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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교육과정에서의 고전 대하소설 교육의 필요성과 내용 -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를 중심으로 (Need and Contents of Classical River Novels in Secondary Education - Focus on highschool literature textbooks)

  • 한길연
    • 고전문학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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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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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9-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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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고전 대하소설은 학생들에게 한국적 대서사 문학의 양식과 미감 및 공동체적 생활문화를 전수하는 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과 연계하여 세계관을 확충하고 정서를 함양하며 창의적인 사고력을 기르게 하는 데 중요한 교육자료이다. 본 논문에서는 중등교육과정에서 고전 대하소설을 가르쳐야 하는 필요성을 재점검하고,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를 중심으로 고전대하소설의 교육내용을 구상해 보았다. 이러한 작업은 서사문학사적 위상과 문화사적 가치로 볼 때 고전 대하소설이 큰 의미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중등교육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외면당해온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먼저 고전소설을 균형 있게 교육하고, 현대 대하소설과 연계 교육을 실시하며, 대서사의 양식과 미감을 알려주고, 조선후기의 다양한 문화를 접하도록 하기 위해 중등교육과정에서 고전 대하소설을 교육할 필요가 있음을 검토하였다. 학생들에게 대하소설의 개념과 범위, 내용과 특질을 명확히 인지시키는 것은 물론, 조선후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하소설 갈래의 전통계승과 변모 과정을 알려주고, 대서사의 장대함과 섬세함을 체득하여 자신과 관련한 대서사를 설계하도록 하며,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삶에 대해 성찰하고 문화콘텐츠로 활용케 하려면 고전 대하소설에 관한 교육이 절실하다. 다음으로는 고전 대하소설을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교육내용을 설계해 보았다. 고전 대하소설 단독으로 교육하는 경우, 대략적인 개요로부터 세부적인 대목으로 작품을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학생들 스스로 자신과 관련한 대서사 양식을 구상하도록 하는 작업을 병행함으로써, 대하소설의 내용과 형식을 명확히 이해하게 하는 것은 물론 일상과 문학을 긴밀히 연결시킬 수 있는 교육내용을 제시하였다. 현대 대하소설과 연계하여 교육하는 경우, 구조적 측면 작가적 측면에서의 공통점을 주지시키면서도 시대에 따른 차이점을 인지하게 함으로써, 대하소설의 전통 계승과 변모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교육내용을 마련하였다. 문학 교과서에 고전 대하소설이 실린다면, 학생들은 그 전모를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고전 대하소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하루 빨리 고전 대하소설이 교과서에 실려 학생들이 한국문학의 성격과 역사를 체계적으로 인식하고, 인간과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며, 대서사 양식을 수용 생산하는 창의적 문학능력을 함양하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창흡과 간챠잔을 통해서 본 18·19세기 한일 한시의 한 면모 (Aspects of Chinese Poetry in Korea and Japan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as Demonstrated by Kim Chang Heup and Kan Chazan)

  • 최귀묵
    • 고전문학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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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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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5-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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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논문에서 필자는 한국의 김창흡과 일본의 간챠잔의 시론과 한시 작품을 비교 검토했다. 본론에서 얻은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창흡과 간챠잔은 의고주의 비판에 동조했다.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견이 일치했다. 성당시를 일방적으로 모방하지 않는다. 눈앞의 (소소하기까지 한) 경물에 눈길을 주고, 거기서 촉발된 차분한 정감을 담는다. 과장된 언어가 아닌 실다운 언어를 사용한다. 모름지기 시는 사실적이어야 한다. 두 사람의 차이점 또한 주목된다. 김창흡은 정감과 경물은 천리를 매개로 하여 작품 안에서 만나게 되며, 둘을 매개하는 언어 표현은 철학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고 했다. 반면 간챠잔은 정감과 경물을 매개하는 천리를 상정하지 않았다. 간챠잔은 경물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세밀하게 표현하는 데 작시의 이상이 있다고 했다. 요컨대 김창흡은 경물을 통해 이치를 표현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간챠잔은 경물 자체를 표현하는 데 머문 차이가 있다. 또한 김창흡은 시는 천리의 표현이면서 국가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담아내는 고차원의 언어활동이라고 했다. 사대부로서 문학의 위상을 높이 두고,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크다고 했다. 반면 간챠잔은 문학은 오락이라고 하면서 문학은 철학과 정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기 고유의 영역이 있다고 보았다. 김창흡은 문학은 학문과 가까운 자리에 있다고 했다면 간챠잔은 문학은 문예여야 한다고 한 것이다. 김창흡과 간챠잔의 시학이 각자 개인의 성취라고 볼 것인가, 아니면 두 나라 한시사의 기저에 놓여 있던 특성이 두 사람을 만나서 표면화한 것인가 생각해 볼 수 있다. 필자는 두 사람의 시학은 좁게는 한시, 나아가는 두 나라 문학 일반의 특성을 표면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범에 매이지 말고 실경을 개성적으로 그리라는 요구는 오랜 기간 성장해 온 두 나라 문학의 특성이 드러나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나주 복암리 목간 출토의 고고학적 의의 (Archaeological Meanings of Wooden Tablets from Bogam-ri in Naju)

  • 김혜정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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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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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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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2008년 나주 복암리유적에서 백제지방 최초로 목간이 출토되었다. 이 글에서는 목간을 묵서가 있는 목제품으로 정의하고 복암리 유적 발굴보고서에 수록된 목간 65점 중 묵서가 확인된 13점을 대상으로 백제 목간 출토현황과 비교하여 복암리 목간의 의미를 살펴 보았다. 복암리 출토 목간은 모두 대형의 1호수혈에서 일괄 출토되었다. 수혈 내부 토층은 모두 43개의 층으로 세분되나 출토된 목간을 비롯한 다수의 목제품, 토기, 기와 등 유물의 시기적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목간은 다른 유구에서는 출토되지 않았으며 수혈에 일부러 폐기한 것으로 보이는데, 목간의 형태적 특징을 통해 2차 폐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복암리 목간은 간지명 묵서 '경오년(庚午年)'이 확인된 목간과 $C^{14}$ 연대측정 결과 등을 토대로 610년을 중심연대로 7세기 초반으로 편년된다. 출토된 13점의 목간을 묵서 내용과 형태적 특징을 토대로 기능적으로 분류하면 문서목간 6점, 부찰목간 6점, 기타목간 1점으로 나뉜다. 현재까지 출토된 백제 목간은 총 89점으로 출토 지역은 나주와 금산을 제외하면 모두 부여에서 출토되었고, 사비도성 안팎의 왕궁지, 궁원지, 사찰 등으로 다양하다. 복암리 목간과 비교되는 주요 백제 목간으로는 관북리 목간, 궁남지 목간, 쌍북리 280-5번지 목간 등이다. 이들 목간과의 비교를 통해 웅진도독부 시절의 지명에 대한 검토, 지명+관등+인명 순으로 정형화된 신분표시 방식, 백제에서 군제가 실시되었고 복암리는 군이 설치된 지역이었다는 단서, 정중제 실시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복암리 목간은 작성시기(610년), 작성지(군이 설치된 두힐성), 작성주체(군좌, 지방관 등)가 확실하며 기록된 내용은 백제 목간의 표준화된 신분표시 방식, 서사방식, 정중제와 양전제의 실시 등 백제 지방사회의 지배에 대한 일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중요자료라 할 수 있다.

한중에서의 일본 고전극 노(能) 연구의 성과와 경향 (Results and Trends of Research on Japanese Traditional Theatre 'Noh' in Korea and China)

  • 강춘애
    • 한국연극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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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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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9-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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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was to summarize Korea and China's researches on Noh and to examine main domain in this field, by investigating the academic books and articles published in two countries. In 1960s, since Nohgaku has been introduced to China, academic articles on Zeami's theories and aesthetics have emphasized on aesthetic characteristics of Chinese plays and Japanese Nohgaku through the similarities of oriental plays. The number of researches on Kabuki is almost twice as that of researches on Noh in China. While most researches on Kabuki were compared with the styles and music of Pecking Opera and the theatrical theories of liyu[李漁], those on Noh has been highlighted the comparative studies on $Y{\bar{o}}kyoku$[謠曲], Chinese Noh plays. The main difference among the researches on $Y{\bar{o}}kyoku$ in Korea and China was the material regarding characters of Noh. Because song yuanzaju[宋 元雜劇]and Nohgaku in Chinese-Japanese plays were the mature form of the classic plays and those were representative of traditional nation plays, this researches tried to ascertain the cultural origins of two countries regarding the aesthetic characteristics by referencing lyrical and narrative features[曲詞] of yuanzaju[元雜劇]and the classic waka of Nohgaku. While the comparative studies on Noh and song yuanzaju and kunqu[昆劇] in China were prevalent, national researches have emphasized on the inner world of the main character and dramaturgy through the verbal description of Noh. Especially, this research tried to investigate the inner world of the main character and the intention of the writers through the verbal description of Noh authorized in the history of the works. Also, the researches on Buddhism in the Middle Ages and religious background were examined significantly. In addition, the $Y{\bar{o}}kyoku$ has influenced on European modern playwrights and the comparative studies between the materials of $Y{\bar{o}}kyoku$ and Western modern plays were concerned. In Korea, the comparative studies on Noh between Korea abd Japan has been most focused on the origin theory of Noh. The fact that appearance theory of Noh had originated from Sangaku was common opinion among Korean, Chinese, and Japanese scholars. However, they are agree with the opinion that according to the formation of the different genres, Noh's mainstream was different among three countries despite of the same origin. Yuan drama and Noh play have the same origin, but different branch. In relation to the Noh's origin theory, there are literature comparative studies in religious background, the studies presumed the origin of instrumental music related to those in mask plays, and the comparative studies between Korean mask plays and $ky{\bar{o}}gen$ of Nohgaku. Kyogen is the Comedy inserted among the stories in Nohgaku performed in just one day. Therefore, $ky{\bar{o}}gen$ must be discussed separately from the relations of 'shite[任手]'s inner action veiled with masks. This research figured out that the lacking points of the two countries' researches were the acting methods of Noh. Academic articles written by foreign scholars studying Korean and Chinese theatres should be included when this issue will be dealt with. In Korea and China, translation studies and writings regarding Nohgaku have studied by those who are major in Japanese literature or oriental literature. This case is the same in Korea in that scholars whose speciality is not theatre, but Japanese literature has studied. Therefore, this present study can give a good grasp of whole tendency on Nohgaku's research in theatre fields.

조선후기 세시기속시(歲時記俗詩) 고찰 -대보름 연작형(聯作型) 세시기속시를 중심으로- (A study on Sesi Keesokshi in the late Joseon Period -Focusiong on Serial Sesi Keesokshi-)

  • 양진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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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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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7-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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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일반적으로 조선후기 한시(漢詩)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민간의 풍속과 민중의 생활 상을 상세하게 다룬 일련의 연작형 기속시(紀俗詩)가 다수 창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기속시는 그 소재(素材)와 내용에서 특정 지역의 풍토, 지리, 기후, 물산(物産), 인정(人情), 세태(世態), 생업과 노동 등 민중의 생활 현장 전반을 두루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소재의 특징에 따라 기속시는 해당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상을 반영하고, 토속적 정서와 민중이 생활 감정을 중점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이러한 기속시중 소재적 측면에서 민중의 연중행사인 세시풍속을 읊은 시를 세시기속시(歲時記俗詩)라 하는데, 조선후기에 이르면 명절이나 세시 절기에 벌어지는 세시풍속만을 소재로 연작형을 이룬 작품이 대거 출현하게 된다. 이는 실학의 발전과 민족의식의 고조, 신분질서의 동요와 민중 역량의 성장,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따른 예술사 전반의 변모와 함께 특히 한시사(漢詩史)에 나타난 '조선시(朝鮮詩)' 정신의 대두(擡頭)등이 역사적 배경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작자의 다양한 체험과 견문, 민족과 민중의 생활감정을 중점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이러한 기속시 중 소재적 측면에서 민중의 연중행사인 세시풍속을 읊은 시를 세시기속시(歲時記俗詩)라 하는데, 조선후기에 이르면 명절이나 세기 설기에 벌어지는 세시풍속만을 소재로 연작형을 이룬 작품이 대거 출현하게 된다. 이는 실학의 발전과 민족의식고조, 신분질서의 동요와 민중 역량의 성장,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따른 예술사 전반의 변모와 함께 특히 한시사(漢詩史)에 나타난 '조선시(朝鮮詩)' 정신의 대두(擡頭)등이 역사적 배경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작자의 다양한 체험과 견문, 민족과 민중의 현실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식 등 작가적 체험과 의식성향이 세시기속시(歲時記俗詩) 창작의 중요한 배경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연작형 세시기속시는 584수(首)로 확인되며, 그중 대보름 풍속을 소재로 한 시는 178수(首)로 전체의 1/3을 차지하는 분량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절기(節氣)에 이루어지는 다양한 전래민속을 한시의 소재로 직접 수용함으로써 민족의 생활양식을 폭넓게 반영하고 있다. 특히 기층민의 현실생활현장에 밀착하여 그들의 질박하고 활기찬 삶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면서 분방 발랄한 민중상을 창조하고 민중의 염원과 삶의 애환을 그려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싸움', '노구반공양'이라는 풍속을 소재로 삶았던 것도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의 문학론(文學論) 고찰 (Study on Literature theory of Gyeong-san(經山) Jeong Won-yong(鄭元容))

  • 권은지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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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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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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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1783-1873)은 1802년(순조 2)에 과거에 급제하여 약 70여 년간 관직생활을 역임하였다. 정원용은 뛰어난 행정능력으로 세도정치기의 상황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뛰어난 문장으로 당대의 여러 문인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정원용은 당대 정치와 학술 그리고 문예 방면에서 영향력이 있었고 방대한 저술들을 남겼지만, 그에 대한 연구 성과는 소략한 편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정원용의 문학 전반을 살펴보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써 먼저 그의 문학론(文學論)이 어떠하였는지를 고찰하였다. 정원용이 지니고 있었던 문학론(文學論)을 고찰한 결과, 크게 세 가지 측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정원용은 모방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정원용은 문장을 지을 때 다른 사람의 작품과 구절을 모방하는 태도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고인(古人)을 따르려고 하는 태도에 반대하고 자신의 뜻을 드러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유원은 정원용의 문장에 대해서 평가하며 자신만의 색채로 일가를 이루었다고 하였고, 정원용은 김조순의 시에 대해서 언급하며 그가 다른 사람의 작품과 구절을 베끼지 않고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를 통해서 정원용이 문장을 지을 때 모방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정원용은 시를 지을 때에 眞意를 추구하였다. 정원용은 두계(荳溪) 박종훈(朴宗薰)(1773-1841)에게 준 서찰에서 '공교롭기를 구하다가 도리어 진의(眞意)에 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위불가구공이반해진의야(謂不可求工而反害眞意也)]'라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정원용이 시를 수식하는 데에 뜻을 두고 이에 힘쓰기 보다는 정(情)에서 발한 바를 꾸미지 않고 자연스럽게 시에 드러내는 것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정원용은 시를 지을 때 다른 사람의 것을 베끼지 않고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하였고, 또 뜻에서 발한 것을 억지로 꾸미고자 애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것을 모방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뜻을 담아내기보다는 겉을 꾸미는 데에 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모방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또 진의(眞意)를 추구했던 것은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원용은 기록을 중시하였다. 그는 지방관으로 부임할 당시 일어났던 사건들과 공문(公文)을 기록하고 부임지에서 지었던 시문(詩文)을 편찬하였으며, 우리나라 제도에 참고가 되는 전장제도(典章制度)를 집성한 책을 저술하고, 평생을 일기로 기록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200여 편에 달하는 많은 저술들을 남겼다. 이러한 정원용의 기록정신은 그의 관직생활과 연관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정원용은 평생을 관직에 있었던 사람으로 자신의 경험이 나라를 경륜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기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행위를 통해서 자신 또한 훗날 도움을 받고자 하였기에 방대한 기록물들을 남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돈암서원의 강학 활동 (The educational activities of Donam Seowon)

  • 김문준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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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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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1-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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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한국 서원의 교육 내용과 방식은 주자가 제시한 교육 내용 및 방식과 대부분 유사하지만, 학파에 따라 다소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돈암서원의 초기 원장으로 재임한 이들은 모두 김장생의 문인이었던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이다. 돈암서원은 같은 노론계 서원이었던 화양서원 석실서원이 기호 지역의 중심 서원으로 성장하면서 서원의 위상과 강학 활동도 약화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돈암서원 설립 초기의 학규는 전하지 않는다. 돈암서원의 운영 방식은 돈암서원 운영 전반에 관하여 17세기 후반 원장으로 재임하던 송준길에게 문의한 윤증의 서신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서신을 통해 볼 때, 돈암서원의 학규는 이이의 <은병정사학규>와 유사하였다고 추정된다. 18세기 이후 돈암서원의 역대 원장은 노론의 낙론계 학자들로서 권상하 계열보다 김창협 계열의 원장이 많았다. 돈암서원 원장은 화양서원, 석실서원의 원장이 겸임하거나 전후로 재임했을 가능성이 많다. 돈암서원에서 행한 강학 활동은 서원 설립 초기에는 김장생-송시열의 교학체계에 따라 소학${\rightarrow}$가례${\rightarrow}$심경${\rightarrow}$근사록 등 성리서를 우선하고 다음에 사서 오경을 가르쳤다. 점차 노론계 낙론 서원인 석실서원 출신의 학자들이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소학${\rightarrow}$사서${\rightarrow}$오경을 먼저 가르치고 다음에 성리서를 가르치는 이이의 교학체계를 시행하였으리라 추정된다. 이러한 강학 순서는 김창협 계열의 학자들이 설립하고 운영했던 석실서원의 강학 내용과 순서이다. 돈암서원의 입학 자격은 신분은 중시하지 않았으며, 학문과 인품을 중시했다. 서원에서 과거 공부는 허용되지 않았다. 원생들은 서원에서 거재(居齋)하면서 강학에 참여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점차 서원의 재정이나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자기 집에 거가(居家)하면서 삭망에 행하는 강회에 참여하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안압지'의 이름과 '안압부평(雁鴨浮萍)'의 의미 연구 - 안압지(雁鴨池) 제영시(題詠詩)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larification of the name of Anapji(雁鴨池) and Anapbupyeong(雁鴨浮萍) - Focusing on Anapji through its Appearance in Poems(題詠詩))

  • 강석근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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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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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5-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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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고는 안압지(雁鴨池) 제영시(題詠詩)를 통하여 신라 명승의 하나인 안압지(雁鴨池)의 이름과, 조선후기 경주지역에서 형성된 '동도칠괴(東都七怪)'의 하나인 '안압부평(雁鴨浮萍)'의 의미를 연구한 논문이다. 문화재청은 2011년 7월 '안압지와 임해전지(臨海殿址)'를 '경주 동궁(慶州 東宮)과 월지(月池)'(사적 제18호)로 개명하여, 안압지는 이제는 월지로 불린다. 이 못이 처음 만들어진 신라 문무왕 14년(647)에는 안압지란 이름은 없었으며, 조선초 김시습(1465~1471, 경주 체재 시기)은 이곳을 "안하지(安夏池)"라 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 25년, 1530)에 와서 비로소 안압지라 불렸다. 필자는 경주의 유학자 이수인(李樹仁, 1739~1822)의 "동호서사기(東湖書社記)"의 동호(東湖, 안압지)는 "기러기와 오리가 많이 날아오는 까닭으로 안압지라 이름지었다[다유안압지상집(多有?鴨之翔集) 고명지(故名之)]'는 기록을 발굴하여, 이 못이 경주지역에서 왜 안압지로 불렸는지에 대한 문헌적 근거를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필자는 "일성록" '정조 4년(1780)'의 기록인 "안압지에 넓이가 반석(盤石) 같은 흙덩이가 있고, 그 위에 덩굴풀이 나 있으며, 이것이 바람을 따라 왔다갔다 한다[안압지부토(雁鴨池浮土) 광여반석(廣如盤石) 상유만초(上有蔓草) 수풍왕래(隨風往來)]"는 내용을 새롭게 찾아서 왜, '안압부평'이 '동도칠괴'의 하나가 되었고, 수많은 문인들의 시문에 왜 '안압부평'이 자주 언급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해명하였다.

조선후기 문풍의 변화와 이용휴의 글쓰기 (Changes in Literary Trend During the Late Joseon and Lee Yong-hyu's Writing)

  • 이은봉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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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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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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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글쓰기란 틀에 박힌 형식이 아닌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조선후기의 문풍은 그렇지 못했다. '문필진한(文必秦漢), 시필성당(詩必盛唐)'이라는 복고주의 문장론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문장의 법도를 무시한 채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는 것은 사실상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도그마에 빠져 변화하는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성리학과 내용은 없이 껍데기만을 모의하는 의고적 글쓰기에 지친 문장가들은 익숙함과 전범에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했다. 이러한 변화의 가운데에 있던 이용휴는 당시 수입된 최신의 중국 서적들을 통해 명말청초의 사조들을 익히며 자신만의 개성적인 글쓰기를 만들었다. 그는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적 사유체계를 거부하고 인간성 본래의 측면에 관심을 가지며 주체 회복을 강조하였으며, 반의고적 글쓰기를 통해 허위에 찬 당시의 풍토를 비판했다. 그리고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 순수한 마음[천리(天理)]를 회복하고, 이를 위해서는 마음[심(心)]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주장은 '심즉리(心卽理)'를 내세우는 양명학과 비슷했다. 양명학은 마음[심(心)]을 윤리의 준칙[이(理)]으로 삼고 있어서, '이(理)는 외재적이고 초월적이며, 이것은 성인에 의해 언어화되고, 경전으로 문자화 되어 있다.'는 성리학과는 확연히 갈라졌다. 그는 이들처럼 이(理)의 외재성을 부정하고 내재성을 강조하면서 성리학의 경전 중심주의를 해체했다. 그가 내세운 전범의 부정과 주체 회복의 글쓰기는 이러한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 때문에 그를 양명학자로 단정 짓거나, 그를 비롯한 반의고적 태도를 갖는 문인들의 사상적 근거를 양명학이라 확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의 문학을 주자학이든 양명학이든 단정 짓는 순간 그것이 또 전범이 되어 주체는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일체의 전범을 부정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랐고, 그것을 글로 남겼다. 우리가 2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의 글을 읽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고소설에 표출된 영웅의 양상과 그 역사적 의미 - <최고운전>, <전우치전>, <전관산전>, <일념홍>, <여영웅>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heroic side and the features of the classic novel Historical significance)

  • 조상우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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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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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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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고는 고소설에 표출된 영웅의 시대별, 남녀별 차이에 드러나는 영웅의 유형화와 소설의 개별적 양상과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본고에서는 <최고운전>, <전우치전>, <전관산전>, <일념홍>, <여영웅>을 텍스트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주인공들을 '문화영웅-최치원, 민중영웅-전우치, 내조(가정) 영웅-정소저, 친일 개화 영웅-일념홍 이형경'으로 유형화하였다. 또 이 영웅의 유형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서술하여 본고의 목적을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중국과 조선은 국경을 맞대고 있기에 서로의 관계가 불편했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된 것이 바로 <최고운전>의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신라의 대문장가였기에 중국 문사와 한 수 우위의 시문수창을 할 수 있었다. 조선이 중국보다 문화가 우수하다는 자부심을 표현하기 위해 문화영웅 최치원이 필요했다. 조선은 반상제도가 뚜렷한 유교사회였다. 그렇다보니 모든 중심은 양반에 치우쳐 있어서 민중들은 양반에 의해 핍박을 받았는데 이 때 민중의 영웅이 필요했다. 그가 바로 <전우치전>의 전우치다. 전우치는 도술을 통해 민중들의 원한과 바람을 해결해 주는 진정한 민중영웅이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전란을 체험한 여성들이 남성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그렇다 보니 <강도몽유록>이나 <박씨전>, 그리고 <이학사전>과 같은 여성영웅소설이 등장한다. 무능한 남성들로 인해 울분에 찬 여성들에게 당시 작가는 작품에서나마 희망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전관산전>의 정소저는 고소설에 충실한 여성주인공보다는 진취적이지만 남편을 위한 내조를 담당하는 가정영웅이다. 조선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일본의 마수에 걸려든다. 이후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조로 맺은 뒤 통감부 정치를 실시한다. 이 때 친일을 부각하고자 친일신문을 발간하고 친일 소설을 연재한다. 바로 <일념홍>과 <여영웅>인데 친일개화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