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객사동헌(客舍東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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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으로 찾은 양근·지평 관아의 흔적 - 관아의 연혁·규모·터[址]를 중심으로 - (Traces of Gwan-a in Yanggeun and Jipyeong in Literature - with the Focus on the History, Scale and Sites of Gwan-a -)

  • 유동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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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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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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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전근대 사회에서 지방고을의 중심공간은 官衙(관아)가 있던 邑治(읍치)였다. 해안가 고을의 읍치는 읍성 안에 있었으나, 내륙 고을의 읍치는 성곽이 없이 관아만 있었다. 현재 양평군(楊平郡)인 양근군(楊根郡)과 지평현(砥平縣)은 관아만 있던 고을이었다. 양근군과 지평현에 관아가 정식으로 설치된 시점은 조선 초기이다. (1)조선 초부터 두 지역에 수령(守令)이 정식으로 임명되었던 점, (2)1703년(숙종 29)과 1465년(세조 11)에 양근군 동헌(東軒)과 지평현 객사(客舍)가 중수(重修)되었던 점, (3)조선 초부터 향교가 있었던 점 등이 조선 초부터 두 지역에 관아가 존재하였음을 증명한다. 조선시대 양근 지평관아의 주요건물은 아사(衙舍) 향청(鄕廳) 작청(作廳) 객사(客舍) 군관청(軍官廳) 등의 공해(公?), 향교 등의 교육시설, 사직단(社稷壇) 성황사(城隍祠) 여단(?壇) 등의 제단(祭壇)이었다. 현재 양근관아와 지평관아의 흔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공간구성 원칙 속에서 남아있는 문헌 고지도 유물 등을 분석한다면, 두 관아의 터[址]는 대략 찾을 수 있다. 문헌상 양근 아사[동헌] 터로 지목된 지역은 '현 양근중학교 앞 양평읍 관문1길 15(양근리 151)'이다. 실제 관문1길 일대에서 조선시대 백자편 기와편 등이 발견되며, 일부 주택에서 옛 동헌의 장대석을 재활용하는 모습도 확인된다. 한편 양근 객사 터로 추정되는 지역은 '현 양평경찰서 주변'이다. 하지만 양평경찰서 주변에서 객사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양평경찰서 근처의 양평역 앞에 천주교 성지 표석이 있어, 이 일대가 관아 터였음을 알 수 있다. 지평관아의 주요건물(동헌 내아 작청 장청 군향고 연무정 화약고 향청 객사 등)은 현 관교길(지평리 238~250)을 따라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는 건물 터는 객사와 아사[동헌] 터이다. 객사 터로 지목된 지평리 238번지는 주민의 구술과 문헌 내용이 일치하며, 아사[동헌] 터로 추정된 지평리 248~250번지 일대는 백자편 기와편 옛 동헌의 담장 등이 발견된다.

다대포진 객사와 동헌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Gaeksa and Dongheon of Dadaepo-jin)

  • 서치상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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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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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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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This paper aims at the examination on the fallacy of the name of 'Dadaepo-gaeksa'. The results are as follow: The so called 'Dadaepo-gaeksa' was one of the official buildings of Dadaejin, the naval forces in the late period of J osun dynasty. The building was moved to Molundae near the original site in 1970. And two years later, it was designated as a cultural asset. However it's real name is 'Dadaejin-dongheon', because Dadae-jin gaeksa was demolished about the time of the foundation of Dadaepo-elementary school. Otherwise, Dadae-jin donheon was used as a school building from 1904 to 1970. Futhermore, the architectural style of the existing building is different from the general gaeksa's in the period of J osun dynasty. Therefore, the name of Dadaepo-gaeksa needs to change into Dadaejin-gaeksa and to restore as its original style.

한말 충청수영 객사·동헌의 위치와 존치상태 연구 (A Study on the Position and Preservation Situation of Gaeksa·Dongheon in Choongcheong Suyeong at the end Joseon Dynasty)

  • 김명래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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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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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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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The study on the government office building in Chungcheong Suyeong(忠淸水營) is very rare. How were the Gaeksa(客舍) and Dongheon(東軒) which are representative government office buildings in Suyeong, maintained and what was the aspect of it, while passing through the upheaval period of the end of Joseon(朝鮮)? And where was the original place and was there any change in use? It is so regrettable that these subjects were not figured out yet. So I thought it is very important task to figure out its actual aspect by investigating the maintain state of the Gaeksa and Dongheon and the change of their places. So this study examined the related historical records and, based on it, analyzed "Ocheon GoonJi(鰲川郡誌)" in various view points. Through this analysis, this study could figured out the maintain aspect of the gaeksa and dongheon and the change of their places, and be able to deduce the other change of the government office building. This study could assume the places of each government office buildings by comparing this investigated result and the analyzed result of the original cadastral map in various view points. As the result of the study done by this method, this study confirmed the maintain state of the Gaeksa and Dongheon in Chungcheong Suyeong while passing through the upheaval period of the end of Joseon. And this study figured out the places of the Gaeksa and Dongheon, and be able to confirm their places by the lot number on the original cadastral map. Along with this, this study could estimate Jo(趙) family's confliction with the residents at that time by verifying the lot numbers of the Sapaeji(賜牌地) which this family received from the government. And among the names of the government office buildings, for the Jangkyocheong(將校廳) which is in dispute because of the name, this study figured out that the author of "Ocheon GoonJi" made a mistake in writing Dongheon.

『영남루시운(嶺南樓詩韻)』의 서지적 특징과 자료적 가치 - 수록 인물 분류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Bibliographic Characteristics and Data Value of YoungNamRooSiun(嶺南樓詩韻) - focusing on the classification of the recorded characters -)

  • 전재동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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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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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3-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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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논문은 최근에 소개된 필사본 "영남루시운(嶺南樓詩韻)"의 서지적 특징과 자료적 가치를 분석하기 위한 것이다. "영남루시운"은 영남루 본당 마루를 비롯하여 능파당(凌波堂), 침류각(枕流閣), 객사동헌(客舍東軒), 덕민정(德民亭), 람수정(攬秀亭) 등 6개 건물을 대상으로 임진왜란 이전에 창작된 기문(記文), 상량문(上樑文), 제영시(題詠詩) 등을 수록하고 있다. 수록 작가는 누적 인원 412명이며, 작품 수는 산문(散文) 11편, 운문(韻文) 559수(首) 등 총 570편이다. "영남루시운(嶺南樓詩韻)"에 수록된 제영시(題詠詩) 작가(作家)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를 비롯하여 밀양(密陽), 청도(淸道), 경주(慶州), 창원(昌原) 등지의 지방관, 선위사(宣慰使), 경차관(敬差官), 어사(御使), 선전관(宣傳官), 호송관(護送官) 등 문무(文武)관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즉, 누적인원 412명 가운데 318명이 중앙과 지방의 관원들이며, 이 수치는 전체 작품의 77%를 차지한다. "영남루시운"에 수록된 작가들의 관직별 분류를 통해 조선전기 영남루 제영시(題詠詩) 작가들은 일반 시인묵객들보다 특정 임무를 띠고 밀양 지역에 파견된 관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논문을 통해 영남루는 승경(勝景) 감상의 목적 이외에 관찰사나 도사의 집무 공간, 왜국 사신 접대 등의 공무가 이루어지던 공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 보령현 읍치시설의 위치추정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estimation of the location of government facilities in Boryeong-hyeon in the Late Joseon Dynasty)

  • 김명래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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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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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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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This study aims to investigate and reveal the spatial structure of Boryeonghyeon by examining the geographical status of its Eupchi (Local administrative center:邑治) through an analysis of the location, tracing locations of governemnt offices including Dongheon(東軒) and Kaeksa(客舍) in the walled town, and checking the lot numbers of Sajikdan(社稷壇), Yeodan(厲壇), and Cheongyeonyeok(靑淵驛) outside it. Buildings of Boryeonghyeon in the walled town in the Joseon Dynasty were almost lost and now, part of the city wall and Haesanru(海山樓) just remains as relic. The walled town consisted of several buildings of government offices as well as Dongheon and Kaeksa which are government organs. Altar and shrine(壇廟) facilities including Shrine of Confucius(文廟), Altar of Land and Grain, and Preceptor's Shrine were placed outside the walled town and Cheongyeonyeok were operated as the facilities for transmission of royal orders. Therefore, the government office facilities in the walled town, altar and shrine facilities outside the fortress, and the location of the post station were required to trace and check each of them. For the checking method, the lot numbers could be checked by checking the original cadastral maps and the then land categories and owners, analyzing the records and circumstances of the relevant township annals(邑誌), and examining analyses on the locations by using a numerical map of one to 5 thousands. The study estimated the locations of government facilities including Dongheon and Kaesa placed in the walled town and was grasped to be the east and west gates with the south gate which remains now in the fortress. And the lot numbers of Sajikdan, Yeodan, Cheongyeonyeok.

조선-일제강점기 동래읍성 경관변화 연구 (A Study on the Historical Landscape of Dongrae Ciy-wall in Busan)

  • 김기혁;김성희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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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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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7-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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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본 연구는 동래 읍성의 입지, 성곽 형태 및 도로망. 관아 및 가옥분포 토지이용 등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경관 복원을 시도한 후. 일제강점기에 나타난 변화를 파악하여 이를 사회ㆍ문화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고자 하였다. 가야시대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던 현재의 장소에 고려말 읍성이 이전 입지한 것은 해안방어 요충지와의 접근성을 최대로 하기 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읍성이 위치한 장소는 동래부의 중심 공간으로 등장하였다. 이와 같은 입지 특성은 4대문 위치 및 성안의 도로망 분포 등에 영향을 주었다. 관아시설의 배치는 중앙 권력의 상징. 읍성 군사 방어 기능과 관련되어 배치되었다. 객사 입지는 중심공간에 지형을 이용하여 권력 질서의 위계를 반영하였으며. 좌측에 동헌. 우측에 향청 및 군사 기능이 배치되었다. 읍성내 취락은 남문을 중심으로 분포하였고. 산록부는 농경지로 이용되었다. 일제 강점기 중 1920년대 시행된 시구개정사업으로 성벽이 철거되었고, 성안에 격자상의 도로망이 신설되었다. 평지에 있던 성벽 자리는 도로용지나 주택지로 이용되었다. 객사와 동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성안의 공간구조가 변화되었고. 관아건물은 공공기관으로 사용되거나, 민간인에게 불하되어 다른 용도로 이용되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읍성이 위치하였던 장소의 상징적 의미는 쇠퇴되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읍성은 부산시민에게 역사적인 중심공간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일부 경관을 중심으로 복원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연구 결과는 읍성이 단순히 건축물이 아닌 당시대의 사회문화가 투영된 경관이며, 각지방에 소재한 읍성은 새로운 시각으로서 재조명되어야 할 것임을 보여준다.

여수 방답진 관아 건축의 배치 및 위치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 of Buildings Arrangement and Location Supposition of Government Office Buildings of BangdapJin in Yeosu)

  • 위소연;성대철
    • 한국농촌건축학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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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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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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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materials on Bangdapjin, summarize the excavation surveys and compare them with the past literature records and to determine the location of the Bangdapjin government office facilities. It was categorized into the castle in the original cadastral map, which allowed to identify the overall shape of Jionseong Castle. The Chi on the castle wall and Ongseong on the Munji have also been identified. The majority of state-owned land in the original cadastral map is usually concentrated at the point where the road from the north intersects with the road from the east to the castle, which is presumably where public buildings were located. One of the photos in the 1950s shows the presence of a building presumed to be an inn featuring, extraordinary shape that deserves special attention. The gate is believed to have had Ongseong due to evidence of a portion protruded at right angles from the castle according to the original cadastral map.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를 통해 본 조선시대 읍치(邑治)의 공간구조와 관아(官衙) 조경 - 평안도 영유현과 황해도 신천군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Spatial Structure of Eupchi(邑治) and Landscape Architecture of Provincial Government Office(地方官衙)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rough 'Sukchunjeahdo(宿踐諸衙圖)' - Focused on the Youngyuhyun Pyeongan Province and Sincheongun Hwanghae Province -)

  • 신상섭;이승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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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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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6-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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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조선후기 문신 한필교(1807~1878년)가 관직을 역임했던 읍치를 대상으로 제작한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 화첩의 평안도 영유현과 황해도 신천군 읍치를 분석 자료로 활용하여 실증사료로서의 가치추적, 공간구조 등의 전형성 정립, 관아조경 및 문화경관 특성 도출 등을 시도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풍수형국도' 성격을 겸하며 사방전도묘법으로 그려진 "숙천제아도"의 읍치도는 조선시대 지방고을의 터잡기와 공간구조는 물론 환경설계원칙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고을 치소(邑治)는 남북 중심축선에 위계를 설정한 배산임수 체계이며,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관아시설, 그리고 3단1묘의 제례처 등 도성에 준한 토지이용과 배치규범을 적용하고 있다. 교통요충지에 자리한 고을 치소는 어귀 장터마당을 결절점으로 안길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면 관아 문루에 다다르는 노단경이 형성되고, 고갯길 또는 물길을 따라 외부 바깥길로 이어지는 체계를 갖는다. 즉, 동선체계는 바깥길-고갯길-어귀길-장터마당-안길-또는 샛길로 수용력과 위계에 따라 분절되며 3거리 길로 접합되는 양상이다. 지방관아의 토지이용은 3조(三朝)의 개념(외조, 치조, 연조)을 반영한 위계적 구성인데, 동헌의 후원과 객사의 별원을 포함하여 3문3조2원(三門三朝二園)의 공간체계를 보여준다. 고을의 뒷동산 소나무 숲, 명당수인 남천, 안산(案山)에 해당하는 조산(造山), 비보숲 읍수(邑藪) 등 풍수적 경관짜임이 작용되었는데, 겨울철 북서풍 차단과 여름철 상승기류 형성 등 에너지 보존, 색체 항상성, 자연재해 방지와 심리적 안정성 등 쾌적성 조건에 부합되는 환경지속성이 추출된다. 한적한 곳에 자리한 향교는 별도의 원림을 가꾸지 않았으며, 누정은 심신수양, 안분지족, 자연회귀 같은 상징적 가치, 정치적 행사와 윤리관 반영, 유흥상경 등 문화경관 양상이 다양하게 표출되는데, 객사에는 기와를 얹은 와정(瓦亭)이, 동헌과 내아에는 네모꼴 연못을 두고 소박한 모정(茅亭)이 도입되는 차별성을 보여준다. 관아에 지표경관으로 문루가 자리하고, 군사훈련 및 심신수양을 겸한 사정(射亭)이 필수시설로 도입되었다. 아사의 앞뜰은 네모꼴 마당(庭)으로 조경처리를 하지 않은 반면, 정청의 뒤뜰(後園)과 객사의 별원(別園) 등은 장식적으로 가꾸었다. 이러한 관아조경은 공간 성격 및 위계를 반영하되 기능적 지속성(차폐와 방화, 미기후조절 등)과 심리적 건전성, 상징성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한 경관미학이라 하겠다. 한편, 소나무, 느티나무, 배나무, 버드나무, 향나무(또는 노송), 연(蓮), 화목(花木) 등이 조경식물로 활용되었는데, 환경심리적 가치가 부가된 배후숲, 조산숲과 비보숲 등과 함께 건전한 문화경관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결과를 일반화 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조선시대 읍치의 공간구조 및 환경설계 원칙이 제도적 틀 안에서 정형성으로 작용되고 있어 연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조선후기 읍성 취락의 경관 요소와 경관 구성 - 태안읍성, 서산읍성, 해미읍성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Landscape Elements and Construction of Eupseong (county seat) in the Late Joseon Dynasty)

  • 전종한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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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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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9-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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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조선시대의 읍성 취락은 중앙 정부가 지방의 각 고을에 계획적으로 건설한 행정 타운으로서 우리나라의 전통 도시를 대변한다. 읍성에는 객사, 동헌과 내아, 질청을 비롯한 다양한 행정 및 통치 시설들이 들어서 있었고 일반 백성들의 민가가 들어서 있는 경우도 많았다. 본 연구는 조선후기 읍성 취락의 주요 경관 요소와 경관 구성의 특성을 고찰하고 그 결과를 지적원도(1913)에 재현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연구자는 현재적 재현을 위한 복원 대상 시기를 설정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연구자는 조선 읍성 경관의 완성기를 19세기 전반기로 규정하고, 이 시기 전국의 읍성 분포 및 주요 읍성 경관 요소의 전국적 보편성과 지역적 특수성을 파악하였다. 이 작업을 토대로, 태안읍성, 서산읍성, 해미읍성을 사례로 읍성 경관 완성기의 읍성 내 주요 경관 요소와 그들의 위치, 전체적 공간 구성을 1910년대의 지적원도 위에 나타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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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라산(咸羅山) 서벽정(棲碧亭) 복원을 위한 기초연구 (The investigation Seobyeog-jeong in Hamra and local culture content)

  • 이응석
    • 지역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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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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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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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서벽정이 위치한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는 조선 시대 함열 현으로써 동헌, 객사, 향교가 자리 잡았던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지역이며, 호남지역의 조세확보와 조운을 관장한 지역이었다. 또한 근대기 함열리에는 전국의 만석꾼이 90여 명 남짓인 시절에 3명의 만석꾼이 한마을에 살 정도로 호남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서벽정은 이와 같은 역사적, 경제적 배경하에서 1926년에 하당 이집천가에서 의해서 건립되었다. 건립된 서벽정에서는 당시 지역 문인은 물론 전국적으로 유명한 문인들이 모여 시회가 개최되었고, 1929년에는 이를 모아 서벽정시고가 발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역 문화콘텐츠로서 그 가치가 높은 서벽정은 현재 사라진 채 빈터만 남아 있다. 또한 서벽정 공간에서 이루어진 근대기 누정문화에 관한 자료도 아직까지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연구된 바가 없다. 본 연구는 이와 같은 배경하에서, 근대기 익산지역 대표적인 누정이었던 함라 서벽정 복원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문헌연구와 현장 방문조사를 통해서 조사하였다. 근대기에 호남의 대지주 집안에 의해서 건립된 서벽정과 서벽정 공간에서 이루어진 누정문화에 대한 연구는 근대기 익산지역의 누정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농도인 익산의 지역 콘텐츠를 개발하는 데 있어 함라 서벽정이 가진 누정문화는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