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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jak Roofs and Modern Joseon Architecture in North Korea: Selection and Exclusion

팔작지붕과 북한의 현대 조선식 건축: 선택과 배제

  • Received : 2018.12.15
  • Accepted : 2019.03.13
  • Published : 2019.04.30

Abstract

Modern Joseon Architecture is North Korea's unique building style that interprets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in a modern way, and its most distinctive design feature is the Paljak roof that decorates the upper part of the buildings. This paper argues that continuous attempts at characterizing the nature of traditional Korean architecture in the late 1950s and early 1960s developed the theoretical rationale for the exclusive use of the Paljak roof in Modern Joseon Architecture. It also argues that the construction of the Pyongyang Grand Theater and the Okryu Restaurant during this period became a decisive moment for the formalization of the Paljak roof. The double roof rafters and gables and the "cheerful yet solemn" roofline were considered as main characteristic features of the Korean roof and the Paljak roof perfectly fits this description. Particularly, in North Korean society where Kim Il Sung became idolized as an impersonalized deity, an anecdote in which Kim Il Sung fixed a prominent gabled roof in the Pyongyang Grand Theater into a Paljak roof has allowed for the roof to gain an exclusive status. Hence, almost all Modern Joseon Architecture since the 1960s accepted the Paljak roof's monopoly position, rather than experimenting with other traditional roof types.

Keywords

1. 서론

현대 조선식 건축이란 전통건축의 형태를 현대적 건축 기술로 재해석한 북한의 건축 유형이다. 이 건축형식의 가장 분명한 형태적 특징은 건물 상부를 덮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전통지붕이다.1) 흥미로운 점은, 현대 조선식 건축에 사용된 지붕은 대부분 팔작지붕이거나 혹은 그 변형된 형태라는 점이다. 이는 남한의 현대건축에서 팔작지붕 외에도 맞배지붕이나 우진각지붕, 모지붕이 적지 않게 차용되었다는 사실과 대비된다.2) 이 글은 팔작지붕이라는 하나의 지붕형식이 어떻게 북한의 현대 조선식 건축에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어떠한 이유로 인해 그 후 반세기 이상의 기간을 거의 독점적으로 사용되어왔는지를 밝히기 위한 연구다.

1950년대까지 북한 현대건축에 가장 흔하게 사용된 전통지붕 형식은 모지붕이였다. 팔작지붕이 북한의 현대건축에 전면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현대 조선식 건축의 형식이 정립된 1960년 이후의 일이다. 이 논문은 북한 건축계에서 팔작지붕이 가지는 독점적 지위는 1950년대 후반 북한 지식인들이 전통건축의 전형적 특징을 찾으려는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1960년을 즈음한 시기 국가적 건축사업이었던 평양 대극장과 옥류관의 지붕 건설 경험을 통해서 정형화되었음을 주장한다. 또한, 이후 북한 학계의 보수적 분위기 아래에서 팔작지붕의 특권적 지위는 변하지 않고 계속 유지되어왔음을 주장한다. 지붕이라는 하나의 건축요소를 분석함으로써, 본 연구는 북한 현대 조선식 건축에서 전통성의 표현이 일련의 선택과 배제의 과정을 통해 정형화되었음을 밝힌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가진다.

2. 선행연구 및 연구방법

북한의 현대 조선식 건축을 연구한 한국의 대표적 학자로는 이왕기와 안창모를 들 수 있다.3) 이들은 다양한 연구를 통해 한국 건축계에 북한의 현대 조선식 건축을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외에도, 전통건축의 지붕과 관련해서는 김준봉의 연구가 있다. 그는 북한 공업출판사에서 출판한 『조선식건물건축설계』4)에 주로 기반하여, 북한 현대건축에서 사용된 전통지붕의 형태와 비례를 분석했다.5) 현대 조선식 건축에 관한 최근의 연구로는 박동민의 연구를 들 수 있다. 그는 현대 조선식 건축을 사회주의 세계의 보편적 예술원리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지역화된 형태라 주장하며, 평양 대극장을 중요한 사례로 이용했다.6) 현대 조선식 건축의 성립에 초점을 맞춘 이 연구는 평양 대극장 지붕의 변화에 관해 기술하고 있으나, 이후 팔작지붕이 어떻게 현대 조선식 건축의 주요한 의장 요소로 정형화되었는가에 관해서는 충분한 답을 주지 않고 있다. 본 연구는 이전의 연구에서 이미 충분히 다루어진 현대 조선식 건축의 현황이나 기원에 관해 다루기보다는, 이러한 현대 조선식 건축에서 팔작지붕이라는 구체적 형태요소가 가지는 독점적 지위의 형성과 지속의 원인에 초점을 맞춘다.'

이 연구의 대상인 현대 조선식 건축은 비교적 구체적인 형태적 특징을 가진다는 점에서, 북한에서 전통 건축 혹은 전통에서 영향을 받은 건축물을 통칭하는 "민족건축"이라는 용어보다는 하위 개념으로 볼 수 있다. 1989년 리화선은 『조선건축사』에서 전통건축을 현대식으로 발전시킨 건축물을 현대 조선식 건축이라 불렀는데, 형태적으로 여러 개의 볼륨이 하나의 건물로 결합하며, 그 위에 여러 개의 전통지붕이 덮여 있으며, 구조와 장식 그리고 내부 공간을 현대적으로 꾸미는 것이 특징이라 했다.7) 이러한 기준에 처음으로 부합한 건물은 1960년에 완공한 평양 대극장과 옥류관이며, 이후 평양의 인민문화궁전과 인민대학습당 등의 기념 비적 건물이 이 양식으로 건설되었다.

리화선은 현대 조선식 건축이 탄생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과거의 전통건축은 "복잡한 기능을 담는 공공건물을 크게 짓[는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8) 이처럼 북한에서 현대 조선식 건축이라 불리는 건물은 대부분 기념비적 규모의 공공건물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지붕을 가졌더라도 주택과 같은 단순한 볼륨의 소규모 건물은 현대 조선식 건물로 보기 어렵다. 또한, 전통적 요소를 차용한 기념비적 건축물 중에서도 현대 조선식 건축이 아닌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평양역사의 경우 전통지붕의 형식을 빌린 시계탑이 있지만, 그 외의 건물 대부분이 서양 고전주의 양식을 따라가고 있으며, 특히 건물 전체에 전통지붕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대 조선식 건축으로 볼 수는 없다. 또한, 전통지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평양의 개선문과 4.25 문화회관 등의 건축물 역시 민족건축으로 분류할 수는 있지만, 현대 조선식 건축은 아니다.

본 연구는 현대 조선식 건축에서 특정 지붕형식이 선택 혹은 배제된 정치적 원인에 집중한다. 구체적으로, 이 글은 우선 북한이 주체적인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1950년대 중반 이후 전통건축의 전형적 특징을 발견하고 이를 현대건축에 적용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관해 알아본다. 그다음으로, 1960년대 초 정형화된 지붕의 형태가 등장하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 형태가 반복된 원인을 보수화되어가는 북한의 정치적 상황에서 찾는다. 그다음으로는 현대 조선식 건축을 넘어 북한건축 전반에서 팔작지붕이 전통지붕의 대표로서 인식되게 된 상황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를 종합하여 마지막으로, 다양한 지붕형식의 선택과 배제의 원인에 관해 분석한다.

3. 1950년대 전통지붕의 이해와 재현

3-1. 1950년대 초중반 전통지붕의 재현

전통지붕의 모티브를 사용한 건물은 1953년 재건이 시작된 직후부터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 중 파괴되었던 국립 중앙력사박물관은 1954년 재건되는데, 이 건물은 전신인 평양부립박물관의 모습 그대로 복구되었다.9) 이전의 평양부립박물관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도쿄 제국호텔의 지붕과 유사한 직선적 형태를 가지고 있었는데, 중앙력사박물관은 이 모습 그대로 재건된 것이다. [그림 1]  전후에 다시 복구되면서 일제강점기의 모습 그대로 재건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에 전통지붕의 현대화에 관한 생각이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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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재건된 국립 중앙력사박물관, 평양, 1954년 (『로동신문』, 1954년 7월 15일)

중앙력사박물관이 완성된 1954년은 새로운 평양역사의 설계안이 완성된 해이기도 하다. 이때 평양역사의 지붕에는 팔모지붕이 사용되었다.[그림 2] 모지붕은 1950년대 북한건축에서 전통성이 표현될 때 흔히 사용된 지붕형식인데, 이러한 전통성의 표현 방법으로서의 모지붕의 사용은 중국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1959년에 완공된 북경의 민족문화궁과 북경역사의 시계탑에 사용된 사모지붕이 그 예다. 중앙력사박물관과 마찬가지로 평양역사의 시계탑에서 볼 수 있는 지붕 역시 직선적이라는 점에서 이후 현대 조선식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정확한 전통지붕의 재현과는 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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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평양역사, 1958년 완공 (『Корея, 1945-1960』, 1960)

팔작지붕이 사용된 이른 시기의 모습은 1955년 『로동신문』에 실린 견방직 공장의 투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10) [그림 3]다만, 여기서는 지붕을 이루는 마루와 처마가 곡선이 아닌 직선이라는 점에서 이후 현대 조선식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곡선의 지붕선보다는 중앙력사박물관이나 평양역사의 지붕과 더욱 깊은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계획도에는 용마루가 보이지 않는데, 높은 용마루가 조선의 전통지붕에서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었으며, 현대 조선식 건축에서도 용마루가 빠지지 않고 강조되어 표현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공장 건물의 투시도에 표현된 지붕의 모습도 이후에 등장하는 현대 조선식 건축에 사용된 지붕과는 큰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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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견방직 공장에 적용된 팔작지붕 (『로동신문』, 1955년 3월 11일)

팔작지붕이 사용된 이른 시기의 모습은 1955년 『로동신문』에 실린 견방직 공장의 투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는 지붕을 이루는 마루 와 처마가 곡선이 아닌 직선이라는 점에서 이후 현대 조선식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곡선의 지붕선보다는 중 앙력사박물관이나 평양역사의 지붕과 더욱 깊은 연관 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계획도에는 용마루가 보이지 않는데, 높은 용마루가 조선의 전통지붕에서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었으며, 현대 조선식 건축에서도 용마루가 빠지지 않고 강조되어 표현된다는 점을 고려 하면, 이 공장 건물의 투시도에 표현된 지붕의 모습도 이후에 등장하는 현대 조선식 건축에 사용된 지붕과는 큰 차이가 있다.

3-2. 1950년대 중후반 전통지붕의 이해

현대 조선식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정형화된 팔작지붕과 그 지붕선은 1950년대 말의 전통건축에 관한 담론의 형성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1956년 소련의 탈스탈린화와 북한 내의 8월 종파 사건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한만의 독자성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이 시기 건축계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칙에 따라 조선만의 역사적, 문화적 특성에 맞는 민족적 형식을 확립하고 이를 현대건축에 적용하기 위한 노력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를 위해서 당시 북한 대도시의 재건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서양의 고전적 건축물은 물론, 유사한 건축전통을 공유하는 중국과 일본의 전통건축과도 다른 "조선만의" 민족적 형식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민족적 형식을 찾는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과거의 모든 전통이 계승할 가치가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맑스-레닌이즘적 역사 인식에 따르면, 과거의 유산에는 언제나 진보적 요소와 반동적 요소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 중 긍정적인 요소만을 찾아 계승해야 했다. 따라서, 전통문화의 계승에는 언제나 취사선택의 과정이 동반되었다. 과거를 보는 이러한 선별적 관점을 통해 보면, 모든 전통지붕 형식이 같은 계승의 가치를 지니지는 않았다.

팔작지붕은 이미 이 시기부터 가장 중요한 지붕형식으로 인식되었다. 예를 들어, 김일성대학 역사학강좌장이었던 미술사학자 리여성은 『조선 건축의 연구』(1956)에서 여러 가지 전통지붕 형식에 대해 논했다. 이 책에서 그는 팔작지붕을 맞배지붕에 우진각지붕을 덧붙인 것이라 말하며, 팔작지붕은 좌우로 박공이 있으므로 조형적으로 풍부할 뿐만 아니라, "곡선의 묘미"를 잘 보여줄 수 있는 형식이라 평했다. 특히, 그는 예로부터 중요한 건물에는 언제나 팔작지붕이 사용되었음을 주장하며, "만약 큰 헷각집[팔작집], 례하면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경회루 같은 것이 뱃집[맞배집]이나 우산각집[우진각집]으로 되였다면 그 모양다리가 과연 얼마나 기괴하였을 것인가. 헷각집 양식은 이러한 대건물에 있어서 없지 못할 양식으로 된다"라고 덧붙였다.11) 즉, 리여성은 팔작지붕을 기념비적 건축물에서 필수불가결한 형식으로 인식했다.

북한에서의 전통에 관한 이해는 현재의 적용을 전제한 것이었던 만큼, 전통지붕 자체에 관한 연구 못지않게 그 형태를 어떻게 현대건축에 적용할지에 관한 논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수리 기술자 출신으로,12) 조선 건축가 동맹 서기장이었던 박황식은 1957년 『문화유산』에 기고한 글에서, 전후 복구기에 지어진 건물이 조선의 특징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이를테면, 건물에서 박공면이 정면에 오는 것을 서양이나 일본식 건축이라 비판하며, 조선식 건축물의 정면에는 박공이 아니라 처마선이 있어야 함을 주장했다. 더 나아가 지붕의 형태에서도 서양의 지붕을 흉내내기보다는, 팔작지붕과 같은 조선의 전통지붕 형태를 따라 하자고 주장했다.13) 현대 조선식 건축의 형식이 등장하기 이전인 1957년 나온 이 글에서 이미 팔작지붕이 여러 지붕의 형식 중 대표로 현대건축에의 적용이 언급됨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지붕의 형식을 그대로 빌리는 행위에 반대하는 흐름도 분명 존재했다. 이를 테면, 모스크바 건축대학을 갓 졸업하고 평양시 인민 위원회 건축 참의로 일하던 남상진은 과거의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공포나 처마 등의 요소는 우연을 포함한 다양한 요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현재의 건축은 이러한 과거의 형태를 그대로 따라갈 필요가 없음을 주장했다. 즉, 과거의 형식을 그대로 따라 하기보다는 현재의 재료와 구조에 맞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야 하고, 그것이 민족적 형식임을 말했다.14)

요약하자면, 1950년대 중후반에는 전통지붕의 대표로서의 팔작지붕에 관한 담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이중으로 된 서까래를 이용해서 길게 낸 지붕, 박공의 존재, 그리고 "경쾌하면서도 장중한" 지붕선 등이 조선지붕의 중요한 특징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이러한 특징을 모두 가진 팔작지붕이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북한 건축가들이 전통지붕의 현대적 적용에 관해 통일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그 차용의 형태가 정형화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현대 조선식 건축에서 팔작지붕의 정형화에는 1960년을 전후한 몇 개의 주요 건축사업의 경험이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4. 팔작지붕의 정형화

전통성에 관한 관심은 담론의 장에서뿐만 아니라, 실제 건축사업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1950년대 말 북한은 건설의 표준화와 기계화를 통한 공사비와 공사 기간의 단축을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지만, 기념비적 건물에서는 추가적인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라도 전통적 형태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는 경제성을 중시하던 북한 건축계의 상황에서도 전통의 표현이 분명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평양의 평남 제1면옥(1959)과 개성시 아동회관(1961; 현 개성 학생소년궁전) 등의 건물에서 전통지붕이 사용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림 4]이 중에서도 북한현대 조선식 건축의 지붕 형태에 결정적 영향을 준 건물은 1960년 완공한 옥류관과 평양 대극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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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평남 제1면옥, 평양, 1959 (『Корея, 1945-1960』, 1960)

1958년 7월 10일 발표된 내각결정 제83호는 해방 15 주년인 1960년까지 평양을 더욱 화려하게 재건하려는 계획을 담고 있었다. 그 내용에는 평양 중심부에 들어설 대극장을 "우리 나라 고유한 건축 예술적 표현을 충분히 구현"한 형태로 만들고, 옥류관을 "주위 풍경에 조화 맞게 조선 건축 양식으로 구성"할 것이 포함되었다.15) 하지만, 여전히 조선의 고유한 건축양식을 띤 건물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정해진 바가 없었고, 따라서 국가적으로 중요한 이 두 개의 건축물에서 어떻게 전통성을 표현할지의 문제는 북한 건축계에서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4-1. 옥류관의 지붕 구성

옥옥류관은 상부에 전통 기와지붕을 사용하고, 공간 구성 및 구조는 현대식으로 구성한다는 현대 조선식 건축의 원리를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 형태적으로 보면, 중심에 본채가 있고, 양쪽에 대칭으로 곁채가 있는 데, 여기에는 모두 팔작지붕이 사용되었다. [그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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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옥류관, 평양 (『평양건설전사 2』, 1997)

이러한 대칭적 구성은 옥류관 직전에 완성한 평남 제1면옥은 물론 같은 시기 만들어진 평양 대극장에도 적용된 익숙한 구성방식이다. 옥류관이 이후 현대 조선식 건축에 남긴 가장 큰 형태적 유산은 본채의 팔작지붕 양쪽으로 덧붙여진 작은 팔작지붕의 존재다. 전통적인 건물의 평면에 비해서 훨씬 커진 현대적 건물을 덮기 위해 큰 팔작지붕의 양쪽 박공면 쪽으로 조금 작은 크기의 팔작지붕을 추가로 하나씩 덧붙여 구성함으로써 하나의 지붕이 과도하게 커 보이는 문제를 시각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팔작지붕 박공면의 확장을 통한 형태의 다변화는 이후의 현대 조선식 건축에서도 볼 수 있는 중요한 구성 기법이 된다.

4-2. 평양 대극장의 지붕 선정

평양 대극장은 그 규모와 기능 면에서 전후 복구기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 중 하나였으며, 그 형태에 관해 건축가들이 가장 치열하게 고민한 건물이기도 했다. 평양 대극장의 초기 시안을 보면,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중으로 된 사모지붕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모습은 현상 설계가 진행되면서 점차 변해간다. [그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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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평양 대극장 초기 시안, 평양, 1958 (『선동원수첩 (산업 부문)』, 1958년 7월 상반호)

대극장의 현상 설계는 내각 결정 제83호가 발표되기 한 달 전인, 1958년 6월 10일에 이미 시작되어 두 달간 진행되었다. 여기에는 11개 팀이 설계안을 내었으나, 당선작 없이 3등과 가작 그리고 장려상만이 선정되었다.16) 실제로 건설된 형태는 아니지만, 여기에 출품된 작품이 보여주는 지붕의 표현은 당시 북한 건축가들이 전통지붕을 현대건축에 어떻게 적용하려 했는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림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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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평양 대극장 현상 설계 제출안들, 1958년 (『건축과 건설』, 1958년, 11호)

지붕만을 살펴보자면, 평양시 도시 설계 연구소 제2건축실의 신순경, 박익환, 정만영 등이 제출한 3등작 «탑»의 전면에는 현재의 팔작지붕이 아니라 사모지붕이 사용되었고, 후면에는 맞배지붕이 사용되었다. 또 다른 3등작은 건설대학 건축학부 교수진인 방덕근, 리원명, 리병호, 진봉재 등이 설계한 «춘향»인데, 흥미롭게도 이 안에서는 전통적인 지붕 곡선 대신, 반원과 부채꼴 등의 기하학적 곡선이 사용되었다. 가작으로 선정된 «청룡» 역시 건설대학 건축학부 교원인 김상순, 김서균, 김기철 등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여기서는 고구려 유적에서 발견되는 팔각형 평면을 적용한 형태가 인상적이다. 지붕도 이를 반영하여 팔각형의 평면을 따라 아주 얕은 처마만이 사용되었다.17) 이 세 개의 안 중 어느 것에서도 팔작지붕은 사용되지 않았다.

대극장 지붕에 관한 고민은 1959년 1월 23일 착공을 한 후에도 계속되었다.18) 그해 2월 16일에는 평양시 도시 설계 연구소의 김정희와 신순경이 각각 안을 내고 합평회를 진행했지만, 이들의 안 역시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9) 결국, 평양 대극장의 형태는 이전에 등장한 여러 가지 안들의 장점을 종합하여 평양시 도시 설계 연구소의 건축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최종적으로 선택된 안에서는 사모지붕, 맞배지붕, 팔작지붕이 모두 사용되었다. 전면의 양쪽 날개에는 사모지붕이 사용되었고, 전면과 후면의 구조물을 비롯하여 건물 대부분에 팔작지붕이 사용되었다. 예외적으로, 가장 높은 무대를 덮는 구조물에는 맞배지붕이 사용되었고, 관객석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둥근 원통형의 비전통적인 지붕이 선택되었다. [그림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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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평양 대극장 모형 (『조선』, 1960년 3월)

건설이 막바지에 이른 단계, 더 나아가 1960년 8월 15일 완공 후에도 평양 대극장의 지붕에 관한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원통형 지붕이 있던 자리에는 팔작지붕이 추가되었고, 맞배지붕는 팔작지붕으로 교체되었다.20) 이것이 북한의 현대 조선식 건축에서 맞배지붕을 볼 수 있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4-3. 소결

북한 현대건축에 적용된 전통지붕은 1950년대까지는 모지붕이 흔히 사용되었지만, 1960년의 평양 대극장과 옥류관의 건설을 기점으로 팔작지붕이 북한의 현대건축에 전면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팔작지붕의 높아진 인식은 50년대 담론의 장에서 형성된 전통지붕의 대표로서의 팔작지붕의 인식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예를 들어, 대극장의 완공에 맞추어 1960년 발간된 『평양 대극장 건설』을 보면, 조선 지붕의 특징으로 이중으로 된 서까래와 깊은 처마, 지붕면의 곡선, 위로 곡선을 이루며 펼쳐진 선자서까래, 높은 용마루, 그리고 박공의 존재를 꼽았다.21) 팔작지붕은 이러한 요건을 충족시키는 가장 적합한 지붕형식이었다. 이렇게 팔작지붕은 1960년대 초에 이미 현대 조선식 지붕의 전형적 형태로 자리 잡고 있었다.

5. 팔작지붕의 독점화

5-1. 주요 현대 조선식 건축의 지붕

1960년대 초반 담론의 장과 실제 건설 사업에서 팔작지붕이 중요한 조형 요소로 선택된 이유가 필연적이라기보다 선택적이었다면, 이후 팔작지붕이 계속 사용되어 온 이유 역시 필연이라기보다는 북한의 특수한 정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1967년 북한에서 마지막 남은 정치 파벌인 갑산파가 숙청되고, 1967년 12월 16일 최고인민회의는 김일성을 정식으로 수령으로 추대한다.22) 김일성의 유일 지배체제에 방해가 되는 지식인들은 제거되었고, 김일성 우상화에 반하는 과거의 출판물은 수정되거나 파괴되었다. 70년대 중반까지 진행된 도서정리사업으로 소련을 포함한 외국에서 출판 된 서적이나 이에 영향을 받은 책들이 모두 불태워졌다. 맑스와 레닌의 글도 예외가 아니었다.23)

극단적으로 폐쇄화 되어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건축계에서도 창의적 해석이나 새로운 전통 담론의 생산보다는, 기존에 승인되고 허용된 이해를 주체사상에 맞게 수정하고 재단하는 작업이 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지식계의 경향은 건축 활동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1960년대 이후 북한에는 다수의 현대 조선식 건물이 만들어지는데, 평양의 인민문화궁전(1974), 평양수예연구소(1978), 인민대학습당(1982), 평양숭어국집(1992) 등이 대표적 건물이다. 평양 외의 지역에서도 현대 조선식 건축을 흔히 볼 수 있다. 안주의 칠성각(1975), 함흥의 신흥관(1976),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1978), 개성의 개성시 아동회관(1961), 통일관(1989), 개성수예공장(1989) 등이 대표적 예다. 이러한 건물의 지붕은 평양 대극장과 옥류관이 보여준 조형 원리를 물려받아, 이를 좀 더 세련되고 복잡한 형태로 진화시켰다.

예를 들어, 1978년 완공된 평양수예연구소는 "조선적인 조형미"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는데, 크기가 각기 다른 11개의 팔작지붕과 21개의 박공이 서로 엇갈려서 복잡하게 배치되었지만, 이들은 조화롭게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24) [그림 9]그 덩어리가 때로는 평양수예연구소처럼 비대칭적이며, 때로는 인민대 학습당처럼 대칭적이지만, 둘 중 어떤 경우라도 그 위의 지붕은 거의 언제나 팔작지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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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평양수예연구소, 지붕 평면도 평양, 1978 (『조선건축』, 1989년, 4호)

5-2. 전통지붕의 대표로서의 팔작지붕

1980년대 들어 북한의 현대건축에는 전통지붕을 직접 차용한 현대 조선식 건축 외에도, 그 형태를 추상화해서 적용한 건축물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경우도 팔작지붕이 그 추상화의 원본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82년 완성된 평양의 개선문은 그 재료와 형식에서 서양의 개선문을 따르고 있고, 그 지붕도 실제로 3단으로 구성된 평지붕이다. 하지만, 평양의 개선문은 김일성의 70세 생일을 맞아 건설된 구조물로서, 조선의 민족적 특성을 반영하도록 계획되었다. 따라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양의 개선문은 유럽의 개선문 형태를 그대로 따라가기보다는 팔작 지붕의 형태와의 접목을 시도했음을 알 수 있다. 1989년 출판된 『당의 령도밑에 창작건립된 대기념비들의 사상예술성』은 개선문이 민족적 형식을 반영하기 위해 팔작지붕의 형식을 빌려왔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개선문은 민족건축형식에서 가장 중요한 합각 [팔작]지붕형식을 그대로 살려 지붕의 돌출부와 면적을 크게 설정하고 3층으로 된 지붕의 건축형상을 특색있게 창조하고있다."25) 이러한 개선문의 형태에 팔작지붕이 영향을 주었음은 여러 다른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있다. 이를테면, 개선문의 지붕 형태를 설명하면서, "학각[팔작]지붕형식을 살려 길게 뽑아준 추녀"나 "지붕모서리부분이 합각식[팔작]지붕처럼 가볍게 들린듯한 인상"을 주려 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26)

2008년 『조선건축』에는 개선문의 비례를 2층 팔작지2008년 『조선건축』에는 개선문의 비례를 2층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진 평양 대동문의 기단 및 문루와 비교하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그림 10]이처럼 개선문에 전통지붕의 대표로서 팔작지붕을 사용하고, 그 적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팔작지붕이 현대 조선식 건축을 넘어 북한에서 전통지붕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고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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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개선문과 대동문의 윤곽선 비교 (『조선건축』, 2008년, 2호)

대표 전통지붕으로서의 팔작지붕의 지위는 담론의 장에서도 확인된다. 1967년 갑산파 숙청 이후 약 20년간 움츠러들었던 건축 담론의 생산은 1987년 『조선건축』이 발간된 이후 다시 활발해진다. 『조선건축』은 이 잡지가 발행된 거의 전 시기에 걸쳐 민족건축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었고, 현대 조선식 건축에 관한 기사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89년과 1991년에는 전통건축의 형태를 수치상으로 분석한 글이 연속해서 발표된다.27) 흥미로운 점은, 이 다섯 개의 글에서 현대 조선식 건축물 혹은 일반적인 전통 건축물의 지붕 형태를 분석하면서 "합각식 지붕[팔작지붕]"을 가진 건물을 "조선식 건물"과 사실상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림 11]다시 말해, 다양한 전통지붕 형식 중 팔작 지붕만이 그 대표로 설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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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 팔작지붕을 대상으로 한 전통건축의 비례분석 (『조선건축』, 1989년, 4호)

더 나아가, 다양한 건물에 사용된 팔작지붕이 가지는 형태적 다양성 역시 무시되었다. 이러한 전통지붕의 정형화를 통해, 전통지붕의 용마루와 박공, 추녀 등의 비례와 곡률이 단일화된 수치로 표준화되었다. 한편, 팔작지붕을 중심으로 규범화되어가는 전통지붕의 담론에서 그 외의 다른 지붕 형태는 점차 주변부화 되어갔다.

6. 배제와 선택

6-1. 지붕형식별 특징과 배제의 이유

현대 조선식 건축에서 팔작지붕이 가진 독점적 지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지붕형식이 왜 배제되었는 지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다. 먼저, 전통건축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된 맞배지붕은 북한에서 배집 혹은 박공지붕으로도 불리는데,28) 팔작지붕이나 우진각지붕에 선행하는 오래된 형태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지붕선이 비교적 직선인 맞배지붕은 조선 지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여겨진 "경쾌하면서도 장중한" 곡선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전형적 조선 지붕이 가진 미를 표현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인식되었다. 또한, 맞배지붕은 가장 적은 비용으로 만들 수 있는 형식이었고, 따라서 과거에 주택이나 사찰, 제당 등 규모가 작고 소박한 건물에서 주로 사용되었다고 여겨졌다.29) 이처럼 과거에 낮은 위계의 건물에 주로 사용된 맞배지붕은 현대 조선식 건축이 도시의 기념비적 건축물을 위한 양식이라는 점에서 이상적인 지붕형식이 되지 못했다.

미국의 건축사학자 그렉 카스틸로는 중앙아시아지역에서 소련이 건설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건축을 분석하면서, 지방의 모든 건축전통이 진보적인 사회주의 건축을 위해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며, 주로 그 지역의 기념비적 건축전통만이 새로운 사회주의 리얼리즘 건축의 탄생에 사용되었음을 지적했다.30) 소련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칙을 북한의 상황에 맞게 지역화한 현대조선식 건축에서도 과거에 낮은 위계의 건물에 자주 사용된 맞배지붕보다는 고급 건축에서 주로 사용된 팔작지붕이 더 적당한 양식으로 인식되었음은 분명하다.

조선의 또 다른 대표적 전통지붕으로 우진각지붕을 들 수 있다. 우진각지붕은 과거 북한에서 우산각지붕이라고도 불렸으나, 현재는 남한과 마찬가지로 우진각지붕이라 불린다. 북한이 고구려 유적인 대성산성 남문과 장수각 등의 유적을 우진각지붕으로 복원한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성문이라는 특정한 건축양식에서는 우진각지붕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건축가들은 우진각지붕을 현대 조선식 건축에 적합한 형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먼저, 북한에는 우진각지붕을 가진 유구가 극히 드물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남한의 경우, 한국전쟁 후에도 큰 성문에 적용된 우진각지붕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서울에만 해도 한양도성의 숭례문과 흥인지문, 경복궁의 광화문과 근정문, 영추문, 창덕궁의 돈화문, 창경궁의 홍화문 등의 기념비적 규모의 문루를 비롯한 다수의 우진각지붕 건물이 남아있다. 이에 반해, 북한에서 한국전쟁 중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은 우진각지붕의 예로는 개성의 관음사 대웅전 정도가 전부인데,31) 이 건물은 규모도 작고, 지붕의 비례도 건물 크기에 맞지 않는 어색한 모습이 다. [그림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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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 관음사 대웅전, 개성시 (『북한의 전통사찰 5. 개성』, 2011)

또한, 북한에서 우진각지붕은 과거에 제한적인 용도로만 사용된 지붕형식으로 인식되었다. 예를 들어,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은 우진각지붕이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궁궐 등의 주요건물에서 흔히 사용되었지만, 조선에서는 주요성문이나 일반민가에서만 사용되었다고 적고 있다.32) 1960년 북한에서 출판한 『조선의 문화유물』에는 우진각지붕이 "기와 지붕에서는 그리 광범하게 사용되지 않으나 농촌 초가 지붕들은 이러한 형식이 보편적이다"고 쓰고 있다.33) 즉, 우진각지붕은 북한에서 낮은 위계의 초가 건물이나 성문이라는 특정한 건축형식에만 사용되었다고 인식되었고, 이러한 과거의 제한된 이용은 우진각지붕의 대표성을 제한했다. 게다가, 형태적으로 볼 때, 우진각지붕에는 전통지붕의 중요한 특징으로 여겨진 박공이 없기 때문에, 조선 지붕을 대표하는 형식이 되기는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살펴봐야 할 지붕형식은 모지붕이다. 모지붕은 지붕면의 수에 따라, 사모지붕, 육모지붕, 팔모지붕 등이 있다. 북한에서 모지붕은 일반적인 건물의 지붕이라기보다는, 정자처럼 임시로 머무는 시설의 지붕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모지붕은 팔작지붕과는 달리 용마루가 없다는 점에서 조선 지붕을 대표하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사용된 예를 찾기 힘든 맞배지붕과 우진각지붕과는 달리, 모지붕은 몇 가지 예외적인 경우 에 한해 현대건축에 사용되었다.

우선, 1960년 현대 조선식 건축이 정형화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건물에는 모지붕이 자주 사용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1950년대까지 모지붕은 가장 흔히 현대건축에 차용된 지붕형식이었다. 예를 들어, 1954년에 계획되어 1958년에 완성된 평양역사34)와 1957년 계획되어 1961년에 완성된 개성시 아동회관에는 모지붕이 사용되었다. 두 번째로는, 전망대 등 작은 구조물의 지붕으로 사용된 경우를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평양 대극장과 인민문화궁전 등의 현대 조선식 건축에서 다른 지붕과 연결된 지붕이 아니라 옥외공간에 독립된 정자가 있는데, 이곳에는 사모지붕이 사용되었다

마지막으로, 위의 두 가지 경우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모지붕이 사용된 경우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함경남도 북청군 룡전리의 리청사가 여기에 해당한다. 보통의 북한의 농촌지역과는 달리, 북청군 룡전리는 시범적으로 "문화농촌"이라는 이름으로 1990년대 초에 새롭게 꾸며진 마을이다. 이 마을의 리청사는 팔작지붕을 가지고 있으나, 한 모서리가 모지붕이 덮인 3층 구조물과 결합되어 있다. [그림 13]건물이 비교적 소규모이며, 마을을 소개한 『조선건축』의 기사에서 이 건물을 현대 조선식 건물이라 소개하고 있지는 않지만,35) 모지붕이 팔작지붕과 함께 사용된 경우도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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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3. 북청군 룡전리 리청사 (『조선건축』, 1992년 2호)

요약하자면, 조선의 전통지붕을 대표하는 팔작지붕과는 달리, 맞배지붕과 우진각지붕 그리고 모지붕은 과거에 낮은 위계의 건물에 주로 사용되었거나, 성문 혹은 정자 등에 사용된 특별한 지붕형식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팔작지붕을 제외한 이 세 가지 지붕형식은 조선 지붕이 가져야 할 전형적 특징으로 여겨진 박공과 높은 용마루, 그리고 특징적인 지붕선을 모두 갖추지 못한 지붕형식이었다. 따라서, 소규모의 민족건축이나 문화주택 혹은 정자에는 흔히 사용되었지만, 현대 조선식 건축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맞배지붕과 우진각지붕과는 달리, 모지붕의 경우 예외적인 사용이 발견되지만, 팔작지붕의 압도적인 사용에 비하면 그 사용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6-2. 팔작지붕의 선택

북한에서 팔작지붕은 초기에 헷각이나 학각 등으로도 불렸으나, 현재는 합각으로 불린다. 현대의 적용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팔작지붕은 다른 지붕이 가지지 못한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우선, 팔작지붕은 조선 지붕의 특징으로 인식된 박공,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모두 지녔으며, 무엇보다 "날아 오를 듯 경쾌한" 혹은 “경쾌하면서도 장중한" 형상으로 표현되는 조선의 특징적인 지붕선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평양에 있는 중요한 전통건축물인 대동문, 보통문, 련광정 등이 모두 팔작지붕 건물이었다는 점에서, 현대 조선식 건축이 탄생한 평양에서 이러한 전통건축물과 형태적 연속성을 가질 수 있는 팔작지붕의 사용은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현대 조선식 건축에서 팔작지붕이 선호를 넘어 독점으로 진행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형태적 통일성을 이루기 위해서다. 현대 조선식 건축에서는 대규모 건물의 상부에 크기가 다른 여러 개의 지붕이 하나의 건물에 사용되는데, 이 경우 서로 다른 여러 개의 지붕 형식을 섞어 쓰기보다는 하나의 지붕형식을 선택하고 이를 변형하여 사용하는 편이 조형의 통일성을 이루는데 유리했다. 예를 들어, 현대 조선식 건축 중 가장 규모가 큰 인민대학습당은 34개나 되는 크고 작은 지붕이 사용되었지만,36) 모두가 단일한 팔작지붕을 사용함으로써 형태적인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림14] 이에 대해 인민대학습당이 완공된 1982년에 나온 『로동신문』 기사는, "건축군을 이루고있는 매개 덩어리들의 지붕모양새는 각이하지만 그 형식은 합각[팔작]식​​​​​​으로 통일되여있다"고 평했다.37) 이러한 통일성 안에서의 변화는 팔작지붕의 독점을 통해서 얻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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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4. 인민대학습당, 1982년 완공 (『로동신문』, 2018년 7월 8일)

한편, 팔작지붕과 다른 지붕형식이 결합할 경우, 두 개 지붕을 결합하는 데 있어 디자인적인 어려움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1957년에 설계된 개성시 아동회관은 팔작지붕이 모지붕과 결합한 드문 사례 중 하나인데, 지붕이 14각형이라는 매우 특이한 형태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지붕을 받치는 원통형 구조물과 그 뒤의 팔작지붕이 어색한 모습으로 만나고 있다. [그림 15] 이러한 설계상의 현실적인 어려움 역시 팔작지붕의 독점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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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5. 개성시 아동회관 (『조선』, 1965년 9월)

현대 조선식 건축에서 팔작지붕이 가지는 독점적 지위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탄생과정에서 김일성의 역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서는 평양 대극장에서 맞배지붕이 팔작지붕으로 변경된 것이 김일성의 명에 의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김일성이 등장하는 이 일화는 다수의 북한 매체에 정형화된 형태로 등장한다.38) 지붕을 기러기에 비유한 이 일화의 주된 내용은 대극장의 지붕 중 하나가 "갑자기 높이떠서 딴방향으로 날아가는것처럼" 보였는데, 이 지붕을 다른 지붕의 방향에 맞게 김일성이 바로잡았다는 것이다.39) 1989년에 출판된 『조선건축사』에서 리화선은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무대 웃지붕이 배집[맞배]으로 되어있어 앞에서 보면 박공면이 높이솟아 마치 절벽처럼 보였다. 1960년 5월 어느날 마감단계에 들어선 대극장건설장을 현지지도하시던 경애하는 수령님께서는 ... 잘못된 무대 웃지붕을 헐어고치도록 하시였다. ... 수령님께서는 고쳐지어 아름답게 조화된 지붕을 바라보시면서 만족을 표시하시였다.40)

이 일화의 사실 여부보다 중요한 점은, 평양대극장에서 맞배지붕을 팔작지붕으로 교체한 인물이 김일성이라는 내용을 담은 일화가 늦어도 80년대 후반 이후에는 북한에 널리 퍼져있었다는 사실이다. 북한에서 참과 거짓을 정의하는 인물인 김일성에 의해 제대로 수정되었다는 팔작지붕 외에 다른 형식의 지붕을 쓰자고 주장할 수 있는 건축가는 없었다. 즉, 이 일화를 통해 팔작지붕은 김일성이라는 가장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를 얻게 된 것이다.

7. 맺음말

지금까지 이 글은 전통건축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북한의 현대 조선식 건축에서 팔작지붕이 가지는 독점적 지위가 어떻게 형성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북한에서 팔작지붕의 중요성은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까지의 담론의 형성과 건축사업의 경험을 통해 강화되었고, 보수적인 북한의 지식 세계에서 김일성에 의해 수정되고 인정받은 팔작지붕이 가지는 특권적 지위는 큰 부침 없이 이어질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팔작지붕의 사용이라는 하나의 사례를 통해, 이 논문은 북한의 건축가들은 전통건축이 가지는 다양한 면을 종합적으로 반영하기보다는 일련의 선택과 배제의 과정을 통해 정형화된 전통의 형태를 만들고 이를 반복해서 이용해왔음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팔작지붕의 독점적 사용은 앞으로도 계속될까? 2015년 완성된 평양양로원은 김정은 시대가 시작된 후 발견되는 대표적 현대 조선식 건물로서 팔작지붕으로 지어졌다. 2016년 『조선건축』에 실린 민족건축의 본보기 평양양로원 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이 건물에서의 팔작지붕의 사용에 관해 "합각[팔작]지붕형식은 경쾌하고 날아갈듯 한 정서적감흥을 주는것으로 하여 예로부터 조선식건물의 대표적인 지붕형식으로 널리 리용되여왔다. 평양양로원은 합각[팔작]지붕형식과 치미를 주어 민족적형식을 뚜렷이 반영"하였다고 쓰고 있다.41) 이처럼 현대 조선식 건축과 팔작지붕의 긴밀한 관계는 새로운 지도자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변함없이 공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한편, 최근 그 변화의 가능성이 엿보이는 기사도 발견된다. 2017년 『조선건축』의 한 기사는 "지금까지 현대조선식건축물설계에서는 합각[팔작]지붕만이 적용되었다"고 하면서도, 새롭게 계획되는 낙랑박물관에서 그 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맞배지붕을 적용한 설계안을 소개했다.42) 이처럼 앞으로 현대 조선식 건축에서 팔작지붕이 아닌 다른 지붕형식이 사용될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지금까지 팔작지붕의 선택이 필연적 결과가 아니었던 것처럼, 다른 지붕형식의 배제도 절대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가올 어떤 사회적, 정치적 변화가 북한 건축물의 지붕선을 변화시킬지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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