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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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호위제도의 고찰 (Study on the Guarding System in the latter "Choson" era)

  • 이성진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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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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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9-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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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조선시대의 경호제도는 경국대전 세조, 예종 때에 완비되고 성종 때에 보충됨으로 써 이 법전을 근거로 하여 우수한 군사를 선발하여 근접경호를 담당하는 금군과 수도 방위와 시위임무를 담당하는 중앙군에 편성함으로써 왕실호위체계가 확립되었다. 임진왜란을 기준하여 볼 때, 전기에는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정로위로 구성되었던 금군이 후기에 들어 상황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였다. 조선전기에 국왕의 신변보호와 수도권 방위에 주력하던 금군의 임무가 임 병 양란의 영향으로 변란과 외적침입을 막아내는 전쟁을 아울러 수행 하는 상황에서 전에 임시방편적으로 설치되었던 비변사의 역할이 확대되는 등의 군사제도의 변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5군영제의 실시로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3 군영이 국왕 호위와 수도방위를 담당하였고, 총융청, 수어청은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을 거점으로 수도권외곽의 방어를 담당케 하였다. 따라서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금군의 기능이 확대됨에 따라, 인원이 대폭 증가되고 현실인식과 자아각성으로 인한 서민의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왕실과 국가의 호위체제에도 상황에 따라 변화가 잦게 되었다. 그러나 종전에 있던 제도가 그대로 남아 있어 실제로 호위를 맡은 군사보다 명분상의 숫자가 늘어난 결과가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호위청, 금군청, 숙위소, 장용영 등의 금군의 재편성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뒤따르는 재정적 뒷받침에도 문제가 되는 가운데 기존의 기본조직들의 위상에 대한 변화도 심해졌다. 정조의 등극은 호위제도의 변화에 획기적인 시대였다. 정조는 친족들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하여 숙위소를 신설하고 장용영을 강화하여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고 당대에 한했지만 왕권을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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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공적·사적경호의 특성과 현대경호와의 비교연구 (A comparison study of the characteristics of private and public security service of Koryo dynasty and modern security service)

  • 이성진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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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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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7-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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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고려건국 후 왕의 측근 친위군에 대한 제도적 정비는 성종시대에 이루어졌다. 건국 후 국가제도를 정비하는 법제의 확립과 더불어 2군 6위에 소속된 금군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금군의 핵심부대는 견룡이며, 그들은 필요에 따라 국왕의 가까운 위치에서 호위하거나 궁성을 수비하고 방어하는 부대로 성장하면서 제도적 위상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사적경호제도인 도방(都房)의 창설은 경대승이 신변 안전을 위하여 자신을 따르는 무술이 뛰어난 군졸들과 침식을 같이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경대승이 병사하고, 그의 도방도 곧 해체되었다. 최충헌은 집권 후 경대승의 도방을 부활시켜 이를 보완하고 발전시켰다. 최충헌은 그의 문하에 문무를 두루 겸비한 문객들이 많은 가운데 유능한 인물을 영입하여 군사기반을 강화하는 한편, 문신들의 조언도 받아들이며 도방의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로써 자신의 정권을 위협할 수 있는 금군의 힘을 약화시킴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굳혔다. 최우의 집권 이후 6번 도방을 내외도방으로 확장, 개편하여 실질적인 도방으로 발전시켰다. 또 야별초를 창설하여 도방의 위기를 방지하는 효력도 발휘하였다. 고려시대의 공경호인 금군은 왕권이 무력화된 무신집권시대에도 그 제도는 존속되었으나, 군권을 위시한 실권은 사적경호 조직인 도방이 행사하였고 왕은 다만 상징적인 존재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고려시대의 경호와 현대 경호를 비교해 볼 때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으나, 경호의 본질에 있어서는 경호대상자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차이점으로는 고려시대의 충성심과 현대의 이익추구가 각각 그 특징으로 대비되며, 고려시대 경호가 무력에 의한 강압으로 다스려진 것이라면, 오늘날의 경호는 자유의지에 의한 의무와 책임감의 수행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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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처리 시 소금첨가에 의한 풋콩의 색과 Chlorophyll 함량 변화 (Color and Chlorophyll of Blanched Vegetable Soybean by NaCl)

  • 송재연;김철재;안길환
    • 농업과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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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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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8-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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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풋콩의 열처리 시 소금의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이전의 실험에서 비슷한 수치를 나타낸 $80^{\circ}C$-30min, $90^{\circ}C$-20min, $100^{\circ}C$-10min의 조건에서 color와 chlorophyll 함량을 측정하였다. 녹색과 깊은 관련이 있는 -a값(colorimeter parameter)과 chloropyll a의 두 수치만을 비교해 보았을 때, -a값은 $100^{\circ}C$-10min이 높게 나온 반면, chlorophyll a는 $80^{\circ}C$-30min에서 높게나왔다. 그리고 chlorophyll 함량의 경우 소금을 첨가한 군이 비 첨가군보다 높은 값을 나타내었다. 온도와 시간이 color와 chlorophyll 함량 파괴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반응속도상수(reaction rate constant)와 활성화 에너지(activation energy)값을 구해보았다. 그 결과 반응속도 상수는 온도가 $10^{\circ}C$증가함에 따라 2배 가량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이는 Arrhenius 이론과 일치하였다. 소금의 첨가는 seed의 색(greenness)만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chlorophyll과 color의 파괴속도를 저하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Pod에서 chlorophyll a 감소를 위한 활성화 에너지는 146.63 Kcal/mol(소금군)로 비소금군의 138.02 Kcal/mol 보다 높은 값을 나타내었고 이는 소금이 색소저하 반응의 속도를 낮춤을 의미하였다. 결과적으로 풋콩의 열처리 시 소금의 첨가는 단순히 맛의 변화뿐만 아니라 chlorophyll 잔량을 높여 풋콩의 색소를 안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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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 건국 초 중앙군(中央軍)연구 (A Study on central army in the early Joseon Dynasty)

  • 박희성
    • 융합보안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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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6_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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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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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조선은 건국과 동시에 군제를 개혁하였다. 고려의 이군(二軍) 육위(六衛) 체계를 바탕으로 하여 10위(衛) 50령(領)으로 개편하였다. 하지만 사실상의 중앙군사력은 이성계의 친군인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에 있었다. 이들과 더불어 중앙군사력의 중추를 이루는 것은 각도의 절제사가 상경시킨 시위패(侍衛牌)였다. 또한 반법제적인 성격의 성중애마(成衆愛馬)도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군령과 군정체제는 정비되기 시작한다. 먼저 군령체제의 개혁으로 지휘체제의 일원화를 위해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설립한다.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는 판사 정도전에 의해서 군사전반에 걸친 강력한 통어권(統御權)을 갖는다. 이어서 정도전은 군사 교육훈련을 강화한다. 교육기관인 훈련관(訓練觀)을 설립하고, 진법훈련을 강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군령체제의 확립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병혁파였다. 왕자의 난 이후 사병 혁파론이 본격적으로 대두하게 되었다. 일부 왕자와 중신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사병을 완전히 혁파하여 새로운 군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군정의 체계화도 이루어졌다. 태조 때 정도전은 십위(十衛)를 십사(十司)로 변경하였다. 이후 세종대에 다시 십이사(十二司)로 확대한다. 또한 태종은 흩어져 있던 이전의 갑사(甲士)들이 복립한다. 갑사(甲士)의 복립을 계기로 하여 과거의 하나의 왕부(王府)를 지키던 사병적인 甲士가 이제는 국가의 녹에 의하여 길러지는 국가의 기간병으로서 과거에 장번적인 갑사(甲士)가 이제는 체번교대(遞番交代)를 행하는 국가제도로서 성립된 규범에 의하여 제도화의 시초를 이루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추가적으로 별시위(別侍衛),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 등의 각종 특수병종이 증창설 된다. 이들은 금군(禁軍)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각자의 역할을 한다.

정조대(正朝代) 장용영(壯勇營)의 경호학적 가치 (King Jeongjo's Jangyongyoung and its Value in Terms of Security)

  • 이성진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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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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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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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상정조대 장용영(壯勇營)은 정조 즉위 후에 신변안전(身邊安全)과 왕권강화(王權强化)를 이룩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 친위부대(親衛部隊)였다. 이는 경호학적 관점에서 볼 때 경호제도 발전과 호위(扈衛) 성과, 경호환경(警護環境)조성의 문화적 가치가 있다. 장용영은 조선 후기의 호위제도의 변화 속에서 정조의 정치적 개혁을 실천해 나가는 데 있어서 합당한 제도로 거듭났다. 인조반정 이후에 역 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호위청(扈衛廳)과 어영청(御營廳) 발족, 그리고 효종 때의 군사력 증강을 목표로 금군을 발전 시켰던 제도들은 임시변통적인 것이다. 그러나 장용영은 숙위소${\blacktriangleright}$장용위${\blacktriangleright}$장용영의 과정을 거치면서 보다 지속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제도로 거듭나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지키면서 왕권강화와 민생안정에 대한 정치적 포부를 실현하는 데 실질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친위부대로 발전하였다. 장용영의 제도에는 효율적인 조직과 운영이 내포되어 있다. 장용영 조직의 특성은 통합성, 전문성, 대규모성을 지닌 것으로서 현대경호의 특성을 드러냈다. 장용영의 군사훈련(軍事訓鍊)과 호위(扈衛)는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호위 작용에서도 정적인 신변보호(身邊保護)와 숙소경비(宿所警備)의 임무에 충실했으며, 이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폭넓은 활동의 범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돌발 사태에도 충분히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잦은 능행과 대규모의 화성행차 및 병사들의 훈련 참관 등의 폭넓고 자유로운 활동을 뒷받침할 수 있었다. 장용영은 단순히 군사적 기능만을 발휘한 부대가 아니고 문화적 기능을 발휘하여 왕실과 백성들이 위기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어 왕의 행차(行次)에 참여하고 왕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왕과 병사가 하나가 된 장용영은 정조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부대로서의 위용(偉容)을 보여줌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국왕과 신하와 백성들이 하나가 되는 경호문화행사(警護文化行事)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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