 표현이 주가 된다. 그 뒤로 중요한 표현 매체는 '입'이다. 입을 벌리고 다물면서 그 정도의 차이에 따라서 다양한 감정이 '눈'의 표현과 함께 전달되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얼굴 근육의 긴장은 감정표현에 크게 저해되며,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최소화하여 얼굴 표면의 지나친 주름을 만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얼굴 표정은 근육 움직임으로 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국, 근육의 움직임은 감정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결과이다. 표정을 일으키는 감정이 먼저 형성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배우의 '정서적 기억', '이완', '집중'등을 통해 '자기화'하는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심리적 연기술이 필연적이다. 또한, 표정이 발현되는 클로즈업 숏이 요구하는 시각적으로 절제된 연기술이 필요하다. 그 외에, 표정연기는 내러티브 전개에 중요한 지점을 제공하는 반응 연기(reaction acting)이며, 주연과 조연이라는 인물의 역할에 따라서 배우에게 요구되는 표정연기의 방법과 숏의 사이즈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재일기』에 나타난 관·혼·상·제례 연구 (A Study on Coming of Age, Wedding, Funeral, and Ancestral Rites Found in 『Hajaeilgi』)

  • 송재용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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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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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5-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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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사옹원(司饔院) 분원(分院)의 공인(貢人)이었던 지규식이 1891년 1월 1일부터 1911년 윤6월 29일까지 20년 7개월에 걸쳐 거의 매일 쓴 "하재일기(荷齋日記)"에는 국내외 정세와 풍속, 의례, 분원 관련 각종 제반사항, 일상생활사 등을 다방면에 걸쳐 다양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특히 지규식의 신분은 양반계층이 아닌바, 이 같은 신분으로 쓴 일기는 흔치 않다. 그런데 필자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하재일기"에 기록된 의례, 그 중에서도 관 혼 상 제례 관련 내용이다. 지규식은 양반이 아닌 신분으로 당시 실제로 행했던 관 혼 상 제례 관련 내용을 "하재일기"에 기록으로 남겼는바, 이러한 일기는 매우 드물 뿐만 아니라 자료적으로도 그 가치가 매우 높이 평가된다. 특히 19세기 말~20세기 초의 관 혼 상 제례의 일면을 엿볼 수 있어 여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관례의 경우, 일반적으로 정월에 행했는데, 이 시기에는 시행시기의 다변화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일부 양반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혼례의 경우, 혼사를 논의할 때 개화되어 가는 과정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파기하는 경우가 종전보다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택일도 신부 집에서 정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중인들이나 평민들의 경우,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렀지만, 부득이 한 경우에는 신랑 집에서 혼례를 치루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규식 자녀들의 혼례는 전통적 절차를 비교적 충실하게 밟고 있었지만, 양가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유동적으로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 예법을 무시한 채, 상중에 혼례를 치르거나 신부를 데려와 신랑 집에서 혼례를 거행한 것은, 근대화 과정에서 외래 종교 및 외래문화의 유입과 이식, 일제의 식민통치, 특히 유교적 사회질서 쇠퇴 등도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이혼도 종전보다 흔했던 것 같다. 상례의 경우, 임종에서 발인하여 하관까지의 기간이 다양한바, 종전보다 다소 변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대부도 보통 임종서 발인까지 3개월인데, 여기서는 7일인바 이를 안 지키는 양반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오늘날 일반적으로 행하는 3일장과 초우 재우 삼우제의 흔적을 "하재일기"에서 찾을 수 있는바, 위의 자료들은 그 가치가 매우 높이 평가된다. 제례의 경우, 제사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규식은 기제사를 지내기 전에 재계(齋戒)를 안 했으며, 심지어 제사 전날 술집에 가서 애인을 만나거나 또는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당시 양반사대부가 하고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지규식은 기독교에 입교하고 나서도 기제사를 지냈으며, 천도교에 입교한 후에도 제사를 지냈다. 한편, 지규식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식과 추석 때 직접 또는 동생이나 아들들을 보내 묘소에 가서 차례(묘제)를 지내게 했다. 그렇다고 지규식이 10월에 묘제를 지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지규식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상으로 지내는 생일제사를 생신차례라고 하여 거의 매년 지냈다. 그런데 생신차례와 제사를 별개로 지낸 적도 있어 특이하다.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일제가 강점할 무렵의 경기도 광주지역 중인출신 집안의 기제사, 차례와 묘제, 생신차례를 지내는 모습은 양반가의 제례 관행보다는 약간 다르고 덜 엄격하지만, 양반이 아닌 집안의 제례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이상에서 보듯, "하재일기"에 나타난 관 혼 상 제례의 내용은 자료적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민속학적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초정(艸丁) 김상옥(金相沃) 시조(時調)에 나타난 자연관(自然觀) (A Study on the View on Nature in Ch'o-Jung's Three-Verse Poems(Sijo))

  • 최흥열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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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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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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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이 글은 초정(艸丁)의 초기 시조집(時調集)인 "초적(草笛)"에서 마지막 시조집인 "느티나무의 말"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발견(發現)되는 자연관(自然觀)을 형식주의적(形式主義的) 방법(方法)과 구조주의적(構造主義的) 방법(方法)을 참고로 하여 자연관(自然觀)을 탐색(探索)하는데 목적(目的)을 두고자 한다. 이 연구의 대상은 시조시인(時調詩人)의 자연(自然)을 인식(認識)하는 사유체계(思惟體系)로서 기존(旣存)의 성과(成果)들을 수용하면서 사상적(思想的) 배경(背景)으로 고시조(古時調)에 나타나는 전통적(傳統的) 자연관(自然觀)의 동질성(同質性)이나 유이성(類似性)을 염두에 두면서 이질성(異質性)도 살피려 한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 수행은 초정(艸丁)시조의 내적(內的) 감정의 지향성(指向性)을 자연(自然)의 형태를 빌어서 살펴봄으로서 전통(傳統)의 계승과 발전적(發展的) 측면을 확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초정(艸丁) 시조(時調)에 나타나는 자연관(自然觀)의 고찰(考索)은 나름의 의의를 지닌다 할 것이다. 전통적(傳統的)인 동양(東洋)의 자연관(自然觀)과 맥을 같이하는 고시조(古時調)에 나타나는 자연관(自然觀)의 흐름과 그 전통에 주목하면서 고시조(古時調)와 초정(艸丁) 시조에 나타나는 자연관(自然觀)을 천착(穿鑿)한 결과 고시조(古時調)에서 추출(抽出)되는 자연관(自然觀)은 첫째, 심성수양(心性修養)의 자연관(自然觀)으로 16세기의 자연관은 혼탁(混濁)한 정치현실과 대립되는 심성수양(心性修養)의 자연관, 둘째, 한거(閑居) 노동(勞動)의 자연관으로 17세기에 이르면 도학적(道學的) 우주론적(宇宙論的)인 전범성(典範性)이 쇠퇴(衰退)하고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자연관(自然觀)에서 약화되고 강호(江湖) 한거(閑居)의 감흥이나 전원생활(田園生活)의 구체적(具體的) 노동 공간으로 시적 관심사(關心事)가 나타난다. 셋째, 은일적(隱逸的) 격리(隔離) 공간의 자연관(自然觀)으로 19세기에 오면 중앙정치에서 소외된 사족(士族)들은 정권에 참여하려는 꿈을 접고 향촌(鄕村)에서 기득권(旣得權) 보전에나 힘쓰면서 세도가문(勢道家門)의 정국주도권(政局主導權)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넷째, 자유분방(自由奔放)의 자연관(自然觀)으로 조선 후기로 넘어 오면서 도시(都市) 상업문명(商業文明)의 발달과 중간층(中間層)의 사회적(社會的) 부상(浮上)으로 시조의 형유층(享有層)이 사대부(士大夫)의 독무대에서 중간층(中間層)이 새로운 시조의 형유층(享有層)으로 부상하는데 가객(歌客)의 등장이다. 문화적(文化的)으로 성장한 중간층(中間層) 지식인들은 시조를 자신의 예술적(藝術的) 교양물(敎養物)로서 애호(愛好)하며 창작(創作)한 그룹이다. 20세기에 이르러 초정의 시조에서 발견(發現)되는 자연관은 첫째, 전통적(傳統的)인 관념논적(觀念論的) 자연(自然)인식으로 꽃을 빌어 사친(思親)을 연역하여 내는 데 있어 인생논적(人生論的) 의미는 배제되고 그 대신 객관적(客觀的) 사물성(事物性)으로 치환(置換)하여 간접적(間接的)으로 표현(表現)하고 있다. 둘째, 서정적(抒情的) 사향(思鄕)과 동경(憧憬)의 대상이다. 초정의 서정(抒情)의 지향성(指向性)과 모더니즘적 기교(技巧)가 보여 시각적(視覺的) 이미지로 고향의 그림이 보이고 있다. 셋째, 근원적(根源的) 사친(思親)의 인식(認識)을 보인다. 넷째, 유기체적(有機體的) 생명성(生命性)을 보인다. 다섯째, 노장적(老莊的) 정적미(靜寂美)를 표출(表出)하고 있다. 정적미(靜寂美)의 인식 대상은 구름 달 눈 낙수 산 낙엽 숲 하늘 봄 됫뫼 꽃 강남 강 바다 바람과 같은 원초적(原初的) 자연(自然)으로서 사물화(事物化)하고 이것을 다시 계절 감각으로 포착(補捉)하는 이원적(二元的) 표현(表現) 구조(構造)를 보인다. 마지막으로 자각(自覺)과 관조(觀照)의 인식이 발현되는 "초적(草笛)" 제3부 "노을빛 구름"에는 문화적(文化的) 유물(遣物) 혹은 역사적(歷史的) 유물(遺跡)을 소재로 한 시조가 집중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청자부(靑磁賦)>, <백자부(白濾賦)>, <옥적(玉笛)>, <십일면 관음(十日面 觀音)>, <다보탑(多寶塔)>, <촉석루(矗石樓)>, <무열왕릉(武烈王陵)>, <포석정(鮑石亭)>, <재매(財買)>, <여황산성>등의 작품이 실려 있다. "초적(草笛)"에서 보여준 고전적(古典的) 문화유산(文化遺産)에 대한 깊은 자각(自覺)과 관조(觀照)는 그 이후의 시조집인 "삼행시육십오편(三行詩六十五篇"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항아리", "이조(李朝)의 흙", "내가 네 방(房)에 있는가", "관계(關係)", "포도인영가(蘭菊印影歌)", "착한 마법(魔法)", "금(金)을 넝마로 하는 술사(術士)" 등의 작품이 도자(陶磁)를 시적(詩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초정(艸丁) 김상옥의 시조에서 나타나는 자연관(自然觀)은 자연(自然)과 순응(順應)하는 고시조(古時調)의 전통(傳統)을 계승(繼承)하고 나아가 관념논적(觀念論的) 자연(自然) 인식(認識)이 자연(自然) 상관물(相關物)을 통하여 구체화된 사물화(事物化)로 나타나 표현(表現)의 간접성(間接性)을 드러낸다. 이러한 표현의 복합적(複合的) 중층구조(中層構造)는 고시조(古時調)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실용논적(實用論的) 자연관(自然觀)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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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 경문에서의 묘(廟)·궁(宮) 언급을 통한 주대(周代)의 그 쓰임 사례 일고찰 - 주대의 묘수제(廟數制) 실재 여부에 대한 궁구 과정에서 【1/2】- (A Study on the Usage of Miào(廟) and Gōng(宮) in Zhou Dynasty through the Mentions to Them in the Scripture Sentences of 『Chūn-qiū(春秋)』 - In the Process of Investigating the Existence of Zhou Dynasty's System to Regulate the Number of Zōng-miào(宗廟) 【1/2】)

  • 서정화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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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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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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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논의에서는 주대(周代) 묘수제(廟數制)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방편으로 "춘추"의 기록 속에 나타나는 '묘'와 '궁'에 대한 집중적인 고찰을 시도하였다. 경문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은 부분들은 "좌전"의 글과 기타자료들을 통해 사건의 맥락을 확인하였다. "춘추" 경문에서의 '묘(廟)'자의 쓰임 사례에서 주목할 만한 사항으로는 다음과 같다. 노나라의 태묘에서는 범국가적인 행사[事]와 제왕의 정치적인 제사 의례인 체(?) 의례를 이행하였고, 또 그와 같은 의례에 쓰이는 화려한 예기(禮器)를 구비하였다. 당대 군주의 종묘에서는 조정 의례인 조(朝)의례를 이행하였다. '궁(宮)'자의 쓰임 사례는 다음과 같다. 군주 개인의 가족이 기거했던 궁에서 그를 위한 가족 제사를 이행하였다. 노나라 삼환씨(三桓氏)의 정치적 거점이라 할 수 있는 환궁(桓宮)을 화려하게 장식한 기록이 눈에 띈다. 희공(僖公) 재위 시에 있었던 서궁(西宮)과 성공(成公) 3년에 화재로 소실된 신궁(新宮) 등은, 그것이 예궁(?宮)일 것이라는 한대 이후에 형성된 관점과는 달리, 양공(襄公)이 좋아했던 초궁(楚宮)과도 같은 군주의 또 다른 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무궁을 세우고'[立武宮] '양궁을 세웠다'[立煬宮]고 하는 기록은, 어떠한 건축물에 '무(武)'와 '양(煬)'이라고 하는 상징성을 부여해 설립하여 제후가 그곳의 위(位)에 서는 행사가 이어진 것임을 논하였다. 따라서 이것은 무공(武公)이나 양공(煬公) 등의 선군을 위한 당대 군주의 효성스러운 제사 이행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그 의례를 통해 얻는 특정의 정치적 상징성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징성은 환궁(桓宮)과 희궁(僖宮)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경문에서의 모든 묘와 궁들은 일정 부분 사당(祠堂)의 기능이 있긴 하지만, '천자7묘'나 '제후5묘'라는 묘수제의 규정에 맞추기 위해 사당으로서 조성한 건축물이 결코 아니었음을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