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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지역(農村地域) 국민학교(國民學校) 급식아동(給食兒童)과 성장발달(成長發達)과 식생활(食生活) 습관(習慣) (Effects on School Lunch Service Programme of Elementary School in Rural Area)

  • 박진욱;이성국
    • 한국학교보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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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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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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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
  • 농촌지역 국민학교 급식아동의 성장발달과 식생활 습관을 알아보기 위하여 경상북도 농촌지역 국민학교 중 급식 학교 6학년 아동 636명(남자 312 명, 여자 324명)과, 이들 학교 인근의 비급식학교 6학년 아동 628명(남자 306명, 여자 322명)을 대상으로 학생건강기록부에 기재된 신장, 체중 측정치를 1학년에서 6학년까지 6년간의 연속적인 자료를 조사하고, 이들의 전반적인 식생활 습관을 1992년 2월 1일부터 2월 15일까지 설문지로 조사하여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남자의 신장은 6년간 급식군이 27.8cm, 비급식군 27.1cm자랐고, 여자신장은 각각 29.9cm, 28.4cm가 자라서 급식아동이 약간 더 성장하였다. 남자체중은 급식군 15.7kg, 비급식군 14.8kg이 증가한 반면, 여자는 16.9kg 및 17.2kg이 성장해 남자는 급식아동이, 여자는 비급식아동이 더 성장했다. 1학년때는 percentile별 신장 체중의 분포가 표준정규분포 곡선형태에 가까우면서 급식군과 비급식군이 서로 비슷하였으나 6학년때는 50percentile선을 중심으로 75percentile이상에 급식아동의 분포가 더 많았다. 6학년때 체력은 남자의 경우 급식아동이 멀리뛰기, 던지기, 턱걸이, 윗몸일으키기에서 비급식아동보다 우세하였으며, 여자는 멀리뛰기 한 종목에서만 유의한 차이를 보였고 (P<0.05), 체력급수에서도 우수한 특급의 분포가 급식군에서 더 많았다. 아침식사를 매일 먹는 아동이 급식군 67.6%, 비급식군 57.8%였고, 아침을 안먹는 이유로 급식군은 습관이 돼서 (50.7%), 비급식군은 밥맛이 없어서 (58.9%)라고 답하였으며, 급식아동에서 대체적으로 싱겁게 먹는 경향이 많았다. 간식빈도는 무 군 모두 70% 정도의 아동이 하루에 1회이상 간식을 하고 있었으며, 간식장소는 급식군은 집에서 (45.2%), 비급식군은 귀가 도중 가게나 길거리에 (48.4%)한다고 답하였다. 가정에서 식사할 때 음식을 골고루 먹는 아동이 급식군에서 더 많았고 식사시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삼킨후 이야기하며 먹는 아동이 급식군에서 더 많았는 반면, T.V를 보면서 먹는 아동은 비급식군보다 적었다. 식사전에 항상 손을 씻는 아동이 급식군은 84.0%, 비급식군 63.6%로 급식군에서 유의하게 높았고, 식사후 이닦기를 항상 하는 아동은 급식군 여자에서 많아 유의한 관련성을 보였다. 영양교육 실태에 있어서도 영양교육을 '받았다'라고 답한 아동이 급식군 78.0%, 비급식군 57.5%였다. 이상의 결과로 볼때 급식아동이 비급식아동 보다 성장발육 속도가 더 빨랐고, 체력도 더 좋다고 할 수 있으며, 식습관 및 위생습관도 양호한 것으로 나타나 국민학교 특히 농촌지역부터 학교급식을 빠른 시일내에 확대 실시토록 해야 할것이며, 교육급식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영양 및 식생활개선교육도 강화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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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자루아과(Pisces: Acheilognathinae) 담수어류 3종의 숙주조개(작은말조개; Unio douglasiae sinuolatus) 크기에 대한 산란양상 (Spawning Patterns of Three Bitterling Fishes (Pisces: Acheilognathinae) in Relation to the Shell Size of Host Mussels (Unio douglasiae sinuolatus))

  • 최희규;이혁제
    • 한국환경생태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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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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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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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연구는 2015-2018년 5월 기간 동안 납자루아과 어류의 서식 집단 중 강원도 홍천 내촌천(HN), 덕치천(HD), 정선 골지천(JG) 및 조양강(JJ)을 대상으로 기 개발된 제한절편 길이 다형성(restriction fragment length polymorphism; RFLP) 분자마커를 이용하여 숙주조개 속 난 및 치어에 대한 정확한 종 동정을 수행 후 납자루아과 어류의 숙주조개 크기에 대한 산란양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연구대상 지역 내 납자루아과 어류는 내촌천과 골지천에서 1종(묵납자루; Acheilognathus signifer), 덕치천에서 3종(각시붕어; Rhodeus uyekii, 묵납자루; A. signifer, 줄납자루; Acheilognathus yamatsutae), 조양강에서 2종(묵납자루, 줄납자루)으로 확인되었고, 네 지역에서 모두 동서하고 있는 숙주조개인 작은 말조개(Unio douglasiae sinuolatus) 982개체를 채집하였다. RFLP 분자마커를 이용하여 납자루아과 어류의 난 및 치어가 확인된 작은말조개(N=163; 16.6%)에서 총 646개체의 납자루아과 어류의 난 및 치어(묵납자루 454, 줄납자루 43, 각시붕어 149개체)를 확인하였다. 각 지역 숙주조개 크기에 따른 산란선호도를 조사하기 위해 난 및 치어가 확인된 숙주조개(mussels with [presence] eggs/fry)와 확인되지 않은 숙주조개(mussels without [absence] eggs/fry)의 각장(shell length), 각고(shell height) 및 각폭(shell width)의 평균 크기를 비교하였다. 그 결과 3종의 납자루아과 어류가 동서하는 덕치천의 경우 난 및 치어가 확인된 숙주조개가 확인되지 않은 숙주조개보다 각장(1.98mm), 각고(0.85mm), 각폭(0.73mm)의 크기가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크게 나타났으며(Mann-Whitney U tests, P=0.002, P=0.012, P=0.009), 다른 세 개의 지역에서도 난 및 치어가 확인된 조개의 각장, 각고, 각폭의 크기가 큰 결과를 보였으나, 통계적으로 유의하지는 않았다. 추가적으로 종 간 숙주조개 당 평균산란 난 및 치어의 수를 분석한 결과 각시붕어 $9.31{\pm}5.94$개, 묵납자루 $2.86{\pm}2.45$개, 줄납자루 $2.50{\pm}1.32$개로 각시붕어는 묵납자루와 줄납자루보다 숙주조개 당 평균 6.45~6.81개 더 많이 산란하였고, 통계적으로 유의한 결과를 나타내었다(Kruskal-Wallis test, P<0.001). 이 결과는 본 연구 대상 납자루아과 어류 3종에서 크기가 큰 작은말조개를 산란을 위한 숙주로서 선호함을 의미하고, 조개 크기에 대한 선호도 차이가 동서하는 납자루아과 종의 수가 많을수록 크게 나타났다. 또한, 묵납자루와 줄납자루의 경우 많은 숙주조개에 적은 양의 난을 추가적으로 고르게 산란하는 반면에 각시붕어는 비교적 적은 수의 숙주조개에 많은 양의 난을 산란하는 번식전략을 나타내었다. 2종 이상의 납자루아과 어류가 서식하는 덕치천(HD)과 조양강(JJ)에서 묵납자루와 줄납자루 2종이 동일한 조개에 산란하는 것이 관찰되었다(N=4). 이는 납자루아과 어류가 2종 이상 동서할 때, 동일한 자원인 작은말조개를 자신의 산란숙주로 이용하기 위한 종간경쟁(interspecific competition)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본 연구에서는 기존 연구된 생태학적 연구에 유전학적인 방법을 추가하여 각 집단 간, 종 간 숙주조개 크기에 대한 산란양상을 보다 정확히 규명하여 숙주조개를 이용하는 납자루아과 어류의 생태적 적응양상을 명확히 파악하고 더 나아가 숙주조개와 납자루아과 어류의 공생(mutualism) 혹은 숙주-기생의 상호관계(host-parasite relationship)를 규명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사찰림의 생태문화적 평가지표에 관한 연구 - 조계산 송광사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Eco-Cultural Assessment Indicator for Buddhist Temple Forest - Focused on Mt. Jogye Songgwang-sa Temple -)

  • 장영환;구본학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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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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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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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연구는 우리나라 사찰림의 생태문화적 가치를 평가하는 평가지표를 개발하고, 개발된 사찰림의 평가지표를 삼보사찰의 한 곳인 송광사(승보사찰)에 적용하였다. 브레인스토밍(숲치유 전문가 2인, 불교계 산림전문가 스님 1인, 산림1인, 연구자 포함 6인)을 통하여 문헌연구와 평가지표 초안을 도출하였고, 이후 전문가그룹(1차:32명, 2차:30명) 심층인터뷰(FGI)를 5점 리커트 설문조사방법으로 도출한 최종평가지표 4개 영역 20개 항목을 기초로 실행한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사찰림의 생태문화적 평가지표에 대해 4개 영역 20개 평가항목으로 각각 5점으로 하였으며 역사문화적 가치는 5개 항목으로 총 25점을, 생태적 가치는 5개 항목으로 총 25점, 휴양 관광적 가치는 6개 항목 총 30점, 교육 이용적 가치는4개 항목 총 20점으로 각각 배점하여 총점을 100점으로 하였다. 개발된 평가지표를 연구대상지인 조계산 송광사를 대상으로 적용한 결과, 사찰림의 역사 문화적 가치가 25점 만점에 23점, 생태적 가치는 25점 만점에 21점, 휴양 관광적 가치는 30점 만점에 22점, 교육 이용적 가치는 20점 만점에 16점을 차지하여 총 82점의 결과치가 도출되었다. 이번 연구에 대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최초로 사찰림의 생태문화적 지표를 개발했다는 것에 의미를 가지고, 사찰림의 생태문화적가치에 대한 활용자료가 될 수 있음에 의미를 가진다. 둘째, 사찰림의 생태문화적 평가지표를 가지고 송광사 사찰림을 평가한 결과, 사찰림의 휴양 관광적 가치와 교육 이용적 가치가 매우 낮았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찰림을 국내 최고의 고객으로 인정하는 산림청과 환경부, 문화재청 등은 사찰림의 관광, 휴양, 교육, 이용을 위한 지원을 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사찰림의 생태문화적 가치에 대한 우수성에 대해 국가적 차원에서 연구하여 사찰림만이 가지는 템플스테이와 치유를 접목한 가칭 "사찰림에서의 치유"와 같은 국가브랜드를 만들어 세계적인 관광산업이 되기를 바란다. 넷째, 사찰림에 대한 법적정의가 없는 현 상황에서 사찰림에 대한 법적정의의 필요성에 대하여 법적정의를 제안하였다. 이러한 사찰림의 정의가 법률적으로 마련되면 사찰림의 생태문화적 가치에 대한 보호 및 활용적 측면에서 국가기관에 전담부서를 조직하고 더 나아가 사찰림을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도 등재하는데 기초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다섯째, 이번 연구의 결과로 나온 사찰림에 대한 생태문화적 평가지표를 바탕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에 적용해서 각 사찰마다의 특징을 도출하여 사찰의 관리 또는 활용에 기초자료가 될 것이다.

남해신사 기본계획에 따른 신당건축 고찰 (A Study on the Basic Planning of the Nam-Hae Sin-Sa Architecture)

  • 김상태;장헌덕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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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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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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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2000년에 발굴된 영암 남해신사는 나라의 안녕과 구복을 위한 국가제사시설로 2001년 신당과 삼문을 복원하였다. 해신사는 바다의 용왕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남해신사와 동해묘, 그리고 서해신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해묘도 복원된 상태이다. 그러나 현재 복원된 남해신사의 신당과 삼문은 2000년 발굴도와 내용에 따른 완전한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고, 관련 문헌과 고지도 분석, 그리고 발굴내용의 심층분석과 아울러 관련 인물들의 인터뷰 내용과 사례분석을 통하여 새로운 기본계획을 연구하게 되었다. 본 연구를 통해서 남해신사 추정 기본계획에 따른 신당건축 고찰에 대한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1. 남해신사는 국가에서 직접 운영한 국가 제사시설로 나라의 안녕과 기우를 지내는 악(嶽) 해(海) 독(瀆)을 대표하는 신당 건축이다. 특히 남해신사는 중국과 일본의 국제무역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으며, 지리산 제단과 함께 호남지방의 중심적인 신당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2. 해신사에 대한 명칭은 남해신사, 동해묘, 서해단으로 정의되어 불리었다. 그러나 남해신사의 경우 조선 초기와 후기의 명칭이 문헌과 고지도 연구를 통하여 남해신사에서 남해당으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해단의 경우 조선 초기에는 건축물이 없는 단으로 조성되었다가, 후기에 건축물이 조성된 사당형식으로 변하였음을 고지도 연구를 통하여 추정할 수 있었다. 3. 해신사에 대한 고지도 분석은 동해묘의 경우 맞배지붕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나, 서해단과 남해신사의 경우 팔작지붕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4. 2000년 발굴내용에 의한 용척 분석결과 나타난 다양한 용척의 사용은 고려시대 남해신사의 규모가 대사(大祀)의 규모로 개창되었지만 조선시대에 중사(中祀)의 규모로 중창되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내용이다. 즉 조선시대 중사로 중건하면서 용척의 척도로 조선시대 영조척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5. 상기의 연구결과에 따른 기본계획은 신당의 경우 팔작지붕의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3 : 2비율로 계획하였으며, 용두와 용미가 장식된 안초공, 내부의 운공과 파련대공 장식, 그리고 용두의 충량은 해신인 용왕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시설임을 표현하였다. 중문간채와 대문간채의 경우 향교건축과 같은 규모와 구성으로 계획하였는데, 발굴내용을 기초로 하였으며, 대문간채 솟을 문의 경우 3칸을 솟을 대문으로 올렸다. 이는 대문간채의 측칸이 맞배지붕의 형태이므로 그 비례와 형태의 조화를 고려하였다. 6. 남해신사의 기본계획은 계룡산 중악단의 사례와 같이 신당과 중문간채, 대문간채에 이르는 2가지의 공간, 즉 신당공간과 준비 공간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으며, 남해신사 서쪽에 위치한 우물은 신당건축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논산 노성산(魯城山)의 입석(立石) 분포와 총석사(叢石寺) 수석(樹石)의 정원적 면모 (Dispersion of Standing Stones at Noseongsan(Mt.Noseong) and Aspect of the Stone Decorated Garden(Soo-suk Jeongwon) at Chongsuk-Sa(Chongsuk Buddhist Temple) in Nonsan City)

  • 노재현;허준;장일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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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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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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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는 아직까지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논산 노성산성 일대 입석과 총석의 현황과 그 형태 및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이에 따라 노성산과 노성산성의 장소정체성과 노성산성 내외부에 산재한 입석의 분포를 파악하는 한편 입석의 밀도가 가장 높고 문화재적 보존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는 '총석사'를 중심으로 수석(樹石)의 배치형태 및 구성 특성을 조사 분석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佛宇條)에서의 '탑사(塔寺)' 존재의 언급, 탐문조사 결과 사찰의 존재설 그리고 '관음사(觀音寺)' 명의 와편 발굴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오래전부터 산성 내부에 불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총석사'라는 각자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찰조사 결과, 산성내부에 존재하는 다수의 입석지 중 제6입석지는 수석(樹石)의 규모, 수석 구성의 복합적 경향, 주변 우물(샘) 및 방지 그리고 석문 등에 이르는 계단의 조성 흔적 등을 볼 때 총석사를 중심으로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간의 성격이 강하다. 총석사를 비롯하여 삼신암, 칠성암, 대장암 등으로 각자된 5개의 수석과 관세음보살로 추정되는 선각 마애불은 동일 공간 바위 위에서 발견된 북두칠성의 성혈(星穴)과 함께 이 공간이 불교 또는 도교와 민간신앙이 결합하여 발생한 칠성신앙 및 산신신앙적 공간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로 파악되었다. 총석사 입석의 실측조사 결과, 수석의 수는 총 24개로 수석고는 29~402cm, 수석폭은 48~290cm로 규모에 있어 큰 편차를 보였으며 수석간 평균거리는 23.56cm로 나타났다. 또한 입석, 평석, 산형석 그리고 영상석 등 다양한 돌을 특치(特置), 군치(群置)하여 수석하였으나 돌의 좌향은 서향(W)으로의 일관된 지향성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국내에 알려진 정토정원의 유구와 비교할 때 수석의 배치 기법상 입석과 형상석 이외의 3개의 평석은 선원의 대표적 구성요소가 되는 좌선암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중 보살암을 마주하는 평석은 삼산석(三山石)을 상징화하여 조성된 것이지만 높이 및 주변 수석 배치 여건으로 보아 참선의 목적보다는 제수를 위한 공양석으로 추정된다. 총석사 수석의 구성은 입면이나 평면구성상 천지인 삼재(三才)를 형상화한 삼존석형(三尊石形)을 바탕으로 심경미(深景美)를 추구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부등변삼각형의 3:5:7 복합수석법으로 일정한 지향성을 보이며 배치되고 있음을 볼 때 총석사 입석군은 사원수석의 형태로 참선을 목적으로 돌짜임된 축경적(縮景的) 정원 유구로 보인다.

조선시대 능비(陵碑)의 건립과 어필비(御筆碑)의 등장 (Formative Stages of Establishing Royal Tombs Steles and Kings' Calligraphic Tombstones in Joseon Dynasty)

  • 황정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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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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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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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논문은 조선 초 중기, 조선후기, 대한제국기 세 시기로 나누어 조선왕릉에 건립된 신도비와 표석의 시기별 건립추이와 양식적 특징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 왕실 능비(신도비와 표석)는 일반 사대부가와 달리 건립한 시기와 주체, 후계왕의 의도에 따라 시기별 차이를 보이며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15~17세기는 왕릉 신도비의 건립과 재건이 이루어진 시기, 18세기는 신도비가 표석으로 대치되어 다수 건립되었고 국왕의 어필을 직접 돌에 새긴 어필비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이며 대한제국기는 황제국으로 격상됨에 따라 조선 개국자인 태조와 왕후, 선조들에 대한 추숭(追崇)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표석 중건이 이루어진 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본다면, 결국 우리나라 능비의 역사는 조선후기를 기점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왕릉 신도비의 형식은 삼국시대의 부정형한 석비의 초보적인 형태에서 벗어나'귀부이수'형의 당비(唐碑) 형식을 수용한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 말 탑비의 퇴화된 양식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15세기 건립 당시부터 선왕에 대한 숭모 예를 표현하고자 하는 국왕과 왕의 치적이 국사(國史)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므로 신도비를 별도로 세울 필요가 없다는 신료들의 입장이 대치되면서 건원릉 제릉 헌릉 구 영릉 4곳에만 건립된 채 왕릉에는 한동안 석비가 건립되지 않았다. 신도비 건립이 중단된 이후 17세기에 이르러 왕릉에 아무런 표(表)를 해 둘 수 없다는 의견이 제기됨에 따라 형식이 간소한 표석이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1682년 작 영릉(寧陵)의 표석은 최초로 왕릉에 건립된 표석이자 장대한 규모,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왕릉의 능표는 영조 재위 기간인 1740년대부터 대규모로 건립되었다. 열성(列聖)에 대한 추숭과 어필간행 등을 통해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전통성을 공표하고자 했던 영조는 제릉의 신도비를 재건하는 한편, 의릉(懿陵)을 비롯하여 총 20곳에 달하는 곳에 표석을 세우는 역사(役事)를 추진했고, 처음 친필 글씨를 돌에 새긴 어필비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어필비 제작 현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소실된 어필을 보존하려 한 숙종의 신념을 계승한 영조에 의해 제도적으로 추진되면서 어필을 새긴 능비가 등장한 배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시대사적으로 주목할만하다. 이러한 표석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다시 한번 다량 제작된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고종은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태조의 조선 건국에 두고 태조와 그 4대 선조에 대한 추숭과 기념물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고 전면과 후면 모두 자신의 글씨로 채움으로써 역대 어느 왕보다 통치자로서 권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었다. 이상 언급한 왕릉의 신도비와 표석의 건립 추이는 동시대 원 묘에 건립된 신도비, 표석과 비교 고찰을 통해 시대별 특징과 왕실 조각품으로서 성격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날 것으로 생각한다.

'집경제영시(集景題詠詩)'를 통해 본 전통주택의 조경문화 향유양상 (A Study on the Traditional House Landscape Styles Recorded in 'Jipkyungjaeyoungsi(集景題詠詩, Series of Poems on Gardens Poetry)')

  • 신상섭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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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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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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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한국고전번역원 DB자료에 근거하여 전통주택 관련 '집경제영시(集景題詠詩)'를 통해 본 정원의 식물요소와 상징성, 그리고 조경문화를 추적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집경제영시'는 고려중기에 유입되어 지속적으로 창작되었는데, 주로 문신의 길을 택한 상류계층에 의해 향유되었다. 총 165책에서 주택정원을 대상으로 25책의 33제영시가 추출되었는데, 최초로 관련 제영시를 남긴 인물은 고려후기의 문신 이규보(1168~1241)로 판단된다. 그는 '퇴식재팔영', '가분중육영', 그리고 '가포육영' 등 경물소재의 확장과 영물시를 팔경시로 대입하여 향유문화의 다양화에 기여한 최초의 인물이라 하겠다. 둘째, 제영시 표제는 사랑채 당호가 많이 활용되었으며, 경물은 8영(詠)이 전체 33개소 중 19개소(57.5%)였으며, 4영, 6영, 10영, 14영, 15영, 16영, 36영 등의 빈도순으로 제영되었다. 제영에는 소상팔경류의 전형성을 벗어나 (1)경물명 중심 (2)지명과 경관명의 결합 (3)경관명 중심으로 차별화 되는 양상을 보인다. 셋째, 소표제는 (1)자연 및 정원식물 중심의 자연경관소재(22개소, 66.7%)가 주를 이루었고 (2)사랑채 건물 및 연못과 정자 등 조경시설 중심의 인문경관소재(3개소) (3)자연 속에서 행해지는 인간의 행위요소 중심의 복합 문화경관소재(8개소) 유형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양상은 정원식물의 심미적 취향, 실경을 뛰어넘어 관념화된 경물을 향유하며 주목받지 못했던 채소류와 약초류에도 관심을 두는 정감 표출로 이어진다. 넷째, 정원식물은 상록수(4종)에 비해 낙엽수의 개체수(17종) 비중(80.9%)이 월등히 높았다. 이러한 양상은 서유구(1764~1845)의 '임원경제지'에 수록된 상록수 18종(21.2%) : 낙엽수 67종(78.8%)의 비율, 그리고 선행연구[변우혁(1976), 정동오(1977), 이선(2006) 등]와 유사한 결과이다. 다섯째, 정원식물의 출현빈도는 매화(14회), 대나무(14회), 소나무(11회), 연(11회), 국화 10회, 버드나무(5회), 석류(4회), 단풍나무(3회), 오동나무, 배롱나무, 밤나무, 모란, 파초, 갈대, 맨드라미(각각 2회) 등이었다. 즉, 의미론적으로 (1)유교적 규범(소나무, 측백, 매화, 국화, 대나무, 연꽃 등) (2)안빈낙도의 생활철학(국화, 버드나무) (3)은일사상과 태평성대 희구(오동나무, 대나무 등) 관련 상징식물의 도입이 상대적으로 높은 출현빈도를 보였다. 여섯째, 안뜰과 바깥뜰, 채원과 약포, 그리고 사랑뜰 화분에 도입된 식물류 추적이 가능하였다. 즉, 안뜰에는 심미적 취향을 뛰어넘어 문화경관으로 승화시킨 상징식물의 도입, 채원과 약포에는 채소류, 과실수, 약용식물의 이용후생적 도입 양상이 뚜렷하며, 사랑뜰에 화분을 놓아 완상한 석창포, 석류화, 서상화, 국화, 대나무, 연꽃, 매화 등을 도출할 수 있었다. 일곱째, 정자, 연못, 계류, 분경(盆景), 괴석, 후원(後園), 과원(菓園), 약포(藥圃), 화오(花塢), 국리(菊籬), 범주(泛舟), 조어(釣魚), 계음(?飮), 탁족, 간화(看花), 행림(杏林), 도원(桃源), 무송(撫松), 설중매, 상국(霜菊) 등의 시어(詩語)를 통해 조경소재와 관련한 정원 문화의 향유 양상을 추적할 수 있었다.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를 통해 본 조선시대 읍치(邑治)의 공간구조와 관아(官衙) 조경 - 평안도 영유현과 황해도 신천군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Spatial Structure of Eupchi(邑治) and Landscape Architecture of Provincial Government Office(地方官衙)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rough 'Sukchunjeahdo(宿踐諸衙圖)' - Focused on the Youngyuhyun Pyeongan Province and Sincheongun Hwanghae Province -)

  • 신상섭;이승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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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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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6-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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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조선후기 문신 한필교(1807~1878년)가 관직을 역임했던 읍치를 대상으로 제작한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 화첩의 평안도 영유현과 황해도 신천군 읍치를 분석 자료로 활용하여 실증사료로서의 가치추적, 공간구조 등의 전형성 정립, 관아조경 및 문화경관 특성 도출 등을 시도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풍수형국도' 성격을 겸하며 사방전도묘법으로 그려진 "숙천제아도"의 읍치도는 조선시대 지방고을의 터잡기와 공간구조는 물론 환경설계원칙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고을 치소(邑治)는 남북 중심축선에 위계를 설정한 배산임수 체계이며,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관아시설, 그리고 3단1묘의 제례처 등 도성에 준한 토지이용과 배치규범을 적용하고 있다. 교통요충지에 자리한 고을 치소는 어귀 장터마당을 결절점으로 안길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면 관아 문루에 다다르는 노단경이 형성되고, 고갯길 또는 물길을 따라 외부 바깥길로 이어지는 체계를 갖는다. 즉, 동선체계는 바깥길-고갯길-어귀길-장터마당-안길-또는 샛길로 수용력과 위계에 따라 분절되며 3거리 길로 접합되는 양상이다. 지방관아의 토지이용은 3조(三朝)의 개념(외조, 치조, 연조)을 반영한 위계적 구성인데, 동헌의 후원과 객사의 별원을 포함하여 3문3조2원(三門三朝二園)의 공간체계를 보여준다. 고을의 뒷동산 소나무 숲, 명당수인 남천, 안산(案山)에 해당하는 조산(造山), 비보숲 읍수(邑藪) 등 풍수적 경관짜임이 작용되었는데, 겨울철 북서풍 차단과 여름철 상승기류 형성 등 에너지 보존, 색체 항상성, 자연재해 방지와 심리적 안정성 등 쾌적성 조건에 부합되는 환경지속성이 추출된다. 한적한 곳에 자리한 향교는 별도의 원림을 가꾸지 않았으며, 누정은 심신수양, 안분지족, 자연회귀 같은 상징적 가치, 정치적 행사와 윤리관 반영, 유흥상경 등 문화경관 양상이 다양하게 표출되는데, 객사에는 기와를 얹은 와정(瓦亭)이, 동헌과 내아에는 네모꼴 연못을 두고 소박한 모정(茅亭)이 도입되는 차별성을 보여준다. 관아에 지표경관으로 문루가 자리하고, 군사훈련 및 심신수양을 겸한 사정(射亭)이 필수시설로 도입되었다. 아사의 앞뜰은 네모꼴 마당(庭)으로 조경처리를 하지 않은 반면, 정청의 뒤뜰(後園)과 객사의 별원(別園) 등은 장식적으로 가꾸었다. 이러한 관아조경은 공간 성격 및 위계를 반영하되 기능적 지속성(차폐와 방화, 미기후조절 등)과 심리적 건전성, 상징성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한 경관미학이라 하겠다. 한편, 소나무, 느티나무, 배나무, 버드나무, 향나무(또는 노송), 연(蓮), 화목(花木) 등이 조경식물로 활용되었는데, 환경심리적 가치가 부가된 배후숲, 조산숲과 비보숲 등과 함께 건전한 문화경관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결과를 일반화 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조선시대 읍치의 공간구조 및 환경설계 원칙이 제도적 틀 안에서 정형성으로 작용되고 있어 연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도항리목관묘(道項里木棺墓) 안사국(安邪國) (A Study of Dohang-Ri wooden coffin and Anya-Kuk)

  • 이주헌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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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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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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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삼한시대(三韓時代)의 성격과 성립시기(成立時期)에 대하여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는 상황이나 모두 나름대로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헌자료의 기록과 고고자료상에서 서로 공통적으로 관련지어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철기문화(鐵器文化)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며, 연(燕)의 철기문화(鐵器文化)를 갖춘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성립은 근본적으로 한반도 북부지역 뿐 만 아니라 중 남부지역에 이르기까지 큰 파장을 미쳤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철기문화(鐵器文化)의 도입단계에는 철기(鐵器)의 실용적이고 희소적인 가치에 의해서 매장유구(埋葬遺構)에는 쉽게 부장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나 기원전 2세기 전반경부터는 일부 한정된 철기(鐵器)만이 매장유구(埋葬遺構)에 부장되는 경향이다. 따라서 삼한시대(三韓時代)의 성립시기는 철기의 도입과 보편적인 활용으로 보아야하며 목관(木棺)을 사용한 서북한지방(西北韓地方)의 토광묘문화(土壙墓文化)를 포함하여 중남부지역(中南部地域)에 있어서 목관(木棺)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는 적석목관묘(積石木棺墓) 단계, 즉 기원전 3세기전반대의 어느 시점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한편 함안(咸安) 도항리고분군(道項里古墳群)에서 확인된 목관묘(木棺墓)는 목관(木棺)의 형태에 있어서 판재조립식목관(板材組立式木棺)과 통나무목관(木棺)의 2종류가 확인되며, 판재목관(板材木棺)의 사용 비율이 3배 이상 높은 편이다. 출토유물(出土遺物)은 비교적 단순한 조합상(組合相)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영남지역(嶺南地域)을 중심으로 한 목관묘유적(木棺墓遺蹟)에서도 모두 확인되고 있는 특징이므로 전반적으로 변(弁) 진한사회(辰韓社會)의 매장문화는 동일한 흐름 속에서 전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통나무로 제작한 목관(木棺)은 적석목관묘(積石木棺墓)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므로 한국식동검문화(韓國式銅劍文化)와 함께 목관(木棺)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생각되며, 다호리유적(茶戶里遺蹟)과 도항리목관묘(道項里木棺墓)에서만 이러한 목관(木棺)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는 것은 변한사회내(弁韓社會內)에서 양지역간(兩地域間)의 유기적인 관계를 살피는데 있어서 주목되어야 한다. 도항리목관묘(道項里木棺墓)에서 출토되고 있는 철기류((鐵器類)도 거의 다호리유적(茶戶里遺蹟)의 그것들과 유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도항리(道項里) 67호묘(號墓) 출토 주조철부(鑄造鐵斧)는 다호리 1호분에서 출토된 주조철부(鑄造鐵斧)와 같은 지금(地金)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소형철부(小形鐵斧)의 구성비율이 다른 철기류에 비해서 월등히 높은 것과 기경구(起耕具)로 이용되는 철제따비의 출토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도항리목관묘(道項里木棺墓)단계에는 목제농기구(木製農器具)의 제작과 사용이 활발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다호리유적(茶戶里遺蹟)에 비해 절대적으로 빈약한 철기유물은 안사국(安邪國)의 내적(內的)인 한계(限界)를 보여주는 것이며 소국(小國) 수장(首長)의 신분적(身分的)인 상징(象徵)으로서 사용하였던 동경(銅鏡)과 의기류(儀器類)의 출토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도항리목관묘(道項里木棺墓)를 조영한 집단(集團)은 당시 대외문화교류(對外文化交流)의 중심적인 선진지역(先進地域)에 비해서 사회문화적(社會文化的)인 변동(變動)이 덜한 주변 지역적인 성향이 강한 집단(集團)일 것으로 생각된다. 기원후 2세기 후반경 영남지역의 목관묘(木棺墓)는 목곽묘단계(木槨墓段階)로 변화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도항리(道項里)와 다호리유적(茶戶里遺蹟)에서도 목관묘(木棺墓)는 2세기대를 종점(終點)으로 사라진다. 고고자료상으로도 3세기에서 4세기대에 해당되는 적극적인 유구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을 3세기 전반 이후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일어났던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전쟁과 관련지어 합리적으로 추론하고자 한다. 즉 변한사회내(弁韓社會內)에서 도항리(道項里)와 다호리유적(茶戶里遺蹟)의 양집단(兩集團)은 낙동강(洛東江)과 남강수계(南江水系)를 장악한 교역(交易)의 중심지(中心地)로서 서로 경제적(經濟的) 정치적(政治的)인 공조체제(共助體制)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록에 보이는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대상국은 가나(加羅)와 아라국(砑羅國)이며, 가나(加羅)는 다호리집단(茶戶里集團)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전쟁시기도 기원 3세기 전반대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이 전쟁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3세기 전반대 이후의 사건으로 파악될 수 있으며, 4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양지역(兩地域)에서 뚜렷한 목곽묘(木槨墓)의 축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도 두 집단(集團)이 전쟁(戰爭)의 피해를 직접 받은 당사자였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국제법상 우주자원개발원칙 (Principles of Space Resources Exploitation under International Law)

  • 김한택
    • 항공우주정책ㆍ법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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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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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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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미국의 2015년 "상업적 우주발사 경쟁력 법"(CSLCA)나 2017년 룩셈부르크의 우주자원의 탐사 및 활용에 관한 법에서 명시된 바와 같이 자국민은 물론 타국이 운영하는 기업에게도 우주자원의 상업적 탐사와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항은 우주조약(OST) 제2조 및 달협정(MA) 제11조 2항의 우주 및 천체의 비전유원칙에 위반되는 조항인가 하는 점이 중요한 문제이다. CSLCA는 이 법에 의해 특정 천체에 대한 주권이나 점유권, 사법권을 주장하거나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OST 제2조의 비전유원칙에 의하여 달과 다른 천체들이 무주지(res nullius)에서 국제공역(res extra commmercium)으로 전환되는 법적 지위를 가짐으로써 우주와 천체는 마치 공해와 같이 각 국가가 이곳을 전유할 수는 없으나, 이곳의 자원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OST 제2조의 비전유원칙은 비당사국도 구속하는 조항인가 하는 점인데 다수의 학자들은 동 원칙은 국제조약상 규범은 물론 모든 국가들을 구속하는 국제관습법으로 심지어는 강행규범(jus cogens)으로 발전된 조항이라고 보고 있는데 필자도 이에 동의하는 바이다. 우주 및 천체의 지위가 마치 해양법상 공해에 적용되는 res extra commmercium이기 때문에 어느 국가나 사기업 또는 개인이 우주 및 천체의 비전유원칙을 존중하는 한 그곳의 사용 및 수익행위를 할 수 있다면 우주 및 천체에 접근하지 못하는 국가나 개인 또는 사기업체들은 후발주자로서 손해를 크게 보게 될 것이고 이렇게 방치될 경우 우주개발국의 무제한의 우주자원채취는 우주자원이 고갈되는 상태를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인류공동유산(CHM)개념이 도입된 MA가 등장한 것인데, 심지어 MA 제정에 참가한 국가들마저 동 협정의 조약당사국이 되기를 꺼려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주와 천체가 마치 공해와 같이 각 국가가 이곳을 전유할 수는 없으나, 이곳의 자원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되는 곳이라면 만일 미국의 어느 기업체가 미국의 승인을 얻어 달의 일부 중 가장 좋은 지점을 확보하고 자원을 수집할 때, 타국 기업체도 이에 접근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일정지역이란 달에서 어느 정도 크기의 영역인가? 그리고 얼마동안 수집할 것인가? 현재 국제우주법체계에서는 '선착순의 원리'(first come, first served)에 따라 이를 허용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 국제공동체는 국가들의 우주활동 중 예견되는 분쟁해결을 위한 국제회의를 조만간 개최하여야 하며, 조약으로 해결할 수 없는 우주법 문제들을 선언 및 결의와 같은 연성법(soft law)을 통해서라도 조속히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