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국 박사의 회고록 ④ - 한국가금협회 창립과 육추일지

  • Published : 2016.04.01

Abstract

본고는 양계와 한평생을 함께 한 오봉국 교수(서울대 명예교수)가 그 동안의 인생여정을 정리하여 출간한 '축산의 비전을 심으며 살아온 나의 인생여정' 자서전 내용 중 '양계와 함께 걸어온 나의 회고' 내용을 발췌, 게재한 것이다. 오봉국 교수는 1925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1956년 서울대학교 축산과에서 농학석사과정을 거친 후 미국 미네소타대학과 호주 시드니 대학에서 석, 박사과정을 마친후 서울대학교에서 후학양성은 물론 양계산업 발전을 위해 많은 공을 세웠다. 1969년에는 (사)한국가금협회장(대한양계협회 전신)을 역임하고 현재까지 대한양계협회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1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한 바 있으며, 현대가금학 등 16편의 주옥같은 저서를 남겼다.

Keywords

6. 한국가금협회 창립

축산업 중에서 양계분야가 일찍 협회를 구성하고 발족이 되었는데, 1962년 9월 28일 서울시 축협회의실에서 한국가금협회 창립 발기인대회를 가졌고 그해 12월 5일에 서울우유협동조합 회의실에서 약 120여명의 업계와 학계인사들이 모여 창립총회를 가지고 한국 가금협회가 탄생되었다. 한국가금협회는 양계산업의 발전과 업계의 지위향상 및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어 업계인사의 모임체이나, 학계와 업계가 단합하여 창립한 협회이며 양계분야에 관련되는 모든 인사의 총 집결체가 되었으니 산학협동의 좋은 예가 되었다. 

초대 협회 회장선출에 있어서 업계와 학계의 교량역할을 하며 협회 창립의 중심체였던 장안동 양계강습회 회원들이 나를 회장으로 선출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내 나이 37세로 협회 심부름꾼으로 일하기로 자청하고 우리 축산업계의 거목이었던 건국대학 축산대학 학장으로 계시던 윤상원 교수를 추대하기로 제안하여 초대회장에는 윤상원 교수를 모시고 출범하였다. 

2대와 3대 회장에는 이재근 고려대학교 교수가 그 후 제4대 협회장에 내(오봉국 교수)가, (사)대한양계협회로 출범한 후 제2대 대한양계협회장에 오세정 교수 등이 협회장으로 취임하게 된 것을 보아도 학계와 업계가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협회창립은 되었으나 농림부로부터 사단법인체로 인가 받는데 커다란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1차로 1963년 농림부에 제출한 한국가금협회 설립인가신청서가 협회 예산액이 너무 작고, 당시 김원복(金元福) 선생께서 경영하시던 「한국가금연구소」설립취지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유사 단체는 인정할 수 없다하여 반려가 되었다. 

설립허가신청을 얻기 위하여 십시일반으로 양계하시는 이사님들이 호주머니 돈을 털어 모은 것이 10만원이었는데, 그것으로 설립인가를 내기 위한 제반서류를 꾸미고 교통비 기타 경비조로 그 방면에 경험 있는 분에게 청부를 주었던 것인데, 서류는 반려가 되고 갹출한 경비는 다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협회로서는 서류를 보완하여 설립허가신청재심요청을 하게 되었다. 이때 임원들은 결국 남에게 의존해서는 안 되고 협회에서 설립허가신청을 직접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나에게는 필요한 서류를 구비하는 일을 맡겼고, 다른 분들은 경비를 갹출하는 일을 맡기로 하였다. 

당시 나의 연구실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던 유병현 박사(전 호주 과학기술원 가축육종연구소 선임책임연구원)가 나를 도와 서류를 꾸몄는데 인가에 필요한 서류가 보따리로 한 짐이 될 정도로 많았다. 그 당시 작성한 구비서류의 종류를 보니 11가지나 되었다. 

이 서류보따리를 들고 농림부로 드나들며 서류의 보완작업과 경비조달을 위하여 뜻 있는 유지들이 여관에서 합숙을 해가며 일을 추진하였는데 이 모임에 참가한 분은 김현배, 박도현, 김영회, 이재근, 오봉국, 이필용, 강호년, 오세정씨 등 여러 분이었으며, 무슨 정성이 뻗쳐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모든 일을 제쳐놓고 낮에는 각자 맡은 모금운동에 나섰고, 밤에는 모금상황의 보고와 나는 농림부에 가서 추진한 일을 보고하고 또 내일 할 일을 서로 의논하며 근 1주일을 합숙하였다. 

그 당시 서류작성은 오늘날과 같이 타이프라이터도 없고, PC도 없는 때라 서류는 복사를 위해 엷은 미농지 종이 5장을 겹쳐놓고 그 속에 검은 먹지를 넣은 다음 볼펜이 없어 연필과 같이 생긴 골필을 갖고 써 내려가는 서류작성이었다. 사법서사가 아닌 나로서는 농림부 법무관실에 매일같이 출입하면서 서류를 보완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나를 보좌하여 매일 밤 연구실에서 보완서류작업을 해준 유병현 당시 대학원 학생에게 감사한다. 

무교동 건양옥 대포집은 우리가 정한 여관에서 가까운 술집이었는데, 돈 없는 사람이 술값 싸고 안주 좋은 집을 찾다보니 집은 허술하고 비좁은 방이었으나 빈대떡과 조기매운탕은 일품이었으므로 자주 찾게 되었다. 

2월의 추운 날 모금과 서류를 꾸미다 보면 일이 잘되어서 기분 좋아 한잔, 어떤 때는 일이 잘 되지 않아 기분풀이로 한잔 하곤 하였다. 그 당시 소주는 귀하고 약주가 맛좋고 값이 싸서 약주를 잘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금도 목표달성이 되었고 농림부 서류도 정식으로 접수가 되어 드디어 합숙의 끝날이 왔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알 수 없으나 통금시간이 지나 발이 묶이게 되자 한방에서 6명이 자게되어 서로 아랫목 따듯한 곳을 차지하려고 가위 바이 보를 해서 잤던 일이 생각난다. 

이때의 경비는 각자가 얼마씩 부담은 하였으나 동신종축장의 박도현 사장의 도움이 컸으며 한일사료의 고 차두홍 사장도 격려의 주연을 베풀어주곤 하였다. 

이때 제출한 「사단법인 설립허가신청 재심요청서」는 결국 1964년 12월 농축정(農畜政)1161, 12-1892호)에 의하여 정식으로 한국가금협회 설립허가를 얻었다.

7. 육추일지(育雛日誌)와 협회운영

사단법인 한국가금협회는 농림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협회로서의 면목을 갖추었으나 운영이 어려웠다. 사무실은 동신종축장 박도현씨의 도움을 받아 빌려 쓰게 되었으나 인건비, 사무실 유지비 등 경비조달이 어려웠다. 

협회 운영 경비를 보태기 위해서 나는 협회사업으로 『육추일지(育雛日誌)』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당시만 해도 뉴캣슬병을 비롯하여 각종 전염병 발생이 많았고 사양기술이 미흡하여 육추[brooding, 育雛, 부화한 가금(家禽)의 새끼를 키우는 일]가 양계에서 가장 어려운 사업이었다. 

▲ 1969년에 발간된 육추일지 표지

『육추일지』 발간비용은 부화장과 동물약품, 사료회사로부터 광고 찬조금을 받아 제작을 하고 제작된 육추일지 책은 광고찬조를 해준 부화장, 약품회사, 사료회사에 광고료의 반액에 해당하는 책을 배부해 주고 병아리, 약품, 사료를 사가는 양계가에게는『육추일지』를 무료 배부하여 육추사업의 기술보급을 도와주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육추일지』 책 발간은 봄·가을 2회에 걸쳐 발행하는데 광고수입은 『육추일지』 제작비를 제하고도 상당금액의 잉여금이 발생하여 협회 운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육추일지』의 제작권을 가진 나는 저자에게 주는 원고료나 인세는 받지않기로 하고 협회 찬조금으로 사용토록 하였다. 

협회사업으로 돈이 되는 사업을 찾아 협회 운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은 협회 활성화에 밑거름이 된다고 생각되었다. 또한 『육추일지』 발행사업의 경험이 후일 『월간양계』 발간에 큰 도움과 산 경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