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회혼례도첩》(덕수6375)은 조선 후기 사대부 가에서 치러진 회혼례 행사를 다섯 장면으로 나누어 기록한 그림으로, 원래 화첩이었으나 행사의 의의를 밝힌 서문과 참석자인 좌목 등 부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학술적 연구가 다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회혼례를 그린 현전 작품은 본 《회혼례도첩》과 《요화노인회근첩》(미국 예일대학교도서관), <회혼례도병>(홍익대학교박물관) 3건과 19세기 이후의 평생도 병풍에 포함된 회혼례 장면 몇 건에 불과하다. 《회혼례도첩》에 대한 초기 연구는 주로 '풍속화'로서의 성격에 초점을 두고 진행되었는데, 최근 '기록화'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사대부 가에서 성행한 회혼례 행사의 시각적 기록으로서 의의가 크게 부각되었다. 본 논문은 기존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화첩의 제작과 향유의 맥락을 고찰하여 회혼례도 제작의 실상에 구체적으로 접근하고자 하였다. 인물과 공간, 기물 등 화첩의 내용을 분석하고, 화풍과 표현 방식을 검토하여 《회혼례도첩》의 제작 시기를 18세기 후반(4/4분기)으로 추정하혔다. 또한 이 시기의 회혼례 거행 기록과 노신랑이 들고 있는 구장과 관련된 기록을 함께 고찰하여 행사의 주인공 특정을 시도하였다. 아울러 화첩의 제작 배경과 목적, 기능을 살펴보았다. 회혼례 절차를 여러 장면으로 나누어 세세하게 기록한 본 《회혼례도첩》은 회혼례도의 초기 생성 단계에 가까우며, 평생도 병풍으로 일반화되기 전 단계를 제시하고 있어 중요하다. 또한 화첩이 담고 있는 내용과 분위기는 가족적이며 친밀하며 화기애애하고, 손님을 대접하는 장면은 과시적이기 보다 담백한 현장의 기록에 가깝다. 인물의 차림새와 행동 양태는 현장성이 강하고 구체성과 개별성을 지니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화첩의 특징을 동시대성과 서사성으로 파악했으며, 화가의 치밀한 관찰과 세밀한 묘사가 이러한 특징을 뒷받침하고 있음을 분석하였다. 《회혼례도첩》은 가문의 역사를 기록하여 보존하려는 목적에서 제작되었고, 이는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의 심화에 따른 가족 질서의 재편 속에서 가문 의식의 성장을 배경으로 진작된 사가기록화의 흐름에서 이해된다. 필자는 공적 성격을 지니는 경수연도와 사궤장도가 더이상 활발히 제작되지 않는 시기에 회혼례도가 유행하였음에 주목하여, 사사로운 가문의 경사인데다가 유교적 의례로서의 근거가 없었던 회혼례가 사가기록화의 대상이 된 계기로서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그로 인한 명분의 획득을 주목했다. 주지하듯이 18세기 후반 궁중행사의 거행과 관련하여 군왕과 사친의 관계가 중요하게 대두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국가의 안녕과 개인의 경사를 동일한 맥락에서 인식하려는 사고가 나타났음을 고찰하였다. 이는 '효'를 근간으로 부모의 장수와 해로를 축하하는 대중적 수연으로 자리매김한 회혼례가 가문의 사적인 행사를 기록하는 화첩으로 제작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제작배경 하에서 창출된 화첩의 이미지는 공적인 명분보다 개인의 소망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이는 사실적인 화풍과 함께 인간 내면의 정서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조선 후기 회화의 진경적 면모를 보여준다. 《회혼례도첩》의 회화사적 성격을 통해 시대를 드러내는 조선 후기 사가기록화로서의 위상과 의의를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