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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당진찬(奉壽堂進饌)의 무대와 공연 요소 분석 (Analysis of the Stage and Performance Elements for Bongsudang-jinchan Banquet in Joseon Dynasty)

  • 송혜진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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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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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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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고에서는 1795년 화성 행궁에서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열린 봉수당진찬의 의례와 악무를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 및 "정조실록", "홍재전서(弘齋全書)"등의 봉수당진찬 의례기록과 <화성능행도병>등의 도상자료, 일기체의 한글가사 작품인 이희평(李羲平)의 <화성일기(華城日記)>등의 자료를 중심으로 분석하여 무대와 공연요소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잔치의 주인공에게 충(忠)과 효(孝)의 의미를 담은 음악과 춤, 꽃과 음식, 술과 글을 예를 갖춰 올리는 궁중연향은 예악(禮樂)의 원리에 바탕을 둔 국가의례로서 조선왕조 500년 동안 고유한 음악문화를 형성해왔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면서 '예'라는 상징적이며 총체적인 틀 안에서 상호 유기적인 관계에 놓여있던 연례의 음악과 춤들이 개별 악곡과 춤으로 해체되어 '작품화'되었고. 궁중음악과 춤의 철학이나 원리, 시공간에 대한 이해는 현저히 축소된 채, 음악과 춤의 전통은 형식과 예술적 표현 중심으로 변화해왔다. 1990년대 이후, 궁중의례 전통의 재현(再現)을 목적에 둔 연구와 행사가 추진되면서, 이와 연관된 공연예술 활동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며, 특히 봉수당진찬은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무대화 하고 있다. 그러나 원전(原典)의 재현(再現) 및 복원(復原) 문제, 완성도 및 예술성에 대한 문제는 과제로 남아있으며, 지금까지는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수록된 의주의 외형적 재현에 관심을 두었을 뿐, 무대조건이나 공연요소에 중점을 둔 심도있는 분석은 부족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본 연구에서 무대구성과 공연요소 중심으로 분석해 본 결과, 조선시대 궁중연향 중에서 유일하게 '행궁'에서 개최된 봉수당진찬은 '예악의 정치'를 의례와 악무로 구현하는 궁중연향의 기본적인 면모를 보여주면서도 '군신동락(君臣同樂)'의 친화의 비중이 높은 연향이었음을 밝혔다. 내연과 외연의 성격이 섞인 봉수당진찬에서는 가림막을 최소화하여 신분의 차서(次序)와 남녀유별(男女有別)의 원리를 충족시키면서도 삼면에 둘러친 휘장 안에 외빈의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술과 음식, 음악과 춤을 다 같이 공유하도록 배치되었다. 또한, 연향공간의 상징성을 내포한 차일을 백관들의 공간에 치고, 임금이 솔선하여 선찬(膳饌)과 산화(散華)를 명함으로써 군신동연(君臣同宴)의 의미와 범위를 확장시킨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는 봉수당진찬이 '예악의 원리'가 강하게 드러나는 여느 궁중 연향에 비해 '정(情)'을 나누는 화친(和親)에 기반을 두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봉수당진찬에서는 여느 내연에서보다 임금의 역할과 비중이 높았으며, 특히 의주 외의 기록으로 전하는 여러 가지 상황 - 7작 이후에 정조가 신하들을 가까이 불러 나눈 대화, 신하들에게 음식과 꽃을 내림, 잔치를 주제로 직접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도 이에 화답하게 한 일 등-은 의주에 따른 단선적인 연향의 진행에 변화를 주고, 연향의 의미를 확장시키는데 한 몫 하였다. 이밖에, 봉수당진찬의 주악과 정재의 구성을 분석해 본결과 연향에서 여러 인물들의 대화와 움직임이 매우 절제된 것은 여느 궁중연향과 비슷하지만, 춤과 음악을 통해 구현된 소리와 색채감은 매우 다채로웠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봉수당진찬에서는 정조 이전에 치러진 내연에 비해 다양한 종류의 정재를 상연하였고, 이 중에는 새롭게 초연된 레퍼토리도 있었으며, 또 기존의 공연을 새롭게 재구성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선유락>이나 <검무> 등, 지방 관아 및 민간의 레퍼토리를 궁중연향으로 수용한 점, 풍류방에서 즐겨 연주되기 시작한 생황을 <학무> 와 연계한 것은 전통적인 규범과 관습에 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궁중연향의 '열린구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강제동원 구술자료의 관리와 활용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소장 구술자료를 중심으로- (Management and Use of Oral History Archives on Forced Mobilization -Centering on oral history archives collected by the Truth Commission on Forced Mobilization under the Japanese Imperialism Republic of Korea-)

  • 권미현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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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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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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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라 함은 만주사변 이후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일제에 의하여 강제동원 되어 군인 군속 노무자 위안부 등의 생활을 강요당한 자가 입은 생명 신체 재산 등의 피해를 말한다. 강제동원 피해 역사를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 피해당사자, 유족, 시민단체, 학계 등에서 이루어져왔고, 그 결과 2004년 3일 5일 ${\ll}$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등에 관한 특별법${\gg}$ (2007년 5월 17일 일부 개정)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를 근거로 2004년 11월 10일 국무총리 소속으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이하 강제동원위원회)가 발족하였고, 2005년 2월 1일부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의 진상을 규명하여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주요 업무는 강제동원 피해신고접수 및 피해신고조사(피해자 및 유족 심사 결정), 진상조사신청접수 및 진상조사, 진상조사 및 피해판정 불능에 관한 사항, 피해판정에 따른 호적정정, 강제동원 관련 국내외 자료수집 분석 및 보고서 작성, 유해발굴 및 수습 봉환, 사료관 및 추도공간 조성사업 등이다. 강제동원위원회는 피해조사 및 진상조사 업무를 위해 다양한 기록을 발굴 수집해 오고 있다. 여타 피해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이미 공개되었거나 새롭게 발굴되는 기록은 강제동원의 다양한 역사상을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그 양이나 질에 면에서 부족하다. 피해의 역사에서 피해당사자의 이야기는 기록의 부재를 메우기도 하고, 기록 이상의 근거적 가치를 갖기도 한다. 강제동원위원회는 피해생존자와의 구술면담을 통해 다수의 구술자료를 생산하였고 조사업무에 활용하며 체계적인 관리방법을 토대로 관리하고 대중적인 활용까지 꾀하고 있다. 강제동원위원회의 구술자료는 생산 당시부터 철저한 기획에 의해 이루어졌고, 생산단계부터 관리와 활용의 편의성을 염두에 두고 디지털매체의 생산을 유도했다. 또한 조사업무 과정에서 생산되는 구술자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수차례 면담자 교육을 실시하고, 면담자로 하여금 구술당시의 상황을 면담일지로 남기도록 했다. 강제동원위원회는 소장 기록을 관리하는 별도의 기록관리시스템을 갖고 있지 않다. 디지털 아카이브는 피해 진상 관리시스템과 전자결재시스템을 통해 생산되어 관리되지 않는 생산 수집 기증 기록을 등록 검색하는 역할을 한다. 구술자료는 디지털 아카이브에 등록이 되어, 실물과 중복 보존되고 있다. 구술자료는 등록과 동시에 분류, 기술행위가 이루어지고 구술자료의 관리 아이디인 등록번호, 분류번호, 비치번호 등을 부여받게 된다. 강제동원위원회는 구술자료의 적극적인 활용을 위하여 구술기록집의 발간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고, 영상물 등의 제작을 계획하고 있다. 강제동원위원회의 구술자료는 정부차원의 조사 업무 과정에서 생산된 것이라는 한계, 예산부족이나 기록관리시스템 등의 부재 등을 넘어서 한시조직으로서 가능한 적극적인 방법으로 생산 관리 활용되고 있다. 축적된 구술자료는 향후 특별법에 규정되어 있는 대로 사료관 등이 건립된다면 대중 이용자들을 위해 더 체계적으로 관리 활용될 것이다.

산림보험(山林保險)에 관한 연구(硏究) (A Study on Forest Insurance)

  • 박태식
    • 한국산림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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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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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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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2
  • 우리나라는 근래(近來) 고도경제성장(高度經濟成長)으로 인(因)하여 목재수요(木材需要)가 급증(急增)하고 있으나 국내생산재(國內生産材)가 공급율(供給率)은 수요량(需要量)의 20% 정도(程度)에 지나지 않아 많은 외재(外在)를 도입(導入)하고 있으므로 장래(將來)의 목재(木材) 수요공급(需要供給)의 균형(均衡)을 이룩하기 위하여 강력(强力)한 산림자원(山林資源) 조성사업(造成事業)의 추진(推進)이 요망(要望)된다. 산림자원(山林資源) 조성사업(造成事業)을 추진(推進)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조림의욕(造林意慾)을 높이고 조림사업(造林事業)에 필요(必要)한 산업자본(産業資本)을 산림(山林)에 유치(誘致)하도록 하는 일인데, 이러한 역할(役割)을 할 수 있는 경제적시설(經濟的施設)의 하나가 산림보험제도(山林保險制度)의 실시(實施)인 것이다. 산림보험(山林保險)을 실시(實施)하면 산림재해(山林災害)가 보상(補償)되므로 자본가(資本家)는 안심(安心)하고 조림투자(造林投資)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산림(山林)을 담보(擔保)로 한 금융(金融)의 길도 열리어 투자(投資)한 산림(山林)에 환금성(換金性)이 주어지므로 산업자본가(産業資本家)가 산림투자(山林投資)를 회피(回避)하지 않게 되어 산림자원(山林資源) 조성사업(造成事業)이 촉진(促進)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觀點)에서 외국(外國)에서는 19세기말(世紀末)부터 산림보험제도(山林保險制度)가 실시(實施)되기 시작(始作)하여 주요(主要) 임업선진국(林業先進國)에서는 모두 산림보험(山林保險)을 실시(實施)하고 있는 것이다. 산림보험(山林保險)을 실시(實施)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장기간(長期間)에 걸친 산림재해(山林災害)의 통계자료(統計資料)를 정확(正確)히 조사(調査)하는 일과 그 나라의 여건(與件)에 맞는 산림보험제도(山林保險制度)를 창설(創設)하는 일이다. 과거(過去) 10년간(年間)(1961~1970)의 년평균(年平均) 산림재해상황(山林災害狀況)을 조사(調査)한 결과(結果)는 산림화재(山林火災)가 9,000여정보(餘町步), 곤충피해(昆蟲被害)가 570,000정보(町步), 병균피해(病菌被害)가 694정보(町步)로 나타났다. 특(特)히 그중 외국(外國)의 산림보험(山林保險)에서 재해보상(災害補償) 대상(對象)의 으뜸이 되고 있는 산림화재(山林火災) 피해상황(被害狀況)을 과거(過去) 18년간(年間)(1953~1970)에 걸쳐서 조사(調査)한 결과(結果)에 의하면 산화면적(山火面積) 위험율(危險率)이 $\frac{1.1853}{1,000}$였고 1960~1969년(年) 사이의 전국(全國) 산림화재면적(山林火災面積) 위험율(危險率)은 $\frac{1.3045}{1,000}$로서 유우럽에 비(比)하여 높았으나 일본(日本)에 비(比)하여 그리 높지 않았다. 또 과거(過去) 5년간(年間)(1966~1970)의 전국(全國)의 산화재적(山火材積) 위험율(危險率)은 $\frac{0.1991}{1,000}$로서 대단(大端)히 낮은데 이것은 우리나라 산림(山林)의 축적(蓄積)이 빈약(貧弱)한데서 온 결과(結果)였다. 이러한 산림재해상황(山林災害狀況)에 비추어 우리나라에서 산림보험(山林保險)을 실시(實施)하려면 어떠한 내용(內容)의 산림보험제도(山林保險制度)를 설립(設立)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는 질문조사(質問調査)의 결과(結果)는 다음과 같았다. 1. 산림보험(山林保險)의 필요성(必要性) 산림보험(山林保險)은 산림담보(山林擔保)에 의(依)한 금융(金融)의 길을 열어주고(5.65%), 산림피해(山林被害)를 당(當)하였을 때 재조림비(再造林費)를 확보(確保)하게 하여(35.87%), 조림투자(造林投資)를 보증(保證)하는 수단(手段)(46.74%)으로 반드시 실시(實施)되어야 한다고 응답(應答)하였다. 2. 산림보험법(山林保險法) 산림(山林)의 특수성(特殊性)에 비추어 일반(一般) 손해보험(損害保險) 규정(規程)을 준용(準用)할 것이 아니라(8.35%), 산림보험(山林保險)을 위한 특별볍(特別法)을 제정(制定)하여야 한다고 응답(應答)하였다(88.26%). 3. 보험경영업체(保險經營業體)의 종류(種類) 일반(一般) 보험회사(保險會社)(17.42%)나 산림소유자(山林所有者) 상호조합(相互組合)(23.53%)에서 산림보험(山林保險)을 취급(取扱)할 수도 있겠으나, 산림보험(山林保險)의 특이성(特異性)에 비추어 국(國) 공영산림보험(公營山林保險)의 별도(別途)로 운영(運營)되어야 한다고 반응(反應)하였다(56.18%). 4. 보험사고(保險事故)의 종류(種類) 산림보험(山林保險) 사고(事故)를 산화(山火)에 국한(局限)시키거나(23.38%), 산화(山火) 및 기상해(氣象害)만을 포함(包含)시키면 된다는 의견(意見)도 있으나(14.32%), 산림보험(山林保險) 사고(事故)에 산화(山火), 기상해(氣象害), 병충해(病蟲害)까지 포함(包含)시켜야 한다는 의견(意見)이 가장 많았다(60.68%). 5. 보험사고(保險事故) 취급대상(取扱對象)의 종류(種類) 산림보험(山林보험) 취급대상(取扱對象) 수종(樹種)은 침엽수(針葉樹) 인공림(人工林)에 한정(限定)시키거나(13.47%), 침엽수(針葉樹)와 활엽수(濶葉樹)의 인공림(人工林)만을 포함(包含)시키기를 원(願)하는 반응자(反應者)도 있었으나(23.74%), 많은 반응자(反應者)가 수종(樹種), 임종(林種)(인공(人工), 천연(天然)) 구별(區別)없이 모두 포함(包含)시켜야 된다고 반응(反應)하였다(61.64%). 6. 보험사고(保險事故) 취급대상(取扱對象)의 범위(範圍) 산림보험(山林保險) 사고(事故) 취급대상(取扱對象) 범위(範圍)는 10년(年) 이하(以下)의 유령림(幼齡林)만 취급(取扱)하기를 원(願)하는 자(者)(15.23%), 20년(年) 이하(以下)의 임목(林木)만을 대상(對象)으로 하면 족(足)하다는 반응자(反應者)가 있었으나(32.95%), 많은 반응자(反應者)가 40년생(年生) 이하(以下)의 임목(林木)까지 포함(包含)하기를 바라고 있었다(46.37%). 7. 보험계약(保險契約) 기간(期間) 산림보험(山林保險) 계약기간(契約期間)은 1년(年) 단위(單位)가 좋다는 자(者)도 상당(相當)히 있었으나(31.74%), 과반수(過半數)가 5년(年) 단위(單位)로 계약(契約)하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58.68%). 8. 보험계약(保險契約)의 제한(制限) 5정보(町步) 미만(未滿)의 소면적(小面積)은 산림보험(山林保險) 대상(對象)에서 제외(除外)하고(20.78%), 단위(單位) 면적당(面積當) 일정(一定) 재적(材積) 또는 주수(株數)를 보유(保有)하고 있는 산림(山林)만을 계약대상(契約對象)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반응(反應)하였다(63.77%). 9. 계약방법(契約方法) 산림보험(山林保險) 계약방법(契約方法)은 임의(任意)로 산림(山林)을 선택(選擇)하여 계약(契約)하기를 원(願)하는 자(者)(32.13%), 임의(任意)로 계약(契約)하되 소유산림(所有山林) 전체(全體)를 일괄(一括) 계약(契約)하도록 하는 방법(方法)을 택(擇)하여야 한다는 자(者)(33.48%), 특정임지(特定林地)(신식지(新植地), 보조조림지(補助造林地), 고가임지(高價林地))는 의무적(義務的)으로 계약(契約)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반응자(反應者)(31.92%)로 나타나 비슷한 반응(反應)을 보였다. 10. 보험료율(保險料率) 산림보험(山林保險) 요율(料率)은 지역(地域)에 따르는 위험정도(危險程度)를 참작(參酌)하여 면적비례(面積比例)로 결정(決定)하여야 한다는 의견(意見)(31.59%)과 지역(地域) 위험율(危險率)을 참작(參酌)하여 보험가액(保險價額)에 따라 정(定)해야 한다는 의견(意見)이 있었으나(31.59%), 우리 나라에는 지역적(地域的) 위험율(危險率)에 큰 차이(差異)가 없을 것이므로 전국(全國) 일률적(一律的)인 보험료(保險料)를 보험가액(保險價額)에 따라 정(定)하기를 원(願)하는 경향(傾向)이 높았다(39.55%). 11. 보험료(保險料)의 납부(納付) 산림보험료(山林保險料)는 단기(短期)는 일시불(一時拂), 장기(長期)는 매년(每年) 납부(納付)하게 하는 의견(意見)도 있으나(13.80%), 단기(短期)는 고율(高率), 장기(長期)는 저율(低率)로 하되 단기(短期), 장기(長期)를 막론(莫論)하고 매년(每年) 납부(納付)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반응(反應)하였다(86.71%). 12. 보험사무(保險事務) 취급기관(取扱機關) 산림보험(山林保險) 사무(事務)의 취급(取扱) 즉(即) 창구업무(窓口業務)의 취급(取扱)을 산림행정기관(山林行政機關)에 위탁(委託)하거나(18.75%), 일반(一般) 보험회사(保險會社)에 맡기기보다는(35.76%) 산림조합(山林組合)에 위탁(委託) 취급(取扱)하게 하고 보험료(保險料)의 일정율(一定率)을 환부(還付)해주는 것이 좋다고 반응(反應)하였다(44.22%). 13. 손해보상(損害補償)의 한도(限度) 산림보험(山林保險)의 손해보상(損害補償)은 유령림(幼齡林)이 피해(被害)를 입었을 때에는 재조림비(再造林費)를 한도(限度)로 하여 보상(補償)하는 것을 원칙(原則)으로 하고 성림(成林)의 경우(境遇)에는 손해액(損害額)의 80%정도(程度)를 한도(限度)로 하여 보상(補償)하기 보다는(29.70%) 실손(實損) 현재가액(現在價額)을 보상(補償)하거나(31.07%) 조림비(造林費)의 복리계산(複利計算) 합계액(合計額)을 보상(補償)하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36.99%). 14. 보험기금(保險基金)의 조성(造成) 산림보험(山林保險)의 기금조성(基金造成)은 손해(損害) 보상액(補償額)에서 일정액(一定額)을 공제(控除) 적립(積立)하여 조성(造成)하거나(15.65%), 임야세(林野稅)를 신설(新設)하여 기금(基金)을 확보(確保)하기 보다는(33.79%), 산림보험(山林保險) 무사고(無事故)로 인(因)한 잉여금(剩餘金)에서 일정액(一定額)씩을 적립(積立)하여 산림보험기금(山林保險基金)으로 하자는 의견(意見)에 많은 반응(反應)을 하였다(44.81%). 15. 산화(山火)의 원인(原因) 산림관계직(山林關係職)에 종사(從事)하고 있는 사람들의 과거(過去)의 경험(經驗)에 비추어 본 우리나라 산화(山火)의 주요원인(主要原因)은 실화(失火)(원인불명(原因不明), 32.39%), 담배불(28.89%), 화전(火田)(19.85%)에 의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산림통계(山林統計)에 나타나 있는 산화(山火)의 주요원인(主要原因)과 일치(一致)하였다. 16. 산화경방(山火警防) 산림화재(山林火災) 경방조치(警防措置)로서 가장 중요(重要)하고 실효성(實効性)이 있으며 실천(實踐)할 수 있는 삼대대책(三大對策)으로는 (1) 방화선(防火線) 설치(設置)(23.84%), (2) 건조기(乾燥期)의 입산금지(入山禁止)(21.10%), (3) 메스콤에 의한 계몽교육(啓蒙敎育)(18.01%)이라고 반응(反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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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朝鮮王朝) 왕릉(王陵) 문인석상(文人石像)의 복식형태(服飾形態)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ostume Style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Erected at Tombs of the Kings for Yi-dynasty)

  • 권용옥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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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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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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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
  • A costume reveals the social characteristics of the era in which it is worn, thus we can say that the history of change of the costume is the history of change of the living culture of the era. Since the Three States era, the costume structure of this country had been affected by the costume system of the China's historical dynasties in the form of the grant therefrom because of geographical conditions, which affection was conspicuous for the bureaucrat class, particularly including but not limited to the Kings' familities. Such a grant of the costume for the bureaucrat class (i.e., official uniform) was first given by the Dang-dynasty at the age of Queen Jinduck, the 28th of the Shilla-dynasty. Since then, the costume for the bureaucrats had consecutively been affected as the ages had gone from the unified Shilla, to the Koryo and to the Yi-dynasty. As the full costumes officially used by government officials (generally called "Baek Gwan") in the Yidynasty, there existed Jo-bok, Gong-bok and Sang-bok. Of such official costumes, Gong-bok was worn at the time of conducting official affairs of the dynasty, making a respectful visit for the expression of thanks or meeting diplomatic missions of foreign countries. It appears no study was made yet with regard to the Gong-bok while the studies on the Jo-bok and the Sangbok were made. Therefore, this article is, by rendering a study and research on the styles of costumes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erected at the Kings' tombs of the Yi-dynasty, to help the persons concerned understand the Gong-bok, one of the official costume for Baek Kwan of that age and further purports to specifically identify the styles and changes of the Gong-bok, worn by Baek Gwan during the Yi-dynasty, consisting of the Bok-doo (a hat, four angled and two storied with flat top), Po (gown), Dae (belt), and Hol (small and thin plate which was officially held by the government officials in hand, showing the courtesy to and writing brief memorandums before the King) and Hwa (shoes). For that purpose, I investigated by actually visiting the tombs of the Kings of the Yi-dynasty including the Geonwon-neung, the tomb of the first King Tae-jo and the You-neung, the tomb of the 27th King Soon-jong as well as the tombs of the lawful wives and concubines of various Kings, totalling 29 tombs and made reference to relevant books and records. Pursuant. to this study, of the 29 Kings' tombs the costume styles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erected at the 26 Kings' tombs are those of Gong-bok for Baek-gwan of the Yi-dynasty wearing Bok-doo as a hat and Ban-ryeong or Dan-ryenog Po as a gown with Dae, holding Hol in hand and wearing shoes. Other than those of the 26 tombs, the costume styles of the Ryu-neung, the tomb of the Moon-jo who was the first son of 23rd King Soon-jo and given the King's title after he died and of the You-neung, the tomb of the 27th King Soon-jong are those of Jobok with Yang-gwan (a sort of hat having stripes erected, which is different from the Bok-doo), and that of the Hong-neung, the tomb of the 26th King Go-jong shows an exceptional one wearing Yang-gwan and Ban-ryeong Po ; these costume styles other than Gongbok remain as the subject for further study. Gong-bok which is the costume style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of most of the Kings' tombs had not been changed in its basic structure for about 500 years of the Yi-dynasty and Koryo categorized by the class of officials pursuant to the color of Po and materials of Dae and Hol. Summary of this costume style follows: (1) Gwan-mo (hat). The Gwan-mo style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of the 26 Kings' tombs, other than Ryu-neung, Hong-neung and You-neung which have Yang-gwan, out of the 29 Kings' tombs of the Yi-dynasty reveals the Bok-doo with four angled top, having fore-part and back-part divided. Back part of the Bok-doo is double the fore-part in height. The expression of the Gak (wings of the Bokdoo) varies: the Gyo-gak Bok-doo in that the Gaks, roundly arisen to the direction of the top, are clossed each other (tombs of the Kings Tae-jong), the downward style Jeon-gak Bok-doo in that soft Gaks are hanged on the shoulders (tombs of the Kings Joong-jong and Seong-jong) and another types of Jeon-gak Bok-doo having Gaks which arearisen steeply or roundly to the direction of top and the end of which are treated in a rounded or straight line form. At the lower edge one protrusive line distinctly reveals. Exceptionally, there reveals 11 Yang-gwan (gwan having 11 stripes erected) at the Ryu-neung of the King Moon-jo, 9 Yang-gwan at the Hong-neung of the King Go-jong and 11 Yang-gwan at the You-neung of the King Soon-jong; noting that the Yang-gwan of Baek Kwan, granted by the Myeong-dynasty of the China during the Yi-dynasty, was in the shape of 5 Yang-gwan for the first Poom (class) based on the principle of "Yideung Chaegang" (gradual degrading for secondary level), the above-mentioned Yang-gwans are very contrary to the principle and I do not touch such issue in this study, leaving for further study. (2) Po (gown). (a) Git (collar). Collar style of Po was the Ban-ryeong (round collar) having small neck-line in the early stage and was changed to the Dan-ryeong (round collar having deep neck-line) in the middle of the: dynasty. In the Dan-ryeong style of the middle era (shown at the tomb of the King Young-jo); a, thin line such as bias is shown around the internal side edge and the width of collar became wide a little. It is particularly noted that the Ryu-neung established in the middle stage and the You-neung in the later stage show civil servants in Jo-bok with the the Jikryeong (straight collar) Po and in case of the Hong-neung, the Hong-neung, the tomb of the King Go-jong, civil servants, although they wear Yang-gwan, are in the Ban-ryeong Po with Hoo-soo (back embroidery) and Dae and wear shoes as used in the Jo-bok style. As I could not make clear the theoretical basis of why the civil servants' costume styles revealed, at these tombs of the Kings are different from those of other tombs, I left this issue for further study. It is also noted that all the civil servants' stone images show the shape of triangled collar which is revealed over the Godae-git of Po. This triangled collar, I believe, would be the collar of the Cheomri which was worn in the middle of the Po and the underwear, (b) Sleeve. The sleeve was in the Gwan-soo (wide sleeve) style. having the width of over 100 centimeter from the early stage to the later stage arid in the Doo-ri sleeve style having the edge slightly rounded and we can recognize that it was the long sleeve in view of block fold shaped protrusive line, expressed on the arms. At the age of the King Young-jo, the sleeve-end became slightly narrow and as a result, the lower line of the sleeve were shaped curved. We can see another shape of narrow sleeve inside the wide sleeve-end, which should be the sleeve of the Cheom-ri worn under the Gong-bok. (c) Moo. The Moo revealed on the Po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at the age of the King Sook-jong' coming to the middle era. Initially the top of the Moo was expressed flat but the Moo was gradually changed to the triangled shape with the acute top. In certain cases, top or lower part of the Moo are not reveald because of wear and tear. (d) Yeomim. Yeomim (folding) of the Po was first expressed on civil servants' stone images of the Won-neung, the tomb of the King Young-jo and we can seemore delicate expression of the Yeomim and Goreum (stripe folding and fixing the lapel of the Po) at the tomb of the Jeongseong-wanghoo, the wife of the King Young-jo, At the age of the King Soon-jo, we can see the shape of Goreum similar to a string rather than the Goreum and the upper part of the Goreum which fixes Yeomim was expressed on the right sleeve. (3) Dae. Dae fixed on the Po was placed half of the length of Po from the shoulders in the early stage. Thereafter, at the age of the King Hyeon-jong it was shown on the slightly upper part. placed around one third of the length of Po. With regard to the design of Dae, all the civil servants' stone images of the Kings' tombs other than those of the Geonwon-neung of the King Tae-jo show single or double protrusive line expressed at the edge of Dae and in the middle of such lines, cloud pattern, dangcho (a grass) pattern, chrysanthemum pattern or other various types of flowery patterns were designed. Remaining portion of the waist Dae was hanged up on the back, which was initially expressed as directed from the left to the right but thereafter expressed. without orderly fashion,. to the direction of the left from the right and vice versa, Dae was in the shape of Yaja Dae. In this regard, an issue of when or where such a disorderly fashion of the direction of the remaining portion of waist Dae was originated is also presented to be clarified. In case of the Ryuneung, Hong-neung and You-neung which have civil servants' stone images wearing exceptional costume (Jo-bok), waist Dae of the Ryu-neung and Hong-neung are designed in the mixture of dual cranes pattern, cosecutive beaded pattern and chrvsenthemum pattern and that of You-neung is designed in cloud pattern. (4) Hol. Although materials of the Hol held in hand of civil servants' stone images are not identifiable, those should be the ivory Hol as all the Baek Gwan's erected as stone images should be high class officials. In the styles, no significant changes were found, however the Hol's expressed on civil servants' stone images of the Yi-dynasty were shaped in round top and angled bottom or round top and bottom. Parcicularly, at the age of the King Young-jo the Hol was expressed in the peculiar type with four angles all cut off. (5) Hwa (shoes). As the shoes expressed on civil servants' stone images are covered with the lower edges of the Po, the styles thereof are not exactly identifiable. However, reading the statement "black leather shoes for the first class (1 Poom) to ninth class (9 Poom)," recorded in the Gyeongkook Daejon, we can believe that the shoes were worn. As the age went on, the front tips of the shoes were soared and particularly, at the Hong-neung of the King Go-jong the shoes were obviously expressed with modern sense as the country were civiliz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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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증파(考證派)' 의학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Kao Zheng Pai'(考證派) of The Traditional Medicine of Japan)

  • 박현국;김기욱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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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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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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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1. The 'Kao Zheng Pai(考證派) comes from the 'Zhe Zhong Pai' and is a school that is influenced by the confucianism of the Qing dynasty. In Japan Inoue Kinga(井上金娥), Yoshida Koton(吉田篁墩) became central members, and the rise of the methodology of historical research(考證學) influenced the members of the 'Zhe Zhong Pai', and the trend of historical research changed from confucianism to medicine, making a school of medicine based on the study of texts and proving that the classics were right. 2. Based on the function of 'Nei Qu Li '(內驅力) the 'Kao Zheng Pai', in the spirit of 'use confucianism as the base', researched letters, meanings and historical origins. Because they were influenced by the methodology of historical research(考證學) of the Qing era, they valued the evidential research of classic texts, and there was even one branch that did only historical research, the 'Rue Xue Kao Zheng Pai'(儒學考證派). Also, the 'Yi Xue Kao Zheng Pai'(醫學考證派) appeared by the influence of Yoshida Kouton and Kariya Ekisai(狩谷掖齋). 3. In the 'Kao Zheng Pai(考證派)'s theories and views the 'Yi Xue Kao Zheng Pai' did not look at medical scriptures like the "Huang Di Nei Jing"("黃帝內經") and did not do research on 'medical' related areas like acupuncture, the meridian and medicinal herbs. Since they were doctors that used medicine, they naturally were based on 'formulas'(方劑) and since their thoughts were based on the historical ideologies, they valued the "Shang Han Ja Bing Lun" which was revered as the 'ancestor of all formulas'(衆方之祖). 4. The lives of the important doctors of the 'Kao Zheng Pai' Meguro Dotaku(目黑道琢) Yamada Seichin(山田正珍), Yamada Kyoko(山田業廣), Mori Ritsi(森立之) Kitamura Naohara(喜多村直寬) are as follows. 1) Meguro Dotaku(目黑道琢 1739${\sim}$1798) was born of lowly descent but, using his intelligence and knowledge, became a professor as a Shi Jing Yi(市井醫) and as a professor for 34 years at Ji Shou Guan mastered the "Huang Di Nei Jing" after giving over 300 lectures. Since his pupil, Isawara Ken taught the Lan Men Wu Zhe(蘭門五哲) and Shibue Chusai, Mori Ritsi(森立之), Okanishi Gentei(岡西玄亭), Kiyokawa Gendoh(淸川玄道) and Yamada Kyoko(山田業廣), Meguro Dotaku is considered the founder of the 'Yi Xue Kao Zheng Pai'. 2) The family of Yamada Seichin(山田正珍 1749${\sim}$1787) had been medical officials in the Makufu(幕府) and the many books that his ancestors had left were the base of his art. Seichin learned from Shan Ben Bei Shan(山本北山), a 'Zhe Zhong Pai' scholar, and put his efforts into learning, teaching and researching the "Shang Han Lun"("傷寒論"). Living in a time between 'Gu Fang Pai'(古方派) member Nakanishi Goretada(中西惟忠) and 'Kao Zheng Pai' member Taki Motohiro(多紀元簡), he wrote 11 books, 2 of which express his thoughts and research clearly, the "Shang Han Lun Ji Cheng"("傷寒論集成") and "Shang Han Kao"("傷寒考"). His comparison of the 'six meridians'(3 yin, 3 yang) between the "Shang Han Lun" and the "Su Wen Re Lun"("素問 熱論) and his acknowledgement of the need and rationality of the concept of Yin-Yang and Deficient-Replete distinguishes him from the other 'Gu Fang Pai'. Also, his dissertation of the need for the concept doesn't use the theories of latter schools but uses the theory of the "Shang Han Lun" itself. He even researched the historical parts, such as terms like 'Shen Nong Chang Bai Cao'(神農嘗百草) and 'Cheng Qi Tang'(承氣湯) 3) The ancestor of Yamada Kyoko(山田業廣) was a court physician, and learned confucianism from Kao Zheng Pai 's Ashikawa Genan(朝川善庵) and medicine from Isawa Ranken and Taki Motokata(多紀元堅), and the secret to smallpox from Ikeda Keisui(池田京水). He later became a lecturer at the Edo Yi Xue Guan(醫學館) and was invited as the director to the Ji Zhong(濟衆) hospital. He also became the first owner of the Wen Zhi She(溫知社), whose main purpose was the revival of kampo, and launched the monthly magazine Wen Zi Yi Tan(溫知醫談). He also diagnosed and prescribed for the prince Ming Gong(明宮). His works include the "Jing Fang Bian"("經方辨"), "Shang Han Lun Si Ci"("傷寒論釋司"), "Huang Zhao Zhu Jia Zhi Yan Ji Yao"("皇朝諸家治驗集要") and "Shang Han Ja Bing Lun Lei Juan"("傷寒雜病論類纂"). of these, the "Jing Fang Bian"("經方辨") states that the Shi Gao(石膏) used in the "Shang Han Lun" had three meanings-Fa Biao(發表), Qing Re(淸熱), Zi Yin(滋陰)-which were from 'symptoms', and first deducted the effects and then told of the reason. Another book, the "Jiu Zhe Tang Du Shu Ji"("九折堂讀書記") researched and translated the difficult parts of the "Shang Han Lun", "Jin Qui Yao Lue", "Qian Jin Fang"("千金方"), and "Wai Tai Mi Yao"("外臺秘要"). He usually analyzed the 'symptoms' of diseases but the composition, measurement, processing and application of medicine were all in the spectrum of 'analystic research' and 'researching analysis'. 4) The ancestors of Mori Rits(森立之 1807${\sim}$ 1885) were warriors but he became a doctor by the will of his mother, and he learned from Shibue Chosai(澁江抽齋) and Isawaran Ken and later became a pupil of Shou Gu Yi Zhai, a historical research scholar. He then became a lecturer of medical herbs at the Yi Xue Guan, and later participated in the proofreading of "Yi Xin Fang"("醫心方") and with Chosai compiled the "Jing Ji Fang Gu Zhi"("神農本草經"). He visited the Chinese scholar Yang Shou Jing(楊守敬) in 1881 and exchanged books and ideas. Of his works, there are the collections(輯複本) of "Shen Nong Ben Cao Jing"(神農本草經) and "You Xiang Yi Hwa"("遊相醫話") and the records, notes, poems, and diaries such as "Zhi Yuan Man Lu"("枳園漫錄") and "Zhi Yuan Sui Bi"("枳園隨筆") that were not published. His thoughts were that in restoring the "Shen Nong Ben Cao Jing", "the herb to the doctor is like the "Shuo Wen Jie Zi"("說文解字") to the scholar", and he tried to restore the ancient herbal text using knowledge of medicine and investigation(考據). Also with Chosai he compiled the "Jing Ji Fang Gu Zhi"("經籍訪古志") using knowledge of ancient text. Ritzi left works on pure investigation, paid much attention to social problems, and through 12 years of poverty treated all people and animals in all branches of medicine, so he is called a 'half confucianist half doctor'(半儒半醫). 5) Kitamurana Ohira(喜多村直寬 1804${\sim}$1876) learned scriptures and ancient texts from confucian scholar Asaka Gonsai, and learned medicine from his father Huai Yaun(槐園). He became a teacher in the Yi Xue Guan in his middle ages, and to repay his country, he printed 266 volumes of "Yi Fang Lei Ju("醫方類聚") and 1000 volumes of "Tai Ping Yu Lan"("太平禦覽") and devoted it to his country to be spread. His works are about 40 volumes including "Jin Qui Yao Lue Shu Yi" and "Lao Yi Zhi Yan" but most of them are researches on the "Shang Han Za Bing Lun". In his "Shang Han Lun Shu Yi"("傷寒論疏義") he shows the concept of the six meridians through the Yin-Yang, Superficial or internal, cold or hot, deficient or replete state of diseases, but did not match the names with the six meridians of the meridian theory, and this has something in common with the research based on the confucianism of Song(宋儒). In clinical treatment he was positive toward old and new methods and also the experience of civilians, but was negative toward western medicine. 6) The ancestor of the Taki family Tanbano Yasuyori(丹波康賴 912-955) became a Yi Bo Shi(醫博士) by his medical skills and compiled the "Yi Xin Fang"("醫心方"). His first son Tanbano Shigeaki(丹波重明) inherited the Shi Yao Yuan(施藥院) and the third son Tanbano Masatada(丹波雅忠) inherited the Dian You Tou(典藥頭). Masatada's descendents succeeded him for 25 generations until the family name was changed to Jin Bao(金保) and five generations later it was changed again to Duo Ji(多紀). The research scholar Taki Motohiro was in the third generation after the last name was changed to Taki, and his family kept an important part in the line of medical officers in Japan. Taki Motohiro(多紀元簡 1755-1810) was a teacher in the Yi Xue Guan where his father was residing, and became the physician for the general Jia Qi(家齊). He had a short temper and was not good at getting on in the world, and went against the will of the king and was banished from Ao Yi Shi(奧醫師). His most famous works, the "Shang Han Lun Ji Yi" and "Jin Qui Yao Lue Ji Yi" are the work of 20 years of collecting the theories of many schools and discussing, and is one of the most famous books on the "Shang Han Lun" in Japan. "Yi Sheng" is a collection of essays on research. Also there are the "Su Wen Shi"("素問識"), "Ling Shu Shi"("靈樞識"), and the "Guan lu Fang Yao Bu"("觀聚方要補"). Taki Motohiro(多紀元簡)'s position was succeeded by his third son Yuan Yin(元胤 1789-1827), and his works include works of research such as "Nan Jing Shu Jeng"("難經疏證"), "Ti Ya"("體雅"), "Yao Ya"("藥雅"), "Ji Ya"("疾雅"), "Ming Yi Gong An"("名醫公案"), and "Yi Ji Kao"("醫籍考"). The "Yi Ji Kao" is 80 volumes in length and lists about 3000 books on medicine in China before the Qing Dao Guang(道光), and under each title are the origin, number of volumes, state of existence, and, if possible, the preface, Ba Yu(跋語) and biography of the author. The younger sibling of Yuan Yin(元胤 1789-1827), Yuan Jian(元堅 1795-1857) expounded ancient writings at the Yi Xue Guan only after he reached middle age, was chosen for the Ao Yi Shi(奧醫師) and later became a Fa Yan(法眼), Fa Yin(法印) and Yu Chi(樂匙). He left about 15 texts, including "Su Wen Shao Shi"("素間紹識"), "Yi Xin Fang"("醫心方"), published in school, "Za Bing Guang Yao"("雜病廣要"), "Shang Han Guang Yao"(傷寒廣要), and "Zhen Fu Yao Jue"("該腹要訣"). On the Taki family's founding and working of the Yi Xue Guan Yasuka Doumei(失數道明) said they were "the people who took the initiative in Edo era kampo medicine" and evaluated their deeds in the fields of 'research of ancient text', 'the founding of Ji Shou Guan and medical education', 'publication business', 'writing of medical text'. 5. The doctors of the 'Kao Zheng Pai ' based their operations on the Edo Yi Xue Guan, and made groups with people with similar ideas to them, making a relationship 'net'. For example the three families of Duo Ji(多紀), Tang Chuan(湯川) and Xi Duo Cun(喜多村) married and adopted with and from each other and made prefaces and epitaphs for each other. Thus, the Taki family, the state science of the Makufu, the tendency of thinking, one's own interests and glory, one's own knowledge, the need of the society all played a role in the development of kampo medicine in the 18th and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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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十六世紀)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畫) 이해의 확장 : <경포대도(鏡浦臺圖)>, <총석정도(叢石亭圖)>를 중심으로 (Broadening the Understanding of Sixteenth-century Real Scenery Landscape Painting: Gyeongpodae Pavilion and Chongseokjeong Pavilion)

  • 이수미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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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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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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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기증을 받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특별전(2019년)에서 처음으로 공개한 작품인 <경포대도>와 <총석정도>는 조선시대 회화사 이해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매우 지대하다. 두 작품이 1557년의 관동 유람을 계기로 그려진 병풍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어서 16세기 산수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획기적인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밝히기 위해서 본고에서는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에 담긴 경물의 내용을 살펴보고 제작시기와 양식상의 특징을 분석한 후, 다른 작품과의 비교를 통해서 이 작품에 담긴 회화사적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 작품의 제작 배경은 <총석정도>의 발문으로 알 수 있다. 본고에서 박충간(朴忠侃)(?~1601)으로 비정한 정상일로(商山逸老)가 1557년 봄에 홍연(洪淵)(?~?)과 함께 금강산(풍악산)과 관동 지역을 유람하고 유산록(遊山錄)을 작성하였으며 시간이 흐른 뒤 그중 몇몇 명승지를 그려 병풍을 만든 것을 알 수 있었다. 홍연은 자가 덕원(德遠)으로 1551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584년까지는 생존했던 인물이다. 박충간은 호가 남애(南崖)로서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을 고변하여, 그 공으로 형조참판으로 승진되고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책록된 후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이 글로 작품의 제작 시기를 1557년의 유람 후이자, 발문을 쓴 박충간이 50대 이상이 되는, 1571년 이후 곧 16세기 후반경으로 보았다. 산수나 나무 표현 등의 화풍을 기준으로도 16세기 후반의 시대 양식과 부합한다. 전술한 발문의 내용으로 <경포대도>와 <총석정도>가 병풍의 일부였던 것을 알수 있으며, 발문이 써 있는 <총석정도>가 마지막 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경포대도>를 보면 구도면에서 조선 초기 안견파(安堅派)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편파(偏頗) 3단 구도의 요소를 찾을 수 있으나 실경(實景)을 대상으로 하여 그 배치와 화법이 현실화된 양상을 볼 수 있다. 시점(視點)에 있어서도 여러 경물간의 관계나 경관의 특징이 효과적으로 표현되도록 사선각(斜線角)의 부감시(俯瞰視), 정면시(正面視) 등을 활용하여 경포대의 넓은 영역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다각적(多角的)인 관점(觀點)을 보여준다. 산의 형태나 태점(苔點)의 사용은 1557년작 <의순관영조도(義順館迎詔圖)>(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와 매우 유사하다. 16세기 안견파의 특징인 짧은 선이나 점으로 질감을 내는 단선점준(短線點皴)과 구름 모양 운두준(雲頭皴)은 현장감 있게 변모되었다. 조선 초기 산수화의 전통적인 구도와 연결성을 찾을 수 있는 <경포대도>와 달리 <총석정도>는 그 구도가 매우 파격적이다. 화면에 중심축을 두고 돌기둥들이 첩첩이 도열하여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데 근경(近景)의 돌기둥, 중앙의 사선봉(四仙峯), 절벽 위의 사선정(四仙亭)을 삼단계 정도의 깊이감으로 배치하여 화면에 공간감을 조성하였다. 중앙의 사선봉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비중을 점하고 있으나 수직적인 돌기둥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분질적(分節的), 평면적(平面的)인 양상으로 그려져 아직 입체적이고 자연스러운 공간감을 조성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기둥의 아랫부분은 희게 하고 윗부분은 어둡게 하여 고원(高遠)의 상승감을 고조시키는 효과가 있는데 각 기둥을 묘사하는 준법을 보면 기둥으로 설정된 면에 담묵을 바르고 그 위에 농묵의 가는 선들을 그어 총석의 질감과 쪼개짐을 묘사하였다. 붓끝을 사선으로 누르며 수직으로 내려 긋고 있어서 부벽준(斧劈皴)의 초기적 양상을 보인다. 일관되게 보이는 이러한 흑백의 대조, 수직적 준법의 구사는 앞으로 전개될 절파계(浙派係) 화풍의 유행을 예시해준다. 한편 기둥의 윤곽 및 균열문이 각각 다 달라서 실제의 특징을 살리려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둥 위에 올라앉은 새들의 묘사, 파도와 흰 거품의 표현 등에서 반복적인 붓질을 찾을 수가 없고 매우 생생한 묘사력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의 경물 배치는 이후 변화를 보인다. <경포대도>는 아래쪽에 죽도(竹島)를 두고 경포호를 넘어 위쪽에 위치한 경포대 건물과 오대산 일대를 올려보는 구도였다. 이러한 배치는 경포대를 화면 아래쪽에 두고 위쪽의 바다를 향하는 18세기 이래의 전형적인 구성과 차이를 보인다. 바다 쪽에서 총석을 바라보며 그린 <총석정도> 역시 이후의 작품에서는 내륙에서 바다를 향하는 것으로 관점의 변화를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정선(鄭敾)(1676~1759)과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의 작품이 제작된 이후, 두 사람의 구도를 따라 관동도의 유형이 정착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사라진 듯 했던 16세기 <경포대도>의 구도가 조선 말기 <강릉 경포대도>에서와 같이 민간 회화에서 전승된 것도 확인해 볼 수 있다. 관동 지역의 명승도는 이른 시기부터 그려져 고려 김생(金生)(711~?)의 관동도(關東圖), 조선 초 안견(安堅)(15세기 활동)의 낙산사도(洛山寺圖) 등 여러 화가가 단폭이거나 여러 폭의 관동도를 병풍이나 첩 형태로 그렸던 것을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기록은 많으나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작품이 없었는데 본고에서 고찰하는 이 두 점은 현존하는 관동도 중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예로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관동도(關東圖) 병풍(屛風)의 제작 양상을 알게 해주어 회화사적인 의미가 크다. 특히 발문의 내용에 따라 8폭 병풍일 것으로 생각되어 16세기 후반에 이미 관동팔경도(關東八景圖) 형식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성격에 있어서 현존하는 16세기 실경산수화의 예로 거론되는 작품들이 모두 실용적, 공적인 목적의 계회도나 기록화로 제작되어 실경산수화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나타난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실제 경관을 대상으로 자연의 변화무쌍함과 아름다움을 담고자 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발문을 쓴 박충간은 유람할 때 지었던 감상시를 곁들여 자연의 진면목을 반추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 점은 기존에 알려진 실경산수화의 성격과 그 양상을 달리하는 것으로 순수 감상을 목적으로 한 본격적인 실경산수화의 예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높다. 이처럼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의 두 작품은 유람의 결과를 시화(詩畫)로 제작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현존 작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예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지대하다. 또한 그간 확인할 수 없었던 16세기 실경 산수화의 다양한 형태와 구도 및 시점의 면모를 보여주어 한국 실경산수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한 점에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