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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35호 부여 궁남지의 정비과정으로 살펴본 전통의 남용과 발명 (The Abuse and Invention of Tradition from Maintenance Process of Historic Site No.135 Buyeo Gungnamji Pond)

  • 정우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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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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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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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한국 전통 연지의 시원으로 평가되는 궁남지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무왕의 연지 축조 기록, 사비왕궁으로 추정되는 관북리 유적 및 화지산 이궁지 남쪽에 위치한 지리적 정황에 의해 궁남지로 비정되는 한편 사적으로 지정 복원되었다. 본 연구는 궁남지의 복원정비 과정에 나타난 진정성 왜곡과 전통의 발명에 초점을 맞추어 고찰되었으며, 연구의 요약된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마래방죽[마천지]으로 불려왔던 궁남지는 일제 강점기 때만 해도 3만여 평의 광대한 자연 저습지의 상태로 존재했다. 궁남지 복원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홍사준은 1940년대만 해도 마래방죽에 백제시대 궁남지 유적으로 추정되는 섬과 석축시설이 남아있었고 그 위에 전각 및 정원을 조성한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전했다. 또한 화지산 이궁터의 조사 후 서동설화와 연관시켜 마래방죽을 궁남지와 동일시하는 의견을 피력하였는데, 이는 궁남지 복원정비의 이론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특히 홍사준이 제시한 스케치 도면 및 부여도엽에서 마래방죽의 형태와 규모를 엿볼 수 있었는데, 이러한 방죽의 형태는 일제 강점기에 촬영된 사진 속 상황과 근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2. 궁남지의 축소정비는 1960년대 추진된 경지정리사업에 의해 농경지로 불하되고 남은 잔여의 면적이 수습된 결과였다. 1965~67년에 있었던 최초 복원공사 이래 수차례 시행된 궁남지 정비를 통해 드러난 문제는 고고학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채 후대의 시각으로 추정복원 되면서 경복궁 향원지의 구성을 그대로 복제한 데 기인한다. 구체적으로, 연못 안에 섬과 정자를 놓고 교량으로 섬과 육지를 연결시키는 구성은 궁남지가 경복궁 향원정을 모델로 만들어졌음을 방증해 준다. 하지만 교량설계에 참조된 취향교 조차도 조선시대의 형식으로 보기 어려운바 당시의 잘못된 복원설계의 동기와 발상이 궁남지의 가치를 크게 저하시켰다고 판단된다. 이처럼 전통조경의 소재로서 이미 널리 알려진 디자인 전범을 그대로 모방한 것은 경복궁이 갖는 미적 표상과 기호를 지향한 것으로서, 궁남지가 그와 유사한 장소 권위를 획득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3. 궁남지는 애초부터 진정성이 결여된 채 정비된 사적이었기 때문에 정비 과정에서 경관의 왜곡과 전통성의 남용을 통해 유적의 역사적 맥락이 과감히 표방되어 갔다. 이러한 역사 재료의 무비판적인 활용과 왜곡을 불사한 정비방식은 1960~70년대 박정희 체제에 의해 주도된 민족주의 문화정책과 맞닿아 있다. '만들어진 전통담론'의 맥락에서, 박정희 시기의 문화정책은 국민의 기억에서 이상화된 과거를 취사선택하여 그것을 가시적으로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이전의 유적을 보수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이 부각된 사적지가 전국 곳곳에 생겨나게 되었는데, 궁남지가 초기에 순수한 보존의식으로 축소되어 정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본래 공간과는 상관없는 새로운 건조물들이 들어서고 기형적으로 확장 정비되어 갔던 사실은 그러한 국가주도 문화정책의 영향이 컸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