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Taisho Park

검색결과 4건 처리시간 0.018초

근대 부산 대정공원에서 개최된 국낙원(菊樂園)의 구성과 홍보 전략 (A Study on Contents and Marketing Strategy of Kikurakuen held at Taisho Park in the Modern Busan)

  • 강영조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2권3호
    • /
    • pp.201-212
    • /
    • 2014
  • 이 연구는 근대 부산의 대정공원에서 3년간에 걸쳐 개최된 국낙원의 준비 과정과 국낙원의 볼거리인 국화로 만든 인형인국인형 그리고 예기(藝妓)들이 꾸민 연무 공연의 내역을 밝혀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대정공원 국낙원의 전모를 밝히고 상업적 성공을 위하여 사용한 홍보 전략을 고찰한 것이다. 1926년부터 1928년까지 3년간에 걸쳐 부산 대정공원에서 개최된 국낙원은 국화를 이용하여 일본 역사의 극적인 장면이나 카부키 등 대중 예술의 한 장면을 인형으로 재현한 국인형, 대륜국과 현애국 그리고 일반 시민들이 가꾼 국화와 분재로 구성한 국화단, 그리고 미도리마치 유곽에서 선발되어 한 달 정도 강습을 받은 일본인 조선인 예기들의 카부키, 구극 등 연무 공연으로 구성되었다. 예기들은 일본과 동래에서 초청한 전문 예능인으로부터 예능을 단기간에 배워 무대에 올랐다. 국낙원의 홍보 전략은 주최자 부산일보가 기획한 것으로 지속적인 보도와 예기들의 인기투표, 경품 행사, 그리고 시민의 참가였다. 국낙원은 3회라고 하는 단명으로 끝났다. 이 연구는 근대도시 시설인 공원의 역할과 기능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공원의 생활사를 발굴한 것이다.

근대 부산에서 대정공원의 성립 과정과 공간 구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Establishment Process and Spatial Composition of TaiSho Park in Modern Busan)

  • 강영조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1권2호
    • /
    • pp.92-102
    • /
    • 2013
  • 대정공원은 운동장과 휴양 위락 시설을 겸비한 운동공원이다. 1910년 당시 부산 이사관 카메야마가 대만으로 이동할 때 그를 기념하기 위한 도시 시설로써 운동장의 건립에 관한 최초의 발의자는 당시 경제인들이었다. 하지만 운동장 건립은 카메야마의 죽음 이후인 1915년 무렵부터는 타이쇼 천황의 즉위 기념사업으로 진행하게 된다. 1917년 부산 부윤의 제안으로 운동장 건립이 본격화하고, 부지 선정 작업에 들어간다. 부지 선정지 후보를 두고 논의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운동장 부지 선정의 조건으로 먼저 운동장에 합당한 유효 부지 면적, 시가지와의 거리 다시 말해서 접근성, 그리고 예산이었다. 수차례의 논의와 실제 부지 조사의 결과, 전염병원이 이전하고 난 뒤 소학교가 들어오기로 한 부지를 공원 부지로 선정한다. 대정공원의 공사비는 모두 부산부민들의 기부금으로 마련하게 된다. 지역 상공인과 회사, 관공서, 지역별로 기부금 모금 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직적으로 모금하였다. 그 결과, 공사비 전액을 부민의 기부금으로 조성하게 된다. 대정공원은 크게 운동공간과 휴양, 위락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공원의 세 방향에 입구를 두고, 외주는 식재를 하였다. 야구장은 공원의 중앙부에 자리 잡았고, 테니스 코트 2곳도 마련하였다. 일본 스모장도 공원의 북쪽에 마련하였다. 대정공원은 한국 근대 최초의 체육공원이었다. 그리고 공사비 전액을 주민의 모금으로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 1910년 당시 부산에서 운동장을 건립해야만 했던 이유를 밝히는 것이 남은 연구 과제다.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과 퍼포먼스 (Park Yeol·Kaneko Humiko Case and Performance)

  • 백현미
    • 대중서사연구
    • /
    • 제25권2호
    • /
    • pp.117-167
    • /
    • 2019
  •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이란 일본에서 1923년부터 1926년까지 약 3년 동안 식민지 조선인 박열과 제국 일본의 '무적자' 가네코 후미코가 대역 사건 피고인으로 받은 재판과 '괴사진' 사건 등 그 전후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말한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관련 사건은 종종 보도가 금지되었지만, 식민지조선에서 그들에 대한 기사는 간헐적이지만 끊임없이 드라마틱하게 이어졌다. 본고는 식민지조선에서 발행된 신문에서 이 사건이 기사화된 방식을 퍼포먼스의 관점에서 살펴 사건이 전달·수용된 양상과 의미를 밝혔다. 퍼포먼스의 주인공답게,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3년 구속된 이후 형무소 독방에 갇혀 있었음에도 형무소 바깥 세상을 향해 '행동하는 자'였다. 그들의 '행동'은 기민하고 파격적이었다. 1926년 박열은 세 가지 요구 조건을 걸고 재판 방식을 조율했고, 그래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예복을 입고 일본 재판정에 등장해 조선말로 자신들의 이름을 알렸다. 대역 사건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재판 자체를 하나의 사건으로 만든 것은 그들이었다. 또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5년 5월 예심 조사실에서 앞뒤로 밀착해 앉은 자세로 괴사진을 찍었고, 1926년 7월 이 사진이 괴문서와 함께 신문에 실리면서 사법부와 내각을 뒤흔들었다. 그들은 불온한 사진을 남겨, 자신들을 가두고 재판한 일본 사회에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다. 식민지조선의 신문이라는 '무대'의 특성에 따라 이들의 행동은 특별하게 전달되고 수용되었다. 우선 보도 금지 때문에 관련 보도가 간헐적으로 그러나 지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사건이 플롯화된 채 알려져 긴장감이 증가했고, 조선인 또는 무산계층이 연루된 사건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둘째, 재판 전후의 진행 과정을 공연 관람기처럼 기사화하며 재판극을 경험하도록 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의상과 움직임, 그들이 사용한 언어를 밝히고, 그들과 재판관이 주고받는 문답을 대본처럼 기술하였다. 셋째, 재판부 판사의 '담화'를 되받아 쓴 '사설'과 괴사진의 이야기성을 확대 재생산하는 기사를 통해,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이 일본 사회에 일으킨 논란과 분란을 문제적으로 드러냈다.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조화가 깨진 사태를 보여주는 사회적 드라마였다. 본 연구는 이 사회적 드라마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한 역할과 이 사회적 드라마가 식민지조선에서 갖는 의미를 밝혔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행위자로서 이 드라마를 직간접적으로 기획·추진했으며, 일제에 대한 피압박 민족의 당당한 저항을 드라마틱하게 수행했다.

조선 후기 유리거울의 수입과 공예품의 특징 (A Study on Glass Mirror Trade and its Characteristics of Craft after Joseon Dynasty)

  • 박진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2권4호
    • /
    • pp.206-225
    • /
    • 2019
  •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유리거울을 서양경(西洋鏡), 양경(洋鏡), 파리경(玻璃鏡), 파려경(玻瓈鏡), 석경(石鏡)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고, 이를 경험하고 느꼈던 당시의 상황과 교역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살필 수 있다. 이를 통해 17세기 이후 청·러시아와의 교역을 중심으로 유리거울이 수입되었고, 조선 후기에 들어와 수입금지 품목에 포함되는 등 18세기에 들어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신문물로 확인되었다. 19세기에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상품으로 더 크게 확대되었고, 특히 일본과의 교역이 눈에 띄게 성장하였다. 18~19세기의 유리거울은 개인이 용모를 확인하는 기본적인 용도에서 벗어나 상업적인 용도로까지 폭넓게 활용되었다. 당시 중국이나 일본을 방문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에 관한 시각적 충격과 경험들을 글로 남겼고, 유리거울에 대한 유용함은 조선의 소비 욕구로 이어져 유리거울의 수입을 자극하였다. 이로 인해 18세기 이후 유리거울은 조선의 청동거울을 빠르게 대체하였고 유리거울을 이용한 새로운 공예품들이 제작 및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실내에서 사용하는 공예품으로 일체식 유리경갑(一體式 琉璃鏡匣)을 개발해 전통적으로 사용해왔던 빗접과 함께 이용해 편리하였다. 당시 경갑의 인기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를 비롯해 조선시대 풍속화에서도 잘 볼 수 있다. 또한 중국의 기형으로 볼 수 있는 경대(鏡臺)도 조선에서 많이 제작했는데 서랍 개수와 크기, 상자 형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한 여러 형태의 경대를 살필 수 있다. 또한 휴대용의 작은 면경도 조선만의 미감으로 표현한 길상 문양, 장식 기법을 통해 품격 있는 공예품들로 제작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에서도 유리거울을 수입했지만 19세기 말 이후에는 일본식의 공예품들이 성행하였다. 일본 명치~대정시대에 유행했던 유리경대가 수입되었고 대형의 유리거울을 이용한 공예품들이 사용되었다. 이른 시기부터 있었던 경병의 경우 응접실처럼 큰 공간에 진설하거나 연회를 위해 중국·일본으로부터 수입했으며, 서양식으로 거울을 벽에 걸거나 부착해 공간의 밝기를 조절하고 외부의 풍경을 들여와 실내를 장식하는 방법이 도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