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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발행 고등보통학교 교과서를 통해 본 경주 금관총 발견에 따른 일본의 반응 - 경주의 신발굴품(濱田耕作: 하마다 코사쿠) - (Japan's excitement over the discovery of Gyeongju Geumgwanchong (Gold Crown Tomb) seen through high school textbooks published in 1922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 of Joseon (Korea) - Newly Excavated Artifacts of Gyeongju (濱田耕作: Kosaku Hamada) -)

  • 유우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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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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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9-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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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일제강점기였던 1921년 9월말, 경주 노서리(盧西里)에서 우연히 발견된 고분인 금관총(金冠塚)이 발굴된 지 100년이 되었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아시아 더 나아가서는 세계적인 발견으로 알려져 있는 금관총의 발굴보고서는 발굴 3년 후인 1924년과 1928년에 조선총독부가 일본어와 영어로 출판한 경주 금관총과 그 유보(慶州金冠塚と其遺寶: A ROYAL TOMB "KINKANTSUKA" or THE GOLD CROWN TOMB at KEISHU, AND ITS TREASURES)라는 책과 도판(圖版)으로 발행된 것이 있으며 이 책들을 2011년에 경주 문화재연구소에서 우리말로 번역하여 소개한 것이 있다. 발굴보고서는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이었던 하마다 코사쿠(濱田耕作)(후일 교토제국대학 총장)와 조선총독부 고적 조사 사무촉탁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가 작성한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 보고서보다 훨씬 빠른 시기인 고분 발굴에서부터 약 반년 후인 1922년 7월에 서문이 작성된 조선의 고등보통학교(高等普通學校)의 5학년에서 교재로 사용된 '고본 고등 조선어 및 한문 독본 제5권(稿本 高等朝鮮語及漢文讀本 卷五)' 교과서를 발견하여 소개한다. 이 교과서에서 하마다 코사쿠(濱田耕作)는 '경주의 새로운 발굴품(慶州의 新發掘品)'이라는 제목과 우리말로는 조금 어색한 표현이지만 '매우 큰 발견'이라는 뜻으로 '절대의 발견(絶大의 發見)'이라는 부제목을 달아 하나의 단원으로 일본어가 아닌 우리말로 금관총 발굴의 성과와 학술적, 고고학적 발견,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발굴 직후에 작성된 원고이기 때문에 발굴 당시의 고고학 연구자로서 흥분된 느낌과 향후의 연구에 대한 기대를 그대로 읽을 수 있다. 본고에서는 금관총 발굴 후 조선총독부 조사책임자의 흥분된 현장의 목소리를 집필한 지 100년이 되는 2022년에 소개하고자 한다. 아울러 고분 발견부터 보고서의 작성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하나의 연표로 정리하여 일련의 흐름을 이해하기 쉽게 하였다.

기록정보공개 제도 개선 추진 현황과 방안 (The Promotion State and Measures to Improve the Record Information Disclosure System)

  • 조영삼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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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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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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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알권리(right to know)는 법 제도를 만들거나 개선하는 것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다. 알권리는 제도보다 문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제도개선요구가 필요하다. 알권리와 관련해서는 여러 법령이 있을 것이다. 특히 정보공개법, 공공기록관리법, 대통령기록관리법 등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공공기록관리와 대통령기록관리와 관련한 제도가 알권리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은 2004년 이후 기록관리혁신을 추진하면서 공유되었고, 그 결과 '국가기록관리혁신로드맵'이 채택되었다. 또, 2007년 '참여정부'의 '취재지원시스템선진화방안' 발표 이후 정부와 언론단체 등이 참여하여 구성한 '정보공개제도개선T/F'의 다수 의견이 반영된 정보공개법 개정안에는 그동안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제도 개선안을 마련하였다. 이런 개선방안이 제도를 개선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제기되었으나 논의에 반영되지 않은 것들을 중심으로 몇 가지 제도 개선 사항을 제안하였다. 정보 비공개의 개념을 공개유예의 개념으로 전환, 정보공개기준을 구체적으로 비치하고 공개, 비공개대상 개인정보의 구체화, 내부검토를 이유로 비공개하는 정보의 구체화와 엄밀한 적용, 사유없는 속기록의 비공개 조항삭제, 비공개 상한 기한 설정 등이 그것이다. 그동안의 제도 개선 추진의 가장 큰 성과는 알권리가 정보공개제도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고 기록관리라는 '원인'이 체계적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알권리가 내부고발과 같은 우연적 요소가 아닌 기록의 생산, 유통, 보존, 활용의 체계화라는 필연적 요소로 확보됨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록정보의 공개와 관련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국가기록원 등 영구기록관리기관에서의 기록 열람 문제,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저작권 문제 등 여전히 해결해야 할 난제들에 대해 학계와 해당 기관의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률(山律) 선우영(鮮于英) 필(筆) <금강산 묘길상도> (The First North Korean Painting in the Collection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Myogilsang on Diamond Mountain by Seon-u Yeong)

  • 이성미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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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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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7-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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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산률(山律) 선우영(鮮于英)(1946~2009) 필(筆) <금강산 묘길상도>(2000)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게 된 최초의 북한 화가 작품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묘길상도> 가운데 가장 큰 종축(縱軸) 형식으로 크기가 세로 130.2cm, 가로 56.2cm에 이르는 지본수묵진채(紙本水墨眞彩) 그림이다. 선우영에 관하여는 최근 우리나라에도 수차례 개최된 전시회에서 비교적 잘 알려졌다. 그는 1989년 공훈예술가, 1992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는 등 이른바 '진채세화(眞彩細畫)'의 대가로서 북한을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고, 60여 점의 작품이 북한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그림의 주제인 <묘길상> 마애불은 금강산 내금강 지역에 있는 만폭동 골짜기의 높이 40m 벼랑 아래에 15m 정도 크기로 새겨진 고려시대의 마애불이다. 이 마애불의 명칭은 마사연(摩詞衍) 동쪽에 있었던 묘길상암(妙吉祥庵)에서 유래한다. 마애불의 오른쪽 옆 바위에는 직암(直庵) 윤사국(尹師國)(1728~1709)이 쓴 '묘길상(妙吉祥)'이라는 큼직한 음각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필자는 불상의 수인(手印)을 오른손과 왼손이 모두 엄지와 약지(藥指)가 만나는 하품하생인(下品下生印)과 비슷하지만 왼손이 아래를 향하고 있지 않고 오른손과 거의 직각을 이루며 복부에 놓여있으므로 설법인(說法印)으로 보았다. 즉 이 불상은 설법인을 결하고 있는 석가상(釋迦像)이라고 결론지었다. 선우영의 <금강산 묘길상도>는 조선시대 같은 주제의 그림들과 비교하면 불상의 자연 환경, 즉 벼랑 아래 감실에 새겨진 불상이라는 점과 불상이 인간의 모습이 아닌 암각상임을 수묵진채로 표현한 유일한 그림이다. 구도와 색감이 자아내는 초현실주의적 분위기 또한 이 <금강산 묘길상도>의 특징이라 하겠다. 이 그림을 포함한 선우영의 대부분 작품이 진채로 바위 질감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그림이지만 그의 만년작 <파도>(2008)와 같이 전통적의 수묵화에 가까운 그림도 그렸던 폭넓은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화가이다.

1788년 김응환의 봉명사경과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 (Kim Eung-hwan's Official Excursion for Drawing Scenic Spots in 1788 and his Album of Complete Views of Seas and Mountains)

  • 오다연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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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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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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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은 금강산과 해금강, 관동팔경을 그린 60점의 실경산수화와 51편의 기문(記文)으로 이루어진 화첩으로 규모와 화풍에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그림의 특징은 화면을 가득 채운 구성과 남종화풍을 따르면서도 거칠고 파격적인 화법, 산석(山石)의 기하학적이고 입체적인 표현 등이다. 1973년의 특별전, '한국미술이천년(韓國美術二千年)'을 처음으로 화첩의 일부만 공개되었던 작품은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에서 그 전모가 공개되었다. 《해악전도첩》이 김응환(金應煥)(1742~1789)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화첩의 마지막 장에 쓰여진 관지(款識)와 현재 행방이 묘연한 <칠보대>에 찍힌 '복헌'이라는 도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응환을 지시하는 관지와 도장은 모두 후대에 더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본 연구는 화첩을 둘러싼 여러 요소를 고찰하여 제작자를 재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해악전도첩》 제작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18세기 금강산 기행사경도의 전통과 봉명사경을 살펴보았다. 정선(鄭敾)(1676~1759)의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1711)을 비롯하여 심사정(沈師正)(1707~1769), 김윤겸(金允謙)(1711~1775), 최북(崔北)(1712~1786 이후), 강세황(姜世晃)(1713~1791) 등은 조선 후기 최고의 여행지였던 금강산을 유람하고 기행사경도를 제작하였다. 화가들은 이전의 전통을 계승하여 내금강의 명승명소를 주로 그렸고, 자신들이 경험한 장소를 새롭게 시각화하였다. 이러한 기행사경도는 여행을 기념하며 동행자나 후원자를 위해 여러 장면을 담을 수 있는 화첩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개별적인 금강산 기행사 경도의 제작이 증가하는 가운데 1788년에 정조(正祖)(재위 1776~1800)가 도화서 화원인 김응환과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에게 영동9군과 금강산의 명승(名勝)을 그려오도록 명한 일은 공적 업무였다. 정조는 이들의 관계 및 지방관으로서의 경력, 서로 다른 화풍 등을 고려해 봉명사경의 화원으로 선발하였다. 김응환과 김홍도는 영조(英祖)(재위 1724~1776)조부터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하며 선후배이자 동료로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나아가 이들은 영남 지역의 찰방(察訪)으로서 지방관의 업무를 수행한 경험이 있었다. 두 화원의 화풍은 서로 달라 김홍도는 부드럽고도 섬세하게 필선을 운용한 반면, 김응환은 굳세면서도 울창한 풍치를 잘 표현했다. 두 명의 화원은 각자의 개성으로 봉명사경 기간 동안 100여 폭의 초본을 그렸고, 이를 선별하여 60~70여 폭의 화첩 혹은 두루마리를 완성하였다. 이들의 그림은 18세기 전중반에 내금강과 관동팔경 위주로 제작된 금강산 기행사경도의 전통을 더욱 풍부하게 했고 영동과 외금강의 명승명소를 새롭게 발견하며 소재를 확장시켰다. 현재 《해악전도첩》은 원(元), 형(亨), 이(利), 정(貞) 4책으로 이루어졌는데, 원(元), 형(亨)책은 내금강의 그림 29점이며 이(利)책은 외금강의 장면 17점, 정(貞)책은 해금강과 관동팔경 14점으로 구성되었다. 비단 위에 그려진 각 그림은 기하학적으로 산석을 표현했으며, 연백으로 금강산의 암봉을 흰색 혹은 회청색으로 표현했다. 《해악전도첩》의 구도와 화법은 정선, 강세황, 심사정, 정충엽(鄭忠燁)(1725~1800 이후), 김응환, 김홍도의 화법과 비교할 수 있어 18세기 후반의 시대 양식을 갖는다. 특히 화첩의 일부 그림은 김홍도의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1788)과 구성 및 회화적 모티프가 매우 유사하여 두 화첩간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반면에 <영랑호>, <해산정>, <월송정> 등은 김홍도의 그림과는 구별된다. 이를 통해 화가가 김홍도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적인 화첩을 제작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해악전도첩》에는 다른 화첩에는 등장하지 않는 <자운담>, <백운대>, <안문점망비로봉>, <백정봉>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각 장면마다 경물의 특징을 구체적이고 참신하게 묘사하였다. 특히, 화가는 산석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하고 선과 면을 도드라지게 하여 입체감을 강조하였다. 그는 남종화풍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화법을 확립했고 이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면서 화면에 동적인 리듬감을 부여했다. 이처럼 60점의 그림은 거칠고 파격적으로 보이지만 나름의 질서 안에서 일관성을 견지하고 있다. 본고는 화법과 봉명사경의 정황을 종합해 《해악전도첩》의 제작자를 김응환으로 추론하였다. 나아가 김하종(金夏鍾)(1793~1878 이후)의 《풍악권(楓嶽卷)》(1865년 이후)과의 친연성은 《해악전도첩》의 화가를 김응환으로 추정한 또 하나의 이유였다. 《해악전도첩》은 김홍도의 《해산첩》과는 달리 후대에 미친 영향력이 미비한데 김하종의 《풍악권》만이 《해악전도첩》의 소재와 화법을 따르고 있다. 김하종은 《풍악권》에서 50년 전, 춘천부사 이광문(李光文)(1778~1838)을 위해 제작한 《해산도첩》(1816)과는 전혀 다른 화법을 구사했다. 그는 김응환의 《해악전도첩》과 유사한 구성과 회화적 요소, 화보식 인물표현을 따르면서 사의적인 분위기를 강조하였다. 개성김씨의 일원이자 김응환의 종손인 김하종은 가문에 전해지는 《해악전도첩》류의 그림을 감상했고 이를 새롭게 번안했다고 추측된다. 화첩에 포함된 51편의 기문은 그림 다음 장에서 그려진 장소를 설명하고 있어 각 그림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기문은 그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앞의 장소로부터의 이동 정보, 이름의 유래, 지형적 특징, 관련 정보 등이 서술되었다. 이와 같은 백과사전식 혹은 지리지와 같은 기문은 19세기 전반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금강산 화첩류에 더해졌다. 《해악전도첩》의 백화암 기문에는 1845년의 암자에 대한 중건 내용이 기록되어, 기문의 연대를 추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김하종에게 《풍악권》을 주문한 이유원(李裕元)(1814~1888)도 각 그림에 글을 붙였는데 이 글들은 김응환의 화첩에 포함된 기문 51편과 내용 및 서술방식이 흡사하다. 이유원의 기문은 《해악전도첩》의 기문이나 그 초고(원본)와 관련성이 높지만 두 화첩의 기문 필사의 선후관계를 판정하는 데에는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해악전도첩》은 김홍도의 봉명사경 초본 및 김홍도의 영향으로 제작된 19세기의 금강산 화첩과는 구별된다. 이 화첩은 화원 김응환의 회화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을 넓히고 18세기 후반 실경산수화의 또 다른 층위를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