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the Goryo royal to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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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고려왕릉의 석물 연구 (A Study on Stone Figures of the Goryo Royal Tomb Placed in Ganghwado)

  • 한나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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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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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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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고려왕릉은 대부분 개성에 위치하여 실견할 수 없다는 현실적 제약 때문에 연구가 미흡하였다. 또한 왕릉의 구조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석물에 대한 연구도 통일신라 및 조선시대에 국한되어 왔다. 이에 본고에서는 강화도 소재 고려왕릉 5기를 대상으로 축조배경과 현황, 석실구조를 살펴본 다음, 강도시기 왕릉관련 석물의 구조적 도상적 특징을 정리해 보았다. 그 결과 강도시기 석물의 특징으로는 구조의 간소화와 규모의 축소를 들 수 있다. 난간석 및 병풍석 등의 시설은 구조적으로 간소화되고 석인상의 크기는 이후 시기에 비해 두드러지게 작다. 또한 도상에 있어서도 석양의 채용 등 일정한 변화가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한 강도시기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말기 괘불(掛佛)의 새로운 도상(圖像) 전개 (The evolvement of new composition of painting in Gwaebul (Buddhist Ceremonial Painting) at late Joseon dynasty)

  • 이은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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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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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3-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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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조선시대 말기인 1885년에서 1926년에 조성된 괘불은 18점이 현존하고 있는데, 그 중 12점이 서울 경기지역 사찰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초기의 능침사찰(陵寢寺刹)과 원찰(願刹)은 왕실의 후원을 받았으나 태종의 오교양종(五敎兩宗)의 혁파로 인해 불교의례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사찰도 피폐해졌다. 그러나 18세기 말부터 다시 왕실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존속해온 사찰은 다시 번창하게 되었다. 국내 외의 사회적인 혼란했던 이 시기는 국가 및 왕실의 안녕을 빌고 망자(亡者)의 극락왕생을 위한 대중적인 사상이 괘불에서는 새로운 경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괘불에 보이는 새로운 도상은 1853년 남호당 영기(南湖堂 永奇)(1820~1872)가 삼각산 내원암에서 판각 간행한 ${\ll}$아미타요해경(阿彌陀要解經)${\gg}$ 권수 판화에 그려진 아미타삼존도로부터 시작된다. 고려 말에 유행한 수월관음도의 재등장은 망자추선(亡者追善)과 제난구제(諸難救濟)의 역할과 허응당 보우의 〈수월도장공화불사여환빈주몽중문답(水月道場空華佛事如幻賓主夢中問答)〉이라는 도량의식의 '수월도양공화불사(水月道揚空華佛事)'의 허상과 망상이라는 도량의식,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만일회의 성행 등이 괘불 도상과 연관되면서 새로운 도상 출현은 조선 말기 괘불에 새로운 이슈로 나타난다는 점이 주목된다. 괘불의 화풍도 진하고 탁하고 채색과 음영법, 초본을 여러 번 활용한 동일한 도상에서 중앙집권적화된 화사계보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도 이 시기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고려 음각 '○'문과 '⊙'문청자의 연구 (A Study on Goryo Celadons of intaglio '○' pattern and '⊙'pattern)

  • 한성욱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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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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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3-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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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문과 '⊙'문청자는 굽안바닥 중앙에 부호를 새긴 것으로 제작자(공방)를 표기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청자가 생산된 곳은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8.23.27호 가마터인데 'e'문청자는 23호와 27호에서만 확인되고 있어 그 생산지가 더욱 한정적이다. 기종은 완과 대접, 접시, 잔, 병, 합, 퇴주기 등이 확인되는데 접시가 수량도 많고 기형도 다양하다. 이들 청자는 대부분 전성기 청자의 문양과 같은 도범을 이용한 압출양각 기법으로 시문하고 있는데, 이는 문양과 크기 등 장식의장을 균일하게 유지할 수 있는 제작방법으로 양질청자를 생산하는데 적합한 방법이다. 또한 이 시기 상감기법이 보편화되지 않았으며, 압출양각 기법을 이용하여 유사한 청자를 다량 생산하여 공급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 청자는 내화토 비짐이 일부 있으나 대부분 전면 시유 후 U자형 굽의 안바닥에 규석을 받쳐 갑번하였다. 이들 청자는 강화 희종 석릉과 파주 혜음원지, 일본 겸창시 약궁대로 무가 가옥 출토품 등을 통해 1230년대를 중심으로 한 13세기 2/4분기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 청자는 비색청자를 대부분 12세기로 편년하면서 오는 13세기 청자의 공백을 메워줄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자료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몽고에 의한 외세의 충격이 있었으나 중앙통제가 원활하게 이루어져 비색청자가 계속 생산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또한 강화의 갑곶리와 관청리, 행궁의 역할을 하였던 성주 혜음원, 지방의 대찰이었던 경주불국사와 남원 실상사, 대구소와 인접한 장흥의 유력층 유적 등에서 출토되고 있어 상류층을 위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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