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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sustainability of community identity and community culture - Centered on Dong-gye and Sangyeo-gye in Bufori, Yean-myeon

공동체 정체성과 공동체문화의 지속가능성 고찰 - 예안면 부포리의 동계와 상여계를 중심으로

  • Lee, Mi Hong (Dept of Convergence Content, Graduate School of Creative Culture and Industry Andong National University) ;
  • Kwon, Ki Chang (Dept of Convergence Content, Graduate School of Creative Culture and Industry Andong National University)
  • Received : 2021.06.15
  • Accepted : 2021.07.16
  • Published : 2021.07.30

Abstract

This study looked at the factors that shaped the identity of the Bupo-dong community through Dong-gye and Sangyeo-gye, mainly in the case of Bupori, Yeah, and Adong, and to identify that Dong-gye and Sangyeo-gy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shaping and strengthening the community culture of its members. As a result of his inspection, Bupo-dong formed and maintained his belonging and identity as a member of Bupo-dong through the Dong-gye, the town's autonomy code. We were able to confirm that bupo-dong, unlike other villages where community culture is largely destroyed, has been able to continue its own community culture as a bupo people to this day, with a sense of belonging, solidarity and intimacy through the Sangyeo-gye of cooperation and relief. And it can be seen that the fact that the Burawon space, which has symbolic meaning to the people of Bupo-dong, exists without being watered down. It is important to discuss the community culture of Bupo-dong, which is sustainable, mainly in Bura-dong, which continues to be an important cultural space for bupo-dong people to meet and town events.

Keywords

1. 서론

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마을 단위를 기반으로 구성원들 간의 소통과 협력이 활발히 이루어져 왔으나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지역공동체의 기반이 되는 마을이 사라지거나 공동체의 해체가 가속화되는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안동댐 건설과 같은 국가산업시설의 건설은 수십 개의 마을이 동시에 소멸되고 해체되는 결과로 이어지면서, 수백 년의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수많은 공동체문화가 함께 사장되는 결과를 낳았다. 구성원들이 전국각지로 흩어지고 시간이 경과되면서,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던 동계와 상여 계도 중단되거나 축소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공동체문화 약화와 탈공동체화가 심화되어가는 현실에서 개인들이 모여서 만들어가는 공동체 커뮤니티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으며, 지역자치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공동체 회복을 위한 지속 가능한 공동체 문화의 필요성이 증가하고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의 동계와 상여계를 통한 전통마을 공동체 문화 특성 고찰을 통해, 공동체문화의 지속가능성을 알아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부포동의 마을 공간과 구성원들의 특성을 분석하고, 부포동 마을공동체 조직인 동계와상여계의 특징을 살펴보고, 동제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와 한 마을에 두 개의 상여계가 공존할 수 있었던 배경 분석을 통해 부포동이 수몰 후 현재까지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요인을 고찰하고자 한다.

2. 마을공동체에 대한 논의와 선행 연구

공동체의 사전적 의미는 “생활과 운명을 함께 하는 조직체”이다. 공동체를 이루는 견해들을 종합해 정의하면 공동체는 “일정한 공간 안에서 생활하는 구성원들이 정서적 유대감을 가지고 상호작용하면서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며 공동체의식을 공유하는 사회”를 뜻한다. 지역공동체 형성전략 연구를 통해 지역성과 구성원들간의 상호작용, 소속감을 주요 요소로 본 박종관1)과,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마을공동체 구성원들의 소속감과 연대감을 통해 고유의 마을공동체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밝힌 임재해2) 등의 연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성원들간의 상호작용과 공통의 연대감이 공동체의식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이며, 공동체문화는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한 연대감이 적극적 참여로 이어지면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마을공동체는 구성원, 공간, 조직, 문화, 공동체 의식 등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 문화는 마을 공간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 구성 원과 공동체 의식을 포함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공동체의식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동계와 상여 계와 같은 전통적 의례를 들 수 있다. 동계와 상여계와같은 마을공동체에서 행해지는 의례3)는 개인을 공동체에 보다 긴밀하게 연대하게 하고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 의례 참여를 통해 구성원들은 소속감을 느끼며 이러한 결속된 연대감을 바탕으로 마을공동체를 외부로부터 지켜나가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강화해 나가게 된다.

이용기는 장흥군 어서리의 동계 사례를 통해 전통사회가 근현대시기 재편과정에서의 공동체 구성원들의 대응 양상을 고찰하면서 동계가 공동체의 결속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중심역할을 했음을 밝히고 있다. 손상락4)은 안동지방 여러 마을에서 현재까지 동제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현상을 설명하며, 세계유산으로 잘 알려진 하회마을 또한 씨족공동체가 중심이 되면서도 동제를 중심으로 마을구성원들 간의 결속을 다지며 공동체 정체성을 지켜오고 있다고 동제의 의미를 고찰했으며, 하회마을 산주(당주)로 동제를 주관하는 김종흥도 정월에 동민들이 마을의 무사 안녕을 비는 동제를 지내고서야 하회의 한 해 일이 시작된다며, 동제 음식을 나누어 먹고 동사에서 그해 마을일을 의논하는 전통이 마을화합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오창현은 1950년대 경기도 동남부지역 농지개혁과 연결지어 공동체 문화 변화 양상을 고찰하면서, 양평군 산음리와 군포시 속달동 사례를 중심으로 농지개혁을 기점으로 반상의 차이가 없어지고 구성원들의 관계가 대등해지면서 함께 운영하는 상여계의 변화와 함께 공동체의 정체성이 새롭게 형성되면서, 변화된 상여계가 지역 커뮤니티의 역할을 이어가고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오창현의 연구는 시대변화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하면서도 상여계가 마을공동체를 묶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처럼 마을공동체를 구축하거나 형성하기 위해서는 마을구성원이 중심이 되는 마을공동체 커뮤니티 형성이 필요한데, 동계와 상여계는 전통마을인 동성부락 안에서 이러한 커뮤니티가 유지되고 지속되는 구심점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자신들만의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마을공동체의 정체성과 고유한 문화를 지켜가는 데 있어 동계와 상여계가 주요한 요소로 작용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또한 임영준과 이영숙5)은「셜록홈즈」의 콘텐츠 변형요소 분석을 통해 시대환경 변화에 따른「셜록홈즈」콘텐츠의 확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동계와 상여계의공동체문화 변화요소 고찰을 통해 공동체문화 콘텐츠의 확장성의 연장선상에서 부포동 공동체 문화의 지속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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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 Framework of research analysis.

2.1 마을공동체에서 동계와 상여계가 가지는 의미

동계洞契와 상여계喪輿契는 앞에서 살펴본 공동체의 의미와 사례들에서 확인되는 공동체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동계는 재지사족의 주도로 결성된 조직으로, 구성원들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마을 자치규약의 성격을 가지며, 참여와 상부상조를 원칙으로 한다. 동계와 같은 상호부조 기반의 공동체 지향성은 근대 이후 구성원의 연대와 공동체의 이익 추구를 목표로 하는 다양한 목적계 등의 형태로 변화한다. 조선 후기를 거치며 향촌 지배력이 약화되어 가던 재지 사족들이 향촌의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 양반들의 동계와 평민들의 자치 조직인 계(契)를 합쳐 동계조직을 만들었고, 이는 민속제의를 포함하는 동제 등 마을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다양한 형태로 발달되었다. 동계가 기반이 된 대표적 의례인 동제(洞祭)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에게 마을주민들의 무병과 풍년을 빌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공동의 주체가 되어 마을 신인 동신(洞神)에게 함께 드리는 제사로, 동제가 잘 수행되는 마을일수록 단합이 잘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동제가 마을 구성원들의 공동체 유대감과 일체감을 엮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동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집집마다 제수 비용을 거두고, 마을회의를 통해 제관을 선출하며, 구성원들은 동제 기간 동안 금기를 준수한다. 상부상조하여 제를 올리며 축원을 드리고, 마을신께 올렸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친밀감과 유대감을 형성한다.

이러한 상부상조의 전통은 상여계에서도 나타나는데, 상여계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여한다는 점, 상호부조를 원칙으로 한다는 점, 구성원들의 성씨 분포와도 관계가 깊다는 점에서 공동체 정체성과 문화를 집약적으로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상여계는 향촌공동체를 중심으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자생적 공동체조직으로, 보통 부모나 처 등 식구들의 상(喪)을 대비해 필요한 경비와 노동력을 충당할 목적에서 조직되었다.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행해진 것으로, 부조와 상여를 메는 상두계의 성격과 계원간의 방문, 애도의 의무도가지고 있다. 마을에 거주하는 이면 모두 상여 계에 가입해야 했으며,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상부상조의 전통을 원칙으로 삼았다. 상을 당하면 각자가 부조를 하고 장례를 치를 때 상여를 메고, 산역에 참여하며, 크고 작은 일을 서로 나누어 돕는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동계와 상여계를 통한 부포 동의 공동체문화를 고찰함에 있어 먼저 부포동의 마을 공간과 구성원들의 특성을 분석하고, 부포동 마을공동체 조직인 동계와 상여계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동제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와 한 마을에 두 개의 상여계가 공존할 수 있었던 배경을 분석하고, 수몰 후에도 오랫동안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지속가능 요인을 분석하여부포동 공동체문화의 지속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며, 연구 분석의 틀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3. 동계와 상여계를 통해 본 부포동 공동체문화

3.1 부포동 공간과 부포마을 구성원

부포리는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기 전 부포1동과 2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부포1동에 중마, 호 소골, 가름골, 월촌, 신촌, 횃골, 원거리가 위치하고 부포 2동에 역동과 가름, 청고개, 다래 등의 마을들이 위치했다. 부포동은 처음 마음에 들어온 안동 권 씨를 비롯해 봉화 금씨와 진성 이씨가 세거하게 되고, 이어 조씨와 김씨, 하씨, 강씨 등 타성이 들어와 함께 거주하게 된다. 1973년 수몰되기 전의 안동군 통계 연보를 보면 당시 부포동의 세대 수가 135호이고, 주민 수가 60년대 이후 부포1동 가구 수가 기존 80여 호에서 100호, 120호, 130호까지 점차 증가하게 된다. 구성원의 증가는 공동체조직의 규모와 수에도 영향을 끼쳐 부포동에서는 상여계가 둘로 분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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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View of the side of the side of the edict before the edict.

부포동 사람들은 옛부터 안동최초의 서원인 역동서원이 세워진 동네이자 역동 우탁과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어 유학이 꽃피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길러낸 부포동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이 컸으며 이는 강한 연대감과 소속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부포 1동에는 특히 진성이씨, 봉화 금씨가 많이 살았는데, 그 가운데 진성이씨는 중마, 청고개, 호소골, 가름 골에 많이 살았고, 봉화 금씨도 진성이씨와 마찬가지로중마, 호소골에 많이 살았으며, 이는 한 동네에 동계와 함께 두 개의 상여계가 있게 되는 한 요소가 된다. 기록에 의하면 상여계가 부포1동에 2개, 강 건너 부포 2동 청고개에 1개, 다래에 1개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본 연구에서는 수몰되기 전까지 동계가 잘 지켜졌고 두 개의 상여계가 한 마을 안에 있는 부포 1동의 동계와 상여계를 중심으로 재지사족이 중심이 되는 전통마을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부포1동의 공동체조직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공동체문화에 주목하였다.

3.2 부포동 마을공동체 조직

부포동은 진성이씨 종택과 봉화 금씨 종택 성성재가 위치상으로 가운데인 중마에 위치한 데 이어, 두성 씨가 혼맥 관계 등으로 연대를 강화하고 부포들 토지의 상당수를 나누어 소유하며 마을의 중심 세력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부포동의 경우 두성 씨가 중심이 되었다고 해도 그 수가 반 이상을 넘지는 않았으며, 따라서 마을의 다른 성씨들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했다고 보여진다. 그러한 상황에서 공동체의식을 함양하고 마을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예방하고 해결해나가는 역할을 한 것이 항약(鄕約)과 계(契)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부포동공동체 상하 모두를 포괄하는 조직인 동계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마을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지키는 동계가 있었어. 출필곡 반필면은 기본이고, 밖에서 어른을 만나면 반드시 얼굴을 보이고 인사를 해라, 둑이 있는 곳 근처에 곡식을 심지 말라, 이웃의 전지와 접한 곳에 곡괭이질을 하지 말라, 등등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부포 사람들이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규약들이 있었어. 밖에 나가면 부포사람들은 다르다는 평을 들었어. 그러다보이 자연 부포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행동거지를 더 신경을 쓰게 되고, 자부심이 생기고 단결이 더 잘 됐어.”

- 부포 중마 이◯원(72)

부포동에서 동계는 또한 마을사람들이 동제를 함께 지내는 데 기꺼이 동참하게 하는 기능을 했다. 부포에서는 매년 두 번의 제사를 지냈는데, 하나는 신에게 올리는 동제이고, 다른 하나는 동제와 함께 지내는 단소제사다. 단소란 묘소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쌓은 제단을 말하는데, 부포마을에 처음 자리를 잡은 안동 권씨가 후손이 없어 죽음을 앞두고 토지를 마을재산으로 기탁을 해, 그 토지에서 수확한 것으로 매년 마을에서 단소 제사와 동제를 지내왔다. 동제에 드는 비용은 주로 마을공동 소유의 논에서 나오는 소작료로 충당하였으며 주민들은 각자 정성껏 비용을 댔다. 마을공동 토지가 있음으로 인해 구성원들의 재정적 부담이 줄어들어 동제로 인한 갈등 없이 모두가 참여할 수 있었다고 하며, 실제 이런 부분이 오랫동안 동제를 지내는 문화가 이어져 올 수 있도록 기여했다고도 보여진다.

부포마을을 지켜주는 여신을 모시는 부포동 동제는 정월에 당집이 있는 곳에서 지내는데, 오래전에는 마을 입구에 따로 당집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언제부터인가 마을의 중심공간인 부라원 옆으로 옮겨져 함께 자리한 것이 특징적이다. 수몰 전에는 넓은 부포들 가운데 부라원루와 함께 자리하고 있었으며, 수몰 후 두 번에 걸쳐 부라원루가 이건을 할 때마다 함께 이 건을 하여 현재 부라원루와 함께 호소골 한쪽 나 부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부포동의 경우 동제를 지내는 제관을 금씨나 이씨 두 문중이 상의해서 정하고 제사에도 직접 참가하였다.

“제관은 금씨와 이씨 두 문중에서 상의해서 정했어요. 두 문중에서 제관이 나왔다고 하지만 그저 마을에 젊은 사람들 가운데서 돌아가면서 선출되었다고 봐야죠. 학문이 높거나 명망이 있는 분들이 맡거나 큰 부자나 큰 선비는 제관을 맡지 않고, 마을에서 단정한 이를 중에 형편이 넉넉지 않은 이를 제관으로 정했어요. 금씨나 이씨 두 문중에서 큰 부자가 있었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그 집들이 동제 때 물질적으로 지원을 주로 많이 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동네 화합도 잘 되고 했죠”

-『안동 부포마을』중 호소골 이◯정(87)의 구술

형편이 비교적 넉넉하지 않은 젊은 사람을 동제를 주관하는 제관으로 정해 마을공동소유의 논을 부치게 하고, 동제 때도 부잣집에서 동제 비용을 지원하여 동제를 지내는 제관을 대우하였으며, 이는 구성원들이 동제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동제를 준비하는 유사는 따로 정해 금기를 지키며 음식 장만을 하였지만, 마을 일에는 십시일반으로 모두가 함께 참여한다는 상부상조의 동계 규약에 따라 동제를 지낼 때는 모두가 물품과 노동력을 보탰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을사람이면 누구나 동제 참석이 가능했다고 한다. 부포 중마에 살았던 당시 열두어 살이었던 이씨 어른의 말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부포서 살 때 나도 동제 지내는 데 가서 동제 지내는 거도 보고 떡도 얻어먹고 했어. 동제 지낸 그 떡을 먹으면 한 해 동안 무탈하다고 어려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나눠줬어. 부포 사람들은 한쪽씩 다 나눠 먹었다고 봐야 돼.”

- 부포 중마 이◯원(86세)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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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Two Sangyeo-gye (house) location of Bupo1-dong restored to memory of inhabitants. (A) big Sangyeo-gye (house). (B) small Sangyeo-gye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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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The image of Bupo1-dong village restored to the memory of the residents and the change in the location of the Sangyeo-gye (house). (a) big Sangyeo-gye(house), (b) small Sangyeo-gye(house), (c) Old big Sangyeo-gye (house).

부포1동은 처음에는 마음에 들어온 안동 권씨를 비롯해 봉화 금씨와 진성 이씨가 세거하게 되고, 이어 근대 시기와 한국전쟁 시기를 거치며 조씨와 김씨 등 타성이 들어와 함께 거주하게 되면서 하나의 상여 계에 속해 있다가, 마을에 거주하는 봉화 금씨와 진성 이씨의 숫자가 늘어나고, 이들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면서 두 성씨들만으로 다른 상여계를 만들어 분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을이 생긴 이래로 오랫동안 큰 상여를 중심으로 하나의 상여계가 유지되어 오다가, 한국전쟁 이후 산골마을의 소개령으로 인해 인구가 유입된 데 이어 부포들의 경지 정리, 다래와 부포를 잇는 다리(잠수교) 건설, 버스 운행 등으로 60년대 이후 부포1동 가구 수가 기존 80여호에서 100호, 120 호, 130호 이상으로 점차 증가하게 되면서, 부포 1동에서는 기존의 큰 상여(계)에 이어 부포못 옆에 또 하나의 작은 상여(계)를 만들게 된다. 상여를 필요로하는 경우가 늘어남에 따라 재지사족 중심의 작은 상여 계가 하나 더 만들어지게 된 것으로, 재지 사족의 영향력이 작용한 부분도 있지만 인구증가도 한 몫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큰 상여(계)에서 사용하는 상여를 보관하는 상여집은 마을로 들어오면서 부라원을 지나 중마와 가름 골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보이는 가름골과 역동 사이에 위치해 있었으며, 작은 상여(계)를 만들기 전까지는 이 상여로 마을의 모든 장례를 치렀다. 나이 많은 주민들의 기억에 의하면 큰상여가 오래 전에는 마을로 들어오는 오른쪽 입구인 신촌마 산 아래에 있었으나 강에서 가까워 홍수가 날 때마다 훼손이 되고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위치상 마을의 중심인 중 마와 가름골 사이로 옮긴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주민들의 증언과 타지로 이주한 부포 사람들과 남아있는 부포마을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부포동 소식지인 ‘부라보’에 의하면, 마을 구성원 모두가 상여계에 속해 있었으며 상여도 24명에서 32 명이 매는 규모가 큰 대체 상여와 18명에서 20명이 매는 크기가 작은 소체 상여가 함께 있었다. 반면 후에 만들어진 작은 상여(곳집, 상여집)는 이씨와 금씨두 성씨만 사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마을의 규모가 커지고 하나의 상여로 부족한 시점에서, 마을의 중심 사족이면서 조상 숭배와 상례 절차를 더 중시하는 두 양반 문중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강화하기 위해 상여계를 따로 만들었던 경우로 보아야 할 것이다.

3.3 부포동 마을공동체 정체성과 지속가능성 요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포동 구성원들이 중요하게 여기며 함께 참여했던 동계와 상여계가 실제 행해진 사례를 통해 부포1동이 마을 일에 모두가 함께 참여하고 함께 비용을 부담하는는 동계를 기반으로 동제를 지냈으며 마을자치규약들이 잘 지켜져 마을구성원들의 자부심이 높았고, 두 개의 상여계가 공존하면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문화를 형성하고 유지 지속했음을 알 수 있다.

Table 1. community culture and community food through the Dong-gye and Sangyeo-g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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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을 안에 두 개의 상여계가 만들어진 것은 일반적으로는 마을공동체 구성원들간에 갈등을 야기할 수도 있는 문제이나, 부포동의 경우 이것이 공동체 전체의 갈등이나 분화로 이어지지 않고, 두 개의 상여 계가 공존하면서 구성원들의 참여와 연대가 후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마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예방하며 자부심을 가지고 지켰던 동계를 기반으로 구성원들이 공동체를 유지 지속시키고자 하는 공동체 지향성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재지사족과 그 영향 하에 놓여있는 구성원들이 갈등상황을 만들기보다 질서와 조화로 균형을 이루려는 의지도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현재 남아있는 주민들의 경우 동네에서 누군가가 상을 당했을 때 부조를 하고 상여를 함께 맨 기억은 있는데 반해 상여 계가 두 개였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는 상여계가 분리된 이후에도 실제로는 함께 참여해 상여를 매는 경우가 많았고, 상여계 구분에 상관없이 부조를 하거나 음식을 장만하고 상여를 매는 등 어떤 방식으로든 마을 구성원으로서 장례를 치르는 데 참석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부포동 주민들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수몰이 된 후에도 부포에서 부친을 모시고 살았던 이○은 수몰되기 얼마 전에 치러진 해저 어른 의상이 수몰 전 부포에서 치러진 대상으로 큰 상여로 9일장으로 행해졌으며, 성씨에 관계없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부조를 했고 마을에 있던 장정들이 모여 함께 상여를 맸다고 한다. 또한 집이 수몰되지 않아 어른들이 호소골에 거주했던 금◌업의 기억에 의하면, 수몰 후에 있었던 봉화 금씨인 조부의 상은 7일장으로 치렀으며, 이때도 금씨 문중사람들과 남아있는 마을구성원들이 함께 상여를 맨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수몰이 되고도 한참 동안 상여를 매는 전통적 방식으로 두 상여계를 중심으로 장례를 치렀으나, 댐 건설로 인해 이씨와 금씨들이 타지로 많이 이주해 나가면서 두 성씨의 세대 수가 줄어들고 시간이경과하면서 작은 상여와 큰 상여(계)를 다시 하나로 합쳐 동계라는 명칭으로 운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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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Space and Sang-yeo Go Out scene that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formation of Bupo-dong's community. (a) Bu-ra-won and Shrine tree, (b) Shrine (house), and (c) Sang-yeo Go Out.

“부포는 상여계가 두 개랬어. 큰상여계를 초반계, 작은 상여계를 돈목계라고도 했어. 두터울 돈 자, 화목할 화 자, 해서 돈목계. 초반계는 부포사는 여러 성씨가 같이 다 들었고, 우리 일가도 해당되는 사람이 있고 여러 성씨가 모여서 했어. 나중 만든 돈목계는 이씨하고 금씨 두 성만 했는데 수몰이 되면서 양쪽 다 인원이 줄어버려 할 수가 없으니 하나로 합치고 명칭을 동계로 했어. 그전에 있던 동계 이름을 살린 거지. 고마 양쪽이 같이 움직이면 제일 좋아.”

- 안동 부포마을』 중 월천마 이◯락(83) 구술

이는 상여계를 중심으로 분화되기보다 필요에 따라 두 개의 상여계가 공존하며 화합을 모색하며 지내다가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해체되지 않고 마을에 남아 공동체를 이어가는 구성원들에 의해 다시 하나의 상여 계로 합친 것으로, 공동체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와, 그때까지도 상호부조하여 장례를 치르는 전통적 상례문화를 중요하게 역기고 지키고자 한 문화적 배경이 동시에 작용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동제와 부라원을 기반으로 한 부포동 공동체의 지속가능성

고찰한 바와 같이 부포동의 동계와 상여계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조직은 부포마을 구성원들이 상호부조와 협동의 공동체문화를 함께 경험하며, 소속감과 연대감, 친밀감과 같은 공동체의식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이와 같은 공동체의식은 수몰이라는 불가항력의 상황 하에서 마을의 기억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구성원들에 의해 공동체지향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고, 그 결과 산업화와 현대화를 거치면서 공동체 해체 위기에 직면하며 공동체문화의 소멸로 이어진 마을들과 달리 부포동은 지금까지도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자신들의 문화를 지켜오고 있다. 고찰을 통해 부포동구성원들이 소속감과 연대감을 느끼며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이것이 다시 공동체 문화를 지속시켜주는 역할을 해왔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포동 공동체문화가 다른 마을과 달리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부포동 공동체문화가 다른 마을에 비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다른 마을과 차별되는 요소는 무엇일까? 본 연구자는 수몰로 인한 고향 상실과 부라원이라는 공간이 그 중심에 있다고 보았다.

부포사람들은 마을이 수몰되기 전까지 마을에 경사가 있으면 부포들 가운데 고려때 세워진 부라원루에서 잔치를 하고, 정월이면 부라원 옆 당나무가 있는 곳에서 동제를 지냈다. 큰 홍수로 부라원이 훼손되었을 때는 마을구성원들이 모여 논의를 거쳐 마을 기금을 보태고 십시일반 추렴과 울력을 해 나무를 배어와서 기둥을 보수하고 지붕을 수리하는 등 힘을 합쳐 복원하였다. 부라원 중수를 한 후 날을 잡아 음식을 장만하고 마을 구성원들이 모두 차려입고 참석해 기념식을 하였으며, 지역 유지들과 이웃들을 초청해 함께 음식을 나누었다.

“이때가 오십 몇 년도인가 60년도인가 그 무렵이래. 여름에 큰물이 졌어. 부포가 원래 지대가 낮은 데다가 원이 부포들 가운데 있다보이, 홍수 나거나 해서 큰물 지면 기둥이 무너지고 일부는 떠내려가고 그런 일이 몇 번 있었어.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원을 다시 바로 세웠어. 집집마다 몫이 주어져. 뭐 기둥할 거를 해 와라, 서까래 보수할 거를 해 와라. 나도 아부지하고 기둥 할 목재를 하려고 산에 가서 큰 나무를 베서 가지고 왔어. 그래 나무를 해와서 자르고 대패질 하고 해서 원을 다시 바로 세우는 거지. 중수를 다 마치고 마을에서 크게 잔치를 했어. 예안면장이며 경찰서장이며 이웃마을서도 행세깨나 한다는 사람들 다 오고 크게 했어. 원이 상하면 그때마다 마을에서 몇 번이고 다시 수리를 했어. 고려 때 원지 어진 부라이 안 없어지고 지금까지 이래 있는 것도 우리마을 사람들이 같이 보수를 하고 정성을 들였기 때문이라 봐야지. 다른 마을에서 부포 사람들이니까 그래 한다고 했어.”

- 부포 월촌마 이◯창

그렇게 함께 하며 살았던 부포동이 댐 건설로 인해 하루아침에 물속에 잠겼고, 부포동 사람들은 고향을 상실했다. 그러나 축소되거나 단절될 수도 있었던부포동 공동체는 고향에 남은 사람들과 떠난 사람들이 부라원을 통해 소통하며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남은 사람들은 부라원을 두 번이나 이건하며 마을 가까이 두고 쓸고 닦으며 지켰으며, 타향으로 떠난 이들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온라인상에 ‘부포사랑방’ 을 만들고 고향소식과 고향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올리며 소통을 이어갔고, 부포의 상징인 부라원루를그려 부포마을 소식지 ‘부라보(浮羅報)’를 만들어 고향 사람들과 나누었다.

“우리가 부포 떠나서 먹고 사느라 한참동안 부포를 찾아가지 못하고 ‘부포사랑방’을 만들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서로 안부를 나눈 지가 오래 됐어. 거기 고향 집 이야기도 쓰고 우리 할배 곰방대 피던 이야기도 적고, 부라원 중수하고 잔치하던 사진도 올렸어. 수몰 전에 태원이가 찍은 마을사진을 서로 찾아보고 하다가 부포소식지를 만들게 된 거지. 부라원 이름이 부포와 부포마을을 감싸고 있는 나부산 글자를 딴 이름이기도 하고 부포마을을 제일 먼저 떠올리게 ‘부라보’라고 지었는데 다들 좋아하니 잘 지었다 싶어. 그거면 되지.”

- 부라보를 편집, 발행한 이◯정, 이◯호

상을 당하면 서로 부조를 하고, 부라원 이 건이나 부포마을 행사 때면 서로 초청하고 멀리서 달려와 함께 기념하고 축하의 자리를 이어갔다. 망실감 속에서도 그들이 여전히 함께 모일 수 있었던 것은 부라 원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수몰을 앞두고 부라원을 당집과 함께 물에 잠긴 부포 마을이 잘 내려다보이는 자리인 가늠골 산 위로 이건하였다가 2005년 동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 가까운 지금의 호 소골 자리로 다시 이건을 하였을 때도 음식을 장만하고 기념식을 하였다. 76년에 부포동이 물에 잠긴지 30년이 지난 시간이었지만 서울, 대구 등 타지로 나간 부포동 수몰민들까지 함께 모여 부라원을 무사히 이건한 것을 기념하고 축하 공연을 즐겼다.

이처럼 동제를 지내는 당집과 더불어 마을의 역사이자 자랑인 부라원이 부포동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주요한 의미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수몰 전에 있었던 부라원 중수 기념 잔치에 갓 쓰고 도포 입은 어른들과 댕기머리 길게 땋은 처녀들과 까까머리 아이들, 머릿수건을 한 부인들이 음식을 날랐던 모습에서, 그 후로 삼십 여년이 지나 부라원을 옮긴 후 있었던 이건 기념식 때 부라원에서 펼쳐진 축하 공연과, 그때 멀리서도 수고로움을 마다않고 기꺼이 달려와 함께 그 자리를 기념한 부포동 사람들의 모습에서, 현재 시점에서 부라원을 중심으로 지속 가능한 부포 동만의 공동체문화를 만들어갈 필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함께한 추억과 문화가 있고 그것을 나누고 공유할 장소인 부라원이 있기에 가능성 또한 높다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부포동 구성원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장소이자 수몰을 겪고도 살아남아 부포 동을 지키고 있는 부라원 공간을 부포동 사람들의 고향을 추억하는 만남의 장소이자 연대감과 친밀감을 공유하며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는 축제의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부포동 공동체 문화를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부라원 문화축제’를 제안하고자 한다. 이는 장소를 상실한 이들을 위한 현재적 의미의 장소 복원이자 부포동 공동체 문화의 지속가능성의 의미를 지닌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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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Bupo-dong's Community Culture Centered on Buraone.

5. 결론

본 연구에서는 지역공동체의 기반이 되는 마을 단위의 공동체문화가 급격히 약화되어 가는 현실에서,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부포동의 동계와 상여계를 중심으로 예안면 부포리의 공동체문화를 살펴보았다. 고찰 결과 농촌공동체였던 부포동에서는 상부상조와 협동의 문화를 중시하는 마을자치규약인 동계와, 누구에게나 필수 의례인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모두가 참여하고 상호부조를 원칙으로 한 상여계를 통해 구성원들이 상호협동하고 소속감과 연대감을 형성하며 공동체의식을 강화하고 공동체문화를 지속시켜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근대화와 산업화의 과정에서 소멸되거나 해체된 다른 공동체와 달리 부포동 공동체문화가 지속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첫째, 수몰로 망실한 고향에 대한부포동 주민들의 애환을 들 수 있다. 수몰이 되면서 없어진 고향이라는 장소를 상실한 망실감이 오히려 고향을 더 추억하게 하고 고향의 문화를 간직하고 이어가게 하는 강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둘째, 동계와 상여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부포동 공동체의 문화가 끊어지지 않고 ‘부포사랑방’과 ‘부라보’와 같은 형태로 이어지며 소속감과 연대감을 가지게 하고, 소통과 교류를 통해 부포동의 문화를 끊임없이 소환하고 재구성하며 현재에도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화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마을이 수몰된 지 46년이 지났음에도 부포사람이라는 높은 자부심을 간직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잃어버리지 않고 지키고자 하는 구성원들의 강한 공동체 지향성을 들 수 있다. 넷째, 부포동 마을의 자랑이자 상징적인 공간인 부라 원이 수몰되지 않고 지금도 남아 있다는 점이다. 부라 원 공간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이, 서로 떨어져 생활을 영위하지만 언제든지 고향을 지키고 있는 이 장소에 모여 같이 시간을 보내며 정체성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공동체지향성을 살려, 부포동 공동체 문화의 지속가능성을 부라원을 중심으로 논의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형태는 다르지만 부라원의장소성을 살려 과거 부포동에서 행해졌던 동제와 상여 계와 같은 공동체문화를 오늘에 맞게 재창조해, 그때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놀이 문화로 되살린다면, 부포동의 상징적 공간인 부라원을 일상을 벗어난 축제와 만남이 있는 지속가능한 공동체문화의 중심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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