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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인삼과 의약서에 대한 기록 (Records on Ginseng and Medical Book during the Goryeo Dynasty)

  • 이성동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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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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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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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우리나라의 특산품인 고려인삼은 삼국시대 이래 가장 중요한 수출품 중 하나였다. 그러나 고려 시대까지 우리 역사에서 인삼에 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본 고에서는 고려 시대의 인삼에 관한 국제 수교 및 교역 기록과 당시 출판된 것으로 알려진 의약서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주변 국가인 발해, 송, 왜, 후진, 원나라와 외교적 예물로 또는 교역품으로 인삼이 활발하게 거래되었다. 주로 고려에서 주변 국가로 인삼이 수출되었지만 발해와 거란으로부터는 인삼을 외교적 예물로 받기도 하였다. 아라비아 상인은 고려의 대표적 국제무역항이었던 벽란항에 와서 인삼을 교역하였다. 몽골 침입 이후 원나라의 인삼 요구량이 지나치게 많아서 큰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제중입효방』, 『어의촬요방』, 『향약고방』, 『삼화자향약방』, 『향약혜민경험방』, 『향약구급방』, 『비예백요방』 등 여러 의약서가 출판되었다. 『향약구급방』은 조선시대에 중간된 것이 전해지고 있으나 나머지 책들의 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최근 후대의 여러 의약서에 인용된 것들을 연구하여 그 일부가 복원되기도 하였다. 궁중에서 사용되었던 의약서에는 인삼을 포함한 처방의 비중이 높았던 반면 주로 평민을 위한 『향약구급방』에는 인삼 처방이 한 건도 수재(收載) 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인삼이 매우 귀하고 고가이어서 평민이 접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tvN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의 내러티브 특징과 현대적 요소의 활용 방식 연구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the Narrative and Application Methods of the Modern Elements of , a Drama of tvN)

  • 염원희
    • 대중서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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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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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9-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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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연구는 텔레비전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을 통해 퓨전사극의 관습이 무엇이며, 이를 바탕으로 장르 내부에서 개성적인 변주가 이루어지면서 대중성을 확보해가는 과정을 확인하고자 한다. <백일의 낭군님>은 퓨전사극의 관습을 심화하는 방식으로 오히려 관습성을 탈피하고자 하였다. 기존 드라마에서 반복된 갈등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시청자들이 쉽게 몰입할 수 있도록 하였고, 궁중 암투를 그리면서도 이와 분리된 공간을 설정하여 남녀의 로맨스를 충실하게 그려내었다. 두 개의 개별적인 수수께끼를 제시하여 내러티브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또한 '비혼'과 기득권의 횡포라는 사회문제를 이야기하고, 시대상을 반영한 인물과 신조어와 줄임말을 활용한 대사 등 현대 문화의 조선적 해석을 시도하여 과거로 오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시각으로 과거를 보는 시점을 취하여 새로움을 선사했다. 드라마 콘텐츠의 성공은 관습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무엇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하는 데 있다. <백일의 낭군님>은 퓨전사극의 현재와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드라마이다.

아시아 전통춤의 전파에 기반한 전통문화콘텐츠 구축 사례 고찰 - 서역춤 <자지무>의 동아시아 전파를 중심으로 - (A Case Study on the Process of Developing a Traditional Culture Content based on the Spread of Asian Traditional Dance - with a Focus on the Spread of Jajimu to East Asia -)

  • 허동성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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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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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63-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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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고는 고대 서역의 석국(石國. Chach)의 민족무용인 <자지무>가 중원에 전파된 후 <쌍자지> 혹은 <굴자지>로 변용된 뒤 당송대에 고려에 유입되어 궁중의 당악정재 <연화대>로 변용된 아시아 전통춤의 전파 과정을 토대로 한 공연문화콘텐츠의 구축 사례를 돌이켜 고찰하였다. 본 프로젝트를 위해 서역, 중국, 한국의 고대 무용 전파와 관련된 광범위한 사료를 분석하는 사전 연구를 수행하였다. 나아가 사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관련 도상, 동영상, 음원 자료들을 수집하여 공연 제작에 반영하였다. 사전 연구를 기반으로 각 분야 전문인력과의 협업을 통해 음악, 무용, 복식의 재구를 시도하고 그 결과를 공연으로 마무리한 제작 과정을 기술하였다. 나아가 프로젝트의 성과와 향후 활용방안을 제안하였다. 고증사료와 참여인력의 부족에 따른 한계에도 불구하고 고대 아시아 전통춤의 전파와 변용을 주제로 시도한 국내외 최초의 전통문화콘텐츠 구축 사례인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정조(正祖)의 궁원(宮苑) 유락(遊樂) (Jeongjo's Enjoyment of the Palace Garden)

  • 홍형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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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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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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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본 연구의 목적은 정조가 궁원에서 즐긴 유락의 실태를 규명하는 것이다.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상화조어연'은 규장각을 위한 연회로 규례를 정하고 정례화 했다는 차별성이 있다. 정조는 다섯 차례의 행사를 열었다. 둘째, '세심대 놀이'는 정조의 비극적인 개인사를 바탕으로 하는데, 네 차례의 행사가 있었다. 셋째, 정조는 비가 내린 직후에 맑은 물이 흘러넘치는 옥류천의 '폭포 구경'을 즐겼다. 이는 일상적 경관이 아니라 많은 비가 내린 후의 임시적인 경관을 즐겼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넷째, '설중용호회'는 무신들을 위무하는 자리로 일곱 차례의 행사가 있었다. 한 겨울에 열린 이 행사에서는 참석자들이 각자 쇠 꼬치에 꿩을 꿰어 구워 먹게 했다. 또 술과 음악을 베풀어 군신(君臣)이 고락을 함께하는 것을 강조했다. 다섯째, 정조는 겨울철에 난로회를 열거나 난로회의 고사에 따라 술과 음식을 내려 문신들의 노고를 위로하기도 했다. 여섯째, 정조는 활쏘기에 능했으며 이를 즐겼다. 정조 궁중의례인 연사례를 복원하고자 하였으며 두 차례의 연사례를 열었다. 일곱째, 정조는 바쁜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후원에서 달랬던 것으로 보인다. 또 정조는 후원의 자연경관을 감상하며 만물이 생성, 변화하는 주역의 의미를 일깨우기도 했다. 여덟째, 정조는 궁원에서 '군신동락의 자리를 적극적으로 마련했다. 정조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측근 신료들의 지원이 필수적이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본 연구의 한계는 정조 관련 여러 고문헌 중 번역물에 국한하여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사료의 발굴과 번역 성과물이 축적됨으로서 보다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고려 무신집권기 호위제도의 경호학적 고찰 (History of Guard System during the Period of Military Rule in the Goryeo Dynasty)

  • 이성진;조성진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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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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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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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고려전기의 궁중호위는 2군6위의 중앙 정규군으로 편성되어 궁궐안의 호위는 내순검군이 담당하였으나, 무신집권기에 이르러 군제는 문란해지고 왕실 호위는 무신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무신들은 왕의 지척에 있는 중방을 중심으로 문신들을 억압하고 왕권을 무력화 시킨 후 국정을 좌지우지하였다. 무신의 3거두였던 정중부, 이의민, 이고 등의 집권이 단명으로 끝나고 경대승이 집권자의 지위에 올랐을 때, 그는 자신의 신변안전을 위하여 백 수십인의 결사대를 문하에 두었는데, 이 조직이 도방(都房)이었다. 경대승이 병사함에 따라 도방이 폐지되고, 최충헌 집권시대에 신변보호와 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경대승의 도방을 부활시켜 보완한 6번(番)도방은 규모가 방대하고 더욱더 체계를 잘 갖추었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집권기에 6번 도방은 내외도방(內外都房)으로 확장, 강화되었으며, 손자 최항의 집권기에는 한층 더 발전하여 도방 36번제도가 확립되었다. 초기의 도방은 무신 중심으로 도방 주인의 신변안전을 목표로 하였지만 후기에는 문신이 참여함으로써 정보 수집과 선발 경호의 활동을 하였고, 내도방에 해당되는 가병은 사후 위험 방지 역할까지 함으로써 개인의 호위에 만전을 기함은 물론 가문을 지키고 나아가 사회질서와 왕실과 조정을 장악하고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는 포괄적인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최 씨 정권은 사적 친위조직으로서 도방 이외에 마별초(馬別抄)를 창설하였는데, 이는 도방과 함께 기병과 보병(步兵)의 양쪽 날개를 이루었다. 삼별초는 고종 때 최우가 조직한 야별초가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어지고, 여기에 신의군이 합해져 만들어진 것이다. 삼별초가 조직된 이후에는 별초군이 군사와 경찰, 형옥에 이르기까지 그 기능을 발휘하였다. 무신집권기의 호위 조직이었던 도방과 별초군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설경호기구로 출발하였으나 차츰 왕실 호위 기구를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왕실이 도방의 보호를 받는 경지에 이르렀다. 사설경호경비에 해당되는 현대의 민간경호경비는 영리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특성이지만 공적경호경비와 마찬가지로 범죄예방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신 집권시기의 가병이나 도방 구성원들의 역할과 공통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신집권기의 경호조직은 처음에 개인의 신변 호위를 담당한 도방으로 출발하여 무신들의 참여와 확장으로 공공성을 띠어가게 되었고, 삼별초(三別抄)의 활약에 이르러서는 왕실 호위기구가 담당했던 역할에 근접하는 국가 사회 치안구조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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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관덕정(觀德亭) 벽화의 도상과 표상 (Iconography and Symbols of the Gwandeokjeong Pavilion Murals in Jeju)

  • 강영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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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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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8-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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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제주의 관덕정은 군병들의 활터로 '활쏘기'는 물론 '말 타면서 활쏘기', '전쟁의 진법'까지 훈련하여 상무 정신을 고취시키고, 전쟁 대비를 위해 무예를 연마할 목적으로 1448년에 건립되었다. 또한 제주에서 유일하게 대규모 인원이 운집할 수 있는 넓은 공간으로 각종 연회나 관아의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관덕풍림'과 같이 계절의 정취와 자연의 운치를 향유하는 장소였다. 이러한 장소성과 건축적 의미가 큰 관덕정이 17세기 건물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기에 건물 상인방 4면의 5가지 그림이 조선 후기의 그림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관덕정은 10여 차례 이상의 수리와 중수를 거쳤기에 벽화가 구체적으로 언제 처음 그려졌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현재의 벽화원형은(1976년 모사본 기준) 벽화의 도상과 양식으로 추정해보면 1850년(철종1) 재건, 1882년(고종19) 중수, 1924년 도사(島司) 전전선차(前田善次)의 보수, 1969년 10번째 중수 때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벽화 도상을 분석하여 제작 시기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즉, 최초 <호렵도>가 18세기 이후 그려지기 시작한 점을 비롯하여 삼국지의 유명 화제인 <적벽대전>이나 한나라 때의 은일자를 그린 <상산사호>, 당나라 시인 두목의 이야기인 <취과양주귤만거>와 같은 고사인물도의 유행과 민화풍의 <십장생도> 등의 주제는 물론 그림의 구성, 인물의 무기와 복식, 산수 표현과 채색, 필법 같은 세부적인 사항도 관덕정의 벽화가 19세기 말경에서 20세기 전반기에 그려진 작품임을 방증한다. 또한 당시 화단에서 유행하던 회화 주제나 양식과 관련이 깊어 1850년이나 1882년에 제작된 벽화가 1924년 보수와 1969년 중수를 거치면서도 벽화의 기존 내용과 형태를 보존·유지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으로 관덕정의 벽화 주제나 구성 방식은 군사훈련이라는 건물의 목적과 기능에 적합하게 건물 중앙 좌우에 파노라마 형식으로 <적벽대전>, <호렵도>를 구성하고, 바깥쪽으로는 감계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으로 제주의 관리가 지녀야 할 덕목인 은일과 입조 등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상산사호도>나 <취과양주귤만거>의 고사 인물도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또한 신선 사상과 장수를 상징하며, 궁중 행사나 장식화로 쓰이던 주제가 민간으로 확장되어 길상·벽사 기능이 강화된 <십장생도>를 표현하였는데, 이는 당인들의 지향을 반영하기 위해 전체적인 벽화 주제와 구성을 선택적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벽화의 산수가 제주의 명산인 '한라산'이라는 점, 높고 낮은 오름, 현무암 자연석 돌담 표현, 수많은 고사 중에 제주의 진상품이자 특산품인 '귤'을 주제로 한 두목의 고사를 채택하여 시각화한 점, 백록담의 흰 사슴 전설의 응용, 제사를 중시하는 유가적 관습이 남병산의 제사 장면으로 표현된 것 등은 모두 제주의 풍속과 자연환경, 생활상의 일부를 반영하는 그림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내외진연등록(內外進宴謄錄)」을 통해 본 궁중연회음식의 분석적 고찰 - 1902년 중화전 외진연(外進宴) 대전과 황태자의 상차림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Royal Banquet Dishes in Naeoejinyeon-Deungnok in 1902)

  • 이소영;한복려
    •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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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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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8-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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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This study focused on the historic documents known as $deungnok$, records created during preparations for royal events in the $Joseon$ Dynasty, rather than the often cited $uigwe$, the documents describing the Royal Protocol of the $Joseon$ Dynasty. As a reference to the food served at royal banquets, the $deungnok$ can enhance our understanding of royal banquet foods. Seven specimens of $deungnok$ describing royal banquet foods are currently in existence, created during preparations for royal events by the agencies in charge of food, the $Saongwon$ and $Jeonseonsa$. Owing to the nature of their authorship, the details recorded in these $deungnok$ hold great value as important resources for the study of royal banquet cuisine. $Naeoejinyeon$-$deungnok$, which documented an $oejinyeon$ banquet held at the $Junghwajeon$ Pavilion in November 1902, was somewhat disorganized and fragmented. $Jinyeonuigwe$ was more inclusive and well-summarized, since the former were progress reports to the King during banquet preparations that listed various items separately, such as dishes for each table setting and the kinds of flower pieces, and thus did not present a complete picture of all the details as a whole. The latter, on the other hand, were final reports created upon completion of a banquet, and contained more comprehensive records not only of the $chanpum$ (the menu of dishes served), but also the sorts of tableware and tables, floral arrangements, location, scale, and installation date of the $sukseolso$ (temporary royal kitchens for banquets). They also offer a more effective summary by simplifying details duplicated in identical table settings. Nevertheless, the $Naeoejinyeon$-$deungnok$ recorded some facts that cannot be gleaned from the $Jinyeonuigwe$, including the height of some dishes presented in piled stacks, as well as the specific names of dishes and their ingredients. The comparative study of the historic records in the $deungnok$ and $uigwe$ will be helpful in identifying and understanding the specific foods served at royal banquets. The $oejinyeon$-$seolchando$ diagrams in $Naeoejinyeon$-$deungnok$ depict the table settings for the King and the Crown Prince. The two diagrams contain large rectangles divided into three sections. In each section are similar-sized circles in which the names of dishes and the titles for table settings are recorded. From these records we can see that the arrangements of the table settings for the King and the Crown Prince are similar. The relationships and protocols shown in the arrangement of dishes and table settings for the King and the Crown Prince at royal banquets in the $Seolchando$ appear to be consistent. By comparing the two references, $deungnok$ and $uigwe$, which recorded the dishes served at royal banquets, the author was able to determine the height of some foods served in stacked arrangements, the names of $chanpum$, the ingredients used, and the configuration of the $chanpum$. The comparative review of these two written records, $deungnok$ and $uigwe$, will be helpful for a proper understanding of the actual food served at royal banquets.

일본신찬(日本神饌)을 통한 한국고대식(韓國古代食)의 추정연구(推定硏究) -담산신사(談山神社) 가길제(嘉吉祭) 백미어식(百味御食)(2)- (Study on Korean Ancient Dietary Culture through Japanese Sacrificial Offerings -Danjanjinja Kakitsisai(2)-)

  • 김천호;김자헌태낭;각야맹;김전상지
    •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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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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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9-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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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
  • 담산신사(談山神社)의 전신(前身)은 한반도로부터 일본으로 불교(佛敎)전래 이후 불교문화(佛敎文化)가 번성하던 7세기에 건립된 묘악사(妙樂寺)이다. 근세(近世)에 들어와서 국가적인 폐불훼석(?佛毁?)으로 신사(神社)로 바뀌었으므로 고대(古代)로부터의 1200년간 절의 불공(佛供)양식이 그대로 답습되어 전승되어 왔다. 신찬(神饌)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고대불교문화(古代佛敎文化)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문화의 교류가 빈번했던 한국고대의 식문화를 연구하는데 참고가 되리라 본다. 1) 고배(高排) 음식의 형태는 본신사(本神社)와 동시대(同時代) 동계통(同系統)의 춘일대사(春日大社)나 법륭사(法隆寺) 등 고대(古代)의 절이나 신사(神社)에 남아 있어서 현존하는 한국 고배차림과 상통하는 점을 뚜렷이 볼 수 있다. 단지 일본은 현재로는 사자(死者)나 신(神)에게 대한 제사에만 남아 있다는 점이 한국은 경사스런 행사에도 널리 쓰여지고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또 한가지는 본신사(本神社)의 고배형태가 단순한 원주형(圓柱型)에서상부가 지붕 같이 넓어지는 형태로 변형된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고배음식은 실제로 행사가 끝나면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인데 비해 ${\ulcorner}$백미어식(百味御食)${\lrcorner}$은 형태만을 화려하게 만든 상징적인 것이다. 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외관상의 모양만을 만든 것이라 보고 신인공식(神人供食)의 사상으로 볼 때 고대(古代)에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이였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고배음식은 원래 불교, 도교, 유교, 샤마니즘 등의 복합적인 영향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아 인도와 중국에 근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뒷바침이 될만한 것이 없어서 앞으로 뿌리와 유래 그리고 변천과정 등을 조사해야 할 것이다. 2) 고배음식 위의 장식은 고추나 꽈리 등의 열매를 죽곶(竹串)(대나무 꽂이)에 꽂아서 더욱 화려하게 만든 점이 특징이다. 이는 이조(李朝)시대 궁중연회행사에서 고배음식에 상화(床花)로 꽂는데 까지의 발전과정에서 극히 시초단계의 형태로 본다. 생열매나 꽃이 보였고 다음이 떡으로 새나 꽃모양을 만들어 장식했고(사진 10) 그 다음이 계절과 관계없이 실크나 종이로 조화(造花)를 만들어 화려하게 장식했다. 3) 화도(和稻)의 문양(紋樣)은 매년 다르나 만형(卍型)은 필히 포함시키고 나머지는 다양한 종류중에서 선택한 것으로 보아 문양이 고대로부터 다양하게 발전했었음을 알 수 있고 만(卍)자를 필히 넣는 것은 본신사(本神社)가 절이였고 절형식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음을 증명해 준다. 4) 황도(荒稻) 본(本) 제사에서는 현재의 벼보다 대가 수십센치나 긴 흑(黑), 백(白), 적(赤)등 3종류의 고대미(古代米)를 쓰고 있다. 적미(赤米)와 흑미(黑米)는 현미(玄米)의 일종으로서 품종(品種)과 계통(系統)에 따라서 종피(種皮)의 색이 적색계(赤色系)는 적미(赤米), 흑자색(黑紫色)인 것을 흑미(黑米)로 칭하여 사용했다. 백미(白米)는 현재의 도정된 쌀이라고 본다. 이도 원래는 대가 긴 고대미(古代米)였다. 춘일대사(春日大社) 제사에도 흑미반(黑米飯)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개량된 쌀이 되기 이전의 형태는 물론 최초에는 현미를 식용했던 점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술이 달린 벼의 대를 그대로 장식한 것이 특이하다. 이는 쌀을 귀중한 식량으로 꼽았던 것으로 본다. 5) 과실어공(果實御供)의 과일은 각종 야생열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현재 우리가 식용하지 않는 과일, 채소, 구근류가 보인다. 고대식용(古代食用)식물의 재연구조사가 필요하다. 6) 고대(古代)제사나 현재 고배음식에서 보이는 오색(五色)은 오행설(五行說)에 근거를 두나 고대(古代) 신앙부터 다수의 종교의 부합적인 사상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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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평정모(平頂帽)의 명칭 검토와 제작방법 (Name Review, and Production Method of Pyeongjeongmo, Housed by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 이은주;진덕순;이정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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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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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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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6점의 '평정모' 유물에 대한 명칭을 검토하여 그간 사용해 온 '평정모'라는 명칭의 오류를 바로 잡고 유물을 토대로 제작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유물 재현에 활용하거나 궁중의례 재현용 관모 제작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평정모'라는 명칭은 '평정건'에서 유래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녹사(錄事)는 유각평정건(有角平頂巾)을 쓰고, 서리(書吏)는 무각평정건(無角平頂巾)을 쓴다고 하였으나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평정모 유물은 녹사나 서리가 사용하였던 평정건과는 무관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오히려 세자궁 빈궁의 별감(別監)이나 수복(守僕) 등이 사용하던 흑주두건(黑紬頭巾), 또는 조건(?巾)에 해당하는 것임을 확인하였다. 유물 조사를 통해 재단 방법과 바느질 방법, 완성된 형태와 접어 보관하는 방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평정모의 구조는 동일하나, 접었을 때 정면에 드러나는 형태에서 약간씩의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를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평정모는 한 조각으로 평면 재단하여 접는 방법으로 입체적인 모자로 만들었는데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구조를 이루었다. 머리둘레는 55~59cm이며, 높이는 19.4~21.5cm이다. 1장으로 재단하기 위하여 머리둘레에 해당하는 부분을 식서 방향으로 재단하였다. 유물 <창덕 23820>을 토대로 재료 준비, 배접하기, 중심 장식 만들기, 바느질하기, 접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재현품을 제시하였다. 미리 계산된 독특한 형태로 재단된 흑색 주(紬) 겉감에 삼베를 배접하여 재단을 마무리하였다. 머리 윗부분은 검정색 실로 징궈 주었고 뒤 중심선은 소색 면사를 사용하여 3.5~4cm 간격의 블랭킷스티치로 고정하여 형태가 완성되었다. 앞 중심의 접힌 부분 안쪽에는 착용 시 앞쪽 형태를 곧게 유지하기 위하여 대나무 심을 넣고 흰색 면사로 일정한 모양의 스티치를 해서 고정시켰으며 뒤쪽에는 망건에 고정할 수 있는 길이 2.5cm, 너비 0.6cm 크기의 대나무 첨자(籤子)를 달아 착용 시 벗겨지지 않도록 하였다.

고전 시문을 통해 본 파초(Musa basjoo)의 식재 의미와 설계용도(Design Use) (Meaning of Plantain(Musa basjoo) Planting and Design Use through Classic Poetry and Prose)

  • 홍형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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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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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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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고전시문에 대한 고찰과 해석을 통해 파초가 우리의 전통정원에 오랫동안 즐겨 가꾸어진 배경과 그 설계용도(design use)를 고찰하고자 진행되었다. 또 이러한 고찰 과정을 통해 우리나라에 파초가 도입되어 널리 애호된 시기도 함께 규명하고자 한다. 연구의 방법은 파초를 주제로 한 고전시문을 고찰하고 해석하는 기술적 연구방법이 사용되었다.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파초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시기는 최치원의 시를 통해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 여러 시문과 그림을 통해 고려시대 중기에 이미 파초는 정원식물로 널리 식재되고 애호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둘째, 파초에 내재된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파초 잎은 종이의 대용물로 글씨나 시를 쓰기도 하였고 술잔으로 사용되는 등 여름날의 수양과 풍류의 의미를 갖는다. 2) 파초는 '혜가단비'의 고사에 의해 불가에서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식물로 취급된다. 또, 파초 특유 형태와 생육특성, 파초 잎에 빗방울이 흩어지는 모습 등은 부처의 가르침인 '공'과 '무아', '덧없음'을 일깨우는 각성물로 받아들여졌다. 3) 유가에서 파초는 "군자는 하늘을 따라서 스스로 굳세고자 노력하며 쉬지 않는다(君子以 自强不息)"라는 가르침의 표상이었다. 4) 파초의 넓고 긴 잎을 봉황의 꼬리에 비유하여 '봉미'라고 하였다. 따라서 파초 잎은 존귀함의 존재의 상징인 봉황을 의미하므로 책가도, 문자도 등 민화의 소재로 즐겨 채택되었다. 셋째, 파초의 설계용도는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파초의 넓고 푸른 잎으로 인해 여름철 정원에 녹음과 청량감을 제공하는 '시각적 용도'로 활용되었다. 2) 옛 사람들은 여름철에 듣는 '파초우성(芭蕉雨聲)'을 운치 있는 소리로 여겼고, 파초가 이러한 '사운드 스케이프(soundscape)'를 구현할 수 있는 최적의 식물소재라는 점을 파악하고 이를 적극 활용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파초의 여러 설계용도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용도로 '청각적 활용'을 들 수 있다. 3) 파초는 화분에 식재하여 실내에서 관상용으로도 활용하였다. 4) 파초는 궁중과 민간에서 약재와 식재료 등 실용 목적으로도 활용되었다. 본 연구의 한계는 한국고전종합 데이터베이스에 탑재된 자료 중 국역된 텍스트를 위주로 하였다는 점이다. 추후 여타의 원문 자료들에 대한 국역 작업이 진행됨으로써 본 연구와 관련된 새로운 내용들이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