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Inside - 오봉국(본회 고문, 본지 초대 발행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Published : 2013.04.01

Abstract

Keywords

서울대 농과대학 축산학과를 졸업하여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가금학 석사를 마친 뒤 1957년 귀국길에 미국산 종계와 종란을 도입한 오봉국 고문. 그때 만 해도 6.25동란 직후라 메마른 땅에 풀 한포기가 귀해 의식주 해결이 가장 우선이었을 시기였고, 단백질의 근원인 닭과 계란을 들여와 가축 복구사업을 시작했다. 미국 유학을 통해 배운 가금 전문지식을 보급하기 위해 대학교 교단에서는 후학양성에 힘썼고, 산업적으로는 <양계강습회>를 실시해 양계생산농가에게 사양·기술을 전하며 국내 양계 발전을 이끌어왔다. 양계강습회가 시초가 되어 본회의 전신인 <(사)한국가금협회>를 탄생시킨 장본인. 멸종위기에 놓여있던 우리나라 <재래닭 복원>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올해로 미수( 미수(米壽))를 맞는 오봉국 고문을 정자동 어느 조용한 곳에서 만나 그간 활동 사항과 한국의 양계역사에 대해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가금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대학시절 한 친구는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내 이름을 듣고 “새봉자 봉(鳳)자에 나라 국(國) 한국의 닭(家禽學)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듯 닭과 나는 내 이름에 의한 숙명적인 인연으로 맺어진 관계”라며 인터뷰를 시작한다. 6.25동란 직후 서울대학 축산학과를 졸업하면서 학문의 길에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교로 남게 되었다. 대학원에 진학해 가축육종학에 흥미를 가지고 공부하면서 타가축에 비해 세대간격이 짧고 많은 자손을 얻을 수 있는 닭을 연구재료로 사용하며 석사학위논문을 쓰게 된 것이 가금학을 전공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1957년 미국 미네소타대학교에서 가금육종학 석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내 나라의 가금산업 발전을 위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6.25동란으로 산업은 폐허화된 상황에서 우리나라 닭 개량을 위하여 우수한 원종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당시 미네소타 대학에서 개량한 근교계통원종계 백색레그혼종, 뉴햄프셔종, 백색플리모스록종 등 3품종을 미네소타대학 가금학과 학과장과 지도교수의 특별한 배려와 미국 경제원조기관인 ICA후원에 의하여 서울대학교 농과학실험목장으로 종란 1,300개를 도입하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울대학교 농과대학과 축산시험장에 실용계 F1을 만드는 공동연구가 시작되었고 이 연구가 성공하여 농가용 채란계를 보급하게 되었다. 40년간 대학에서 가금학을 연구하며 후학양성에 힘썼고, 1991년도 만 65세의 나이에 대학에서 정년퇴임 후 본회 상임고문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유학 후 생산자를 위한 장안동 양계강습회가 발단이 되어 한국가금협회가 출범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6.25동란으로 폐허가 된 우리나라 땅에 희망의 바람을 불어넣을 소재가 필요로 했다. 축산업에서는 대가축인 소나 돼지보다 닭을 사육하기에 용이했기도 했고, 서서히 전문 양계농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59년이 되던 해 서울 장안동에서 당시 부화장을 경영하고 있던 한 분이 찾아와 서울 장안동 근교에 양계농가 15여명이 양계친목회를 조직하고 새로운 양계 기술과 지식을 얻고자 하니 매달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했었다. 학계에서 습득한 가금지식을 어떻게 하면 생산자에게 지식을 나눠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선뜻 응했다. 새로운 양계이론과 기술을 보급하기 위해 장안초등학교 교실 하나를 빌려 시작했다. 서울대 나온 농과대학 교수가 미국 유학까지 다녀와 무료로 양계강습을 하더라고 입소문을 타면서 서울시 축협 강당으로 옮겨 강습할 정도로 규모가 커진 <양계강습회>는 유일했던 양계생산자의 배움터가 된 것이다. 양계업자 뿐만 아니라 학계와 동물약품회사, 사료회사 임직원들도 많이 참석했고, 꾸준히 유지되면서 장안동 양계인을 중심으로 조직을 만드는 것이 어떨지 설득했다. 단순히 모임이 아닌 협회를 형성해 당신들의 권익보호를 하고 보다 체계적인 계란 유통을 하면 좋지 않을까. 이리하여 <장안동 양계강습회>를 시초로 강습이 2년간 진행되면서 가금연구회 회원이 중심이 되고 부화, 종계업을 하는 중견인사와 각 지역 양계인들이 모여 <(사)한국가금협회> 창립준비에 착수하게 되었다. 1962년 서울시 축협회의실에서 한국가금협회 창립 발기인대회를 가졌고 그 해 말 서울우유협동조합 회의실에서 창립총회를 가지고 <(사)한국가금협회>가 탄생되었다. <(사)한국가금협회>는 양계산업의 발전과 업계의 지위향상 및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학계와 업계가 단합하여 창립된 협회인 만큼 산학협동의 좋은 예가 되었다.

설립 후 초기 협회운영에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협회 운영 경비를 보태기 위해 협회사업으로 <육추일지>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발간비용은 부화장과 동물약품, 사료회사로부터 광고찬조금을 받아 제작하고 제작된 육추일지는 부화장, 약품회사, 사료회사에 배부하고 병아리, 약품, 사료를 사가는 양계농가에게 무료 배부하여 육추사업의 기술보급을 도와주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봄·가을 2회에 걸쳐 발행했고 광고수입은 제작비를 제하고도 잉여금이 발생하여 협회 운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후 육추일지 발행사업의 경험이 후일 월간양계 발간에 큰 도움과 산 경험이 되었다. 육추일지 발간에서 배운 광고찬조로 업체에 대하여는 광고찬조금에 해당하는 수량을 잡지를 주면 찬조업체에서는 자기 회사 물건을 사가는 양계농가에게 무료로 잡지를 배부한다면 농가는 월간양계를 무료로 보게 되고 보급도 빨리 될 것이라는 말에 발 벗고 다녔고 개인적 친분이나 체면 때문에 광고청탁을 받아준 회사가 있었고 그 당시 협회 설립에 애착에 있었던 여러분의 협조가 합작되어 월간양계가 탄생된 것이다.

▲ 국내에서 처음 발행된 닭 육추일지

양계인의 구심점이 된 양계박람회가 축산박람회로 발전되기까지... 

65세가 되던 1991년 해에 교수 정년퇴임을 앞두고 (사)대한양계협회 상임고문와서 협회 일을 도와달라는 부탁이 있다. 협회는 창립에서부터 직·간접적으로 깊은 인연을 맺고 지내온 처지로 한평생 양계 학문을 연구하고 교육해 온 입장에서 앞으로 양계산업분야에서 봉사하는 것이 보람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지금의 대한양계협회 서초동 사무실 안에 보면 자료실 옆방 일명, 고문실로 매일 출근하다시피 나왔다. 상임고문으로 와서 보니 협회는 모든 양계인들의 구심체가 되어야 하고 양계산업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제시하며 앞으로 산업이 지향해야할 방향제시를 해주는 것이 협회의 사명이라면 협회와 양계인들이 하나가 되는 어떤 계기를 마련하는 일이 중요하다 생각되었다. 많은 분들의 도움과 협조로 1991년 10월에 3일간 축산분야에서는 처음으로 <’91한국양계박람회>를 개최했다. 양계분야의 각종 축사시설, 기구, 기계, 재래닭 전시 등 전시행사와 요리솜씨대회, 양계산물의 우수성 홍보행사, 양계인대회와 우수양계인 선발 시상, 세미나 등 다채롭게 마련된 행사가 되었다. 이후 1999년도부터는 한국양계박람회가 전 축산업계가 참여하는 한국국제축산박람회로 확대되어 제1회 추진위원장으로써 위촉되기도 했다.

① ’93한국양계박람회 

② ’99한국국제축산박람회

우리나라 재래닭 복원사업? 

 1990년 초에 개량 가축을 도입하면서 생산성이 낮은 재래종은 점차 개량종으로 대치되기 시작했다. 1945년 8.15해방과 1950년 6.25사변 등 사회적으로 큰 혼란기를 맞으면서 가축의 사육수는 크게 감소되었고 미국을 비롯한 UN원조기관에서 개량종 가축을 원조사업 일환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점차 우리 국민의 기호에 맞는 개량종으로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되면서 재래닭이 어떠한 형태인지? 그리고 남아는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적어도 우리나라가 오천년의 긴 역사와 함께 나라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때부터 기르던 재래닭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허신행 농림부 장관을 찾아가 <재래닭 고품질 육용화 연구사업>의 일환으로 종축원과 축산시험장, 가축위생연구소, 각 대학교수들의 협력이 더해져 1994년에서 1997년까지 4년간의 연구비를 4억여원을 지원받았고, 총액 약 8억 2천만원이 소요되었다. 그 당시 재래닭의 특질을 지닌 닭을 수집하기 위해 외국 개량종이 미치지 못한 두메산골 오지를 돌아다녔고, 재래닭 기초계군을 만들어 개량종의 피를 갖지 않은 닭을 선발한 후 외모특징에 따라 적갈색, 황갈색, 흑색, 백색 등 4가지 개통을 만들고 복원했다.

▲ 재래닭 복원

협회나 농가에 당부사항이 있다면?

국내 양계산업은 이미 현대화, 선진화 단계에 진입했다. 육계업은 계열화체제로 되어 대기업-농가와의 계약조건을 통해 사육-납품-가공 단계가 체계적으로 자리잡혀있다. 채란업은 계열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현대화된 양계시설과 경영시스템으로 우수한 생산성을 나타내고 있다. 한 가지 문제점을 꼽으라면 축사시설현대화사업으로 급속도로 농장시설투자에 집중되면서 3년마다 egg-cycle이 찾아올때마다 불황에 대한 대비책이 없다는 것. 난가 폭락으로 불황이 올 때마다 생업으로 경영하는 2만수 미만의 소규모 양계농가가 기술과 자금력이 부족으로 도태·도산되고 있고 그에 따른 대책이 마련되지 않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편, 경제가 위축되다보니 소비는 크게 늘지 않고 상대적으로 사육수수는 늘어나고 있다. 불투명한 축산업을 조화롭게 해결하기 위한 방향 모색이 협회와 양계업자들이 심각히 고민해야할 부분이다. 대외시장 개방화, 불안한 미국사료 곡물 작황시장 등 여러모로 생산 사육 환경요건이 불리한 상황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양계농가는 각자 처해 있는 상황을 파악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할 것이고, 협회 차원에서는 양계업이 헤쳐나가야 할 방향 제시로 농가 계도에 힘쓰는 것이 앞으로 주요 사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