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Stamped-Roof Ti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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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각와를 통해 본 익산의 기와에 대한 연구 (Study on roof tiles of Iksan featuring Stamped-Roof Tiles)

  • 이다운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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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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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9-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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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인각와는 백제기와의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익산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다. 그 종류와 출토량 그리고 출토유적의 성격을 살펴보면 왕실과 관계 깊은 유적에서 주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작기법이 같다는 것은 특정 와공집단에 의해 생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생산시기에 대해서는 간지명인각와를 참고하였다. 그 결과 크게 무왕 즉위를 전후한 시기와 기축년(629)을 중심으로 한 7세기 제2/4반기 두 시기로 나뉘어 생산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와 함께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의 창건기 수막새도 문양과 출토량 등을 검토한 결과 인각와와 같이 두 시기로 나뉘어 생산 공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생산배경에 대해서는 제작기법 생산시기와 함께 오부와 오항을 나타내는 인각와의 성격을 검토하였다. 무왕 주체의 조영사업에 필요한 기와생산에는 왕실만으로 그 재원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부뿐만 아니라 오항에서도 원조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경 하에 성립된 기와생산은 관 주도의 일원화된 체제하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때 생산된 인각와의 인장을 인증 또는 검정을 위해 만든 것으로 날인 주체는 기증자도 생산자도 아닌 정해진 수량을 확인하고 날인할 수 있는 검사관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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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동문이형 막새기와에 대한 소고 - 경주지역에서 채집된 3종 8점을 중심으로 - (A Study of Shilla (新羅) Roof-end Tile Which Has The Same Design But Different Form)

  • 박홍국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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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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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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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우리나라의 고와중에서 특히 막새기와에는 제작당시에 유행 또는 선호되었던 문양이 시문되어 있어 일찍부터 기와연구의 지름길로 인식되면서 주된 고갈 대상이 되어 왔다. 이 중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암수막새들은 그 문양과 종류의 다양함에서 다른 나라의 것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본고에서는 막새문양면에 시문된 무늬는 같은데, 주연부 높이$\cdot$접합기법$\cdot$상하주연의 유무 등에서 차이를 드러낸 3종 8점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발하게 되었다. 1. 고찰한 3종류의 기와들은 세부형태의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종류별로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본다. 2. 기와제작기법 그 자체가 편년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시간적 범위는 어떤 기법이 처음 도입$\cdot$발생되었을 무렵에 그 기법에 의하여 제작되었던 유물에만 적용가능하다고 생각된다. 3. 이러한 고찰 결과에 따라 고와편년에는 그것이 출토된 층위, 공반유물(특히 토기) 비교 등 외에도 다양한 방법에 의한 접근이 필요함을 재강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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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중문지 출토 치미의 제작기법 연구 (A Study on Production Techniques of Ridge-end Roof Tile Excavated from Middle gate site in Bunhwangsa Temple)

  • 양희제;박도현;정민호
    • 보존과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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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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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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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분황사 중문지 출토 치미의 복원과 제작기법에 대한 연구 결과, 치미는 몸체, 등, 배, 날개, 문양, 종대로 구분되고 몸체는 하단부와 상단부로 나눌 수 있다. 몸체와 날개는 테쌓기 하였으며 배면을 접착하였다. 테쌓기 과정에는 3종류의 타날도구를 이용하여 접합면을 두들겼고 전체 형태가 완성되면 외면을 손다듬질 하였다. 원공을 통하여 손이나 도구를 내부로 넣어 점토를 긁어내거나 덧발랐고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표면을 평탄하였다. 문양은 틀을 제작하여 찍어 낸 후 몸체에 부착하였다. XRD분석과 TG-DTA분석 결과에서는 $867^{\circ}C$ 이상에서 상전이하는 트리디마이트 (Tridymite)를 동정할 수 없었고 $1,063^{\circ}C$에서 흡열반응이 나타난 점은 알바이트와 같은 알칼리장석이 $1,050^{\circ}C$에서 다른 광물로 변질한 결과로서 연구대상 치미는 $867^{\circ}C$이하의 소성온도를 경험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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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장무이묘의 발견과 조사 (The Discovery and Exploration of the Tomb of Jang Mui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 정인성
    • 박물관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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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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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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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일제강점기에 발견되어 조사된 장무이묘는 문헌 속의 대방군을 황해도 사리원으로 비정하는 결정적인 고고자료가 되었다. 무덤 축조에 사용된 전돌 중에 대방태수라는 관직명이 찍힌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무이묘의 발견은 1909년에 발견된 대동강변 벽돌무덤군을 낙랑군과 관련된 유적으로 확정 짓는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이래로 대수(帶水)와 대방군의 위치를 둘러싼 논란이 고고학적으로 정리된 일대 발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고대사와 고고학 연구에서 이토록 중요한 유구임에도 불구하고 그 발견 경위와 조사 내용이 제대로 검토되었다고 할 수 없다. 1912년 세키노의 발굴에서 출토된 문자 전돌과 기와류는 현재 도쿄대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다수의 장무이묘 출토 전돌이 소장되어 있는데 개별 자료의 조사 주체는 아직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노모리 등의 조사에서 수집된 자료에는 이를 명시한 주기가 있음을 확인한 정도이다. 이 외에도 도쿄국립박물관과 일본의 몇몇 대학에도 관련 문자 전돌이 반출되어 있다. 이들 자료를 망라한 종합 보고서가 작성되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장무이묘는 무덤의 구조에 대한 재해석(정인성 2010)을 바탕으로 그 시기를 4세기 중엽인 348년으로 보는 설이 우세해 졌다. 대방군 시기의 무덤이 아닌 것이다. 대방군과 군치의 위치를 둘러싸고 가장 유력한 고고학 증거가 사라진 셈이다. 관련하여 대방군과 군치문제 등을 둘러싼 논의의 활성화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