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the Korean Empire

검색결과 247건 처리시간 0.028초

일제의 공문서 폐기 시론 -국가기록원 소장 조선총독부 기록의 잔존성을 중심으로- (A discourse on The Japanese Empire's destruction of official records : Focusing on the persistence of the records of Government-General of Chosen held by the National Archives of Korea)

  • 이경용
    • 기록학연구
    • /
    • 제67호
    • /
    • pp.205-236
    • /
    • 2021
  • 이 논문은 남겨진 조선총독부 기록의 잔존성을 중심으로 전시체제기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실행된 '의도된' 기록 폐기 문제를 검토하였다. 일제 내각에서의 결정이 일본 본토와 식민지 등 제국 전역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공문서를 대상으로 실행된 역사적 개연성을 보다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으며, 1930년대 후반 이후 아시아·태평양 전쟁으로 확전되고 전황이 악화되는 상황을 배경으로 공문서 감축과 정리, 종이자원의 재활용 등 이미 기록 폐기를 위한 시스템이 준비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또한, 조선총독부 기밀문서취급규정과 경찰서 처무규정 검토를 통해서 총동원계획과 관련한 기밀(비밀) 문서, 고등경찰 업무와 관련한 다양한 비밀문서의 존재, 그리고 이러한 비밀문서 중 상당수가 영구 또는 10년 이상 보존 기록에 해당된 사실도 확인하였다. 동시에 처무규정상 남아 있어야 할 문서현황이나 보존현황을 알 수 있는 각종 대장(부책)이 단 한 책도 존재하지 않는 현상을 밝히고 이를 패전 직후 조선총독부의 대대적인 공문서 폐기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통감부의 기록장악과 조선침략 (Control of Records by the Residency-General and Japanese Invasion of Joseon)

  • 이영학
    • 기록학연구
    • /
    • 제41호
    • /
    • pp.213-260
    • /
    • 2014
  • 이 논문은 일제가 1905년 12월에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관제를 개편하고 기록을 장악해가면서 조선을 침탈해가는 과정을 고찰한 글이다. 일제는 1906년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조선의 내정권을 강화해 간 후에 관제를 개편하면서 조선의 관료제를 동원하여 조선의 실상을 파악해갔다. 관제의 개편을 통하여 현용기록과 비현용기록을 관리함으로써 조선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를 바탕으로 조선의 침략을 원활히 수행해갔던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규장각의 기록을 정리함으로써 역사기록을 파악하고, 정부의 현용기록을 장악하면서 조선 내부의 취약적인 부분을 간취하고, 다른 한편으로 '시정개선(施政改善)'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개혁을 빙자하면서 조선을 침략해들어왔던 것이다. 실제의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궁내부 규장각을 장악하여 규장각에 소장하고 있었던 역사기록을 정리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2년에 걸쳐 조사사업을 수행하고 대한제국의 역사기록을 정리함으로써 조선의 역사적 흐름과 그 핵심을 파악하였다. 둘째 정부의 준현용 기록을 수집 정리하였다. 그것이 본격화한 것은 1910년 8월에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였다. 대한제국의 멸망 후 정부기록을 조선총독부 취조국에서 이관받아 정리하여 조선의 상황을 파악하고 장악해갔다. 셋째 정부와 황실 재산에 관한 문건을 대대적으로 정리하여, 황실재산 중 일부를 제외하고 국유재산으로 환원시켰다.

현대(現代) 패션에 나타난 고저스(Gorgeous) 이미지에 관(關)한 연구(硏究) - 중세(中世) 비잔틴 시대(時代)의 이미지를 중심(中心)으로 - (A Study of Gorgeous Images in Modern Fashion - Focus on Byzantine Empire in the Middle Ages -)

  • 정윤희
    • 패션비즈니스
    • /
    • 제6권5호
    • /
    • pp.48-58
    • /
    • 2002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four separate elements-sublime beauty, elegant beauty, mysticism, ornament-which appeared in materials, patterns, colors, silhouettes, details, and accessories, laying stress on luxurious, brilliant, mysterious feelings on Gorgeous Images appeared as trend theme of modern fashion by mixing religious mysticism of the Byzantine Empire. Mysticism element is using the effect of splendid and gorgeous colors from the Orient rather than forms. And a philosophy of abundant colors in mosaics, which are seen in art forms such as architecture, paintings, etc., shows that it creates some visual rooms for religious spirits. Influenced by the fashion of the Greco-Roman style, the elegant beauty element is expressing abundant comfort and elegant feminine lines that are from creases, and it is also emphasizing natural beauty which seems to slip down by displaying the splendid images of Gorgeous as drapes that fit a body. Ornament element was reflecting an inspiration from the splendid and brilliant culture of religion in the Byzantine Age. Therefore, it was appeared as a style filling the whole with bulky silks, splendid ornamental materials embroidered in gold or silver thread, the complicated geometric patterns that are two-dimensional and dignified, and so on. It was decorated with crosses which represent Christianity as a motif, and also it emphasized the splendor of the Byzantine and dazzling splendid images of Gorgeous by using accessaries decorated with various jewels. The elements of sublime beauty are showing the beauty adding humble and majestic images to it as designs sought by spiritual values or intrinsic values. Those designs, so to speak, have pretense which does not allow to expose a body and plain pure feeling, so that they are showing some abstinent styles in a solemn atmosphere, with most details removed. We can say the Fashion Theme appearing in Modern Times is the result from representing by combining various factors of the times with formative beauty through creative works for aesthetic expression. The moderners are requiring new designs which is possible to meet their individualities, in addition to their outstanding fashion senses. From this point of view, a variety of textiles, patterns, and colors in the Byzantine have a great meaning to fulfill people's various desires as interesting elements.

숭의묘 건립과 숭의묘 제례악 (Soongeuimyo 崇義廟 Establishment and Soongeuimyo Jeryeak 祭禮樂)

  • 이정희
    • 공연문화연구
    • /
    • 제19호
    • /
    • pp.317-346
    • /
    • 2009
  • 숭의묘는 유비를 주향으로 하고 관우와 장비를 배향한 것 외에도 제갈량·조운·마초·황충·왕보·주창·조루·관평 이상 8인을 종향한 사당이다. 배향 인물 중 관우가 포함되어 있어 관왕묘의 하나로 인식되고 논의되었다. 이는 기존에 있던 관왕묘인 동묘, 남묘, 북묘에 이어 '서묘(西廟)'라고도 불린 명칭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관우라는 인물을 모셨다는 공통분모 때문에 관왕묘와 숭의묘의 관련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숭의묘는 관왕묘와 차별되는 면모가 있다. 숭의묘는 배향인물의 측면에서 관왕묘보다 격이 높았고 아악·아악악현·육일무가 수반되어 사용되는 악무(樂舞)의 종류가 현격히 달랐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 1904년 4월 27일에 첫 봉안의식이 행해진 후 1908년 7월에 폐지되기까지 숭의묘제례가 행해진 기간은 불과 4년 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덜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숭의묘 터를 조선총독부에서 고아원과 맹아원으로 사용해 버리는 바람에 그 묘역까지 철저히 훼손되어 숭의묘의 기억을 되돌릴 공간마저 잃어버렸다. 그러나 숭의묘제례는 조선의 전통적인 제례용 악무(樂舞)의 형태를 두루 갖추어 중사(中祀)격으로 행례된 중요한 국가제례의 하나였다. 또한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후 대한제국의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강병책의 일환으로 구상된 제례로, 칭제(稱帝) 이후 환구제례와 더불어 새롭게 만들어졌으며, 대한제국 최후의 국가사전이라는 측면에서 큰 의의가 있다.

대한제국기 내장원의 위상 변화와 공문서 접수 (Receipt of Official Documents after the Status Change of the Office of Crown Properties in The Great Han Empire)

  • 박성준
    • 기록학연구
    • /
    • 제36호
    • /
    • pp.35-67
    • /
    • 2013
  • 대한제국기 내장원이 각종 국가 재원을 관할한 거대 재정기구로 확대되면서 공문서 양식도 변화되었다. 초기와 달리 1900년 2월부터 판심에는 궁내부가 삭제된 '내장원(內藏院)'이 찍힌 공문서 용지를 사용했다. 내장원경의 도장에 새겨진 명칭도 '내장원경지장(內藏院卿之章)'으로 변경되었다. 내장원이 거대 재정기구로 확대되면서 위상도 독자성을 갖는 기구로 높아졌던 것이며, 그 양상이 공문서 양식에도 반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문서 유통 체계에서도 나타났다. 1897년까지 내장원이 각 군으로부터 받은 보고의 수신자는 대부분 궁내부대신이었으나 1899년부터는 수신자가 내장원인 보고서가 대부분이었다. 1899년 8월 이전에는 내장원이 각 군에 훈령을 내릴 수 없었으나, 1899년 8월 이후부터 내장원은 각 군에 훈령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 내장원은 중앙기관과 대등한 위치에서 문서를 거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00년 9월부터 내장원은 중앙기관과 대등한 위치에서, 지방 기관과는 상급 기관으로서 문서를 거래하게 되었고, 내장원에는 기록과가 설치되었다. 내장원은 궁내부 소속의 하급 기관에서 벗어나 독립된 기관으로서 각 기관과 문서를 거래하게 되었다. 1900년 9월 기록과가 설치된 이후부터 내장원은 독자적으로 문서 접수책을 작성했다. 1901년도 접수책과 1905 1906년도 접수책을 비교해 보면 1905년도 접수책부터 접수 호수가 등장하고 일부에서는 해당 문서의 담당 기관이 기록되었다. 1902년부터 1904년까지의 접수책이 없어 접수책에 언제부터 접수 호수가 기록되었는지 접수책을 통해서는 알 수 없지만, 1905년도 접수책에 기록된 접수 호수와 일자가 접수스탬프에 기입된 내용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접수 호수가 기록된 시점은 접수스탬프를 찍기 시작한 1902년 7월 전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접수스탬프와 달리 접수책에는 업무 담당 기관인 과(課)가 먼저 기록되었다. 이는 내장원이 접수책을 과를 구분해서 작성했던 방식에서 과를 통합하여 작성하는 방식으로 전환했기 때문이었다. 내장원은 과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접수책에 접수한 순서대로 문서를 기록하면서 각 문서에 연속된 접수 호수를 부여하고, 해당 문서의 업무 담당 기관을 구분하기 위해 접수책 하단에 과를 기록했던 것이다. 1900년 9월 기록과가 설치된 이후 독자적으로 문서를 수발하게 된 내장원은 접수한 문서에 도장 '내장원영수증(內藏院領收證)'을 찍고, 문서접수 장부를 작성했다. 내장원은 과를 구분해서 접수책을 작성했던 초기의 방식에서 과를 통합해 하나의 접수책에 작성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접수책에는 접수 호수와 업무 담당 기관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접수한 문서에는 접수일자 호수로 구성된 접수스탬프를 찍어 점차 접수 체계가 정비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대한제국기 내장원의 공문서 편철과 분류 (The Classification and filing of the Official Documents of the Office of Crown Properties in the Great Han Empire)

  • 박성준
    • 기록학연구
    • /
    • 제28호
    • /
    • pp.3-33
    • /
    • 2011
  • 내장원은 1895년 4월 궁내부 소속 기관으로 왕실의 보물 및 세전장원(世傳莊園)과 기타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성립되고 황제권을 강화하는 정책이 시행되면서 내장원은 역둔토(驛屯土) 해세(海稅) 인삼(人蔘) 광산(?山) 등 각종 재원을 관할하며 거대 재정기구로 확대되었다. 내장원의 관할 재원이 증대됨에 따라 하급기관도 증가해 장원과(莊園課), 종목과(種牧課), 삼정과(蔘政課) 등이 설치되었다. 내장원은 각종 재원을 관리하면서 각부부원청(各府部院廳) 지방기관 민들과 거래한 다양한 문서를 1단계로 과(課)를 단위로 분류하였다. 내장원의 대표적 문서철인 "훈령조회존안(訓令照會存案)", 13도 각군 보고 소장, "각부군래첩(各府郡來牒)"은 장원과, "내장원경리원각도각군보고존안(內藏院經理院各道各郡報告存案)", "훈령존안(訓令存案)"은 종목과, "통첩편안(通牒編案)", "궁내부훈령편안(宮內府訓令編案)"은 지응과에서 처리한 문서철이었다. 이들 문서철은 같은 시기에 내장원에서 처리한 문서들이지만, 각 문서철의 문서의 내용은 중복되지 않았다. 이는 내장원에서 과를 단위로 문서를 분류하여 편철하였기 때문이다. 내장원은 과 단위로 문서를 분류한 다음 문서의 수발신 여부를 문서의 편철 기준으로 삼았다. 내장원은 한 종류의 문서만을 편철한 경우도 있었지만, 다른 종류의 문서를 함께 편철하기도 했다. 문서 종류는 문서 명칭을 통해 문서 성격과 거래 기관간의 위계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문서의 등급이 다른 조회와 훈령, 조회와 보고 같은 문서를 함께 편철했다는 것은 거래 기관의 위계가 문서 편철의 1차 기준은 아니었다는 것이고, 이는 문서 종류별로 문서를 편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장원은 서로 연관된 문서를 조응해서 편철하지도 않았다. 조회는 대등한 관리에게 보내는 문서이며, 이에 대해 답신하는 문서가 조복이다. 조회 조복은 각각 동일한 사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거래한 서로 조응하는 문서이다. 그러나 장원과와 종목과 모두 조회 조복을 따로 분리해서 각각 편철하였다. 문서 종류가 다른 훈령과 조회를 함께 편철하고, 서로 조응하는 조회 조복을 따로 분리하여 편철한 것은 해당 문서가 수신 문서인지, 발신 문서인지 문서의 수발신 여부를 편철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수발신 문서를 구분한 다음, 한 책 단위로 문서를 편철할 때는 지역이나 기관의 구분 없이 문서시기를 기준으로 삼았다. 거래 기관이나 지역의 구분 없이 편철된 다른 문서철과는 달리 1900년부터 13도 각군 보고 소장은 도를 단위로 구분한 다음 각 책을 문서 시기별로 구분하여 편철하였다. 13도 각군 보고 소장에 지역별 구분이 적용된 것은 내장원의 관할 재원이 증대되면서 지방과 맺는 관계 또한 확대되었기 때문에, 이들과 거래한 문서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도를 단위로 지역을 구분한 다음 문서 시기별로 문서를 나누어 편철하였던 것이다. 내장원은 1차적으로 과를 단위로 문서를 분류한 다음, 수발신을 기준으로 문서를 구분하고, 각 문서철은 문서시기를 단위로 편철하는 공문서 편철과 분류체계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20세기 조선 왕실 처방집 『어용탕제책(御用湯劑冊)』 연구 (A Study on the 20th Century Joseon Dynasty Royal Prescription Book, 『Eoyong Tangjechaeg(御用湯劑冊)』)

  • 최성운;황지혜;장재립;김남일
    • 한국의사학회지
    • /
    • 제33권2호
    • /
    • pp.23-36
    • /
    • 2020
  • In this paper, we look at the basic bibliographic details, such as the publication period, of the 20th century Joseon dynasty royal prescription book, Eoyong Tangjechaeg (御用湯劑冊). Through the process of searching for the royal family members who were given the prescriptions from the royal prescription book, as well as the doctors who gave the prescription, we aim to study its purpose as well as its value in terms of medical history. By studying this piece of medical literature, we will be able to shed light on the Joseon dynasty's royal Korean medicine practices as it passed through the turbulence of history during times such as the Korean Empire (1897-1910) and the Japanese colonial era (1910-1945). We illustrate the changes that took place in royal Korean medicine at the time, and also consider the trends of royal prescriptions as well as their significance from a Korean medicinal standpoint.

The Impact of the United States Fashion on Korean Fashion in 20th Century

  • Oh, Keunyoung;Choi, Jeongwook
    • 패션비즈니스
    • /
    • 제21권3호
    • /
    • pp.80-92
    • /
    • 2017
  • Fashion trend is more than a social phenomenon that multitudes of people accept as popular styles of clothing.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understand the influence of fashion trend over time and distance. Geographically thousands of miles apart, the U.S. has strongly influenced fashion in Korea, revealed by references and historic depictions collected from literature and web sites. Results of the study are summarized as five issues: First, emergence of female missionaries from the U.S. American missionaries working in the late Great Korean Empire performed a significant role importing Western culture to Korea. Second, as opportunities of education increased, women studying abroad introduced Western fashion to Koreans when they returned to Korea. They were more open to Western culture than other Koreans and moderately harmonized their Korean sentiment and Western culture, mitigating cultural shock and enabled other Koreans to accept Western culture. Third, the effect of fashionistas on media. Singers working for U.S. armies stationed in Korea and movie stars appearing in Hollywood movies profoundly affected Korean pop culture and fashion trends in Korea. Fourth, following First Lady Jacqueline Kennedy of the U.S. She was an influential figure in those days and a fashion leader as well. Lastly, acceptance of working girl fashion depicted in American television shows. American working girls depicted on American TV shows were highly admired by young Korean women, so the fashion of American working girls became a major fad among young Korean women.

A Study on the Significance of Acupuncture and Pharmacopuncture Therapy for Cold Accumulation Through a Literature Review on the Historical Development Process in Cold Accumulation Treatment

  • Jin-Ho, Jeong;Jaseung, Ku;Ji Hye, Hwang
    • Journal of Acupuncture Research
    • /
    • 제39권4호
    • /
    • pp.267-274
    • /
    • 2022
  • In order to secure clinical evidence for the treatment of cold accumulation (CA), this study reviewed and analyzed 91 records of literature and related records. To perform a classical literature search, the Oriental Medicine Classic databases and the Uibujeonrok electronic data were searched. Books on Immunopharmacopuncture (IP) were also reviewed. A common etiology for CA was attributed to the abdomen, while the detailed sites of the abdomen differed. In IP, CA had a more comprehensive list of symptoms of physiological and pathological significance. As for the treatment of CA, typically, herbal medicine was used until the end of the Korean Empire period, and moxibustion treatment on CV4, CV6, CV-12, ST36, EX-B4, and conduction exercise therapy were also reported. Since 1965, acupuncture needle-based invasive treatment such as acupuncture for CA, and IP have been described in IP theory. Consequently, the treatment of CA (as described in the IP theory), was considered to be a more advanced method of treatment compared with the existing classical treatment methods.

서병효(徐丙孝) 연구에 대한 예비적 고찰 (A Preliminary Study of Seo Byung-Hyo)

  • 박훈평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 /
    • 제33권3호
    • /
    • pp.49-61
    • /
    • 2020
  • Objectives :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ollect basic data about Seo, Byung-Hyo and lay the groundwork for future analysis of his medical ideas. Methods : The life of Seo in regards to family and relationships was reconstructed through his genealogy and newspaper articles. His medical ideas were analyzed through the treatment records in books and historical material. Results : 1. Seo was primarily a clinician rather than a social worker throughout the Korean Empire and Japanese colonial era. 2. 『Summary of Experienced Old Prescriptions (經驗古方要抄)』 was a concise book that mainly took after the 『New Edition on Universal Relief (濟衆新編)』, supplemented by contents from the 『DongUiBogam(Treasured Mirror of Eastern Medicine)』. 3. It is meaningful that Seo's book restored and developed the single-ingredient prescription tradition of the 『DongUiBogam(Treasured Mirror of Eastern Medicine)』. 4. Seo faithfully followed the tradition of royal court medicine and utilized new prescriptions that were proven effective. Analysis of the prescription contents of 『A royal palace's diary(內殿日記)』 displays such characteristic. Conclusions : Seo, Byung-Hyo could be regarded as a clinician who faithfully inherited and developed 『DongUiBogam(Treasured Mirror of Eastern Medicine)』 and 『New Edition on Universal Relief (濟衆新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