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Palace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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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경서분변상도(觀經序分變相圖)의 연구(硏究) (A Study on the Buddhist Paintings of the Legend of Ajātasatru)

  • 유마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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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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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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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Kwan-gyongdo is a pictorial presentation of a $s{\bar{u}}tra$ that teaches the Buddhist way for a person to be reincarnated in the paradise of $Amit{\bar{a}}bha$ Buddha. It consists of a preface (Kwan-gyong sobun pyonsangdo) and 16 scenes of $S{\bar{a}}kyamuni$ preaching. The preface, a painting illustrating the motivation behind the production of tile kwan-gyongdo, illustrates the "Legend of King $Aj{\bar{a}}tasatru$", a tragic story in which the prince of India's Magadha kingdom murders his father, the king, to usurp the throne. The 16 subsequent scenes show $S{\bar{a}}kyamuni$ teaching the distressed queen how a person can be reborn in paradise through meditation and praying. In the kwan-gyongdo in the Mogao Cave No. 17 in Dunhuang, China, painted during the Tang dynasty (618-907), the preface and the 16 scenes are presented in one painting, whereas they are presented in two paintings in those painted in Korea during the Koryo period (918-1392). The difference is attributed to the stylistic disparity of the two periods. Despite the temporal gap between the Koryo paintings and the Mogao Cave paintings, a comparison of the two can show the characteristic development of kwan-gyongdo. Kwan-gyongdo of the Koryo period do not have the "enmity created in the previous life" scene featuring a heavenly figure and a hare, a result that shows the influence of the Tang school that deleted the scene. The scene of $S{\bar{a}}kyamuni$ preaching on the Mountain of Spirit is included in kwan-gyongdo of both the Koryo period and the Mogao Cave, but the scene of $S{\bar{a}}kyamuni$ emerging from the earth to the Magadha palace is not included in Koryo kwan-gyongdo. Kwan-gyongdo of Koryo are generally a simpler but more faithful rendering of the $s{\bar{u}}tra$.

원대(元代)의 왕역(王繹)·예찬(倪瓚) 합작 <양죽서소상(楊竹西小像)> 연구 (A Study of Portrait of Yang Zhuxi housed in the Palace Museum in Beijing)

  • 장준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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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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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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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양죽서소상>은 1363년이라는 분명한 연대를 지닌 원대의 희소한 초상화라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또 최초의 초상화 이론인 "사상비결(寫像秘訣)"의 저자이자 중요한 초상화가인 왕역(王繹)의 유일한 현존 작이라는 점, 대표적 산수화가인 예찬(倪瓚)과의 합작이라는 점, 그리고 산수인물화 형식 초상화의 이른 사례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그림의 주인공은 본래 원대의 고관대작 양우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는 명대 이일화(李日華)의 오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 피사인물은 송강지역의 은거 문인으로 강남의 문인 사회에서 명망이 높았던 양겸이다. <양죽서소상>은 소식(蘇軾)과 같은 은자의 도상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은거 문인 양겸을 표현하는데 있어 적절한 선택이었다. 또 예찬이 그린 바위와 소나무는 군자, 문인이라는 전통적 상징성과 맞물려 작품의 의미를 강화시켜 주었다. 양식적으로는 백묘법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동시기의 여타 초상화들과 차별화된다. 그러나 안면 표현의 경우 채색이 배제되었음에도 오히려 뛰어난 사실성을 보여준다. 반면 신체의 표현에 있어서는 단아하고 절제된 서예적인 선묘를 구사함으로써 작품의 격조를 높이고자 하였다. <양죽서소상>은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제의적 성격이 강한 여타 초상화들과 달리 감상적 성격이 강하다. 피사인물 자신과 친구들의 열람, 감상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서로간의 교유적인 측면에서도 의미가 컸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순한 감상의 차원을 넘어서서 피사인물 자신과 친구들의 심회를 담고자 하는 의도가 컸다.

강세황의 "호가유금원기(扈駕遊禁苑記)"로 살펴본 창덕궁 후원의 원형경관 탐색 (Study on the Prototype of the Rear Garden in Changdeok Palace through Gang Sehwang's "Record of Strolling with King in the Forbidden Garden")

  • 정우진;오이천;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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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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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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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는 강세황의 "호가유금원기"를 통해 정조 연간 창덕궁 후원의 원형적 물상과 전후 변화상을 고찰한 것으로 옥류천, 만송정, 망춘정, 존덕정, 폄우사, 태청문 일대를 대상으로 하였다. "호가유금원기"에서 묘사한 옥류천 영역의 특징으로는, 소요정을 두른 담장, 부벽준의 회화 기법처럼 입체적인 산을 표현한 위이암의 형상, 태극정 앞의 지당이 있었다. 강세황이 포착한 태극정 앞의 지당은 "동궐도"에서도 확인되며, 고종황제 즉위 40년을 경축하는 칭경예식 때 원유회장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옥류천의 정비과정에서 철거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후원 꽃구경의 명소였던 망춘정 일대의 특징으로는 조각된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담장 내부에는 육면정의 구조를 하고 있는 망춘정이 있고, 그 초석은 백옥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또한 천향각으로 추정되는 낭무가 망춘정과 인접해 있었다. 강세황은 폄우사의 행각, 태청문과 이를 두르고 담장도 자세히 묘사하여 "동궐도"에 나타난 공간구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프라시압 궁전벽화를 활용한 문화콘텐츠 개발 방안 연구 (A Study on the Development of Cultural Contents based on the Mural Painting of Afrasiab Palace)

  • 박가영;이경주;정대율
    • 예술인문사회 융합 멀티미디어 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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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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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81-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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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의 문화가 교차하던 실크로드의 중심에 위치한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아프라시압 궁전지벽화가 1960년대 발굴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7C 소그디아나 왕국 바르후만 왕의 즉위식이 그려진 서벽에서 고대 한국인으로 추정되는'조우관'을 쓴 두 인물이 발견되어 당시 국제적 정세와 문화적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 아프라시압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벽화는 사방으로 각기 다른 내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것만이 가진 문화적 특성과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활용한 스토리텔링과 문화콘텐츠의 개발은 없었다. 따라서 본 연구의 목적은 고대 한국인이 그려진 아프라시압 궁전지 벽화의 서벽 그림을 기반으로 한 문화콘텐츠와 캐릭터 개발과 활용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직접 현장을 방문하여 조사한 자료는 물론이며 기타 관련 학술자료들을 수집하였다.

용주사(龍珠寺)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의 축원문(祝願文) 해석(解釋)과 제작시기(製作時期) 추정(推定) (Interpretation of Praying Letter and Estimation of Production Period on Samsaebulhoedo at Yongjusa Temple)

  • 강관식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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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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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5-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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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용주사 <삼세불회도>는 유교적 이념과 불교적 이념, 궁중화원 양식과 산문화승 양식, 고유한 전통화법과 외래적 서양화법 같은 다양한 이원적 요소들이 창조적으로 융합되어 이룩된 기념비적 걸작으로서 조선 후기의 회화 발달과 혁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의 하나이다. 그러나 화기(畫記)가 없기 때문에 현존 <삼세불회도>의 제작시기와 작가를 비정하고 양식 특징을 분석하는 문제를 놓고 연구자마다 견해 차이가 심해 지난 50여 년 간 논쟁이 끊이지 않음으로써 회화사적 의미와 가치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존 <삼세불회도>의 제작시기를 추정하는 문제는 모든 논의의 기본적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특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불화와 달리 화기(畫記)가 없고, 작가에 대한 기록이 문헌마다 다르며, 화승들의 전통적인 불화 양식과 화원들의 혁신적인 서양화법이 혼재되어 있어 작가와 양식을 일치시켜 이해하는 문제가 쉽지 않기 때문에 제작시기를 추정하는 문제는 특히 논란이 많은 쟁점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현존 <삼세불회도>는 일반적인 불화와 달리 수미단 중앙에 왕실(王室) 존위(尊位)의 축원문(祝願文)을 써놓아 주목되며, 애초에 썼던 "주상전하(主上殿下), 왕비전하(王妃殿下), 세자전하(世子邸下)"의 삼전(三殿) 축원문을 지우고 '자궁저하(慈宮邸下)'를 '왕비전하(王妃殿下)' 앞에 추가해서 고쳐 써넣어 더욱 주목된다. 따라서 이 축원문은 현존 삼세불회도의 제작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객관적 단서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최근에 새롭게 제시된 19세기 후반 제작설은 1790년의 용주사 창건 당시에는 순조(純祖)가 '원자(元子)' 신분이었고 1800년 1월 1일에야 '세자(世子)'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세자(世子)'라는 존호가 쓰여있는 현존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은 세자 책봉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아야 하며, 형식과 도상이 19세기 후반기 화승들이 그린 청룡사나 봉은사의 <삼세불회도>와 유사하고 서양화법은 후대에 개채된 것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현존 <삼세불회도>는 19세기 후반기의 화승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불화(佛畫) 화기(畫記)의 축원문을 광범위하게 조사해보면, 불화 제작 시점에 왕실에 실존한 인물의 신분(身分)과 생년(生年), 성씨(姓氏)까지 구체적으로 쓰는 것이 통례였기 때문에 19세기 후반에는 용주사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처럼 수십 년 전에 승하한 사람들을 생전의 존호(尊號)로 고쳐 쓸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1790년 전후에는 원자(元子)나 세자(世子)의 유무(有無)와 무관하게 의례적으로 "주상전하(主上殿下), 왕비전하(王妃殿下), 세자저하(世子邸下)"의 삼전(三殿) 축원문을 쓰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현존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에 '세자저하(世子邸下)'의 존호가 쓰여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반적인 왕실 위계와 달리 '자궁저하(慈宮邸下)'가 '왕비전하(王妃殿下)'보다 앞에 쓰여있는데, 이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비극으로 인한 정조와 혜경궁(자궁(慈宮)), 왕비 세 사람의 특수한 관계로 인해 정조가 혜경궁의 왕실 위상을 왕비 앞에 오도록 하여 정조대에만 사용된 특별한 왕실 전례였기 때문에 현존하는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은 정조대에 개서(改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애초에는 당시의 일반적인 불화 축원문처럼 의례적인 삼전(三殿) 축원문을 썼다가 이를 지우고 다시 '자궁저하(慈宮邸下)'라는 특별한 존호를 넣어 개서(改書)하는 매우 특별한 일이 일어났는데, 이는 현륭원(顯隆園)의 재궁(齋宮현륭인 용주사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와 부인인 혜경궁(惠慶宮)(자궁(慈宮))임에도 불구하고 축원문에 의뢰적인 삼전(三殿)만 쓰여있고 혜경궁이 빠져있는 것을 보고 정조가 지시하여 개서(改書)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개서(改書)는 정조가 현륭원과 용주사가 준공된 뒤 처음으로 현륭원에 원행(園幸)하여 원소(園所)를 두루 돌아보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용주사에 들러 <삼세불회도>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친견했던 1791년 1월 17일에 정조가 지시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어진다. 따라서 이와 같이 특수한 내용과 형태로 이루어진 축원문은 현존 <삼세불회도>가 1790년의 창건 당시에 그려진 원본 진작임을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객관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사합원의 평면유형과 공간구성의 특징에 관한 개괄적 연구 (A Study on the Feature of Plan Type and Space Composition of the Siheyuan Housing in China)

  • 최장순
    • 한국주거학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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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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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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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and analyse the features of plan type and space composition of the Siheyuan(courtyard house) which is one of the most remarkable types of the traditional dwellings in China. With the passage of time this house developed into one of the chinese house style. The technique of Siheyuan's spatial composition goes so far back in the New Stone Age. The relics of this are the colony layout, the system of four sides, the layout type of a palace, the picture of lacquered ware, the pictured brick, the earthenware of house type, the cave painting, the paintings of painters and others. The fundamental spatial conception of it arranges one or more courtyards to compose, sometimes in a very complex way, a general walled compound. The main longitudinal axis is mainly north-south, but the chief buildings, or halls are always placed transversely to it. These rectangular buildings mayor may not connect, by means of open galleries variously planned, with rows of smaller buildings flanking the courtyards on both sides. On this system, enlargement is never carried out by adding to height, but by continual duplication of existing units, and growth in breadth or preferably depth. The need for family security is thought to have led to the development of this rectangular houses with walls mainly blank on the outside, defensible entrances, and public service facilities in the center of the houses.

의장기(儀仗旗)에 있어서의 천상(天象)의 의미(意味) 고찰(考察) (A Study on the Heaven-Shaped Patterns of the Ceremonial Flags)

  • 백영자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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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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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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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
  • Various ceremonial flags were of great importance to the rulers who wished to have the absolute authorities for governing the people. Perhaps nothing indicated the ideas, thoughts and symbols of a certain period and people than the ceremonial flags. The ceremonial flags used in the old China and Korea took the shapes of the heaven and the earth, representing the social backgrounds and thoughts. This study was limited only to the discussion of the heaven-shaped patterns of the ceremonial flags. The 28 constellations of the heaven, in the Oriental way of thinking, were considered to express the immortal powers of Providence and the political domination of the earth. Hence the Polaris, the center of the heaven, symbolized the whole family of king, prince, child born of a concubine and royal harem. Among the constellation pictures were those of Han period, wall painting of old tombs in Koguryeo kingdom and old Japanese kingdom. Referring to the Emperor's ceremonial flags in Daemyeongjibyei, symbolic meanings changed historically and the complete systems of the ceremonial flags were established in Song period when the divine person was drawn on the flags. Animals concerned properly with the particular star and the shapes of the star were both drawn on the flags in Won period and only the shapes of the particular star in Myeong period. In the Imperial enthronement of Kojong the ceremonial flags might be made by the examples of those of Myeong period and remains are now found at Changdeok Palace, which need a further study because the references in detail are not avail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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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의 수발양식 관한 연구 -조선시대 여성 수발법을 중심으로- (A Study on the form of korean Women's Hair Style-From the Viewpoint of Woman's Hair Style in Cho-Sun Dynasty-)

  • 정상숙;조효순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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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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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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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 SOO-BAL(Hair Style) is a method Which match hair style to face and clothes with using hair covering and protecting the head. Also SOO-BAL includes personal ornaments using to avoid one's hair be disheveled. In a standpoint of beauty and spirit, etiquette SOO-BAL is a very important thing as one being dressed up. Until now, since just a form of hair style have been studied, hair styling process is nothing to be known and studied. Time after time, our unique traditional SOO-BAL is forgotten with clothes and then this th-esis will be classified hair styling form follow-ing a form of hair style in royal palace of the C-hosun dynasty. According to the record of HAE DONG HISTORY, it shows the same of attire between Ko-rean and chinese style in ae of the chosun. The reason in that there were no any certain boundary border and the interaction of culture between two countries was happened spontaneously at ancient time like the GOCHO-SUN age. Until the period of the three states, the korean attire be changed had gone with chinese one s-imilarly. The chinese form gave to influence on the EONJIN MEURI·POON-GI-MYEONG MEURI·JJO-CJIN MEURI·MOOK-EUN GOONG-BAL MEURI·OL-LIN MEURI·SSANGSANG-TU ME-URI be drawn wall painting in the KOKUR-YU. And a gold chignon accesso-ry unearthed in a MOO-RYOUNG royal mausoleum is proof of the korean attrire be changed with chinese. In the shilla dynasty at three years after Cjin-Deuk(A.D. 649) reign. It was recorded that the dynasty let women wear the form of chinese attire. Also in the koryo dyn-asty, a rod-like hairpin (BIN-YEU) and DANG-GI employing EON-JIN MEURI was used. The SOO-BAL based on the Confucianism had lots of regulations which limited to use ornaments with classes of society in the CHOSUN dynasty. Until YOUNG CHO and CHUNG CHO period. EONJIN MEURI be decorated GACHAE was announced by dynasty as ind-ulging in luxury. Women of yangban used a rod-like hairpin and a chignon accessory made by jewerly. And 1-owly women weared a rod-like hairpin made of born and wood to perfom EONJIN MEURI with PUNCHAE. Most unmarried women decorated with DDA-AH-NEULIN MEURI, GUI-MIT MEURI, specially in palace with SAE-ANG MEURI. At palace, one put on a full dress with KEUN MEURI, and a simple dress with ER-YEO MEURI be decorated DDERL-JAM The CHOP-JI MEURI manifested social rank, class. Kids at CHO-SUN age had BA-DUK-PANMEURI and JONG-JONG MEURI. The ornament things are GACHE, DDERL JAM with EON-JIN M-EURI, and all kinds of rod-like hairpin and chignon accessory used in JJOK MEURI. IN DANGGE, JE-BI-BURI DANGGI used by ummarried women. DO-TOO-RAK DANGGI and AP DANGGI on a dress suit, and BE-SSI DANGGI used by 3∼4 years ungrown kids etc. were used. And at palace, kinds of CHUPJI used with JJOK MEURI showed social rank. In CHOSUN age, women want to keep shiny hair washed at TA-NO festival day, a treatment of bald hair used a forked remedy. In CHOSUN age, woman Soo-Bal hair style has DAE-SOO·DDEU-KOO-JI MEURI·CHO-P-GI MEURI·EON-JIN MEURI·SAE-ANG MEURI· and so on. We could find out Soo-Bal was developed very well by these variety hair styles. I attatched all of the hair style pictures step by step, and also explained detail my research foll owing these 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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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버쉬팅변환을 통한 「동궐도(東闕圖)」의 평면도 제작 가능성 연구 - 창덕궁 금천교 주변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Possibility of Producing a Floor Plan of 「Donggwoldo(東闕圖)」 through the Use of Rubber Sheeting Transformation - With a Focus on the Surroundings near the Geumcheongyo Bridge in Changdeokgung Palace -)

  • 이재용;김영모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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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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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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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고는 "동궐도(東闕圖)"의 작도원리를 기반으로 러버쉬팅변환(Rubber Sheeting Transformation)을 통해 조선후기 창덕궁 금천교 주변의 평면도 제작을 시도하였으며,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궐도(東闕圖)" 제작 당시부터 현존하는 주요 전각의 실제 크기와 그림에 묘사된 크기를 비교하여 전각의 정입면이 약 1/200으로 축소되어 작성되었음을 밝혀냈다. 그러나 측입면에서는 동일한 제작 비율이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측입면의 길이가 실제의 약 절반 정도로 그려지고, 사선 각도가 평균 $39^{\circ}$로 파악됨에 따라 캐비닛 투영(Cabinet Projection)과 유사한 방식으로 작도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둘째, "동궐도(東闕圖)"의 작도 원리를 역추적하여 "사투영평면도"를 작성하고 러버쉬팅변환을 통해 "동궐도(東闕圖)"의 창덕궁금천교 주변 평면도를 제작하였다. 변환 시 투영변환(projective transformation)이 가장 적합한 것으로 확인되었고, 표준 오차는 2.1208m로 비교적 높은 정확도를 나타냄으로써 "동궐도(東闕圖)"의 평면도 제작이 유의미하였다. 이는 "동궐도(東闕圖)"뿐만 아니라 평행사선도법으로 작성된 각종 기록화의 평면도 제작 가능성을 시사한다. 셋째, 작성된 평면도가 제공하는 공간 정보의 정확성을 검토하기 위해 금천교의 위치, 금천교와 진선문의 배치, 금천의 석축 위치를 시기에 따라 비교하였다. 그 결과 작성된 평면도의 내용이 금천교 발굴조사결과와 그 맥락을 함께 함으로써 러버쉬팅변환이 "동궐도(東闕圖)" 제작 당시 모습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도구로서의 활용 가능성이 검증되었다. 본 연구는 러버쉬팅변환을 적용하여 "동궐도(東闕圖)"에 수록된 공간정보를 2차원 평면도로 제작하기 위한 가능성을 모색하고, 이를 통해 조선후기 동궐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고종연간 집경당(緝敬當)의 운용과 궁중(宮中) 서화수장(書畵收藏) (The Collection of Paintiongs and Calligraphy at Jipgyeong-dang Hall during King Gojong's Reign(1897~1907))

  • 황정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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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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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7-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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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본 논문은 경복궁 집경당의 운용과 수장품의 내역을 통해 고종연간 궁중 서화수장의 추이를 살펴본 것이다. 그동안 집경당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건립시기는 경복궁 중건공사가 이루어진 1867년 이후이며 주로 내외신 접견처로 활용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이글에서는 집경당과 한 건물로 배치된 함화당의 상향문과 기타 관찬사료의 기록을 통해 집경당이 1890년경에 건립되었으며, 그 운용에 있어서도 국왕의 접견처보다는 주로 고종의 강학(講學) 공간이자 풍부한 서책과 서화를 보관한 궁중 도서관, 서화수장처로서 기능을 하였음을 조명하였다. 서책을 보관한 장서각이 궁궐의 특정 영역과 관계없이 분포했던 반면, 서화작품을 수장한 수장처는 조선후기 이후 연침(燕寢) 영역에 위치하기 시작했다. 고종과 비빈들의 침전 영역에 속한 집경당이 서화수장처로 이용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특히 고종연간에는 건청궁과 집옥재를 중심으로 국가의 문화적 기틀을 마련하고자 한 정책으로 인해 경복궁 연침영역에 궁중 도서관이 밀집해 있었다. 당시에는 헌종에 의해 발전한 19세기 전반의 궁중 서화수장에 힘입어 각 궁궐마다 선왕선후의 초상, 그들의 어필, 조선왕실 서책, 그밖에 국내외 서화가들의 작품이 다량으로 소장되어 있었다. 한편, 고종의 적극적인 외국서적 수입정책과 개항기라는 시대상황과 맞물려 궁중으로 유입된 서화자료의 내역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1800연대를 전후로 간행된 중국 청대 서화, 화보(畵譜), 총서류 및 일본화보, 서양지도가 상당량 유입된 정황이 파악됨에 따라 조선 고유의 작품을 위주로 했던 전통적인 수장 성격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이러한 집경당 소장 서화의 외래적인 성격은 19세기 서화단에 있어 김정희 일파를 중심으로 한 청대 첩학(帖學) 비학파(碑學派) 서풍(書風)의 수용, 그리고 장승업 조석진 안중식 등이 청대 산수 인물화풍을 적극 수용하여 중국화풍의 대대적인 유행을 가져온 경향과도 상통한 맥락이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