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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벤키족 씨족명 분포 현황 및 의미 분석: 바이(Baj), 킴(Kim), 샤마/사마(Shama/Sama)를 중심으로 (The Analysis of the Distribution and Meaning of the Evenki's Clan Name: Centering on Baj, Kim, and Shama/Sama)

  • 엄순천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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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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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43-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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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본 논문에서는 알타이어족, 예니세이어족, 고립어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에벤키족 씨족명 어근 바이, 킴, 사마를 중심으로 해당 씨족명의 기원과 의미, 분포현황, 이동경로, 해당 씨족명이 존재하는 시베리아 제 민족 사이의 친연 관계를 규명했다. 씨족명 '바이'의 기원에 대해 아직 명확하게 규명된 바는 없지만 그 의미를 둘러싸고 '북쪽', '흰색', '풍요로운' 혹은 '자연의'라는 세 가지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씨족명 '바이~'는 시베리아 제민족 사이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먼저 알타이제어 만주-퉁구스어파에 속하는 에벤키, 에벤, 나나이, 울치, 오로크, 오로치, 만주족 그리고 몽고어파와 투르크어파에 분포되어 있으며 예니세이어족이나 고립어족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이 어근의 씨족명이 에벤키족 사이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이 씨족명은 프리바이칼리예의 에벤키족에서 기원하여 인근의 부랴트, 몽골, 야쿠트족 사이로 넓게 전파된 뒤 이후 동쪽으로는 아무르강의 닙흐족, 북쪽으로는 유카기르와 케트족 같은 예니세이 고아시아제어권 민족, 서쪽으로는 엔츠족과 셀쿠프족 같은 사모예드제어권 민족에게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씨족명 '킴~'은 먼 고대에 기원하며 만주-퉁구스어파에 존재하는 유사한 단어, 에벤키족 씨족명 어근 '킴~'과 음성학적으로 유사한 중국인의 성 '김', 에벤키족의 설화를 바탕으로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씨족명 '킴~'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금, 쇠, 돌과도 일정정도 관련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또 씨족명 '킴~'은 시베리아 소수민족 사이에 널리 분포되어 있지만 에벤키족 사이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중국 인근과 페르시아에도 분포되어 있었다. 씨족명 '킴~'의 기원은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지만 먼 고대 바이칼 인근의 에벤키족에 편입된 후 만주-퉁구스의 제민족 사이에 널리 전파되었고 더 나아가 투르크제민족 사이로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씨족명 '샤마/사마~'는 알타이어족의 만주-퉁구스제어권, 투르크제어권, 우랄어족의 사모예드어제어권 민족 등 시베리아의 전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음성적 형태도 무척 다양한데 에벤키족 사이에 가장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 씨족명이 알타이어족과 우랄어족의 제민족 사이에서 발견된다는 점은 이 두 어족의 민족들이 아주 먼 과거에 관련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 씨족명은 오로크족을 제외한 만주-퉁구스제어권의 모든 민족 사이에서 발견되는데 이에 대한 규명이 필요해 보인다.

강릉(江陵) 오죽헌(烏竹軒)의 조선시대 사회사(社會史)적 의미 (The social historic meaning of Gangneung-Ojukhen in Joseon Dynasty)

  • 이상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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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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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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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보물 제165호인 오죽헌은 강원도 내에 남아있는 조선전기 가장 이른 시기 사대부 주택의 별당이다. 집의 형태적 측면은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낳은 집으로 유명하다. 강릉최씨 가문에 의해 처음 지어졌으나 자녀균분상속의 관행 속에서 사위에게 상속되었고, 최종적으로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이씨가 외손인 권처균에게 배묘조로 상속해 주었다. 권처균의 호가 '오죽헌'이었으므로 택호 또한 오죽헌이 된 것이다. 오죽헌은 조선시대의 상속과 봉사관행의 변화 양상을 조망해 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오죽헌이 용인이씨, 신사임당, 그리고 이이, 권처균 등 직계가 아닌 외손들과 특별한 인연이 맺어지게 되는 것은 서류부가와 친정살이라고 하는 유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용인이씨, 신사임당은 친정인 오죽헌에서 태어나 자랐다. 용인이씨는 결혼 직후부터 사망할 때까지 친정인 오죽헌에서 살았다. 신사임당도 결혼 후 근친을 위해 친정을 자주 오가며 생활했고, 이이를 오죽헌에서 낳았다. 이이는 유년을 외조모 용인이씨 슬하에서 보냈고, 강릉을 떠나서도 어머니를 따라 외가를 자주 오갔으므로 외조모와의 정이 매우 각별하여 외조모의 봉사손이 된다. 권처균이 용인이씨 배묘손이 되는 것도 아버지 권화가 데릴사위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오죽헌은 서류부가와 친정살이라고 하는 조선전기 혼인과 생활풍속을 엿볼 수 있는 집이다. 이이가 외가로 지칭했던 강릉 북평촌 최씨마을에는 권처균의 직계손인 안동권씨 추밀공파가 세거하는 동성마을이 형성되었다. 17세기부터는 부계친족집단을 중시하는 사회사적 변화가 일어난다. 오죽헌은 이러한 시점에 권처균에게 상속되었고, 최씨마을이었던 죽헌동에 안동권씨 집거지인 동성마을이 만들어지는 시발이 되었다. 오죽헌은 조선전기에서 후기로 변화되는 상속 친족 혼인제도 등과 같은 사회의 변화상을 한눈에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홍씨독서록의 목록기술방식에 대한 고찰 (An analysis on the bibliographical description of the Hong-ssi Tok-so-rok(홍씨독서록))

  • 리상용
    • 한국문헌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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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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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5-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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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background and circumstances of the bibliographical description method appearing in the Hong-ssi Tok-so-rok, or an annotated classified bibliography of Korean and Chinese books edited for the Hongs and their clan. The conclusions are as follows. Each entries of the bibliography are entered under titles, and generally followed by bibliographic elements of volumes, written age, author's name, functional word of authorship, and annotation. The written age is stated by the dynasty name for the first authors within each classes. However some anonymous works and government compiled works are recorded the king's shrine name or the reign title. Entries of the bibliography are arranged by the chronological order in each classes. The writer's name is generally described by 'surname + given name'. However it is sometimes also recorded in the one of the following forms; Appellation (hao, 호) or posthumous title + surname + given name. Sumame + appellation or posthumous title + given name. Appellation ( (hao, 호) or posthumous title + sumame + Sonsaeng (선행) + given name. Sumame + government position title + given name. Appellation (hao, 호) + surname + cha(자, master). surname + ssi(씨). ect. Married women's names are stated by her husband's surname followed by the Chinese character 부 or 절부 which signifies wife or virtuous women, and then her given name. The works written or compiled by King's order (명찬서) are generally described in the form of 명제신+ functional word of authorship. Names of government agencies are occasionally stated as the authors' for the government publications or government compiled works. The functional words of authorship are described in the phrase of 소작야, 소편야 instead of 저, 찬, ect. It is more noticeable that in the case of the collections of individual writers' works the wording of 지문야, 지시야 is written after the name of the author. More complicated descriptive forms are seen in the entries of works for the shared authorship and mixed responsibility. Two or more than two monographic works of the same author classed in the same class are annotated all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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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과 공동체 - 파평윤씨 노종파 종족 운동의 재검토 - (Lineage Groups and the Communities - A Reexamination of the Movement of Nojongpa Lineage of the P'ap'yong Yun Clan)

  • 김문용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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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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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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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막스 베버는 중국의 종족(宗族) 조직을 자급자족의 자기완결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의 관점은 유사한 종법적 친족 조직인 조선시대 문중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구성원들의 삶에서 종족 조직 외부를 상정(想定)하지 않는 그의 관점은 종족에 대한 이해를 지나치게 단순화했다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17세기 조선에 출현한 파평윤씨(坡坪尹氏) 노종파(魯宗派)의 종족 운동을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문중의 공동체적 성격에 대해 논한다. 이 글의 주요 논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노종파는 봉사(奉祀)와 종법적 규범, 자제교육, 물적 토대로서의 족산(族産)을 포함하는 체계적인 미래 기획을 수립하였다. 이 기획은 송대의 선례들을 전범으로 표방하였지만 실제로 양자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종족 운동을 인도(人道)와 인륜(人倫)의 실천(實踐)으로 간주하고 매진함으로써 그 간격을 극복하고 종족의 결집을 유도해 낼 수 있었다. 둘째, 노종파의 종족 기획에서 가장 특징적인 족산 부문(의전(義田) 의곡(義穀))은 제전(祭田)의 기능 이외에 자제교육 지원에 중점을 둔 반면, 기한자(飢寒者) 구제 등 구성원의 생활 지원 기능에서는 취약하였다. 노종파 전체의 의전과 의곡은 결국 40년 만에 폐지되고 소종 단위의 의창(義倉)이 대안으로 모색되었다. 이는 종족의 영속이라는 그들의 기대와 문중의 낮은 물적 토대 수준 사이의 거리를 함축하는 것이었다. 셋째, 문중은 다양한 지역공동체와의 병존 경쟁을 통해 수립되었지만, 가족의 동거공재(同居共財) 속성을 구현하는 데는 의지도 여건도 충분하지 않았고, 결국 구성원의 삶의 재생산에 전반적으로 관여하는 생활공동체로서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 문중은 자급자족의 자기완결적인 조직이 아니라, 향촌 또는 국가와 긴밀히 교통하면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조직이었다.

Korean Names

  • Kim, Chin-W.
    • 인문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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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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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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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Historical origins of both personal names and place names in Korea are reviewed. It is shown that names of native origin have been largely replaced by those of Sino-Korean names. Some statistics are given on the basis of the 2000 census data in South Korea. A unique method of naming personal names which contain a generation marker called hangnyol is reviewed. This enables the person to figure out one's position and others in the family tree up to as many as ten generations without going consulting the book of genealogy. While this practice had a role to play in a vertically structured society where seniority is important, it is less practiced as the society is becoming more egalitarian, so that native names, not writable in Chinese characters, are on the rise. In this global age, a person is not just a member of his family or clan, s/he is also a member of the international community. The author proposes several things that should be considered in naming to fit the modern global age: euphony of names, ambiguity, possible bad connotations when Romanized, unintended homophones with comic meanings,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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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제정(光霽亭) 장소 전승의 함의와 의미맥락 (Implication and Its Meaning Contact of Gwangje-jeong's Place Transmission)

  • 노재현;이석우;이정한;정경숙;김영숙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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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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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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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전북 임실군 삼계면에 소재한 광제정의 건립 배경 및 연혁 그리고 장소 및 공간특질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통해 광제정 조영 및 이건(移建)에 담긴 상징과 장소적 함의를 추찰(推察)할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옛 광제정 터와 현 광제정에 대한 '물리적 환경 인간활동 상징성과 의미'를 중심으로 해석할 때 다음과 같은 장소성과 장소전승의 의미가 도출되었다. 정명(亭名)의 '광제(光霽)'란 선비로서 혼탁한 속세에 물들지 않겠다는 매당(梅堂) 양돈(楊墩)의 지조를 상징하며, 이는 매당 생존의 시대상황과 무관치 않다. 광제정의 누정제영을 통해, 은일을 실현코자 한 매당의 심정과 광풍제월의 마음으로 우뚝 선 기상이 엿보인다. 광제정중건기를 통해 볼 때 광제정에 매화를 심고 광제라는 현판을 내건 주체가 바로 매당 자신이며 매당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광제정은 매당을 기리는 상징물로 존재해 왔는데 이는 경사지를 이용해 조성된 돈대(墩臺)와 매화 식재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광제정 입구 '숙호(宿虎)마을'과 광제정 우측으로 돌출된 '복호암(伏虎巖)'은 매당을 배향하는 공간이라는 장소성이 함축된 표현이며, 이곳에 새겨진 양집하의 5언시에도 매당을 추념하는 공간 아계사(阿溪祠)의 장소성이 잘 묘사되어 있다. 매당을 배향한 아계사가 고종5년(1868) 훼철되면서 그 유지(遺址)는 '광제정 이건을 위한 터'로의 쓰임새를 보였다. 광제정 건립 이후 최소 359년간 이어져 왔던 후천리 옛 광제정 터와 그 주변은 광제정의 이건에도 불구하고 '광제정 광제마을 광제교 광제천' 등의 지명 속에 '광제'라는 전부지명소로 남아 매당을 기리는 장소로 전승되고 있다. 광제정은 남원 양씨 종중의 '연대의 공간'이라는 뚜렷한 구심적 장소로, 전승될 수 있었던 배후에는 선조의 덕업을 숭상하며 시대적 고민을 함께한 후손과 종중 및 교우자 간의 동료의식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장소 전승의 이면에는 매당의 인품과 '광풍제월'의 기상을 기리고자 하는 추모의 정 그리고 선조의 덕업을 이어받아 지켜나가는 '봉선(奉先)'의 정신이 깊이 작용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Achaemenes)왕조 비수툰(Bisotun) 부조에 묘사된 복식 연구 (A Study on Costume Styles on the Bisotun Relief of the Achaemenid Persian Empire)

  • 장영수
    • 한국의상디자인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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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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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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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This paper is a study on the Bisotun relief of the Achaemenid Dynasty in ancient Persia. The Bisotun relief consists of the relief and the inscriptions which was completed through 7 phases. The inscriptions describe how King Darius suppressed the rebels in Elamite, Babili and ancient Persian languages. This relief is a work during the early Darius period and it describes using the traditions of Mesopotamia in terms of the theme and structure. In terms of structural features, it follows the typical features of the Assyrian arts, the beard and the shape of hair style. On the other hand, the smooth curves used to describe the creases of the clothes and the supple body was not a typical oriental feature. It was known to be because of Greek influence from their communications. It also showed the dressings of the clans that made up the Achaemenid Dynasty through the 9 rebellions wearing clothes unique to their clan and the inscription that was inscribed with the name of the clans. The clothing and ornaments they were wearing can be divided into two groups, the clans that wore one-piece style Persian dress and clans that wore tunic jackets and trousers which is a typical dressing style of the noma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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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군 육절려(六節閭)의 정려표창 연기(年記)와 육절 대상인물 고찰 (A Study on the Period of Commendatorying Jeongnyeo(旌閭) of Yukjeollyeo(六節閭) in Hoengseong-gun and People of Yukjeol(六節))

  • 이상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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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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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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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글에서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5호인 횡성군 육절려의 중심인물인 서예원(徐禮元) 일가가 정려를 받게 되는 경위와 명확한 정려표창 연기(年記)를 밝히고, 5명의 정려가 걸려있음에도 '육절려'라는 명칭을 쓴 사유를 비롯하여 육절에 해당되는 인물을 구체적으로 고증해 보았다. 서예원은 진주목사로 재직하면서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가족과 함께 전사하였다. 서예원 사후 1811년부터 횡성문중과 지역 유생들이 관(官)에 청원을 올려 1817년 서예원과 그의 처 전주이씨(全州李氏)에게 정려가 내려졌고, 횡성에 정려각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서예원의 장남인 서계성(徐繼聖)과 그의 처 풍천노씨(豊川盧氏), 서예원의 시집가지 않은 딸의 정려를 청하는 추가 청원을 올려 1832년에 모두 정려를 받았고, 이로 인해 횡성의 정려는 '오정려(五旌閭)'로 불렸다. 이후 춘천 밀양문중에서 횡성문중 후손들이 서예원의 장파(長派)가 아니라는 이유로 정려를 밀양으로 이건해 가려고 했으나, 이건하지 못하자 1945년 밀양에 새로운 여각을 새우고 '육절려'라고 명했다. 1945년까지 횡성의 정려각 명칭은 계속 '오정려'로 사용되고 있었고, 1945년 직후 육절려 현판이 걸렸다. 정려를 받은 인물이 5명임에도 불구하고 '육절려'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13년 만에 쇄환되어 온 서예원의 차자(次子)인 서계철(徐繼哲)의 절의를 함께 기리기 위해서였다. 횡성문중에서는 5명의 정려표창 이후에 서계철도 함께 정려를 내려줄 것을 여러 번 청원했으나 끝내 정려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정려를 받은 5명과 함께 서계철의 절의를 함께 기려 '육절'로 숭모하였던 것이다. 본 연구를 통해 그간 연구가 미진했던 육절려의 연혁과 역사성을 좀 더 명확히 밝힐 수 있었다.

복암(復菴) 이설(李?)의 한문산문(漢文散文) 연구(硏究) (A Study on Bogam Yi seol's(李?) Essays in Classical Chinese)

  • 조상우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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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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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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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고는 이설의 문집인 "복암집"에 실려 있는 한문산문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본고에서는 이설의 한문산문 내용 분석에 앞서서 이설의 가문과 이설이 살아온 과정을 살폈다. 이설은 조선조의 명문가인 연안 이씨의 후손으로 그 선조들은 대대로 문장가였으며, 직계 조상인 이귀와 그 아들들은 반정을 통해 사회의 모순을 바로 잡기도 하였다. 이설의 한문산문을 분석한 결과 "화이론(華夷論)의 구현과 항일 의지, 사회 안정을 위한 시무 방안 제시"로 대별하여 제시하였다. 전자에 대해서는 일본에 의해 망해가는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제시하고 무엇이 문제인가를 서술하였다. 그러면서 청을 배반하지 말고 일본은 축출해야 할 원수 나라임을 밝히고 있어 이설의 확고한 항일 의지를 알 수 있다. 후자에서는 조선 후기에 있었던 난민과 동학의 무리들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방안을 제시해 놓고 있다. 그 방안을 보면 "애통하는 조서를 내려 뉘우치는 뜻을 보이고 백성을 위로하기, 진휼(賑恤)하는 정치를 급히 시행하여 흩어져 있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 궁궐을 엄히 지키어 간세배(奸細輩)의 출입을 끊기, 구하는 길을 널리 열어 놓고 여러 사람의 계책을 듣기, 원병의 도움을 믿고 무비(武備)를 늦추지 말기" 등이다. 이상의 서술로 볼 때 이설은 의리를 목숨보다도 중요하게 여겼고, 자신이 옳다고 여긴 것은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려고 노력한 인물이라 평할 수 있다.

부동산의 제3자간 명의신탁에 관한 대법원의 판례평석 (Review of the Supreme Court Judgement on Real Estate Nominal Trust without Intermediate Registration)

  • 박광현
    • 한국컴퓨터정보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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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컴퓨터정보학회 2016년도 제54차 하계학술대회논문집 2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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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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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2016년 5월 19일 대법원은 전원합의체판결에서 부동산 매수자가 본인 명의로 소유권이전등기를 하지 않고 등기를 매도인에게서 직접 명의수탁자로 이전하는 제3자간 명의신탁(중간생략등기형 명의신탁)의 경우 명의수탁자가 신탁부동산을 임의로 처분하여도 형사처벌를 할 수 없다는 판결을 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민법과 형법의 교차영역인 명의신탁에서 민사사건의 형사화를 지양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지만 이에 따른 관련법의 정비를 통한 법개정을 제안한다. 즉, 명의신탁에 관한 법제 간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부동산 실권리자명의 등기에 관한 법률'의 개정이 요구된다. 또한 부동산소유자가 그 등기명의를 타인에게 신탁하기로 하는 명의신탁약정을 맺고 그 등기명의를 명의수탁자에게 이전하는 소위 2자간 명의신탁의 경우도 비범죄화를 함으로써 법체계의 논리성과 통일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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