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coloni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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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비의 보존과학적 연구 (Study for the Conservation Treatment of the Stele for National Preceptor Hongbeop from the Jeongtosa Temple Site in Chungju)

  • 채우민;황현성
    • 박물관보존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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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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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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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비(본관1960)는 고려시대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석조문화재이다. 홍법국사탑비는 일제강점기에 수차례 반복된 부재의 해체 및 이동과 동시에 장기간 야외에 노출되어 풍화가 진행된 상태였기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왔다. 이 연구에서는 2015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주관하는 석조물복원사업의 일부 대상인 홍법국사탑비의 야외 전시를 위해 재질특성을 규명하고 풍화훼손지도 및 초음파 물성진단을 활용한 손상도 진단을 실시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보존처리를 진행하였다. 재질분석 결과, 탑비의 귀부는 중립질 입자크기를 가지는 석영, 사장석, 알칼리장석, 흑운모, 백운모를 구성광물로 가지는 복운모 화강암이다. 탑비의 비신은 담홍색을 띠며 암회색이 혼재되어 나타나고 중립질의 방해석을 조암광물로 가지는 결정질 대리암이다. 이수는 회백색으로 중립질의 방해석을 주요 구성광물로 가지는 결정질 대리암이다. 탑비에서 나타나는 각각의 훼손유형별 점유율 산출 결과 비신에서는 마모로 인한 훼손이 28.29%로 남측면이 가장 높으며, 이수에서는 입상분해로 인한 훼손이 11.08%로 북측면이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초음파 물성진단을 통해 탑비의 전체적인 풍화도를 파악한 결과 귀부에서는 결구부를 중심으로, 비신에서는 상단부에서 낮은 값을 보였으며, 이는 표면 가공도의 차이와 부분적인 박리 및 균열로 인해 변위가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홍법국사탑비의 야외 전시에 앞서 과학적 조사를 바탕으로 외부환경에 의한 풍화를 억제하고자 표면 오염물제거와 표면 강화처리를 진행하였다.

경복궁 아미산의 조영과 조산설(造山說)에 관한 고찰 (Studies on the Construction and the Artificial Mountain Theory of Amisan in the Gyeongbok Palace)

  • 정우진;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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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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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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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사료 및 도상자료의 분석을 통하여 경복궁 교태전 북쪽의 아미산 화계가 인공산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재검토하고 반론을 제기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경회지를 판 흙으로 아미산을 조산했다는 논리는 그간 정설로 여겨졌으며, 의심 없이 대부분의 경복궁 관련 논저와 단행본에서 반복되어 기술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사료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 아미산 조산설에 대해 몇 가지 반론을 제기하였는데, 기존 주장에 내재된 논리적 모순, 경회지 축조시기와 교태전 건립 시점의 불일치, 영조와 고종 연간에 제작된 도형사료에서 나타난 백악산과 아미산을 잇는 산줄기의 존재, 아미산 북쪽에 있는 흥복전에서 동쪽 담장을 경계로 높은 위차를 보이고 통행기능이 없다는 점, 중건 당대에 아미산을 풍수적인 아미사(蛾眉砂)로 인식하고 있는 것과 세종 연간에 경복궁 주산논쟁 결과 조치된 경복궁 내맥의 보존에 관한 주장이 그것이다. 아울러 본 연구에서는 교태전 북쪽의 언덕이 아미산으로 불러지게 된 기원과 잘못된 조산설이 등장하게 된 원인을 규명하였는데, 풍수용어 아미사가 음변되어 아미산이 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중국 사천에 있는 도불(道佛)성지인 아미산을 모방한 의경의 조성과 천연두신을 퇴치하기 위한 벽사적 의미의 아미산 조영관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아미산 조산설은 천지조산(穿池造山)식 조경법식을 경회지와 아미산에 소급시킨 것으로 보이며, 1980년대를 전후로 주장이 등장하게 된 것으로 조사 되었다. 백악산과 아미산을 잇는 용맥은 일제가 1915년 경복궁에 개최한 대규모 박람회를 기점으로 상당부분 절토되었으나, 교태전 동북쪽에 위치한 탐방로를 따라 낮은 둔덕이 약 70m 가량 이어져 있어 일제 강점기에 이 지맥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표고분석 결과 녹산에서 아미산까지 불연속적인 언덕이 일정한 축을 이루는 것이 발견되어 아미산의 용맥을 대략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아미산 용맥에 관한 기초연구를 통해 향후 경복궁 지형복원의 주요한 단서를 제공하려 하였다.

멀티도어코트하우스제도: 기원, 확장과 사례분석 (The Multi-door Courthouse: Origin, Extension, and Case Studies)

  • 정용균
    • 한국중재학회지:중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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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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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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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The emergence of a multi-door courthouse is related with a couple of reasons as follows: First, a multi-door courthouse was originally initiated by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that increasingly became impatient with the pace and cost of protracted litigation clogging the courts. Second, dockets of courts are overcrowded with legal suits, making it difficult for judges to handle those legal suits in time and causing delays in responding to citizens' complaints. Third, litigation is not suitable for the disputant that has an ongoing relationship with the other party. In this case, even if winning is achieved in the short run, it may not be all that was hoped for in the long run. Fourth, international organizations such as the World Bank, UNDP, and Asia Development Bank urge to provide an increased access to women, residents, and the poor in local communities. The generic model of a multi-door courthouse consists of three stages: The first stage includes a center offering intake services, along with an array of dispute resolution services under one roof. At the second stage, the screening unit at the center would diagnose citizen disputes, then refer the disputants to the appropriate door for handling the case. At the third stage, the multi-door courthouse provides diverse kinds of dispute resolution programs such as mediation, arbitration, mediation-arbitration (med-arb), litigation, and early neutral evaluation. This study suggests the extended model of multi-door courthouse comprised of five layers: intake process, diagnosis and door-selection process, neutral-selection process, implementation process of dispute resolution, and process of training and education. One of the major characteristics of extended multi-door courthouse model is the detailed specification of individual department corresponding to each process within a multi-door courthouse. The intake department takes care of the intake process. The screening department plays the role of screening disputes, diagnosing the nature of disputes, and determining a suitable door to handle disputes. The human resources department manages experts through the construction and management of the data base of mediators, arbitrators, and judges. The administration bureau manages the implementation of each process of dispute resolution. The education and training department builds long-term planning to procure neutrals and experts dealing with various kinds of disputes within a multi-door courthouse. For this purpose, it is necessary to establish networks among courts, law schools, and associations of scholars in order to facilitate the supply of manpower in ADR neutrals, as well as judges in the long run. This study also provides six case studies of multi-door courthouses across continents in order to grasp the worldwide picture and wide spread phenomena of multi-door courthouse. For this purpose, the United States and Latin American countries including Argentina and Brazil, Middle Eastern countries, and Southeast Asian countries (such as Malaysia and Myanmar), Australia, and Nigeria were chosen. It was found that three kinds of patterns are discernible during the evolution of a multi-door courthouse model. First, the federal courts of the United States, land and environment court in Australia, and Lagos multi-door courthouse in Nigeria may maintain the prototype of a multi-door courthouse model. Second, the judicial systems in Latin American countries tend to show heterogenous patterns in terms of the adaptation of a multi-door courthouse model to their own environments. Some court systems of Latin American countries including those of Argentina and Brazil resemble the generic model of a multi-door courthouse, while other countries show their distinctive pattern of judicial system and ADR systems. Third, it was found that legal pluralism is prevalent in Middle Eastern countries and Southeast Asian countries. For example, Middle Eastern countries such as Saudi Arabia have developed various kinds of dispute resolution methods, such as sulh (mediation), tahkim (arbitration), and med-arb for many centuries, since they have been situated at the state of tribe or clan instead of nation. Accordingly, they have no unified code within the territory. In case of Southeast Asian countries such as Myanmar and Malaysia, they have preserved a strong tradition of customary laws such as Dhammthat in Burma, and Shriah and the Islamic law in Malaysia for a long time. On the other hand, they incorporated a common law system into a secular judicial system in Myanmar and Malaysia during the colonial period. Finally, this article proposes a couple of factors to strengthen or weaken a multi-door courthouse model. The first factor to strengthen a multi-door courthouse model is the maintenance of flexibility and core value of 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 We also find that fund raising is important to build and maintain the multi-door courthouse model, reflecting the fact that there has been a competition surrounding the allocation of funds within the judicial system.

현대시조의 기독교적 상상력 연구 - 선정주·장순하 시조를 중심으로 - (A Study on Christian imagination of the Modern Sijo - On Seon, Jeong-ju and Jang, Sun-ha -)

  • 민병관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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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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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9-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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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현대시조에 나타난 기독교적 상상력에 관한 연구는 양적으로 영쇄한 편이다. 이 연구는 기독교 문학의 심도있는 이해와 기독교 시조문학사의 올바른 정립을 위한 기초 작업의 일환이다. 현대의 시조시인 중에서 기독교적 상상력을 드러낸 시조를 가장 많이 쓴 선정주 시조시인과 장순하 시조시인의 시조를 텍스트로 삼고자 한다. 먼저, 선정주 시조시인(1935~2012)의 시조에 드러난 기독교적 상상력을 파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선정주 시인은 목회자로서 생전에 6권의 시조집과 1권의 시조선집을 발간하였다. 그가 발표한 시조의 대부분에는 기독교적 상상력이 침윤되어 있다. 특히 그의 시조에는 기독교 관련 내용들을 역설적 상상력을 활용하여 시적으로 형상화한 작품들이 다수 있다. 역설적인 표현을 통해 목회자로서 가지게 되는 종교적 번뇌와 구도자적 열망을 드러낸 시조가 다수 있다. 아울러 역설적인 표현을 통해 부활신앙에 대한 시인의 확고한 믿음을 표출한 시조도 다수 있다. 다음으로, 장순하 시조시인(1928~)의 시조에 드러난 기독교적 상상력을 파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장순하 시인은 12권의 시조집과 1권의 전집을 발간하였으며, 현재까지 시조 창작을 하고 있는 현대시조계를 대표할만한 원로 시조시인이다. 그는 1996년 기독교에 입문하여 시조집"사랑학 입문"에 있는 210편을 포함하여 200편이 훨씬 넘는 기독교 관련 시조를 발표하였다. 그의 기독교 관련 시조에는 성경 구절 등을 인용하거나 성경 속의 예화를 차용한 작품들이 대다수이다. 인유적 상상력을 통해 그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으며 종말사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시조가 다수 있다. 이와 같이 살펴본 결과 두 시조시인의 기독교 시조에 나타난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선정주 시조시인의 기독교 시조는 목회자로서의 사명감과 갈급한 심정 및 부활신앙을 역설적 상상력을 통해 형상화하였다. 장순하 시조시인은 성경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변용하는 방법인 인유적 상상력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종말사상을 형상화하였다. 두 시조시인의 기독교 시조에 나타난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선정주 시조시인과 장순하 시조시인은 기독교적 상상력을 표출한 시조를 다수 발표했으며, 각자 개성적인 기독교 시조의 한 영역을 구축하였다. 두 시조시인의 기독교 시조에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와 기독교에 대한 절실한 신앙심을 표출한 작품이 다수 있다. 두 시인의 기독교 시조는 나름의 시적 성취를 이루었으며 기독교 시조의 양적, 질적 심화에 기여를 했기에 기독교 시조문학사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할 만하다. 이 연구 결과를 통하여 앞으로 기독교 관련 시조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기를 기대하며 앞으로 보완해야 할 과제와 연구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창작을 한 다른 시조시인의 작품을 대비하여 고찰함으로써 기독교 시조의 정체성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창작을 한 다른 자유시와의 대비 연구를 통해 한국 기독교 문학의 위상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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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영화정책과 스크린 쿼터제의 변천에 대한 연구 (A study on the changes of the Screen quota system as a Film policy in Korea)

  • 조희문
    • 한국산학기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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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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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82-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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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스크린쿼터제는 한국영화계의 가장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다. 이 제도가 한국의 영화산업의 보호와 성장에 크게 유용하다는 주장과 오히려 과도한 제도적 보호가 자생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6년 7월 1일부터 연간 73일 수준으로 축소되었는데, 이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에서 스크린쿼터제는 두 번의 시행과정을 겪었다. 첫 번째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통치하고 있던 1935년부터 1945년의 해방까지의 기간 동안에 시행된 것이며 또 한 번은 1967년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이르는 기간이다. 전자는 식민지 기간 동안 영화를 정치선전 수단으로 활용하려던 일본인들이 외국영화 특히 미국영화의 수입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로 시행되었다. 1935년에는 외국영화의 상영비율이 전체 영화의 4분의 3 수준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했으며 1936년에는 3분의 2, 1937년에는 절반을 넘지 못하도록 점진적으로 제한 비율을 확대했다.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공격한 이후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이후에는 미국영화의 수입을 전면적으로 금지했다. 외국영화의 상영을 제한했던 이유는 일본영화와 한국영화를 모두 포함하는 국산영화의 상영을 강제적으로 늘리기 위해서였다. 전쟁수행을 위한 정치적 선전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한 것이다. 후자는 한국영화의 산업적 성장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그러나 제도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의 경쟁력은 개선되지 않았으며 극심한 불황에 시달렸다. 정책의 보호로 시장을 독과점한 한국의 영화사들은 관객이 원하는 영화를 개발하는 대신 외국영화의 수입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사 설립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외국영화 수입도 마찬가지였다. 영화사는 경쟁자가 없는 상태에서 특별한 보호를 받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그런 한국영화를 외면했으며 외국영화를 딘 좋아했다. 게다가 스크린 쿼터제는 극장측에 일방적인 의무를 부과함으로서 제작과 유통을 적대적인 관계로 대립하게 만들었다. 경쟁력이 미약한 한국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해야 하는 극장측은 정부의 정책에 지속적으로 반발했다. 스크린 쿼터제는 영화제작자, 극장 운영자, 관객 어느 누구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과도한 보호가 오히려 한국영화의 경쟁력을 약화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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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매장문화재 국가귀속제도의 정책 개선방안 연구 (Improvement of State Ownership of Excavated Cultural Heritage System and Establishment of Policy Direction)

  • 김종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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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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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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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매장문화재 국가귀속제도는 일제강점기의 문화재 법규에서 연유하여 문화재보호법을 거쳐 현행 매장문화재법에 계승되고 있다. 국가귀속제도는 국가문화유산의 근간을 형성하는 국가귀속문화재를 확정하는 절차로서 문화유산 분야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동안 행정의 영역으로만 취급되어 학술적 연구나 정책적 검토에 소홀하였다. 최근 전통문화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문화재가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 확립과 관광 활성화에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의 국가귀속문화재 관리위임 요구가 증대하고 특히, 중요 유물의 확보와 관련해서는 중앙과 지방 간 문화적 헤게모니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국가귀속제도에 있어서 중요한 절차인 국가귀속대상 문화재 선정방식과 보관관리기관 지정과 관련해서는 그동안 지속적인 개선 노력이 있었음에도 각계로부터 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제도개선 요구를 받고 있다. 본 논문은 2011년 매장문화재 법제가 제정 시행된 이후 그 운영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과 개선과제를 도출하여 국가귀속제도의 정책 개선방안을 고찰하였다.

동궐(東闕) 추경원(秋景苑)의 조영과 변천에 관한 고찰 (A Study of the Construction and Change of Chugyeongwon in Donggweol)

  • 오준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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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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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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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연구는 동궐(東闕)에 실존했던 추경원(秋景苑)의 조영과 변천 양상을 실증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세부적으로는 추경원의 조영 위치와 범위, 조영 배경과 의도, 소속 체제와 공간적 변화 양상을 고찰하였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추경원은 창경궁 함인정(涵仁亭) 주변 또는 시민당(時敏堂)과 진수당(進修堂) 사이의 공간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관련 사료에 따르면 추경원은 도총부(都摠府) 서쪽, 협상문(協祥門) 안쪽, 숭문당(崇文堂) 인근에 위치했다고 전해진다. "동궐도형(東闕圖形)"을 통해서도 각각의 조건에 부합하는 추경원의 조영공간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적 실측도 형식의 "창경궁배치도(昌慶宮配置圖)"에 따르면 오늘날 추경원은 창경궁 문정전(文政殿)과 숭문당 남쪽의 녹지공간에 해당한다. 둘째, "동궐도(東闕圖)"에서 추경원은 담장으로 한정된 대지에 수목들이 생육하던 녹지공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내부에 일체의 인공적 시설은 도입되지 않았다. 또한 추경원은 주변 대지보다 표고(標高)가 높은 지형에 입지했다. 특히 추경원의 구성 형식과 입지 특성은 한양에 소재했던 궁궐 외원(外苑)과도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궁궐 외원의 운영 양상을 고려하면 추경원 역시 지세(地勢)의 보존과 배양(培養)을 위해 조영되었다고 판단된다. 셋째, 조선 후기에 걸쳐 추경원은 동궁(東宮)과 함께 창덕궁 또는 창경궁 소속으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추경원은 동궁 영역에 포함된 왕실정원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본래 담장과 협문(夾門)으로 구성되었던 추경원의 서쪽 경계부는 이후 담장과 행각(行閣)이 결합된 형식으로 변모했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추경원은 각종 개발행위로 인해 점차 변질되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소실(消失)되어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일제강점기 『조선명승시선(朝鮮名勝詩選)』에 나타나는 명승고적의 문화경관 연구 - 충청남도 천안을 사례로 - (A Study on the Cultural Landscapes of Scenic Sites on 『Joseon myeongseungsiseon(朝鮮名勝詩選)』 at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 A Case of Cheonan, Chungnam Province -)

  • 이행열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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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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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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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조선명승시선(朝鮮名勝詩選,1915)"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조선환여승람(朝鮮?與勝覽)"을 이용하여 충청남도 천안편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에 나타나는 명승고적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조선명승시선"이 발간된 시대적 상황을 검토해 본 결과 1894년에 발발한 '청일전쟁(淸日戰爭)'에 대한 기억이 기록된 내용으로 발간되었으며, 한일강제합방(1910) 이후의 조선총독부 '동화주의 교육'과 궤를 같이 하였다. 저자인 나루시마 사기무라(成島鷺村)에 대하여는 서문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었다. "명승시선"에서 각 명승고적을 기술하는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곳은 '안성도(15줄)'로, 일본의 '청일전쟁'과 같은 전쟁의 기억을 담고 있는 곳이었다. "여지승람"과 "환여승람"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명승고적은 천안의 경우 모두 13개소가 된다. 대부분 내용이 비슷하거나 유사한 것으로 기술되었다. 다만 '홍경원'과 '성환역'은 기존의 명승고적이 가지고 있는 조선의 산수관에 대한 층 위에 '정유재란' 또는 '청일전쟁'이라고 하는 새로운 전쟁의 역사층을 덧씌워서 전혀 새로운 명승고적의 '장소성'으로 전환시켜 기술하였다는 점이다. 새롭게 기술된 명승고적 중 '안성도'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첫 패배를 안겨준 '안성천전투'에 대한 기억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특히 본문 중에 시노부 순페이의 시를 소개하여 장소성과 시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강조하여 시 감상의 묘미를 극대화시키는 작용을 하도록 기술되었다. 반면 조선의 시는 모두 10편으로 제목과 소재가 대부분 역사적 장소와 연관되며, 내용 또한 그러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할 때 시 감상의 묘미가 더욱 높아진다. 그러나 실제 구성은 전혀 페이지를 달리함으로써 그러한 맥락 관계가 무시되었다. 이러한 명승고적들이 가지는 장소성에 대하여 살펴보면 장소의 위치, 의미, 규모, 주변의 여건 등을 고려해 볼 때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여행자를 위한 서비스 공간, 조망과 휴식 또는 회고를 위한 공간, 예불 또는 추모를 위한 사찰공간, 방어와 보호를 위한 성곽시설, 또는 임금의 어가공간 그리고 옛날 전쟁터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공간으로는 은둔과 동학농민의 투쟁공간이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안이라는 지역의 문화경관으로서의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앞으로 이러한 점을 토대로 하여 지역문화재의 보존과 복원을 위한 정책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동궐도상의 존덕정 영역에 나타난 무편액 건물의 조영사적 고찰 (Historical Studies on the Nameless Buildings at the Jondeokjeong Area in Donggwoldo)

  • 정우진;심우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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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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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8-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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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창덕궁과 창경궁이 공유하는 후원인 동궐 후원은 조선왕조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기술과 사상이 집약된 후원으로서 단연코 한국 조경문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왕실의 휴식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상징적 의례와 인재양성의 장이 되었던 동궐 후원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상당부분 훼철되어 과거의 면모가 일축되었다. 창경궁 북쪽의 후원권역은 일제에 의해 완전히 변형되어, 현재는 주합루에서 옥류천에 이르는 몇 개소의 영역이 후원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중에서 본 연구의 대상이 되는 존덕정 영역은 인조 연간에 옥류천 개발이 완료된 직후부터 화원(花園)으로 조성된 정원으로서, 심추정, 척뇌당, 폄우사, 망춘정, 천향각, 청심정 등의 정자가 존덕정을 중심으로 승경의 요점지에 자리 잡은 화목류와 연지 중심의 공간이었으나 현재 존덕정과 심추정, 폄우사만이 남아 있고, 그 외의 정자들은 멸실되거나 변형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각 건축물에서 감상되는 수요소, 식생, 점경물 등을 분석함으로써 원형적인 조영의도를 구명하는데 주력하였으며, 동궐 후원의 진정성 있는 복원 정비와 조경 시설물을 둘러싼 환경의 보전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정보 구축을 위하여 존덕정 영역의 정자인 심추정, 망춘정, 척뇌당, 천향각, 청연각의 5개 정자의 역사적 기록과 조영실태가 고찰되었다. 이들은 "궁궐지"와 실록에는 명칭이 언급되어 있지만 "동궐도"에는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데, 관련된 문헌자료가 망라되어 고증이 시도되었다. 이중 척뇌당과 심추정은 동궐도상에서 추정 건물을 뚜렷하게 밝힐 수 있었고, 존덕정 서북쪽에 위치한 용도가 불분명한 건물은 천향각 내지는 망춘정이었다고 추정하였으며, 태청문의 담장이 본래 청연각에 둘러쳐져 있었던 담장이었다는 가설도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제껏 동궐도와 동궐 후원연구에서 난관으로 여겨졌던 창덕궁 동북쪽 모퉁이에 위치한 용도와 명칭이 불분명한 건물일곽에 대해서는 연산군과 숙종이 사용했던 기록이 발견되었고, 궁궐 사람들 모르게 유희생활을 하는 임금만의 별당이었음을 밝힐 수 있었다.

미륵사지석탑 붕괴상태 고찰 (A Study of collapsed conditions of the stone pagoda in Mireuk Temple Site)

  • 김덕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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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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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5-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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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미륵사지석탑은 이미 오래전에 붕괴된 상태로 남아 있다. 붕괴된 시기와 원인은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6층까지 무너져 내려 부재가 헝클어진 서측면 하부에는 1층 높이까지 석축이 쌓여 있다. 이 석축은 남아 있는 부분이 더 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이미 오래전에 쌓았다. 그러나 언제 누가 이 석축을 쌓았는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나 전해지는 이야기가 없다. 본 연구에서는 제2장에서 미륵사지석탑의 모습을 표현한 옛 문집 등에 나타나 있는 정황을 시대별로 정리하여 역사적 배경을 짐작해 보았다. 1915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서측면을 둘러싸고 있는 석축 상부 무너진 경사면에 콘크리트를 덮었다. 그 후 1998년도에는 전라북도에서 미륵사지석탑에 대한 구조안전진단을 실시하였다. 문화재위원회는 구조안전 진단에 근거해서 1915년에 공사한 콘크리트를 제거하고, 탑을 보수정비하기로 결정하였다. 탑이 무너져 내린 상태는 콘크리트를 제거하면서 그대로 발견되었다. 탑의 붕괴상태는 지진 또는 기초가 침하되는 현상, 홍수, 태풍 따위의 자연 현상에 따라 각각 다른 모 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가설을 세웠다. 이 논문에서는 제3장에서 역사적으로 기록된, 여러 가지 자연 현상에 의해 무너진 탑들의 모습을 관찰하여 그 특징을 분류해 보았다. 그리고 제4장에서 미륵사지석탑에서 나타나 있는 상태와 앞서의 다른 예들과 비교분석해 보았다. 연구결과 미륵사지석탑은 지표면보다 높게 구성되어 있는 탑의 기초에 해당하는 기단에서 우수에 의한 침식 현상이 발견되었다. 기단에서 발생한 침식은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진행된 현상으로 관찰되었다. 기단 침식이 심해지면서 서측면 1층 벽체가 바깥쪽으로 기울어지게 된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상부층을 받치고 있는 1층 벽체가 바깥쪽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탑의 상부 구조는 평형을 잃어 무너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고찰되었다. 그밖에 지진이나 태풍, 지반 침하와 같은 자연현상에 의해 무너진 탑들에서 나타나는 붕괴상태의 특징이 미륵사지석탑에서는 뚜렷하게 발견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