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고대 한국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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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천문기록과 역사 환경과의 상관관계 연구

  • 양홍진;최고은
    • 천문학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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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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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6.1-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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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고대 천문기록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기록의 사실 여부와 함께 천문기록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본 연구에서는 고대의 천문기록 중에서 관측 빈도수가 높은 유성과 유성우 기록을 통해 이들의 분포와 역사적 환경 요소와의 관련성을 알아보았다. 유성과 유성우 기록을 분석한 선행연구에 의하면 한국과 중국 일본의 고대 유성과 유성우 기록은 잘 알려진 주기 유성우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인접한 세 나라의 관측 기록은 시대별로 일부 다른 분포를 보이는데 이러한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세 나라의 역사적 환경과 천문기록 분포와의 상관관계를 조사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1200년부터 1700년까지 500년 동안의 왕조-왕위교체, 외부침략, 내란과 같은 역사 사건을 조사하여 중요도에 따라 세 등급으로 나누고 이들을 유성과 유성우 기록 분포와 비교하였다. 연구 결과, 한국과 중국 일본의 고대 유성과 유성우의 기록 분포와 역사적 사건과는 서로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세 나라의 고대 천문관측 기록이 정치적 사건의 영향을 받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고대 천문기록을 분석할 경우 역사적 사건이나 왕위교체 등의 사회적 영향보다는 시대별 천문기록의 분포개수를 고려한 가중치가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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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대의 빈(모가리)에 대하여 (The Academic Trends and Perspectives of the Ancient Mogari Ritual Ceremony in Japan)

  • 강윤석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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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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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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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본고는 한국 상장례 중에서 빈의 연구에 대한 선행적인 작업으로써, 일본 고대의 빈(모가리)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살펴보는데 있다. 빈(모가리)은 일본 고대의 상장례 중의 하나로서, 사람의 죽음부터 장지에 매장하기까지의 기간 동안에 행해진 일련의 의례를 말한다. 이것은 ${\ulcorner}$위지${\lrcorner}$위인전이나 ${\ulcorner}$일본서기${\lrcorner}$ 등의 문헌기록에도 나타나 있다. 이러한 문헌기록을 통해서 3세기대부터 상장례에서 빈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고학에서도 식륜의 배치나 선각화 및 장식벽화에서도 빈 의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특히 빈의 기간, 빈옥의 위치 및 구조, 그리고 讀의 내용에 대해서 고대의 문헌기록과 고고 유구 및 유물을 대상으로 검토하였다. 빈의 기간에 대해서는 문헌기록마다 다르며, 또한 같은 천황이라도 2개월부터 5년 8개월 등으로 일정하지 않다. 또한 고고학적 검토에서는 인골과 사람의 대변 분석을 통하여 문헌기록의 8일이나 10여일로 합치한다고 보고 있다. 빈옥의 위치는 옥외에 있다는 문헌기록과 고분의 주위에 있다는 고고학적 연구결과도 있다. 빈옥의 구조에 대해서도 문헌의 기록에서는 칼로써 베어 무너뜨릴 수 있는 간단한 구조로 기술되어 있는 반면에, 고고학의 가형식륜이나 장식벽화에 묘사된 것을 보면 견고한 가옥구조로 되어 있다. 빈 동안에 실시된 의례는 문헌기록이나 고분의 식륜배치 및 장식벽화에 나타난 것을 종합 해 볼 때, 사자의 초혼이나 진혼등을 위한 가무나 기도, 그리고 공선의례 등이 실시된 것으로 보인다. 본고는 일본 고대의 빈에 대한 검토이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고대의 빈 연구에 있어서 참고가 될 부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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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철기의 년대측정 방법개발 - 탄뎀(Tandem)형 가속기 이용해서 측정

  • 한국원자력산업회의
    • 원자력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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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10호통권1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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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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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 이제까지 고대철기의 년대측정은 함께 출토된 토기를 빌어서 이루어져 왔다. 일본에서는 철을 만들 때 열선으로 사용한 목탄에서 흡입된 탄소를 탄뎀형가속기를 이용해 방사선 동위체비 측정방식으로 가속기 질량분석에 위해 철기의 년대를 알아내는 법을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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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그 숙명적 관계-고대부터 개항기.식민지 시기, 미래의 전망까지

  • 손승철
    • 출판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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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2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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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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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역사는 서로 어떻게 관계를 정립하는냐에 따라 결정된다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우리의 역사 현실과 이렇듯 밀착돼 있는 한일관계의 연구는 주로 일본인에게서 시작돼 왔다. 이러한 연구의 불균형이 객관적인 이해를 더욱 어렵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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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화사(仁和寺)에 소장된 "황제내경태소(黃帝內經太素)" 고권자초본(古卷子抄本)의 전사과정(傳寫過程)에 나타난 일본(日本)에서의 오류(誤謬)에 관하여 (仁和寺藏古巻子抄本"黃帝內経太素"に見られる 日本的な誤りについて)

  • 좌합창미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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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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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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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당(唐)나라 고종시대(高宗時代)(7세기후반기(世紀後半期))에 유행(流行)했던 양상선(楊上善)이 선주(選注)한 "황제내경태소(黃帝內経太素)"가 일본(日本)에 전(傳)해진 것은 현종시대(玄宗時代)(8세기전반기(世紀前半期))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태소(太素)"는 중국(中國) 송대(宋代)에는 이미 거의 모두 유실(流失)되었다. 일본(日本)에서도 점차 확실하게 전승(傳承)되지 못했지만 강호시대말기(江戶時代末期)에 이르러 경도(京都)의 인화사(仁和寺) 서고(書庫)에서 재발견(再發見)되었다. 따라서 지금 볼 수 있는 "태소(太素)"에 수록된 내용들은 모두 인화사(仁和寺)에 저장된 고권자초본(古卷子抄本)(이하(以下)에서 인화사본(仁和寺本)이라고 약칭(略稱))으로부터 유래(由來)해온 것이다. 이 초본(抄本)은 1165~1168년(年)에 단파뢰기(丹波頼基)가 직접(直接) 쓴 것이다. 그가 기초로 삼았던 원본은 일세대전(一世代前)의 단파헌기(丹波憲基)가 쓴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살펴본 결과, 인화사본(仁和寺本) "태소(太素)"의 정리(整理)에서 최초에 초사(抄寫)할 때 착오(錯誤)가 있었다는 것을 고려(考慮)할 필요성(必要性)이 일반고의적이상(一般古医籍以上)으로 크다고 말할 수 있으며, "소문(素問), "영추(靈樞)"와의 이동점(異同點)에 대해서도 교기(校記)할 필요(必要)가 없는 것을 응당 지적(指摘)해내야 한다. 그중 상당한 부분(部分)은 옮겨쓴 사람이 일본인이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일본인(日本人)에 의하여 교정(校正)하는 것이 더 편리(便利)하다고 생각된다. 단지 대륙(大陸)의 문화(文化)가 고대일본(古代日本)에 전입(轉入)되는 과정에서 고대한국인(古代韓國人)의 작용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태소(太素)"초본(抄本)에도 "일본적(日本的)인 착오(錯誤)"외에 "고대한국적(古代韓國的)인 착오(錯誤)"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금후(今後) 이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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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 日 民家의 平面構造 比較硏究 (A Comparative study on the structure of plan in folk houses of Korea and Japan)

  • 장보웅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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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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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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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 한국과 일본은 대한해협과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리 고 고대에 선박으로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가는 문제는 일기만 청명하면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대의 일본은 한반도와의 문화적 교류 와 주민의 이동이 많았고, 그것도 일방적으로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우리의 수준 높은 문화를 직접 그들에게 전수시켰고, 일본으르 건너간 많은 주민들은 일본 의 상류층을 형성하였고 그리고 원주민을 지배하였다. 다시 말하면 일본은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다방면의 많은 문화를 수용하였으뎌, 특히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 너간 주민들은 한반도에서 거주하던 민가를 그대로 일본 열도에 재현하였다. 따라서 한.일 양국의 민가는 평면의 구조 면에서 차이점 보다는 유사점이 많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유 사점은 현시점에서의 관점이고, 과거로 거슬러 을라가면 갈수록 유사점은 공통점으로 전환 될 것이다. 일본은 19세기 말에 명치유신을 통해서 근대화를 시작하면서 그들의 민가도 부 분적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현재도 한국의 민가 증에서, 특히 겹집은 그 구조가 일 본 민가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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