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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의 도상(圖像) 원류와 전개 과정 (On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Iconography of the Twelve Zodiac Signs of Royal Tombs of Joseon Dynasty)

  • 김지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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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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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8-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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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조선왕릉은 조선왕조의 역사, 이념, 문화, 미술, 건축, 제례 등이 종합적으로 융합되어 만들어진 결정체이며, 500년 왕조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산물로서 그 상징적 의의가 매우 크다. 왕릉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 중에서도 특히 능침 주변에 배치된 석물들은 능침을 수호하는 상징적 기능으로서 중요한 요소였으며, 그 중에서도 봉분 가장 가까이에 표현된 십이지는 그 기능의 가장 중심에 놓여져 있는 대상물이었다. 통일신라시대 능묘에서부터 시작된 십이지신상은 전해지는 규모나 뛰어난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능묘 축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과 위치를 차지했었음이 확실하나,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왕릉에 이르러서는 규모나 형태에서 매우 간소화된 경향을 띠게 되면서 다른 석물들에 비견하여 그 중요성이 간과되어 왔다. 십이지신상은 무덤을 수호하는 역할과 방위의 개념으로서 능묘를 장식했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으며, 시대별로 다양하게 변화되어 나타나며, 조선왕릉까지 그 전통성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역사성과 상징성은 간과할 수 없다. 본고에서는 조선왕릉에 표현된 십이지 도상(圖像)을 크게 3가지로 형식 분류하여 그 원류와 시기별 전개 과정을 고찰해 보았다. 십이지 도상은 사람의 몸과 얼굴을 표현한 인신인수형(人身人首形), 관에 십이지 동물을 표현한 인신인수관형(人身人首冠形), 십이지와 십간 팔괘의 혼합 문자형으로 분류된다. 조선왕릉의 이 3가지 십이지 도상은 그 원류를 중국으로부터 볼 수 있으며, 조선 전기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 교체되면서 왕릉을 장식하는 주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서 애용된다. 조선왕릉 십이지신상은 통일신라 이래 이어온 우리나라 능제의 고유성과 전통성을 확인할 수 있는 산 증거로서 그 의미가 크다 하겠다.

북한산 조계동 송계별업(松溪別業) 정원 복원을 위한 경관해석 (A Study on the Landscape Interpretation of Songge Byeoleop(Korean Villa) Garden at Jogyedong, Mt. Bukhansan near Seoul for the Restoration)

  • 노재현;송석호;조장빈;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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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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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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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문헌연구와 현장연구를 바탕으로 17C 중반 북한산 조계동(曹溪洞)에 조영된 송계별업의 장소성과 별업의 정원상 및 경관상을 추적하여 송계별업 원림의 복원을 전제로 한 경관해석을 시도한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송계별업은 인조의 3남이자 효종의 아우인 인평대군 이요가 인조 24년에 조성한 왕가별업이다. 본제는 직선거리로 약 7km 떨어진 건덕방 타락산 아래의 궁집 석양루로서, 대군이라는 조영주체의 신분적 특수성 때문에 송계별업 또한 단청 및 건물의 제도가 매우 화려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장소정체성이자 핵심경관은 구천은폭으로 중국 여산폭포에 비견되는 다층의 폭포를 갖는 관폭과 청음의 공간이었으며, 별업 멸실 이후에는 왕릉 부석장으로 역할과 부석금표처의 장소이미지가 더해졌다. 조계동천을 중심으로 한 송계별업 내원은 구천은폭을 비롯하여 한담과 창벽 등의 자연경관과 비홍교, 보허각, 영휴당 그리고 계당 등의 인공요소가 절묘하게 조화되었다. 또 현존하는 '송계별업'과 '구천은폭' 바위글씨는 별업원림의 조영자와 영역성을 상징하는 경관언어이자 장소 표식으로, 보허각을 중심으로 비홍교, 창벽, 한담 등의 경물명을 바위에 세기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특히 시각적 종점의 역할을 하는 구천은폭은 캐스캐이드형의 다단폭포로서 그 하부는 말구유 형상의 절리상 포트홀의 지형경관적 특성을 보인다. 한편 외원은 별업 정문과 행랑채 성격을 갖는 공간과 내 외원 양자를 연결시켜주는 계당과 돌다리 그리고 기거를 목적으로 한 영휴당 등으로 구분된다. 영휴당에서는 보허각만 관망되는 반면 보허각에서는 구천은폭을 비롯하여 영휴당 등 사방의 조망이 가능하도록 한 이원적 조망 틀짜임이 읽혀진다. 또한 비홍교에서 구천은폭과 창벽 그리고 한담을 상호 부감 앙시하게 되며, 비홍교를 건너 보허각에 올라 구천은폭과 조계동천을 바라보는 단계적 행위를 체험케함으로써 속세에서 선계로 이행되는 시각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 희랑대사상(希朗大師像)의 특징과 제작 의미 (Characteristics and Significance of the Huirang Daesa Sculpture at Haeinsa Temple in Hapcheon)

  • 정은우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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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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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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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희랑대사상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상으로 높이 82.4cm, 무릎폭 66.6cm, 앞뒤 최대폭 44cm에 이르는 등신상에 가까운 크기이다. 제작 기법은 승상의 앞면과 뒷면을 건칠과 나무를 접합하여 만든 것으로 동아시아의 유일한 사례로 주목된다. 유사한 기술이 나말여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에 이미 적용된 바 있어 이 시기의 특징으로 이해된다. 희랑대사상에 대해서는 18세기에 쓰여진 가야산을 여행하면서 쓴 기행문에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즉 승상의 가슴에 있는 구멍과 힘줄과 뼈가 울퉁불퉁하다는 등의 독특한 특징은 현재의 희랑대사상과 정확하게 부합된다. 가슴에 있는 구멍은 신통력의 상징으로 3~4세기에 활동한 서역의 승려 불도징(佛圖澄)의 가슴에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에는 흑칠 상태였으며, 19세기에 현재와 같이 채색되었음도 알 수 있다. 봉안 전각은 해인사의 해행당(解行堂)과 진상전(眞常殿)이었으며, 이후 조사전과 보장전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 승상의 제작과 봉안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문헌 기록에 등장하지만 현존하는 작품은 매우 드문 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승상의 초상조각은 고려시대의 희랑대사상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제작된 나옹과 의상대사상 등 모두 네 구뿐이다. 이 가운데 희랑대사상은 고려 초기 10세기경에 제작된 상으로서 최고의 제작 기술과 사실적인 재현 그리고 내면의 인품까지 표현한 점에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다. 승상을 제작하여 숭배하고 신성시하는 전통은 한국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다만 재료와 제작 기술에 대해서는 나라마다 차이와 특이성을 보이며 발전하였다. 중국은 육신불(肉身佛)이 많은 편이며 일본은 건칠, 나무, 흙 등 시대마다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많은 승상을 제작하였다. 저마다 다른 재료와 기법을 사용했지만 동아시아 각국의 승상 제작은 승려의 참모습과 정신성의 성공적 표현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연쇄극의 정체성 논의 - 총체예술론적 관점에서 - (A Study On The Identity Of Yeonsegeuk(Kino-Drama))

  • 김수남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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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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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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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한국에 영화가 전래된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1903년 6월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한국영화의 효시에 대한 논쟁은 김도산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1919년)를 영화로 인정하느냐 아니면 연극으로 인정하느냐의 문제이었다. 조선에 연쇄극이 처음 들어 온 것은 일본 세토나이카이 일행의 <선장의 처>로 알려져 있지만 또 다른 설은 1915년 10월 16일 대한매일신문의 연재소설을 무대화한 미쯔노 강게쓰 일행의 <짝사랑>이 부산의 부산좌에서 공연된 것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서울에서는 1917년 3월 14일부터 황금관에서 <운명의 복수>가 무대에 올랐다. 연쇄극은 우리의 독창적인 공연형식이 아니다. 연쇄극이 조선연극계에서 전성을 누렸던 시기는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공연된 김도산의 <의리적구토>부터 3년 정도에 불과하다. 연쇄극의 공연형식은 연극이 진행 되는 중에 영화를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특별한 극형식이다. 연극이 기존의 예술을 종합한 종합예술이라면 연쇄극은 새로운 매체인 영화까지 무대에 도입한 새로운 종합예술(총체예술)로서 확대연극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마디로 연쇄극의 영상 도입은 영화적 행위의 삽입이며 연극적 표현의 확대기능으로서 새로운 공연예술로서 총체예술의 관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현재 연쇄극의 학술적 연구가 미미한 상황에서 연극으로서 연쇄극인가 또는 영화로서 연쇄극인가의 개념 정의는 우선 연쇄극의 정체성과 그 미학적 확립이 요구된다. 조선영화 비평가, 임화는 연쇄극 필름을 영화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은 활동사진을 영화라고 부르지 못한 것 이상이다. 라고 연쇄극의 정체성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연쇄극이 활동사진만치 독립된 작품도 아니고 연극의 보조수단에 불과한 영화의 한 태생에 그치는 것이라고 연쇄극을 연극으로 결론 내렸다. 조선영화 초창기의 대표적 감독인 안종화 역시 연쇄극이 무대에서는 도저히 실연할 수 없는 야외활극 같은 것을 촬영해서 연극 장면에 적당히 섞어서 상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당시 연쇄극이란 연극과 활동사진이 결합된 형식의 공연물로 영화는 연극의 보조수단으로 보았다. 공간이 제한된 연극무대로는 표현하기 곤란한 정경이나 극적인 장면들을 야외에서 촬영하였다가 무대공연시 필요한 대목에 극장 내의 불을 끄고 백포장에 영사하다가 다시 불을 켜고 무대공연을 계속하는 식의 공연양식이었다. 연쇄극은 작품에 있어서도 진지한 연구가 없이 일본 연쇄극의 제작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그 내용에서도 신파극의 잔재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당시 일간지 지상에서는 연쇄극이란 개량신파극의 모방이므로 약식있는 연극인들이 가질 무대가 아니라는 혹평을 연일 게재하였다. 본 논문의 연구목적은 연극이냐 영화이냐의 정체성이 불분명한 연쇄극의 형식미학을 논의하고자 한다. 논의 과정으로서 연쇄극의 등장 배경과 공연형식 그리고 새로운 공연 예술로서 연쇄극을 총체예술적 관점에서 고찰한다. 그 결과 연쇄극은 영화가 아닌 확대 연극의 개념으로 규명하고 새로운 공연예술로서 재평가하고자 한다.

영남 유학과 기호 유학의 소통 사례와 지역갈등 융화 방안 (The Suggestions to harmony between Yeongnam(East)-Giho(West) region using friendly relationship of Confucian in Joseon Dynasty)

  • 김문준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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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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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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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한국사회의 동서 지역 갈등을 극복하는 지속적인 소통 노력은 여전히 필요한 일이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과거 한국 역사에 내재한 왜곡과 갈등의 역사를 수정하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며, 이러한 가운데 한국철학사상사 인식에서도 일반인들의 왜곡된 이해를 바로잡는 노력이 필요하다. 과거에 조선시대 한국 성리학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는 학파와 지역을 연계하여 영남학파 기호학파로 양분하고, 다시 학파와 정파를 연계하여 영남학파-남인, 기호학파-서인으로 양분하여, 이 양자를 지속적인 갈등 관계로 인식하는 경향이 많다. 이러한 왜곡된 이해는 수정되어야 한다. 동서(東西) 개념과 이와 연관한 학문 분화, 정치 갈등에 내재한 오해와 과장된 갈등 구조는 수정되어야 한다. 선조때 정치권이 동서(東西) 분당(分黨)이 되었는데, 이 때의 동서는 서울 내에서의 동서 지역을 의미하며, 영남(동)과 기호(서)가 아니다. 당시의 동서 분당과 영호남 지역인의 지역 분열은 관계없는 일이다. 사실 한국 성리학을 대표하는 많은 유학자들이 학파-정파-지역을 넘어 친밀하게 교류한 사례가 많다. 조선 중기의 조식과 성운, 이황과 기대승, 이황과 이이, 노수신과 이이, 조선 후기의 정경세와 김장생, 정경세와 송준길, 조선말의 곽종석과 김복한 등 당대를 대표하는 선비들은 서로 인격 존숭과 학문 교류에 기초한 친교가 깊었다. 이들 기호 영남 인사들의 친교 사례는 조선 선비들의 인격과 학문과 정신세계의 높은 수준을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한국 전통의 정신적 문화적 무형 자원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앞으로 영남(경상)-경기-호남(전라)-호서(충청) 지역의 선비들의 교류와 소통 사례를 더욱 발굴 홍보하여 영호남 화합의 정신문화적 토대로 활용해야 한다. 그 구체적 활용 방안으로는 동서 유학자들의 친교와 관계된 양 지역 지자체의 기관 교류, 공동 기념행사, 양 지역 유학자들의 명가(名家) 교류, 양 지역 박물관의 동서 화합 특별전 개최, 지역 축제 공동 개최, 공동 문화 프로그램 운영, 양 지역의 서원교류 등 선현들의 교류를 홍보하고 공동 사업으로 활용해야 한다.

대순진리회의 '세계종교' 가능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Possibility of 'World Religion' in Daesoon Jinrihoe)

  • 권동우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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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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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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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대순진리회는 교단 내부 구성원들에 있어서나 학계에 있어서나 '민족종교'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이 민족종교의 성격이 꽤 복잡하다. 곧 민족종교로서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한민족의 선민사상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류와 세계를 구제하겠다는 세계종교의 보편성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민족종교의 특수성과 세계종교의 보편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특수성과 보편성의 논리는 단지 대순진리회에만 국한된 특징이 아니다. 이미 세계적으로 많은 종교들이 민족종교와 세계종교의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가진다고 하는 이중성을 보여 왔다. 그 가운데 본고에서 주목한 것은 근대 일본에서 형성된 교파신도다. 근대 일본 정부가 국가신도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교파신도는 총 13개 종파가 형성되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일본인의 민족적 전통을 계승하는 민족종교라고 하면서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세계종교를 표방하면서 해외포교에 나선다. 그렇다면 이처럼 민족종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세계종교를 지향했던 교파신도의 해외포교는 어떻게 귀착되었고, 이들의 세계종교화는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본고에서는 이처럼 민족종교와 세계종교의 이중성을 보여 왔던 교파신도의 사례를 통해 대순진리회의 세계종교의 가능성을 살펴보고, 이를 위해 대순진리회가 지향해야 하는 길에 대해 약간의 제언을 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한국사회에서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던 '민족종교'론 또는 '민중종교'론의 역사적 흐름에 대해 살펴볼 것이며, 한국에서 민족종교이면서 세계종교를 지향하고 있는 원불교의 사례도 점검하는 것으로 민족종교와 세계종교의 경계에 서 있는 대순진리회의 새로운 지향점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한국의 불교그림과 공연 - 삼척 안정사에서 연행되는 땅설법을 중심으로 - (Korean Buddhist Pictures and Performances-Focused on Ttangseolbeop performed at Samcheok Anjeongsa Temple)

  • 김형근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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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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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9-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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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고는 빅터 메어(Victor H. Mair)의 용어 'Painting and performance'에서 촉발되었다. 그 책에서는 불교가 전파된 지역에 불교그림이 공통적으로 있고, 또한 그것을 활용한 공연이 있음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불교와는 관련 없지만 이러한 공연 형식은 세계적일 수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은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곧 그에 해당하는 공연의 기록과 전승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2018년 삼척 안정사의 땅설법이 알려졌다. 학계는 한편으로 매우 반가워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고민을 하게 된다. 그 고민은 곧 '공시적, 통시적 보편성'으로 요약된다. 과연 삼척 안정사에서 전승하고 있는 땅설법이 그 절만의 특이 유형인가? 아니면 전승이 안되었을 뿐 전국적인 단위에서 보편적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런 본질적 질문에 앞서 우린 아직 충분히 안정사 땅설법의 전모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본고는 안정사 땅설법의 전체적인 윤곽을 보이기 위해 마련되었다. 땅설법 전체에 공통적으로 '그림'(변상도)이 쓰이며,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운용하는지 다양한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땅설법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땅설법은 본전으로 5개의 레퍼토리, <석가모니일대기(釋迦牟尼一代記)>, <선재동자구법기(善財童子求法記>,<목련존자일대기(目連尊者一代記)>, <성주신일대기(成造神一代記)>, <신중신일대기(身衆神一代記)>를 가지고 있다. 또 별전으로 <만석중득도기(曼碩衆得道記)>, <안락국태자경(安樂國太子經)>, <태자수대나경(太子須大拏經)>, <심청효행록(沈淸孝行錄)>, <삼한세존일대기(三韓世尊一代記)>,<위제희부인만원연기(韋提希夫人滿願緣起)> 등이 있다. 공통적으로 불교적 인물의 일대기 서사구조를 취한다. 이 서사를 진행하는데 있어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변상도이며, 이 변상도의 내용을 다양한 방식으로 알려주는 것이 땅설법이다. 서사의 실마리가 되는 변상도의 경우 빛이 없는 저녁에는 볼 수 없는 문제가 생겨 특별한 고안이 필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그림자극과 영등(影燈)의 방식이다. 즉, 땅설법은 세 가지 방식의 공연 방식이 있다. 첫 번째가 변상도를 이용하는 방식이고, 두 번째가 그림자를 이용하는 방식이다. 세 번째가 영등의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레퍼토리의 내용에 따른 선택이 아닌 공연 환경에 따른 선택이다. 빛이 있어 그림을 볼 수 있으면 변상도를 이용한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어두워 볼 수 없으므로(과거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 그림자나 영등의 방식을 취했다. 이렇게 땅설법에서 시각적인 방식을 도구로 활용한 것은 단순히 구비문화 차원에서 한단계 진일보한 시각문화로의 이행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구비서사와는 달리 함축되어 있는 이미지의 힘은 감성적 자극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불교의 신비함을 체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누항도(陋巷圖)와 누항록(陋巷錄)을 통해 본 이만부의 공간철학과 식산정사의 원형경관 (A Study on Lee, Man-Bu's Thought of Space and Siksanjeongsa with Special Reference of Prototype Landscape Analyzing Nuhangdo(陋巷圖) and Nuhangnok(陋巷錄))

  • 강병선;이승연;신상섭;노재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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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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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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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된 '천운정사(天雲精舍)'는 식산 이만부가 1700년에 건립한 식산정사이다. 본 연구에서는 식산정사와 관련한 이만부의 생애와 은일관을 알아보고, 그의 정사경영의 결과물인 「누항록」과 《누항도》를 분석해 정사의 풍수적 입지와 영역성 및 원형경관을 추정하고, 은거한 선비가 자신의 공간에 담고자 했던 철학을 고찰하여 다음의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식산 이만부는 조선 후기 대표적 은둔형 유학자이다. 정사의 이름이자 이만부의 호인 '식산'은 마을의 뒷산(主山)에서 연유한 것으로 그는 생각(思), 몸(躬), 말(言), 사귐(交) 네 가지를 쉬고자 했다. 다난했던 숙종년간 남인 집안의 이만부는 '식산'이라는 호를 통해 은둔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표상하였다. 둘째, 이만부는 식산정사의 입지, 공간구조, 건축물 및 조경시설물, 수목, 주변경관, 이용행태 등을 「누항록」에 기록하였고, 《누항도》화첩을 남겨 원형에 가까운 식산정사 복원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 셋째, 이만부는 외노곡이 밖에서 보면 사면이 두로 막혀있으나 안으로 들어서면 아늑하고 깊숙하며 멀리까지 내다보인다는 풍수적 지리관을 언급하고 있으며, 노곡마을 전체를 일컬어 식산정사라 했는데 이는 명명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고 영역을 형성·확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식산정사의 공간구성은 연식공간, 교육공간, 후원공간, 휴식공간, 채원 및 약초밭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당과 루, 연지로 구성된 연식공간은 개인적 공간으로 호연지기, 천인합일의 흥취, 군자의 도리, 인을 생각하는 이만부의 거처이자 강학을 베풀던 공간이다. 다섯째, 양정재 영역은 교육공간으로서 양정재는 주역 몽괘에서 취한 이름으로 어린 학생들의 학문과 덕이 크고 밝게 성장하기를 기원한 이름이다. 여섯째, 간지정, 고반대, 세한단 등으로 구성된 후원공간은 식산정사 가장 안쪽의 숲이 우거진 곳을 정리하고 자연 입석과 고송을 병풍삼아 작은 정자를 지을 축대를 쌓은 곳으로, 멈춤의 미덕과 은자의 여유, 군자의 지조 등에 관한 뜻을 담고 있다. 일곱째, 식산정사 담장 밖 동쪽 시내 건너 고목이 우거진 곳에 단을 조성하여 영귀사라 하고 괴석을 쌓고 화초를 심어 휴식의 장소로 삼았다. 여덟째, 조선시대 선비들처럼 채소와 약초의 효능을 상세히 알고 있던 이만부는 정사 내에 채원과 약초밭을 가꾸었다. 아홉째, 식산 이만부는 식산정사의 각 공간별 건축물과 조경시설물에 대한 명명을 통한 의미 부여와 고사(古事)를 따른 식재를 통해 자신의 정사에 성리학적 이상향을 실현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十六世紀)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畫) 이해의 확장 : <경포대도(鏡浦臺圖)>, <총석정도(叢石亭圖)>를 중심으로 (Broadening the Understanding of Sixteenth-century Real Scenery Landscape Painting: Gyeongpodae Pavilion and Chongseokjeong Pavilion)

  • 이수미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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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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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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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기증을 받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특별전(2019년)에서 처음으로 공개한 작품인 <경포대도>와 <총석정도>는 조선시대 회화사 이해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매우 지대하다. 두 작품이 1557년의 관동 유람을 계기로 그려진 병풍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어서 16세기 산수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획기적인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밝히기 위해서 본고에서는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에 담긴 경물의 내용을 살펴보고 제작시기와 양식상의 특징을 분석한 후, 다른 작품과의 비교를 통해서 이 작품에 담긴 회화사적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 작품의 제작 배경은 <총석정도>의 발문으로 알 수 있다. 본고에서 박충간(朴忠侃)(?~1601)으로 비정한 정상일로(商山逸老)가 1557년 봄에 홍연(洪淵)(?~?)과 함께 금강산(풍악산)과 관동 지역을 유람하고 유산록(遊山錄)을 작성하였으며 시간이 흐른 뒤 그중 몇몇 명승지를 그려 병풍을 만든 것을 알 수 있었다. 홍연은 자가 덕원(德遠)으로 1551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584년까지는 생존했던 인물이다. 박충간은 호가 남애(南崖)로서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을 고변하여, 그 공으로 형조참판으로 승진되고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책록된 후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이 글로 작품의 제작 시기를 1557년의 유람 후이자, 발문을 쓴 박충간이 50대 이상이 되는, 1571년 이후 곧 16세기 후반경으로 보았다. 산수나 나무 표현 등의 화풍을 기준으로도 16세기 후반의 시대 양식과 부합한다. 전술한 발문의 내용으로 <경포대도>와 <총석정도>가 병풍의 일부였던 것을 알수 있으며, 발문이 써 있는 <총석정도>가 마지막 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경포대도>를 보면 구도면에서 조선 초기 안견파(安堅派)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편파(偏頗) 3단 구도의 요소를 찾을 수 있으나 실경(實景)을 대상으로 하여 그 배치와 화법이 현실화된 양상을 볼 수 있다. 시점(視點)에 있어서도 여러 경물간의 관계나 경관의 특징이 효과적으로 표현되도록 사선각(斜線角)의 부감시(俯瞰視), 정면시(正面視) 등을 활용하여 경포대의 넓은 영역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다각적(多角的)인 관점(觀點)을 보여준다. 산의 형태나 태점(苔點)의 사용은 1557년작 <의순관영조도(義順館迎詔圖)>(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와 매우 유사하다. 16세기 안견파의 특징인 짧은 선이나 점으로 질감을 내는 단선점준(短線點皴)과 구름 모양 운두준(雲頭皴)은 현장감 있게 변모되었다. 조선 초기 산수화의 전통적인 구도와 연결성을 찾을 수 있는 <경포대도>와 달리 <총석정도>는 그 구도가 매우 파격적이다. 화면에 중심축을 두고 돌기둥들이 첩첩이 도열하여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데 근경(近景)의 돌기둥, 중앙의 사선봉(四仙峯), 절벽 위의 사선정(四仙亭)을 삼단계 정도의 깊이감으로 배치하여 화면에 공간감을 조성하였다. 중앙의 사선봉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비중을 점하고 있으나 수직적인 돌기둥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분질적(分節的), 평면적(平面的)인 양상으로 그려져 아직 입체적이고 자연스러운 공간감을 조성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기둥의 아랫부분은 희게 하고 윗부분은 어둡게 하여 고원(高遠)의 상승감을 고조시키는 효과가 있는데 각 기둥을 묘사하는 준법을 보면 기둥으로 설정된 면에 담묵을 바르고 그 위에 농묵의 가는 선들을 그어 총석의 질감과 쪼개짐을 묘사하였다. 붓끝을 사선으로 누르며 수직으로 내려 긋고 있어서 부벽준(斧劈皴)의 초기적 양상을 보인다. 일관되게 보이는 이러한 흑백의 대조, 수직적 준법의 구사는 앞으로 전개될 절파계(浙派係) 화풍의 유행을 예시해준다. 한편 기둥의 윤곽 및 균열문이 각각 다 달라서 실제의 특징을 살리려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둥 위에 올라앉은 새들의 묘사, 파도와 흰 거품의 표현 등에서 반복적인 붓질을 찾을 수가 없고 매우 생생한 묘사력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의 경물 배치는 이후 변화를 보인다. <경포대도>는 아래쪽에 죽도(竹島)를 두고 경포호를 넘어 위쪽에 위치한 경포대 건물과 오대산 일대를 올려보는 구도였다. 이러한 배치는 경포대를 화면 아래쪽에 두고 위쪽의 바다를 향하는 18세기 이래의 전형적인 구성과 차이를 보인다. 바다 쪽에서 총석을 바라보며 그린 <총석정도> 역시 이후의 작품에서는 내륙에서 바다를 향하는 것으로 관점의 변화를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정선(鄭敾)(1676~1759)과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의 작품이 제작된 이후, 두 사람의 구도를 따라 관동도의 유형이 정착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사라진 듯 했던 16세기 <경포대도>의 구도가 조선 말기 <강릉 경포대도>에서와 같이 민간 회화에서 전승된 것도 확인해 볼 수 있다. 관동 지역의 명승도는 이른 시기부터 그려져 고려 김생(金生)(711~?)의 관동도(關東圖), 조선 초 안견(安堅)(15세기 활동)의 낙산사도(洛山寺圖) 등 여러 화가가 단폭이거나 여러 폭의 관동도를 병풍이나 첩 형태로 그렸던 것을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기록은 많으나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작품이 없었는데 본고에서 고찰하는 이 두 점은 현존하는 관동도 중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예로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관동도(關東圖) 병풍(屛風)의 제작 양상을 알게 해주어 회화사적인 의미가 크다. 특히 발문의 내용에 따라 8폭 병풍일 것으로 생각되어 16세기 후반에 이미 관동팔경도(關東八景圖) 형식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성격에 있어서 현존하는 16세기 실경산수화의 예로 거론되는 작품들이 모두 실용적, 공적인 목적의 계회도나 기록화로 제작되어 실경산수화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나타난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실제 경관을 대상으로 자연의 변화무쌍함과 아름다움을 담고자 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발문을 쓴 박충간은 유람할 때 지었던 감상시를 곁들여 자연의 진면목을 반추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 점은 기존에 알려진 실경산수화의 성격과 그 양상을 달리하는 것으로 순수 감상을 목적으로 한 본격적인 실경산수화의 예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높다. 이처럼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의 두 작품은 유람의 결과를 시화(詩畫)로 제작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현존 작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예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지대하다. 또한 그간 확인할 수 없었던 16세기 실경 산수화의 다양한 형태와 구도 및 시점의 면모를 보여주어 한국 실경산수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한 점에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육지면품종의 유용형질의 유전에 관한 연구 (Studies on the Inheritance of Agronomic Characteristics in Upland Cotton Varieties (Gossypium hirsutum L.) in Korea)

  • 계봉명
    • 한국작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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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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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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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
  • 면화의 유용형질의 개별적 유전관계를 조기에 검정하고 이들의 상호관련성을 육종사업에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초자료를 얻고저 1969년부터 1972년까지 작물시험장목포지장실험포장(북위 $34^{\circ}47',$ 동경 $126^{\circ}20',$ 표고 1.5m)에서 육지면품종간의 Partial Diallel Cross $F_1$ 및 Paymaster$\times$Heujueusseo Trice의, 분리집단을 공시하여 Hetesosis, Combining Ability, 품종별우열성, 유전분산의 분할, 표현형 및 유전상관등을 조사한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Heterosis는 주당삭수와 소면수량에서 양친평균 보다 각각 27.84%, 37.26%의 증가경향을 보였고 기타 형질에서는 유의성이 없었다. 2. GCA에 있어서는 모든 형질에서 유의성이 있었고, SCA보다 GCA 효과가 컸으며, 품종별 GCA효과푸 Suwon# 1이 조숙으로, Paymaster 및 Arijona는 고소면로, Arijona는 장섬유의 방향으로 했다. 3. 소면수량의 SCA는 Mokpo #4, Mokpo #6, Heujueusseo Trice등을 편친으로 한 조합이 변이가 컷고, 기중 SCA효과가 가장 큰 조합은 Mokpo# 4$\times$Acala 1517W, Mokpo#$\times$D.P.L, Heujoeusseo Trice$\times$Paymaster 조합등으로서 비교적 대립형질이 많은 조합이었다. 4. 조만성의 유전은 조숙이 만숙에 대하여 완전우성조합 또는 조숙과 만숙의 상호간의 우성을 나타내지 못하는 중간성조합이 있었음에 따라 이것은 상가적 유전성분이 큰 Multi gene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추찰되였다. 조숙성의 우성강도가 가장 큰 품종으로서는 Heujueusseo Trice. Mokpo#6, Suwon#1 등이였다. 5. 삭중 및 종자 100립중의 유전은 뚜렸한 경향이 없었다. 6. 장섬유성인 Paymaster와 단섬유성인 Heujueusseo Trice간의 교잡조합의 $F_2,$ $F_3에$ 있어서의 섬유장분리는 장섬유가 단섬유에 대하여 완전 또는 부분우성의 단인자지배에 의하여 분리되였으며 세대가 진전됨에 따라 우성개체발현율이 감소되는 경향이였다. 또한 Diallel Cross $F_1으로$ 동시에 수개품종을 비교할 경우는 각품종의 섬유장의 폭이 다르고 우성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다소 복잡한 대립인자작용으로 나타났다. 7. 주당삭수는 대체로 초월우성이 강하게 나타났으며 따라서 상가적부분이 적게 표현되여 비대립유전자의 작용도 존재하는 것으로 였다. 8. 소면수량도 초월우성이 강하게 나타내여 비대립유전자의 작용도 존재하는 Multi gene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으로 보였으며 대체로 다수성품종이 소수성품종에 비하여 우성이였다. 그러나 Heujeusseo Trice는 소수성품종으로서 초월우성을 나타내여 품종 및 조합에 따라서 상리한 반응을보였다. 9. 개화소요일수의 유전력은 39~34%였으나 협의 11%로 낮은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개체변이가 심하여 유전력이 다소 낮게 표현되는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삭중의 유전력은 광의 30%, 협의 22%로 낮은 경향이였으나 Diallel Cross $F_1$ 에서는 다소 높게 나타났다. 10. 섬유장 및 소면비율의 유전력은 어느 경우에서도 높았으므로 선발효율이 클것으로 기대된다. 11. 주당삭수의 유전력 Diallel Cross 에서 30%, $F_2에서$ 협의 36%로 낮은 경향을 보였으나 광의 67%로 높았으므로 $F_2,$ $F_3에서는$ 양친의 특성을 어느정도 나타낼것으로 기대된다. 12. 소면수량의 유전력은 Diallel Cross 에서는 초월우성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낮은 우전력을 보였으나, $F_2,$ $F_3에서는$ 광의 38%, 협의 50%로서 비교적 높았다. 따라서 수량의 유전력은 $F_1에서는$ 극히 낮았으나, $F_2,$ $F_3세대에서는$ 높아가는 경향이였다. 13. 개화소요일수, 소면비율 및 섬유장의 상호간에는 $F_1,$ $F_2,$ F3에서 모두 표현형상관이 높았으므로 만숙품종 및 개체가 대체로 장섬유 및 고소면의 경향이였고 이들의 유전상관도 높기때문에 유전적관계가 컸었다. 개화소요일수와 소면수량과의 상관관계가 극히 낮았으므로 이들은 서로 독립형질로 사료되지만 주당 삭수와는 $F_3에서$ 부의 상관이 있으므로 조숙개체가 다삭성인 경향을 많이 보였다. 14. 소면비율과 섬유장과의 표현형 및 유전상관은 $F_1,$ $F_2,$ $F_3$ 모두 높았으므로 이 두 형질은 대체로 흡사한 형질이라고 인정할 수 있음에 따라 장섬유품종이 대체로 고소면성이였다. 또한 소면수량과 소면비율과는 Diallel Cross $F_1에서$ 정의 상관, $F_2에서는$ 섬유장과의 정의 상관을 보여 소면비율 및 섬유장도 소면수량에 다소 관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5. 소면수량은 주당삭수와의 표현형상관이 $F_1,$ $F_2,$ $F_3$ 모두 고도의 전상관을 나타냈고, 유전상관도 높음에 따라 유전적인 관련성이 크다고 인정되였다. 따라서 다수성을 선발하려면 주당삭수가 많은 개체를 후기세대에서 선발하는 것이 선발효율이 크다고 사료된다. 또한 양질계통을 선발하기 위해서는 장섬유 및 고소면개체를 초기세대부터 선발해도 선발효율은 클것으로 기대되지만 이러한 개체는 동시에 만숙성을 내포할 가능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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