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coloni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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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후고전기 말기 정치사회권력의 특징: '마을위원회' -식민지초기 사료를 중심으로 (A look at the sociopolitical characteristics of Late Postclassical Maya, focused on "Village Council" - analyzed on early colonial historic sources.)

  • 송영복
    • 국제지역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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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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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3-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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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이 논문은 마야의 비 중앙 집중적인 정치·사회체제에 대한 논의의 한 부분으로 마을위원회에 대하여 관찰하였다. 마을위원회를 "같은 마을의 구성원으로서 그 마을의 지도적인 역할을 하는 복수의 사람들 혹은 그런 사람들의 집합체"라고 개괄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마야 사회에는 마을위원회 혹은 이와 유사한 기관이나 실체가 존재하여 이것이 마을의 의사결정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 나타난다. 일반 마을 사람들이 이러한 제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다수의 마을 지도자들이 촌장과 같은 한 사람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마야와 유럽의 만남의 시기나 식민지시대 초기의 사료들을 통하여 관찰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마을위원회라고 통칭하고 있는 실체가 마을의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기관 중 하나라는 점을 강조할 수 있다. 마을의 입법·행정·사법을 총괄하는 최고의 정치기구로서 촌장의 전횡을 감시·견제하고 강력하게 처벌하기도 하는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사료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들의 선출이 주민들의 직접참여로 이루어진다는 점도 두드러진다. 마을위원회의 구성원들이 대부분 마을의 원로 노인들로 이루어진다는 점 또한 특이할 만하다. 이러한 점들을 통해서 볼 때 마을위원회는 마야의 세계관과 정치관뿐만 아니라 사회구조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즉 마야에는 소수의 엘리트들에게만 권력이 집중화된 구조와는 달리, 다수의 사회구성원들에게 권력이 분산되어 있는 형태가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념 뮤지컬과 독립운동의 기억 -<신흥무관학교>, <구>, <워치>를 중심으로 (Musicals and Memories of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 Centered on the musical Shingheung Military School, Ku: Songs of the Goblin, Watch)

  • 정명문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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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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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9-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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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방식에는 기억 주체와 당대의 권력 관계 즉 기억의 정치학이 반영된다. 본고는 2019년에 공연된 기념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구: 도깨비들의 노래>, <워치>를 통해 변화된 지점들을 분석하였다. 위 작품들은 만주 독립운동, 홍코우 공원의거를 배경으로 하되 기록되지 않은 것을 채우면서 독립 운동에서 기념해야 할 것들을 조정하였다. <신흥무관학교>의 경우, 공식 기록 속 인물을 배경으로 하되 이름 없는 이들을 전면에 내세워 기념 대상을 확대하였다. <구 : 도깨비들의 노래>는 타임 슬립을 통해 망각된 대상을 재현하고 사죄하면서 기억을 수정한다. <워치>는 사진, 뉴스 릴, 신문기사 등 다큐멘터리 기법을 통해 팩션의 스펙터클을 강화하였지만, 기록에 한정되는 한계도 드러난다. 3.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뮤지컬에서는 '민중의 움직임'이 현재와 연결되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들이 발견된다. 이를 위해 공식적 기록에 새로 생산된 가치와 기억을 반영하였고, 군중의 일상과 감정에 공을 쏟았다. 또한 실증적 고찰과 호명하기를 동시에 활용하여 신뢰성을 높였다. "100주년 기념"으로 호출된 뮤지컬에서는 독립운동가와 함께 움직인 군중의 일상과 감정 즉 미시문화사적 접근이 담겨 있다. 기념해야 할 목표와 목적의 이동이 나타난 것이다. 이 시도들은 동시대적 공감대 형성이란 성과를 얻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호동왕자 서사의 근대적 재현 양상 연구 (The Modern Representations of Prince Hodong stories)

  • 유인혁
    • 대중서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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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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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3-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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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근대 이후 호동왕자의 서사가 어떻게 재현되었는지 정리하고 그 의미를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호동왕자의 이야기는 12세기에 『삼국사기』에 처음 소개되었는데, 현재 TV 드라마, 영화, 소설, 희곡 등 다양한 갈래에 걸쳐 재생산되고 있는 대중적이며 민족적인 서사이다. 흥미로운 점은 『삼국사기』를 제외한 근대 이전의 문헌 속에서 호동왕자의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호동왕자는 1935년에 이르러 윤백남에 의해 최초로 문학적으로 재현되었으며, 비로소 현재와 같은 대중성을 갖게 되었다. 즉 호동왕자의 이야기는 근대에 들어와 발견(명)된 '전통'의 표상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윤백남을 필두로 이태준의 『왕자호동』, 유치진의 『자명고』로 이어지는 글쓰기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호동왕자의 성격들을 주조했다. 윤백남은 정사(情死)의 모티프를 삽입하여 낭만적 연인으로서의 호동의 모습을 만들어 냈고, 이태준과 유치진은 낙랑을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으로 설정함으로써 민족(국가)주의적 컨텍스트를 삽입했다. 이 두 양상 모두 『삼국사기』에는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위 작가들에 의해 고안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삽입된 성격들은 각 텍스트들이 생산되었던 시기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윤백남의 경우 과거를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근대적 미의식을 단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태준의 경우 총동원체제를 (반)내면화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사유체계를 보여 주고 있고, 유치진은 해방 공간 속에서 역사적 인물을 통해 민족의 남성성을 상상해내는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렇게 서로 다른 맥락 속에서 소환되고 전유된 호동의 표상들이 모여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호동왕자'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적 상상력의 무대화에 대한 시론 -SF연극의 역사와 현재 (A Study on the Staging of Scientific Imagination -History and Current Status of SF Theaters)

  • 전지니
    • 대중서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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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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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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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고는 'SF연극'의 역사와 현재를 논의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SF연극은 대중에게 여전히 생소한 장르로, 연극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무대는 과학적 상상력을 펼치기에 적절치 않은 공간으로 인지되었다. 연극에 과학적 상상력을 결합한 작품들이 빈번하게 공연되고, SF연극에 대한 인식이 확립되기 시작한 것은 2010년 이후로, 연출자들은 사실적 묘사를 포기하면서 기술의 진보 속에서 고립되는 인간의 심리와 세계의 부조리에 몰두하게 됐고, 이것이 오늘날 한국 SF연극을 개괄하는 바탕이 됐다. 이를 감안하여, SF연극에 대한 연구사와 개념 변화로부터 출발해 식민지시기부터 현재까지 SF극의 공연 현황에 대해 살펴보았다. 현재 SF연극에 대한 함의는 만들어지는 중이며, SF연극의 역사를 검토한 결과 다음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과학적 개연성이나 합리성과 관계없이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하거나 기술의 진보를 언급하면 모두 'SF연극'으로 명명되기에 과학적 상상력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융합을 강조하는 시대에 과학과 무대를 접목했다는 시도 자체가 높이 평가 받으면서, 소재의 진보성에만 천착하고 세계관은 여전히 퇴행적인 경우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여전히 극본이 SF의 고전이나 일본 원작에 기대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르물에 대한 젊은 창작자들의 다양한 시도가 새로운 소재를 원하는 동시대 관객과 호흡할 수 있다면, 한국형 SF극의 저변은 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정책 관점에서의 조선시대 여악에 대한 담론 연구 (Analysis on Policy Discourse of Female Traditional Musician in Joseon Era)

  • 권영지;홍기원
    • 지역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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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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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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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한국사회에서 여성예술인은 성불평등한 구조와 문화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부과된 여성예술가에 대한 왜곡된 대중적 인식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이러한 인식은 문화예술계의 미투(metoo) 운동에서 성폭력의 피해자를 대하는 이차 가해의 행위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 특별히 전통예술분야에서의 여성예술인에 대한 인식은 식민지 시대와 해방 이후 근대화 시기를 기점으로 수립된 음악정책의 특성으로 인하여 그 지위가 더 저급화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악, 여기, 기생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던 조선시대의 여성 예술인들은 그 시대의 권력이 생산하는 지식의 장에서 그 정체성 및 역할과 기능이 만들어졌는데 다차원적인 담론의 층위 중 섹슈얼리티에 관련되는 부분만이 지속적으로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본 논문은 젠더적 분석 없는 전통예술지원정책이 조래할 수 있는 위험(성폭력이 용이한 구조의 지속 등)을 인식하는 가운데 여성예술인이 관련된 정책 담론의 계보를 확인하여 보다 적실성 있는 정책대안을 도출할 수 있는 지식생산을 목적으로 한다. 그 첫 단계로서 여성국악인을 둘러싼 조선시대의 담론을 분석한다. 분석의 결과 여악을 둘러싼 담론은 정치철학적 차원, 음악이론적 차원, 그리고 사회문화적 차원으로 나눌 수 있었다. 이들 중 어떤 차원이 지속성을 유지하게 되는가는 다음 단계의 연구과제로 남겨둔다.

한국의 하안단구 연구 (Researches on fluvial terraces in Korea)

  • 이광률
    • 한국지형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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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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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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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우리나라의 하안단구 연구사를 요약·정리하고, 선행 연구를 토대로 우리나라 하안단구의 지형 특성을 검토하였다. 우리나라의 하안단구 연구사는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1980년대 중반은 초창기 지형학자들에 의해 하안단구 이론이 전파되었던 시기이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는 하안단구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이 집중적으로 배출되어 하안단구에 대한 논의가 우리나라 지형학의 중심에 자리 잡은 시기이다. 2000년대 이후에는 다양한 연구방법이 개발되면서 하안단구에 대한 논의가 한층 성숙되고 연구 성과가 양적으로 풍부해진 시기이다. 우리나라에서 하안단구가 가장 잘 발달한 지역은 태백산맥 일대의 한강 중·상류 및 낙동강 중·상류의 영서 및 영동 하천과 소백산맥의 서사면에 해당하는 남한강 중류, 금강 중·상류, 섬진강 중·상류이다. 지반융기가 활발한 이들 하천에서는 하상비고가 매우 높은 하안단구가 관찰되고, 하천의 하각률이 상대적으로 높다. 그리고 하안단구 형성시기는 신생대 제4기의 기후 변동에 의해서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해당 하천 유역의 기후, 수문, 지질, 지형 등의 환경 조건에 따라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는 것으로 판단된다.

천연기념물 칠곡 금무봉 나무고사리 화석산지에 대한 고찰 (Reconsideration of the Natural Monument Geummubong Petrified Tree Fern Fossil Site, Ghilgok, Korea)

  • 정승호;공달용
    • 자원환경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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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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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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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칠곡 금무봉 나무고사리 화석산지는 1925년 Tateiwa가 중생대 나무고사리 줄기 화석(Cyathocaulis naktongensis)을 처음 발견한 모식산지로서, 그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천연기념물로 지정, 약 90여년 간 보존되어 왔다. 하지만, 발견 당시 나무고사리 화석 산출 층준을 찾지 못해, 전석 상태의 표본을 기반으로 낙동층 내 역암/사암층을 함화석층으로 해석하면서, 금무봉 일대가 광범위하게 문화재구역으로 설정되었다. 2003년 이후, 지정구역 인근 노두에서 나무고사리 화석이 발견되면서 산출지역의 퇴적암상이 특정되었으며, 나무고사리 화석의 외형과 해부학적 특징에 대한 연구가 추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Ogura가 국내에서 보고한 Cyathocaulis속 2종의 분류 기준을 재검토하고, C. naktongensis와 C. tateiwai가 동종일 가능성을 고찰하였다. 또한, 오랫동안 이어져 온 각종 규제에 따른 갈등과 민원 해결을 위해, 현재의 문화재 구역은 시대환경 변화에 맞게 적정성 검토를 통한 큰 폭의 재조정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정원유전자를 활용한 건재고택의 고증복원연구 (A Study on the Restoration of Geonjae old House Garden Using Garden Genes)

  • 홍승훈;이혁재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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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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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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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아산 외암마을의 건재고택정원은 마을을 대표하는 설화산에서 비롯되는 마을의 풍수지리적 여건 및 마을을 관통하며 지나가는 인공물길 등과 더불어 마을의 경관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로서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함유하고 있으나,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유지되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많은 부분이 소실, 교란, 왜곡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외암마을의 주요 가옥에는 전통정원이 조성되어 있었지만, 건재고택의 정원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양식의 정원이 조성되어 서로 다른 정원문화가 하나의 장소에 공존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어, 근대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본연구에서는 건재고택의 정원에 대한 유전자 분석을 통해 과거의 모습을 예측하고, 그 결과에 대한 고증복원을 통해 건재고택의 정원에 대한 복원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다. 또한, 문화재의 원형 복원에 있어 훼손은 최대한 지양하고, 문화재 보전관리의 용이함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과거의 사진과의 대조 및 현장고증의 결과, 건재고택의 정원은 왜곡과 훼손이 반복되어 예전의 모습과는 다른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전자 분석을 통하여 과거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는 복원 방법을 제시할 수 있었다.

수산자원 소유.이용제도의 변천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Evolution of the Holding and Utilizing System of Fisheries Resources in Korea)

  • 류정곤
    • 수산경영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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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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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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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
  • This study deals with the evolutional history of the holding and utilization of fisheries resources in Korea. Fisheries resources have the basic characteristics of the density dependent self-regulating renewable and common property resources, Irrational utilization of fisheries resources is mainly due to the unlimited access to the resources. The holding and utilization of fisheries resources in Koryo era was opened to everyone. But it was nationalized in the early Yi Dynasty. The purpose of its nationalization was to provent the paticular powered-man with their monoplized holding and to levy fisheries tax. Eoeop-peop, the first modern fisheries law in Korea, was enacted as a part of the invasion policy of Japan in 1908. With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in 1910, the Japanese Government established a new institutional system of fisheries as a part of an overall reformation of the institutional for an implementation of the colonial policy. It was very the new enacted Fisheries Law (Gyogyorei). Also the Government enacted compulsorily another new Fisheries Law (Chosen Gyogyorei) with its adjunct laws and regulations revise the institutional system of fisheries on May 1, 1930. After Eoeop-peop enactment, the fisheries resources in Korea could be used only under the license, permission, and statement. After Korea was from Japan in 1945, Korea Government at last enacted the new fisheries law (Susaneop-peop) in 1953. The goal of Susaneop-peop was to achive the general usage and protection of the fisheries resources, and to attain the development and democratization of the fishery in Korea. This law was amended 13 times until 1990. The license fishery have a legal right on the fishery, called a fishery rigt. This right means a right of exclusive occupation and utilization of a unit of the inshore fishing grounds. The main evolutional issues of license fishery are as the following : 1) the foundation of the exclusive usable fishery right(1911, Gyogyorei), 2) the deletion of the settled U9space lift net and settled space sein net fishery, and the expansion of the cooperative fishery-No.1, 2, and 3 type cooperative fishery-(3rd amendment, 1963), 3) the deletion of the No.2 and 3 type cooperative fishery, and the separation of the culturing fishery in No.1 and 2 type culturing fishery (13th amendment, 1990). The effective period of the license fishery was amended as the following : 1) 1908(Eoeop-peop) : within 10 years, renovation system, 2) 1929(Chosen Gyogyorei) : within 10 years, unlimited extension system, 3) 1971. 7th amendment : 10 years, renovation system, 4) 1972. 8th amendment : 10 years, only 1 extension system, 5) 1975. 9th amendment : 5-10 years, only 1 extension system, 6) 1990.13th amendment : 10 years, within 10 years of total extensional years. The priority order of the fishery license was established in 1953 (Susaneop-peop). The amendment of it is as follows : 1) 1953. enactment \circled1 the fishing grounds that the fishery right is extablished 1st order : the existing fishery right man, unlimited renovation 2nd order : the corporate that the regional fisherfolk organized 3rd order : the rest experienced fishermen \circled2 new fishing grounds 1st order : the corporate that the regional fisherfolk organized 2nd order : the rest experienced fishermen 2) 1971. 9th amendment \circled1 the fishing grounds that the fishery right is established 1st order : the existing fishery right man, unlimited renovation 2nd order : the Eochongye that the regional fisherfolk organized 3rd order : the regional fishery cooperative that the regional fisherfolk organized 4th order : the rest experienced fishermen \circled2 new fishing grounds 1st order : the Eochongye that the regional fisherfolk organized 2nd order : the regional fishery cooperative that the regional fisherfolk organized 3rd order : the rest experienced fishermen 3) 1981. 10th amendment \circled1 the inside of No.1 type cooperative fishing grounds 1st order : the Eochongye that the regional fisherfolk organized 2nd order : the regional fishery cooperative that the regional fisherfolk organized 3rd orer : the rest experienced fishermen 4) 1990. 13th amendment \circled1 No.1 type cultural fishery 1st order : the Eochongye that the regional fisherfolk organized 2nd order : the regional fishery cooperative that the regional fisherfolk organized 3rd order : the rest experienced fishermen \circled2 No.2 type cultural and settle fisher : general priority order The effective period of the permission fishery was amended 6 timed. First, it was within 5 years and renovation system (Eoeop-peop). Now it is 5 years and renovation system. The effective period of the statement fishery was amended 4 times. First, it was within 5 years, and then was amended within 3 years(Chonsen Gyogyorei). Now it is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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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 중(中) 사혈(瀉血)에 관한 연구(硏究) (A Study on the Blood-Letting Therapy in Elementary Questions)

  • 이준근
    • 대한한의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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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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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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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Blood-Letting Therapy is a rational and ecological medical treatment by which we can heal most of the diseases by removing the static blood which precipitates in the blood vessel and blocks the flowing of blood. And the static blood is the generic term for the injurious, bad, dead and precipitated blood which is blocked the capillary vessel. The Yellow Emperor's Canon of Internal Medicine says that "the patient is treated with drugs internally and stone acupuncture externally. "In the old texts, the blood-letting therapy is mentioned as blood-letting, network vessel pricking, bloodletting, pricking, and arousing pulses etc and it is noted down as the method of network vessel pricking in 'On the Application of Needles' of Spiritual Pivot. Nine-pricking therapy, twelve-pricking therapy and five-pricking therapy are recorded in the methods of network vessel pricking and among them, the method of squeezing blood after pricking the affected part is explained as the network vessel pricking. There are four methods of network vessel pricking, pricking, picking, cluster needling and scatter-pricking and they are fluidly applied to the various symptoms of diseases. In 'On Discriminative Treating for Patients of Different Regions' in Elementary Questions, Ki-baek emphasizes "most of the local people, there are black in skin and loose in striate, and their diseases are mostly of carbuncle kind. It is suitable to treat the disease with stone therapy to prick with stone, so the stone therapy is transmitted from the east. "And in 'On the Corresponding Relation Between the Eum and Yang of Man and All Things' in Elementary Questions, when the Emperor asked Ki-Back, he answered "sthenia means the sthenia of evil, and deficiency means the deficiency of healthy energy. When the blood is sthenic, the evil should be discharged by pricking when out letting the blood; deficiency of vital energy is the asthenia of channels and network vessels, so the energy should drain from the channel which is not deficient, to replenish. "And in this case we can use the methods of 'Breaking out the static bloods', 'driving out the static bloods', blood-letting'. With this we can infer that the blood-letting therapy is made use of the important medical treatments from the ancient times. Especially in referring to the principles of treatment in The Yellow Emperor's Canon of Internal Medicine, it mostly alluded to acupuncture therapies and only eleven times to medicinal treatments. This is to verify that the blood-letting therapy formed the foundation of the medical art. In Dong's Therapy of Acupuncture-Moxibustion and Bloodletting, Dong Kyeong-Chang gave emphasis on the points that there must be extravasated bloods without exception in the serious illnesses which is old, unnatural, accompanying acute pains and so we can revive our body‘s sprit by circulating 'gi' and static blood piled up in the network vessel, regulating the weakness and strength, and controling the disharmony of the internal organs. The blood-letting therapy has effect on the orifice in emergency, such as fore draining, freeing network vessels, harmonizing gi and blood, relieving pain, dispersing swelling and concretion, sedation, resolving toxin as well as strengthening the heart, relieving itching. So it has distinguished effect on all kinds of medical treatment to the modern people. But by the change of social customs and the confucianism of confucius - it is widely spread on the period of North and South Dynasties, 'Wi' and 'Jin' in china and the period of the Three States in korea - The blood-letting therapy which was regarded as the most important medicinal treatment withered rapidly. And Confucius accentuated the importance of our body and all its members, loyalty and filial piety and banned any damage of our body under no circumstances. As a result of it, the therapy of blood-letting had a rapid decrease and barely kept itself in existence in both countries. What is worse, at the period of Japanese colonial rule of korea and our nation's founding of early stage, it has been withered by the high-handed policy to change Oriental Medicine into modern medical science. So the therapy of blood-letting barely kept itself in existence in some Buddhist temples. Another case, it has handed down as a old-fashioned quick fix in folk remedies. But all kinds of the contamination of heavy metals and the misuses of antibiotics are widely spread nowadays, which increased diseases of adult people and incurable diseases as modern society unavoidably made its way into a highly industrial society. To make us more miserable, the western medical science - the antibiotics and surgical operation medical science - already reveals itself into a limit. The necessity of a new medical science which can give a security to the patients who are suffering from the diseases of adult people and the incurable diseases is especially come into the force nowadays. In view of the results after bibliographically studying on the blood-letting Therapy in Elementary Questions of the Yellow Emperor's Canon of Internal Medicine, the blood-letting therapy has acted for the important Oriental medicinal science and has been clarified the prominent effects on the diseases of adult people and the incurable diseases. So it is regarded as an appropriate thing that we lay out a determined theory of the blood-letting therapy and of course prevent the unwanted side effects from inappropriate medicinal treatments, and make full use of clinic by elevating the curative value and that we win back our self-respect of medical treatment which is dominated from the western medical science and ultimately contribute to national medical welf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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