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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김응환의 봉명사경과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 (Kim Eung-hwan's Official Excursion for Drawing Scenic Spots in 1788 and his Album of Complete Views of Seas and Mountains)

  • 오다연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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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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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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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은 금강산과 해금강, 관동팔경을 그린 60점의 실경산수화와 51편의 기문(記文)으로 이루어진 화첩으로 규모와 화풍에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그림의 특징은 화면을 가득 채운 구성과 남종화풍을 따르면서도 거칠고 파격적인 화법, 산석(山石)의 기하학적이고 입체적인 표현 등이다. 1973년의 특별전, '한국미술이천년(韓國美術二千年)'을 처음으로 화첩의 일부만 공개되었던 작품은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에서 그 전모가 공개되었다. 《해악전도첩》이 김응환(金應煥)(1742~1789)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화첩의 마지막 장에 쓰여진 관지(款識)와 현재 행방이 묘연한 <칠보대>에 찍힌 '복헌'이라는 도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응환을 지시하는 관지와 도장은 모두 후대에 더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본 연구는 화첩을 둘러싼 여러 요소를 고찰하여 제작자를 재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해악전도첩》 제작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18세기 금강산 기행사경도의 전통과 봉명사경을 살펴보았다. 정선(鄭敾)(1676~1759)의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1711)을 비롯하여 심사정(沈師正)(1707~1769), 김윤겸(金允謙)(1711~1775), 최북(崔北)(1712~1786 이후), 강세황(姜世晃)(1713~1791) 등은 조선 후기 최고의 여행지였던 금강산을 유람하고 기행사경도를 제작하였다. 화가들은 이전의 전통을 계승하여 내금강의 명승명소를 주로 그렸고, 자신들이 경험한 장소를 새롭게 시각화하였다. 이러한 기행사경도는 여행을 기념하며 동행자나 후원자를 위해 여러 장면을 담을 수 있는 화첩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개별적인 금강산 기행사 경도의 제작이 증가하는 가운데 1788년에 정조(正祖)(재위 1776~1800)가 도화서 화원인 김응환과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에게 영동9군과 금강산의 명승(名勝)을 그려오도록 명한 일은 공적 업무였다. 정조는 이들의 관계 및 지방관으로서의 경력, 서로 다른 화풍 등을 고려해 봉명사경의 화원으로 선발하였다. 김응환과 김홍도는 영조(英祖)(재위 1724~1776)조부터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하며 선후배이자 동료로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나아가 이들은 영남 지역의 찰방(察訪)으로서 지방관의 업무를 수행한 경험이 있었다. 두 화원의 화풍은 서로 달라 김홍도는 부드럽고도 섬세하게 필선을 운용한 반면, 김응환은 굳세면서도 울창한 풍치를 잘 표현했다. 두 명의 화원은 각자의 개성으로 봉명사경 기간 동안 100여 폭의 초본을 그렸고, 이를 선별하여 60~70여 폭의 화첩 혹은 두루마리를 완성하였다. 이들의 그림은 18세기 전중반에 내금강과 관동팔경 위주로 제작된 금강산 기행사경도의 전통을 더욱 풍부하게 했고 영동과 외금강의 명승명소를 새롭게 발견하며 소재를 확장시켰다. 현재 《해악전도첩》은 원(元), 형(亨), 이(利), 정(貞) 4책으로 이루어졌는데, 원(元), 형(亨)책은 내금강의 그림 29점이며 이(利)책은 외금강의 장면 17점, 정(貞)책은 해금강과 관동팔경 14점으로 구성되었다. 비단 위에 그려진 각 그림은 기하학적으로 산석을 표현했으며, 연백으로 금강산의 암봉을 흰색 혹은 회청색으로 표현했다. 《해악전도첩》의 구도와 화법은 정선, 강세황, 심사정, 정충엽(鄭忠燁)(1725~1800 이후), 김응환, 김홍도의 화법과 비교할 수 있어 18세기 후반의 시대 양식을 갖는다. 특히 화첩의 일부 그림은 김홍도의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1788)과 구성 및 회화적 모티프가 매우 유사하여 두 화첩간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반면에 <영랑호>, <해산정>, <월송정> 등은 김홍도의 그림과는 구별된다. 이를 통해 화가가 김홍도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적인 화첩을 제작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해악전도첩》에는 다른 화첩에는 등장하지 않는 <자운담>, <백운대>, <안문점망비로봉>, <백정봉>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각 장면마다 경물의 특징을 구체적이고 참신하게 묘사하였다. 특히, 화가는 산석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하고 선과 면을 도드라지게 하여 입체감을 강조하였다. 그는 남종화풍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화법을 확립했고 이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면서 화면에 동적인 리듬감을 부여했다. 이처럼 60점의 그림은 거칠고 파격적으로 보이지만 나름의 질서 안에서 일관성을 견지하고 있다. 본고는 화법과 봉명사경의 정황을 종합해 《해악전도첩》의 제작자를 김응환으로 추론하였다. 나아가 김하종(金夏鍾)(1793~1878 이후)의 《풍악권(楓嶽卷)》(1865년 이후)과의 친연성은 《해악전도첩》의 화가를 김응환으로 추정한 또 하나의 이유였다. 《해악전도첩》은 김홍도의 《해산첩》과는 달리 후대에 미친 영향력이 미비한데 김하종의 《풍악권》만이 《해악전도첩》의 소재와 화법을 따르고 있다. 김하종은 《풍악권》에서 50년 전, 춘천부사 이광문(李光文)(1778~1838)을 위해 제작한 《해산도첩》(1816)과는 전혀 다른 화법을 구사했다. 그는 김응환의 《해악전도첩》과 유사한 구성과 회화적 요소, 화보식 인물표현을 따르면서 사의적인 분위기를 강조하였다. 개성김씨의 일원이자 김응환의 종손인 김하종은 가문에 전해지는 《해악전도첩》류의 그림을 감상했고 이를 새롭게 번안했다고 추측된다. 화첩에 포함된 51편의 기문은 그림 다음 장에서 그려진 장소를 설명하고 있어 각 그림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기문은 그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앞의 장소로부터의 이동 정보, 이름의 유래, 지형적 특징, 관련 정보 등이 서술되었다. 이와 같은 백과사전식 혹은 지리지와 같은 기문은 19세기 전반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금강산 화첩류에 더해졌다. 《해악전도첩》의 백화암 기문에는 1845년의 암자에 대한 중건 내용이 기록되어, 기문의 연대를 추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김하종에게 《풍악권》을 주문한 이유원(李裕元)(1814~1888)도 각 그림에 글을 붙였는데 이 글들은 김응환의 화첩에 포함된 기문 51편과 내용 및 서술방식이 흡사하다. 이유원의 기문은 《해악전도첩》의 기문이나 그 초고(원본)와 관련성이 높지만 두 화첩의 기문 필사의 선후관계를 판정하는 데에는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해악전도첩》은 김홍도의 봉명사경 초본 및 김홍도의 영향으로 제작된 19세기의 금강산 화첩과는 구별된다. 이 화첩은 화원 김응환의 회화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을 넓히고 18세기 후반 실경산수화의 또 다른 층위를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후기 관서지방의 공연 시공간과 향유에 관한 연구 (A Study of the Time-Space and Appreciation for the Performance Culture of Gwanseo Region in Late Joseon Period: Focusing on Analysis of Terminology)

  • 송혜진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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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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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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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고는 조선후기 관서지방 공연문화의 시공간과 향유에 관한 연구이다. 관서(關西) 지방은 중국 대륙과 인접한 접경지대로 군사적 요충지이자 대외무역과 상업의 발달로 재화가 풍부한 문화의 중심지였다. 조선후기에는 중국과 조선을 오가던 수많은 사신과 역관, 상인들이 이 지역을 경유하였고, 1~2년 간격으로 관찰사가 교체되었으며, 지역 인재 선발을 위한 도과(道科)과 빈번하게 시행되면서 환영과 전송 의례, 위로, 향연에 따른 공연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양상은 여러 문헌자료와 읍지(邑誌), 그림 자료로 전하며, 문학, 음악, 무용, 민속학 분야의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관서악부>를 비롯하여 평양, 성천의 자연과 풍류를 노래한 가사문학작품, 연행록 등을 문학작품을 세밀하게 읽다보면, 기존의 연구에서 주목해 온 공연의 종목과 악기편성, 음악기구, 음악인 등 뿐 만 아니라 공연활동의 주체와 시공간, 향유방식에 대한 유용한 정보들이 매우 풍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 공연이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언제,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공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지, 관객과 공연주체가 어떻게 소통하였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 음악과 춤에 관한 단적인 정보 외에 '공연', '사람', '시간', '공간'의 관계성에 관한 연구는 지금까지 미진했던 '전통공연예술 양식' 연구의 기반이 되리라고 판단된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관서악부> 108편, 한글 가사 작품 8편, 한문연행록 9종에 표현된 공연관련 정보를 '주요어' 에 주목하여 분석한 결과 조선후기 공연문화의 시공간과 향유 양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었다. 공연의 시기와 시간, 전체 소요시간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는 않았다. 사신연의 경우, 국가나 개인의 상례(喪禮), 기일(忌日) 등의 '금지사유'가 없는 한, 더위나 추위를 무릅쓰고라도 진행되었다. 그 외에 계절을 선택하여 '놀음'을 벌일 경우, 계절적으로는 '삼사월 좋은 때', '춘풍' 불고 '일기 화창'한 날과 '가을 물결' 아름다운 '추강(秋江)'의 계절이 선호되었다. 공연 시간 대는 '아침밥을 먹고 나서', '포시(오후 4시경)', '석반을 물리치고~', '야심(夜深)', 의 예에서 처럼 매우 가변적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밤에 열리는 야연(夜宴)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공연의 지속시간은 '잠깐 보고'부터 '전날 오전부터 다음날 낮까지' 차이가 컸다. 공연시간대와 전체 소요시간은 사신일행의 일정에 영향을 받았다. 공연 공간은 자연, 누정이나 관아의 건축 공간, 선유놀음의 선상 공간, 영송(迎送)의 행차음악이 연주된 연도(沿道)로 구분해볼 수 있었다. 평양의 연광정, 부벽루, 성천의 백상루, 선천의 의검정, 천연정, 의주의 통군정 등의 건축공간과 강상에 배를 띄운 선유놀음의 크고 작은 선상공간은 관서지방 공연문화의 중심이었다. 공연 공간에는 공연주체와 좌상(座上)객의 필요에 따른 주물상, 다담상, 찬을 갖춘 상, 병풍, 의자, 향로 등이 구비되었으며, 야연에서는 청사초롱, 홍촉대, 횃불이 갖춰졌다. 약산동대 등, 자연 공간에서의 공연도 선호되었다. 공연 향유와 관련하여 공연주체와 관객, 공연내용, 향유자의 소감과 비평 등을 살폈다. 공연주체는 기생과 무동, 악공, 전악, 취타군, 무동, 가아(歌兒) 등 수많은 명칭이 사용되었다. 특히 공연에서 춤과 노래, 연주를 담당했던 기생에 대해서는 기생의 수, 연령, 역량, 이미지 등을 알 수 있는 아주 많은 이칭(異稱)이 조사되었다. 공연에서 향유자는 유객(遊客), 좌상(座上)으로 불렸고, 특정 작품에서는 '풍류 태수', '학탄 신선' 등의 표현도 사용되었다. 향유자들이 즐긴 공연은 정재류의 춤과 관서지방의 민속무, 이에 따른 삼현육각 편성의 음악, 12가사, 한문 낭송조, 잡가, 민요, 광대소리 등의 노래, 거문고, 가야금, 양금, 피리, 해금, 퉁소, 옥저 등의 기악 독주, 혹은 병주. 행차에 따른 연주 등이었다. 세부곡목에 주목해보면 조선후기 관서지방에서는 궁중 예술과의 교섭이 매우 활발하였고,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었던 <홍문연>, <항장무>, <선유락> 등의 레퍼토리를 탄생시켰는가 하면 고유의 민속가무도 함께 향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연의 규모는 '대연', '크게 벌이다', '수삼 동기', '성천기 7명', '60기생', '기생 2~3명', '삼자비' 등으로 표현되거나 독주, 독창, 독무인 경우 이름으로 표기하였다. 역시 공연 계기와 장소에 따라 공연의 규모가 매우 유동적이었음을 알려준다. 공연자의 연령은 10대 초반부터 늙은 기생까지 다양하게 소개되었는데, 특히 어린 기생들의 가무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다. 공연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지만, 반대로 '잡악(雜樂)', '졸렬', '웃음거리'로 분류되어 외면당한 예도 있다. 그런가 하면 여러 지역에서 유사한 공연종목을 관람한 뒤, 이를 '비교(比較)' 평가한 예가 있는데, 이는 관서지방 공연문화 향유양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된다. 공연은 주로 사신맞이. 사신연, 순행에 따른 연회 등 공적인 성격을 띤 것이 많았고, 그밖에 사적인 향유 차원에서 이루어진 예도 적지 않게 조사되었다. 관서지역의 사신맞이는 대동강의 관선을 이용한 도강(渡江)의례가 특징적이다. 이는 관찰사, 부사, 감사 등의 관리의 이임과 부임뿐만 아니라 정례적으로 중국에 오가던 사신일행의 행차가 끊이지 않았으므로 이와 관련된 공연문화의 지속성이 탄탄하게 확보될 수 있었다. 이와같이 '주요어 추출'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관서지방의 공연 시·공간과 향유양상에 관해 살핀 본 연구는 향후 관서지방의 재정과 경제, 생활문화의 측면과 관련지어 '관서지방 특유의 공연문화'를 밝히는 연구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지금까지의 연구가 미진한 전통공연예술의 시공간과 공연양식에 관한 연구의 외연을 넓히는데 풍부한 근거자료로 활용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라사국립애이미탑십박물관(俄羅斯國立艾爾米塔什博物館)·서북민족대학(西北民族大學)·상해고적출판사(上海古籍出版社) 편(編) 『아장구자예술품(俄藏龜玆藝術品)』, 상해고적출판사(上海古籍出版社), 2018 (『러시아 소장 쿠차 예술품』) (The State Hermitage Museum·Northwest University for Nationalities·Shanghai Chinese Classics Publishing House Kuche Art Relics Collected in Russia Shanghai Chinese Classics Publishing House, 2018)

  • 민병훈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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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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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6-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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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 3층 맨 우측에는, 세계 유수의 실크로드 미술 컬렉션을 상설전시하는 "중앙아시아실"이 자리 잡고 있다. 20세기 초 실크로드를 학술조사한 러시아의 코즐로프(Pyotr Kozlov), 베레조프스키(Mikhail Berezovsky), 올덴부르그(Sergey Oldenburg) 등에 의해 수집된 고고 미술품 들이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의 방대한 이들 유물은 그 대강을 파악할 수 있도록 지역별로 분류하여 공개중이며, 이제까지 독일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한국, 일본 등에서 개최된 특별전시를 통해 그 일부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실크로드 탐험대의 성과물을 종합적으로 공개한 대형 기획전시 이 2008년에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개최됨으로써, 러시아의 실크로드 관련 유물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번에 간행된 『아장구자예술품(俄藏龜玆藝術品)』(2018)은 중국의 상해고적출판사(上海古籍出版社)가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공동으로, 당관 소장 실크로드 유물 가운데 쿠차 지역의 예술품만을 선정하여 출판한 도록이다. 이 도록의 편집과 논고 및 유물 해설은 에르미타주 박물관 동양부(Oriental Department)의 시니어 큐레이터 키라 사모슉(Dr. Kira Samosyuk)이 담당하였다. 키라 박사는 하라호토(Khara-Khoto)와 서역(西域) 미술 전문가로, 그 이름이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중앙아시아 불교미술 연구의 석학이다. 본서에는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의 쿠차 지역 출토 유물을 망라하여, 중앙아시아 불교미술에 있어서의 쿠차 지역의 특징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탐험대가 남긴 현장사진과 스케치 등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소개함으로써, 수집 유물 이외의 귀중한 정보도 아울러 제공하고 있다. 키라 사모슉 박사는 본서의 게재 논문 「The Art of the Kuche Buddhist Temples」에서, 러시아의 실크로드 탐험의 개요를 소개하고, 주로 불교시대 쿠차의 역사 전개 과정과 쿠차에 전래된 불교의 양상 그리고 석굴의 벽화 묘사와 그 연대 문제를 논한 후, 벽화의 주제와 소상(塑像), 석굴사원이 예배의 장으로서 어떻게 운용되고 있었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키라 박사는 결론으로서, 쿠차 문화는 불교 전파의 역사 가운데 독립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유목세계의 여러 민족과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간다라 미술, 헬레니즘, 고대 이란, 중국 문화와의 관련성 속에서 독자적인 성격을 구축하였음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쿠차 지역에서 형성된 문화는 타림분지뿐만 아니라 돈황(敦煌)과 중원(中原) 지역의 석굴예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으로 문장을 마감하고 있다. 키라 박사의 논고 가운데 주목할 부분은 쿠차 지역 석굴의 조성(造成) 연대(年代)에 관한 것이다. 그녀는 이제까지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벽화의 조성 연대에 관한 견해를 소개하며, 벽화의 인물이 착용하고 있는 갑주(甲冑)의 도상(圖像) 특징 등을 소그드 미술 등 주변 지역에서 출토된 관련 자료와 비교하여, 키질의 조성 연대를 기존의 학설보다 백여 년 이상 소급해야 함을 주장하며, 5세기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쿠차 지역 석굴의 조성 시기의 문제는 석굴의 형식 문제를 비롯하여 불화(佛畫)의 주제(主題)와 양식(樣式), 안료(顔料)의 문제, 복식(服飾)이나 두발(頭髮), 제 장식(裝飾) 요소 등을 학제적(學際的) 연구 방법으로 재조명하고, 그 과정에 나타나는 주변 문화권과의 관련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위에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 등 과학적 방법을 보조 자료로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에는 제2차세계대전 때 베를린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벽화편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일반인에게는 물론 학계에서도 그 행방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이들 벽화편이 최근에 보존처리를 마치고 일반에게 상설전시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본서 출판의 경위를 서술한 서언(序言)에는 이번 간행이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쿠차 예술품의 제1차 출판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아마도 보존처리가 끝난 독일 컬렉션을 소개하는 도록의 편집도 예정되어 있는 듯하다. 아울러 투르판과 호탄 지역 문물을 소개하는 도록의 간행도 기대해본다. 현재 쿠차의 석굴사원에서 절취한 벽화편은 러시아와 독일, 한국 등 여러 국가에 분장되어 있다. 이번 도록 출판을 계기로 쿠차 현지의 키질 석굴을 비롯한 제 석굴사원의 잔존벽화를 중심으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벽화를 함께 소개하여 이들 석굴사원 벽화의 원래 모습을 온전하게 소개하는 종합도록의 간행도 필요할 것으로 본다. 그리고 동서의 문화가 혼합되어 있고 쿠차 지역 특유의 지역적 특성이 반영된 석굴사원의 벽화류 등을 소개하는 도록에는, 각 유물에 대한 보다 상세한 해설이 요망된다. 그리고 미술사 이외에도 보존과학적 측면에서의 안료 분석 등 학제적 조사연구 성과도 포함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작금의 중국 서부 개발 정책에 따라, 신장 지역의 오아시스에 인구가 과밀 거주함으로써 유발되는 기후변화 등으로 석굴사원의 벽화는 현재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문화계뿐만 아니라 문화재 보존수복(保存修復)의 첨단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여러 국가들이 실크로드 석굴벽화의 보존수복을 위해 공동 노력하고 아울러 관련 인적자원 양성 등을 위해 보존과학센터를 운영하는 등 모두의 중지를 모아야할 때다. 본서는 20세기 초 서구 열강에 의해 추진된 실크로드의 고대 유적 조사 결과 가운데, 러시아 조사대가 쿠차 지역의 석굴사원을 중심으로 거둔 성과를 종합적으로 소개하는 출판물이지만, 향후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의 독일 컬렉션 벽화까지 전부 소개될 경우, 쿠차의 불교미술과 실크로드 연구에 크게 공헌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의미에서 본서는 이제까지 축적되어 온 쿠차 지역에 대한 고고미술 연구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자 실크로드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서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실크로드 미술 연구의 성과물이자 새로운 편집 체계로서 학적 편의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을 기획하고 실크로드 미술 연구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키라 사모슉 박사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수도 신장 절위 경엽의 형태변이에 관한 연구 (Studies on the morphological variation of plant organs of elongating node-part in rice plant)

  • 김만수
    • 한국작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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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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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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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
  • I. 강원도 춘천지방에서 주로 재배되는 수도 품종 20개를 공시재배하여 출수기에 신장절위(간선단으로부터 4 개절위)경엽에 대한 형태조사를 한 바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공시한 20 개품종의 평균엽면적은 제 1 엽 18.61 $cm^2$, 제 2 엽 21.84 $cm^2$, 제 3 엽 21.52 $cm^2$, 제 4 엽 18.56 $cm^2$로서 제 2 엽과 제 3 엽이 크고 제 1 엽과 제 4 엽이 작았으며 엽신중은 제 1 엽 97.0 mg, 제 2 엽 118.1 mg, 제 3 엽 115.4mg, 제 4 엽 95.3 mg로서 엽위별의 비중은 전기 엽면적의 경우와 같았고 엽초중(절당)은 제 1 엽초 176.3 mg, 제 2 엽초 163.7 mg, 제 3 엽초 163.4 mg, 제 4 엽초 123.9 mg 로서 절위가 상승함에 따라 현저히 컸다. 또한 엽중(엽신+엽초)은 절위당 제 1 엽 273.3 mg, 제 2 엽 281.8 mg, 제 3 엽 278.8 mg, 제 3 엽 219.1 mg로서 엽위별의 제2 및 제3엽이 컸고 제1엽과 제4엽이 적었으며 고간중(엽신+엽초+간)은 제1절위 374.4 mg, 제2절위 418.2 mg, 제3절위 446.1mg 및 제4절위 362.1 mg로서 역시 중간절위가 크고 상위와 하위에서 적었다. 2. 신장 절위 경엽의 품종간 변이계수를 산출하여 본즉 엽면적에 있어서 12.75%, 엽신중 15.29%, 엽초중 15.90%, 절간중 11.42%, 엽중(엽신중+엽초중) 15.45% 그리고 엽중 13.24%였으며 각절위에 있어서 엽면적, 엽신, 엽초, 간중등의 품종간 변이계수는 간중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2 및 제3절위에 있어서 작았고 제3 및 제4절위에서 컸으며 절간중에 있어서는 제3 및 제4절위의 변이계수가 작았다. 그리고 각 절위간 경엽의 변이계수는 엽면적 8.90%로서 가장 적고 엽신중 11.24%로서 적은 편이었으며 간중은 20.02%로서 가장 컸다. 3. 수도의 엽간중에 대하여 엽신 엽초 및 절간이 각각의 고유하는 중량의 비율은 29.2%로서 가장 높고 간중 34.2%, 엽신중 26.6%로서 낮으며 각 절위에 있어서도 각 부분이 점유하는 비율은 대체로 같은 경향이지만 엽신중의 비중은 제2엽에서 크고 엽초중은 상위절에 갈수록 간중은 반대로 하위절일수록 비중이 높았다. 4. 4개절위를 합한 엽신/간비는 77.7%, 엽초/간비 114.5%, 엽신/엽초비 67.9% 및 엽신/간+엽초비 36.2%이며 상위벌에서 엽신/간비 및 엽초/간비는 높고 엽신/엽초비는 하위절에서 높았다. 5. 수도의 신장 절위 경엽과 수량과의 관계는 전체엽면적의 4개엽과 정조수량과의 상관관계(r)는 0.666이었고 제1엽 및 제2엽은 0.659 및 0.609로서 각각 고도의 정(+)의 상관을 보였으며 제3엽과 제4엽은 0.464, 0.523으로서 유의상관을 인정하였으며 전체엽신중과 정조수량간에는 0.678, 제1엽 0.691, 제2엽 0.654, 제3엽 0.570으로서 각각 고도의 정(+)의 상관을 보였고 제4엽에 있어서는 0.544로서 유의상관을 보였으며 엽중(엽신중+엽초중)과 수량과의 상관은 엽면적의 경우와 동일한 경향을 보였고 엽간중과 수량과의 상관은 총고간중 및 제1절위고간중에서만 고도의 정(+)상관을 보였고 그 밑에 절위에서는 유의상관을 보였다. 한편 전체엽초중과 정조수량간에 있어서는 0.572, 제1엽초 0.623으로서 각각 고도의 정(+)상관을 보였고 제2, 제3 및 제4엽초에 있어서는 각각 0.486, 0.513 및 0.450 으로서 유의상관을 보였고 간중과 정조수량과의 상관은 모두 0.377 이하로서 낮은 상관을 보였다. 6. 수량계급에 따르는 품종들의 신장 절위 경엽의 평균치로 본 엽신중, 엽면적 1 $cm^2$당 엽신중, 엽초중, 간중, 엽중은 모두 다수품종에서 컸으며 중수>소수품종의 순위로 낮았고 각 절위별에 있어서도 대체로 같은 경향을 보였으며 그들에 있어서의 절위간변이는 엽면적, 엽신중, 엽초중, 간중 모두 다수품종에서는 현저히 적고 중수 및 소수품종에서 컸다. 7. 수량계급에 따르는 품종들의 식물체지상부 구성비율 즉, 엽신, 엽초, 엽간이 각각 점유하는 비율은 다수품종에 있어서 엽신 27.6% 엽초 39.5%, 간 32.9%인데 비하여 소수품종은 엽신 25.5%, 엽초 38.1%, 간 36.4%이고 중수품종은 그들 중간적 값을 보였다. 8. 수량계급에 따르는 품종들의 엽신/간비, 엽초/간비는 다수품종은 높고 소수품종은 낮았으며 중수품종은 그들 중간을 보였다. II. 수도품종 신 2 호, 시로가네 및 진흥의 3개를 공시하여 10a당 실소를 8kg, 12kg 및 16kg의 3개수준으로 시용하여 신장 절위 경엽의 형태변이를 조사하는 한편 잎의 실소함량을 분석하여 그들과 수량과의 관계를 살펴 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신장 절위 경엽의 시용량에 따르는 3개 품종의 평균형태변이치는 총엽면적(선단으로부터 4개엽 총합)은 실소 8kg구에 비하여 2배비에서 16.5%의 증대를 보였으며, 총엽신중에 있어서도 거의 같은 비율의 증대를 각각 보였고, 총엽초중에 있어서는 2개비구 7.8%, 1.5 개비구 4.9%의 증대를 보였고, 각엽위별에 있어서도 전자와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 한편 간중은 반대로 2개비구 11.2%, 1.5개비구 1.5%씩 각각 감소되었으며, 그 정도는 특히 하위절위에서 현저하였다. 2. 각 품종의 신장 절위 경엽이 시비량에 따르는 변이계수는 총엽면적에 있어서는 제002 15.40%, 시로가네 12.87% 및 진흥 10.99%였고, 각 절위별로 엽신의 변이가 큰 것은 신 002는 제4엽, 시로가네는 제2엽, 진흥은 제1엽으로서 품종간에 차이가 있었다. 총엽신중의 변이계수는 총엽면적의 경우와 같은 경향을 보였고, 총간중의 변이계수는 제002 7.72%, 시로가네 12.11% 및 진흥 0,94% 이였으며 각 절위별 변이의 정도도 품종에 따라 다르다. 3. 신장 절위 경엽의 시비량에 따르는 절위간 변이는 엽면적, 엽신중, 간중 모두 N8kg인 소비조건에서 변이가 크고 N16kg인 다비조건에서 적어졌으며 N12kg구는 이들 중간이고, 엽초중에 있어서는 다비조건에서 변이가 컸다. 4. 엽초중을 구성하는 엽신 엽초 및 절간이 각각 점유하는 비율은 시비량에 따라 다르며, 시비량의 증가에 따라 엽신중의 비율은 현저히 높아지고, 엽초중의 비율은 반대로 낮아진다. 5. 시비량에 따르는 공시품종의 신장 절위 경엽의 상호관계를 보면 엽신/간비는 소비구에서 낮고, 엽신/엽초비는 시비량의 증가에 따라 낮아지며, 엽초/간비는 높아지고 엽신/간십엽초중비율은 낮아졌다. 6. 시비량의 증가에 따라 공시품종 모두 신장절위의 엽면적, 엽신중, 엽초중은 증대되었다. 그에 따라 수량도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간중은 시비량 증가에 따라 감소되고 수량은 반대로 증대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 정도는 품종에 따라 차이가 있다. 7. 출수기 및 성숙기에 있어서의 잎의 실소함량은 시비량에 따라 다르며, 공시품종 평균실소함량은 출수기에 있어서 N8kg 시비구 2.74%, N12kg 시비구 2.49는 각구 0.80%, 0.92% 및 1.03%로서 증비에 의하여 실소함량이 현저히 증가되고 있으며, 엽위별에 있어서는 상위엽일수록 높았다. 8. 잎의 실소 함량은 품종간에 차이가 있는데, 동일품종내에서는 출수기와 성숙기에 있어서 그 함량이 높을수록 수량이 증대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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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李朝時代)의 임지제도(林地制度)에 관(關)한 연구(硏究) (A Study on the Forest Land System in the YI Dynasty)

  • 이만우
    • 한국산림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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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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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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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
  • 토지국유원칙(土地國有原則)을 표방(標榜)하고 "공사(公私) 공리(共利)"를 기본원칙(基本原則)으로 하고 있었던 고려조(高麗朝)의 시전과제도(柴田科制度)도 집권력(執權力)의 약화(弱化)로 인(因)하여 조만간(早晩間), 붕괴(崩壞)되고 말았던 것이나 임지제도(林地制度)에 있어서는 분묘설정(墳墓設定)의 자유(自由)와 개간장려(開墾奬勵)를 이용(利用)한 삼림(森林)의 광점(廣占) 및 전시과제도(田柴科制度)로 인(因)한 시지(柴地)의 수조권위양(收租權委讓)으로 유래(由來)된 사적수조권(私的洙組權)이 결부(結付)된 삼림(森林)의 사점현상등(私占現象等)이 점차(漸次) 발전(發展)하여 고려중기(高麗中期)의 국정해지기이후(國政解地期以後)에는 대부분(大部分)의 삼림(森林)이 권력층(權力層)의 사점지(私占地)로 화(化)하여 왔었다. 고려조(高麗朝)의 모든 제도(制度)를 그대로 계승(繼承)한 이조(李朝)는 건국후(建國後) 국가소용(國家所用)의 삼림확보(森林確保)를 위(爲)한 삼림수용(森林收用)의 제도확립(制度確立)이 긴요(緊要)하였음으로 전국(全國)의 삼림(森林)을 국가권력(國家權力)에 의(依)하여 공수(公收)하고 국가(國家)와 궁실소용이외(宮室所用以外)의 모든 삼림(森林)은 사점(私占)을 금(禁)한다는 "시장사점금지(柴場私占禁止)"의 제도(制度)를 법제화(法制化)하였고 도성주변(都城周邊)의 사산(四山)을 금산(禁山)으로 함과 아울러 우량(優良)한 임상(林相)의 천연림(天然林)을 택(擇)하여 전조선용재(戰漕船用材)와 궁실용재(宮室用材)의 확보(確保)를 위(爲)한 외방금산(外方禁山)으로 정(定)하고 그 금양(禁養)을 위(爲)하여 산직(山直)을 배치(配置)하였다. 그리고 연병(練兵)과 국왕(國王)의 수렵(狩獵)을 위(爲)한 강무장(講武場)과 관용시장(官用柴場), 능원부속림(陵園附屬林)의 금벌(禁伐), 금화(禁火)를 제정(制定) 등(等) 필요(必要)에 따라 수시(隨時)로 삼림(森林)을 수용(收用)하였으나 고려조이래(高麗朝以來)로 권력층(權力層)에 의(依)하여 사점(私占)되어온 삼림(森林)을 왕권(王權)으로 모두 공수(公收)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이조초기(李朝初期)에 있어서의 집권층(執權層)은 그 대부분(大部分)이 고려조(高麗朝)에서의 권력층(權力層)이었던것 임으로 그들은 이미 전조시대(前朝時代)로부터 많은 사점림(私占林)을 보유(保有)하고 있었던 것이고 따라서 그들이 권력(權力)을 장악(掌握)하고 있는 한(限) 사점림(私占林)을 공수(公收)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며 그들은 오히려 권력(權力)을 이용(利用)하여 사점림(私占林)을 확대(擴大)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왕자(王子)들도 묘지(墓地)를 빙자(憑藉)하여 주(主)로 도성주변(都城周邊)의 삼림(森林)을 광점(廣占)하고 있던 터에 성종(成宗)의 대(代) 이후(以後)로는 왕자신(王自身)이 금령(禁令)을 어기면서 왕자(王子)에게 삼림(森林)을 사급(賜給)하였음으로 16세기말(世紀末)에는 원도지방(遠道地方)에 까지 왕자(王子)들의 삼림사점(森林私占)이 확대(擴大)되었고 이에 편승(便乘)한 권신(權臣)들의 삼림사점(森林私占)도 전국(全國)으로 파급(波及)하였다. 임진왜란후(壬辰倭亂後)에 시작(始作)된 왕자(王子)에 대(對)한 시장절급(柴場折給)은 삼림(森林)의 상속(相續)과 매매(賣買)를 합법화(合法化)시켰고 이로 인(因)하여 봉건제하(封建制下)에서의 사유림(私有林)을 발생(發生)시키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권신(權臣)들도 합법적(合法的)으로 삼림(森林)을 사점(私占)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조시대(李朝時代) 임지제도(林地制度)의 기본(基本)이었던 시장사점금지(柴場私占禁止)의 제도(制度)는 건국초(建國初)로부터 실행(實行)된 일이 없었으며 오로지 국가(國家)의 삼림수용(森林收用)을 합법화(合法化)시키는 의제(擬制)에 불과(不過)하였던 것이다. 금산(禁山)은 그 이용(利用)과 관리제도(管理制度)의 불비(不備)로 인(因)하여 산하주민(山下住民)들의 염오(厭惡)의 대상(對象)이 되었음으로 주민(住民)들의 고의적(故意的)인 금산(禁山)의 파괴(破壞)는 처음부터 심(甚)하였고 이로 인(因)하여 국가(國家)에서는 용재림확보(用材林確保)를 위(爲)한 금산(禁山)의 증설(增設)을 거듭하였으나 관리제도(管理制度)의 개선(改善)이 수반(隨伴)되지 않았음으로 금산(禁山)의 황폐(荒廢)는 더욱 증대(增大)되었다. 영조(英祖)는 정국(政局)을 안정(安定)시키기 위(爲)하여 경국대전이후(經國大典以後) 남발(濫發)된 교령(敎令)과 법령(法令)을 정비(整備)하여 속대전(續大典)을 편찬(編纂)하고 삼림법령(森林法令)을 정비(整備)하여 도성주변(都城周邊)의 금산(禁山)과 각도(各道) 금산(禁山)의 명칭대신(名稱代身) 서기(西紀) 1699년(年) 이후(以後) 개칭(改稱)하여온 봉산(封山)의 금양(禁養)을 강화(强化)시키는 한편 사양산(私養山)의 권한(權限)을 인정(認定)하는 등(等) 적극적(積極的)인 육림정책(育林政策)을 퍼려하였으나 계속적(繼續的)인 권력층(權力層)의 삼림사점광대(森林私占廣大)는 농민(農民)들로부터 삼림(森林)을 탈취(奪取)하였고 농민(農民)들 이 삼림(森林)을 상실(喪失)함으로써 국가(國家)의 육림장려등(育林奬勵策)은 효과(効果)를 나타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임진왜란후(壬辰倭亂後)의 국정해이(國定解弛)로 인(因)한 묘지광점(墓地廣占), 왕자(王子)에 대(對)한 삼림(森林)의 절급(折給) 권세층(權勢層)에 대(對)한 산림사점(森林私占)은 인허(認許)하는 입안문서(立案文書)의 발행등(發行等)으로 법전상(法典上)의 삼임사점금지조항(森林私占禁止條項)은 사문화(死文化)되었고 이조말기(李朝末期)에 있어서는 사양산(私養山)의 강탈(强奪)도 빈발(頻發)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이와 같이 이조시대(李朝時代)의 시장사점금지조항(柴場私占禁止條項)은 오로지 농민(農民)에게만 적용(適用)되는 규정(規定)에 불과(不過)하였고 이로 인(因)하여 농민(農民)들의 육림의욕(育林意慾)은 상실(喪失)되었으며 약탈적(掠奪的)인 삼림(森林)의 채취이용(採取利用)은은 금산(禁山), 봉산(封山) 및 사양산(私養山)을 막론(莫論)하고 황폐(荒廢)시키는 결과(結果)를 자아냈으며 권력층(權力層)의 삼림점탈(森林占奪)에 대항(對抗)한 송계(松契)의 활동(活動)으로 일부(一部) 공산(公山)이 농민(農民)의 입회지(入會地)로서 보존(保存)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일제(日帝)는 이조말기(李朝末期)의 삼림(森林) 거의 무주공산(無主公山)이 었던것처럼, 이미 사문화(死文化)된 삼림사점금지조항(森林私占禁止條項)을 활용(活用)함으로써, 국가림(國有林)으로 수탈(收奪)한후(後) 식민정책(植民政策)에 이용(利用)하였던 것이나, 실제(實際)에 있어서 이조시대(李朝時代)의 삼림(森林)은 금산(禁山), 봉산(封山), 능원부속림등(陸園附屬林等)의 관금지(官禁地)와 오지름(奧地林)을 제외(除外)하고는 대부분(大部分)의 임지(林地)가 권세층(權勢層)의 사유(私有) 내지(乃至)는 사점하(私占下)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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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시된 효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 연구 (Showing Filial Piety: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a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이재호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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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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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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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덕수5520)는 그림과 발문(跋文) 열 폭으로 이루어진 병풍으로, 작가는 조중묵(趙重黙)(1820~1894 이후), 주문자는 박경빈(朴景彬)(생몰년 미상), 발문을 쓴 사람은 홍선주(洪善疇)(생몰년 미상), 제작연대는 1868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낱장으로 보관되어 온 <인왕선영도>를 병풍으로 복원하고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에서 최초로 공개하였다. <인왕선영도>에는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과 홍은동을 아우르는 인왕산 서쪽 실경이 묘사되어있고 원경에는 북한산 연봉이 그려져 있다. 화면 속에는 인왕산(仁旺山), 추모현(追慕峴), 홍재원(弘濟院), 삼각산(三角山), 대남문(大南門), 미륵당(彌勒堂)이라는 지명이 표기되어있다. 이 지역을 나타낸 조선후기 지도와 비교해보면 지형 표현과 지명 표기에 유사성이 있다. 조중묵은 넓은 공간을 포착하기 위해 지도의 지리정보를 숙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경의 현장을 답사한 결과, 조중묵은 각각의 경물을 과장하거나 생략하였고 수평의 화면에 나열식으로 조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조중묵은 남종화풍 정형산수에 뛰어났던 화가로, <인왕선영도>의 세부 표현에서 사왕파(四王派) 화풍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19세기 도화서 화원들이 화보를 활용하여 가옥을 그리거나 토파에 호초점을 찍고 당분법(撞粉法)으로 꽃을 나타내는 등 장식적인 화풍을 구사한 경향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인왕선영도>에는 바위를 짙은 먹으로 쓸어내리듯 붓질한 기법, 산세의 괴량감, 가로로 붓을 대어 단순하게 그린 소나무 등 18세기 정선(鄭敾)(1676~1759)의 개성적 양식도 가미되어있다. 조중묵은 인왕산 실경산수로 유명한 정선의 양식과 권위를 차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왕선영도>는 유기적 공간감과 현장의 인상이 잘 드러나지 않으며, 연폭 화면이라는 매체도 조중묵의 개인 양식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인왕선영도>는 발문의 텍스트와 화면의 이미지가 잘 조응하는 작품이다. 발문의 내용을 여섯 단락으로 나누어 보면 ①무덤의 주인공과 이장 경위, ②무덤의 입지와 풍수, ③묘제(墓祭)와 신이(神異)한 응답, ④무덤 관리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협력, ⑤병풍 제작의 동기인 박경빈의 효성과 수묘(守墓), ⑥발문을 쓴 의의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화면에서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용이한 ②의 내용은 화면에 충실하게 재현되었다. <인왕선영도> 제작의 직접적 동기인 ⑤를 보면 주문자 박경빈이 "무덤이 마치 새롭게 단장한 것 같이 눈에 완연하다."라 하여 <인왕선영도>에 만족했음을 알 수 있다. 경물 하나하나를 설명하듯 나열한 구도는 회화미는 떨어지더라도 무덤의 풍수지리를 전달하는 데는 더 적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상당수의 산도(山圖)는 18세기 이후 제작된 목판본 선영도로서, 족보와 문집에 수록된 경우가 많다. 16~17세기의 기록에서는 족자 선영도를 첨배(瞻拜)의 대상으로 삼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선영도 첨배는 현실적으로 수묘(守墓)가 곤란할 때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의례로 인정되었다. 한효원(韓效元)(1468~1534), 조실구(曺實久)(1591~1658) 등이 선영도를 제작한 후 당대의 명사에게 서문을 요청하고 효심을 과시한 사례는 <인왕선영도>의 선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개인 소장),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국립중앙박물관) 등은 선영도는 아니지만 계회도 형식의 족자이고 풍수를 도해했다는 점에서 17세기 선영도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인왕선영도>는 첨배라는 측면에서 초상화와도 의미가 비슷했다. 발문의 "부친의 기침소리를 직접 접하는 듯하고, 그 태도와 몸가짐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는 표현과 부친의 초상에 조석 문안을 올린 서효숙 고사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박경빈이 일반적인 선영도 형식이었던 족자나 목판화 대신 연폭 병풍의 실경산수화를 주문한 의도는 분명히 알기 어렵다. 19세기에는 민간에서도 사례(四禮) 의식에 다수의 병풍을 배설(排設)하였는데, 의례의 성격에 따라 그림의 주제를 반드시 구분하여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인왕선영도> 또한 여러 의례에 두루 배설하거나 장식 병풍으로도 사용하기 위해서 선영 그림이라는 주제를 실경산수화 이미지 아래에 가렸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인왕선영도>의 핵심 소재인 무덤 봉분이 모호하게 처리된 것은 사산금표(四山禁標)의 금제 위반을 숨기기 위함일 가능성이 있다. <인왕선영도>에 묘사된 인왕산 서쪽 산기슭은 분묘 조성 금지구역이었다. 1832년에 금표 내에 몰래 쓴 묘를 적발하여 즉시 파내고 관련자를 엄히 처벌한 사례로 볼 때, 19세기 중엽까지도 사산금표 내의 분묘 금제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의 발문에는 장지를 얻기 위해 쏟은 정성이 상세하게 쓰여 있다. 장지조성에 마을사람들의 협조와 묵인이 필요했던 것은 금표 구역 내에 묘지를 조성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인왕선영도>와 비교 가능한 동시대 연폭 병풍의 실경산수화로 이한철(李漢喆)(1808~1880)이 그린 <석파정도(石坡亭圖)>(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를 들 수 있다. <석파정도> 제작시기를 전후한 1861년에 이한철과 조중묵은 철종어진도사에 함께 참여하였으므로 조중묵이 이한철의 <석파정도> 제작 과정을 보았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조중묵이 몇 년 후 <인왕선영도>를 주문받았을 때 <석파정도>의 인상적인 연폭 실경산수를 본 경험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두 작품의 화풍 차이는 주문자의 취향과 제작 목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는 실경산수화와 선영도의 중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관람자의 지식수준과 주문자와의 친분, 관람에 들이는 시간에 따라 천차만별의 의미로 수용되었을 것이다. <인왕선영도>의 발문에는 무덤 주인의 이름과 자호, 본관이 일체 작성되지 않은 채 '박공(朴公)'이라고만 표기되어 있다. 주문자인 박경빈의 인적 사항도 파악할 수 없었으나 다만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가계를 미루어 볼 때 재력이 있음에도 지배계층으로 올라설 수 없는 신분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발문을 쓴 홍선주 또한 사대부로 보기 어려우며, 『승정원일기』 기록에 나타나는 경아전 서리일 가능성이 있다. 박경빈은 상류 계층에 진입하고 싶은 욕망으로 보수적인 가치인 효(孝)를 강조하여 부친의 무덤을 명당으로 이전하고 <인왕선영도>를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왕선영도>는 금제위반 적발에 대한 우려, 병풍의 다목적성 등의 이유로 본래의 제작의도를 뚜렷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모순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병풍이 제작된 지 47년 만에 각 폭이 분리된 채 미술상을 통해 이왕가미술관 소장품이 된 상황을 보더라도, 박경빈이 <인왕선영도>에서 꿈꾸었던 명당 발복과 가문의 신분상승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