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King Injo (仁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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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仁祖)의 질병관리 중 약죽(藥粥)의 적용과 의미에 관한 고찰 - 승정원일기 기록을 중심으로 - (Review of Application of Medicinal Porridges by King-Injo of the Joseon Dynasty - Based on the Records from The Daily Records of the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

  • 임현정;차웅석
    •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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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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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8-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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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During the Joseon Dynasty, medicinal foods derived from herbs were often more effective than traditional medicines. In addition, the royal family of the Joseon Dynasty believed that foods could be used as various disease treatments. Grain-based foods, especially medicinal porridges (藥粥), were most frequently used for diet therapy. We investigated various types of diet-related diseases suffered by King Injo (仁祖) as well as how the diseases were treated using medicinal porridges based on information in the 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 which is the daily record of the Royal Secretariat of the Joseon Dynasty. This study examined the SeungjeongwonIlgi of King Injo from his1st year (1623) to 27th year (1649) on a website database maintained by the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According to the records, King Injo suffered from severe diarrhea several times due mainly to febrile disease (煩熱症) as well as abdominal dropsy (脹滿) throughout his entire life. Major diseases affecting King Injo were due to his unhealthy eating habits and psychological factors. For treatment, royal doctors prescribed around 15 medicinal porridges, including nelumbo (seed) porridge (Yeonja-juk), milk porridge (Tarak-juk), Chinese dioscorea porridge (Sanyak-juk), mungbean porridge (Nokdu-juk), perilla seed porridge (Imja-juk), adzuki-bean porridge (Pat-juk), soybean porridge (Kong-juk), Korean-leek porridge (Buchu-juk), and so on, in addition to other medical treatments. Diet therapy using medicinal porridges has been used throughout history since the Joseon Dynasty period. However, knowledge of traditional diet therapy and medicinal porridges used by monarchs in the Joseon Dynasty is insufficient. Therefore, in-depth study is needed to understand the theory of traditional medicinal foods as well as explore their application to patients in the context of modern medicine.

조선 인조(仁祖)의 질병기록에 대한 고찰 - 승정원일기 기록을 중심으로 - (A review on disease records of King-Injo of Chosun Dynasty - based on the records from 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Chosun Dynasty -)

  • 김혁규;김남일;강도현;차웅석
    • 한국의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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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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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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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Chosun Dynasty' is a record created in Seung-jeong-won, a secretariat for kings of Chosun, and is a government record which holds conversations between kings and their vassals as it is. General affairs in terms of the royal family and national administration are recorded, but what is more important is the records on diseases of kings and how they were treated. This study is to look into diseases from which King Injo(1959-1649) had suffered based on the records written during the time of his reign, which was from 1623 to 1649. Also, the "curse incident" and the death of prince Sohyeon, son of King Injo, both of which had significant influence on the health of the king, were reviewed in relation to the disease records.

광해·인조 연간의 해인사 수다라장과 법보전 상량문 연구 (A Study on the Sangryang-muns of Sudara-jang and Beopbo-jeon at H aein-sa in the Years of King Gwanghae and King Injo)

  • 서치상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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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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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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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This paper attempts to study on the substantial characters of the sangryang-muns written for the constructions of Sudara-jang and Beopbo-jeon at Haein-sa in the years of king Gwanghae and king Injo. On that basis, it also attempts to declare the first time that the Buddhist Order firstly used long sangryang-mun, and to presume the backgrounds of the constructions. The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the queen, Mrs. Ryu and court ladies of king Gwanhae had participated as donators to the constructions. Therefore, it is supposed that the constructions had been promoted by the queen's Buddhistic beliefs as well as the commemoration of the 6th award of eulogistic posthumous title to king Gwanghae. Second, throughout the history of Korean Buddhism, long sangryang-mun was firstly used in the construction of Sudara-jang. Therefore, we can see the fact that long sangryang-mun was introduced to the Buddhist Order, as donation by royal families. But the long sangryang-mun couldn't be suitable for the traditional customs of Buddhism, the monks wrote additionally the Balwon-mun, so to speak, the pryer address. Third, the sangryang-mun of Beopbo-jeon was written in the mixed format of long sangryang-mun and traditional Balwon-mun. It is supposed that the Buddhist monks wanted to keep the traditional customs. Four, in the late period of J oseon dynasty, the same formats as the sangryang-muns of Sudara-jang and Beopbo-jeon have been widely used in the various Buddhist buildings. Consequently, it is supposed that these three sangryang-muns were the embryonic formats for the major types of the late Buddhist building sangryang-muns.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노의(露衣) 일습(一襲) 고증 제작 (Historical Investigation and Reconstruction of Noeui (露衣) Set (一襲) of Uigwe for the Royal Wedding Ceremony of King Injo and Queen Jangryeol)

  • 김남희;최연우
    • 한국의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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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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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0-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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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Noeui was a garment used for women's outfits and robes. In the late Joseon Dynasty it was a special garment that could only be worn by the class belonging to the royal family. Noeui was especially prepared as a wedding dress, and was worn by the bride at the Chinyeong ceremony on the day of the wedding ceremony. Until now, Noeui did not have in depth research at the costume history despite its importance as a royal costume in the Joseon Dynasty. Thus, based on Uigwe for the Royal Wedding Ceremony of King Injo and Queen Jangryeol (which is the only material with a diagram of Noeui and its pattern) this study historically investigated and restored the Noeui set of Queen Jangryeol, which was arranged in 1638, when King Injo and Queen Jangryeol were married. This academic study is the first to historically confirm and restore Queen Noeui's set, and rigorously analyze the historical materials as well as provide new comments on the shapes of Noeui's Git and the front side.

조선 중기 국왕의 음악정책 - 성종·중종·인조를 중심으로 - (The Music Policies of the Kings of Joseon Dynasty - Focus on Seongjong, Jungjong, and Injo -)

  • 송지원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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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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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5-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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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연구에서는 15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까지, 약 200여년 사이에 집권했던 세 왕, 성종과 중종, 인조의 음악정책을 살펴보았다. 이 세 왕은 각각 다른 이유에서 음악사적으로 주목을 요한다. 성종은 조선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예서, 법전, 악서의 전형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1474), "경국대전(經國大典)"(1476), "악학궤범(樂學軌範)"(1493)을 편찬하여 그가 펼친 음악정책의 방향에 대해 조명할 필요가 있다. 중종은 연산군의 폭정을 못 견디어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왕으로 추대된 후 대비의 승인을 얻어 왕위에 오른 경우이며, 인조는 직접 군사를 일으켜 집권하여 반정(反正)에 의해 즉위했다. 반정에 의해 즉위한 왕이 전개한 음악정책의 양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 이처럼 세 왕 모두 즉위의 배경이 각 다르고 그 왕대에 펼쳐진 음악정책의 내용 또한 다른 강조점을 두고 전개되므로 각각의 양상에 대해 별도로 고찰하였다. 성종은 악(樂)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음률을 깨친 관리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예조에 특별한 전지(傳旨)를 내렸다. 그 내용을 먼저 밝히고자 하였다. 또 의례에서 사용하는 노랫말의 개정 논의와 관련되어 이루어진 여러 개편 작업들의 과정과 내용, 의미를 살펴보았다. 중종은 음악의 제도적인 면을 많이 보완하였다. 이는 연산군 대에 변칙적이고 방만하게 이루어진 음악관련 정책을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 표명의 결과이다. 또 노랫말이 불도(佛道)에 관계되는 말, 남녀상열지사를 다룬 말이 많아 이를 혁파하고자 하는 정책이 펼쳐졌다. 인조 대는 전란 이후의 상황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펼쳐진 음악정책을 살펴보았다. 두 차례의 전란 이후 악공과 악생이 흩어져 국가제사도 제대로 갖추어 올리지 못하던 시기이므로 이 시기의 음악정책은 안정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정책이 펼쳐진다. 이와 함께 병자호란 이후 소실된 악기와 흩어진 음악인들의 수습을 위해 어떠한 조치가 취해지는지 논의하였다. 아울러 제사에서 쓰이는 음악이 폐지된 상황에서 그 복구 노력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았다.

창덕궁 후원 산단(山壇) 권역 구성요소의 특질과 변용 (Studies on the Characteristics of Spatial Components and Conversion of Sandan Area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gung Palace)

  • 정우진;유기석;심우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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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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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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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는 창덕궁 후원 산단(山壇) 권역의 조영 특성과 공간성격을 구명하는 것으로서, 권역 내의 공간구성요소를 중심으로 조영개념, 경관설계기법 및 변화과정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의 결과는 아래와 같다. 산단 권역에는 인조, 숙종, 순조 연간과 일제 강점기 및 근래의 보수공사 등 여러 시대에 걸친 경관 층위가 존재하고 있었다. 인조 연간에 취승정(聚勝亭)의 건립으로 개발된 산단 권역은 임금의 휴게시설로 조성되었고 이러한 용도는 숙종이 낙민정(樂民亭)을 건립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순조 연간, 즉 동궐도 제작 이전에 산단과 백운사(白雲社)가 건립되면서, 이 일대는 산신을 제사 지내는 제례공간의 성격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조성된 건축요소들은 당시 통용되던 토지신(后土神)에 대한 제례시설을 구비했던 것이거나 유교례로 해결될 수 없는 왕실의 신앙적 욕구를 충족시킬 필요성에 의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는 산단 권역의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는 특징으로 판단된다. 한편 일제 강점기에 제작된 창덕궁 평면도의 분석 결과, 일제 강점기까지 산단은 존치되어 있었으나 해방 후 어느 시점에 철거된 것을 알 수 있었다. 1970년대 초에는 이 일대가 '빙천'이라는 관람지로 개발되면서 대대적인 변형이 이루어졌다. 이때 빙천을 거치는 신작로의 공사가 병행되었는데, 현 상태는 당시 공사의 결과를 반영하고 있다. 1970년대 빙천 보수공사에 참여한 관계자의 인터뷰 결과, 당시의 공사가 음용수를 위한 2개소의 배수시설을 신설할 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옥류천 어정(御井)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왕의 즉위와 대동법 시행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Throne of Kings and Implementation of Daedongbeop)

  • 최학삼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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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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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7-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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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광해군 즉위 후의 경기대동법(선혜법), 인조 즉위 후의 강원도대동법, 효종 즉위 후의 충청도 및 전라도 대동법의 시행은 새로이 즉위한 왕에게 기대를 걸어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개선시키려 했던 위대한 경세가(輕世家)의 대단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세 왕의 즉위 후 시행된 대동법은 그 시행과 관련하여 큰 위기에 당면하게 된다. 시행과 관련된 위기의 차이점은 광해군 때와 인조 때의 대동법은 시행결정 후 시행은 즉시 이루어졌으나 얼마 안가서 폐지위기에 놓였다는 것이고, 효종 때의 충청도 및 전라도 대동법은 시행 전에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으나 그 반대를 극복하고 시행된 이후에는 폐지위기를 맞지 않고 계속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세 왕의 즉위와 그 새로운 왕에게 기대를 걸어 백성의 편안한 삶을 위한 대동법의 시행을 성공시킨 경세가(輕世家)들의 노력에 대하여 검토해 보았다. 광해군 때의 한백겸과 이원익 및 황신, 인조 때의 조익과 이원익, 효종 때의 김육 등은 공물방납의 폐단을 개선하여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개선시켜 주고자 하는 공통적인 생각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성리학의 이론적인 해석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닌 그 해석을 바탕으로 백성을 위한 올바른 정치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경세가(輕世家)적인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대동법 시행을 위한 정책입안과 시행인 것이다.

정조대(正朝代) 장용영(壯勇營)의 경호학적 가치 (King Jeongjo's Jangyongyoung and its Value in Terms of Security)

  • 이성진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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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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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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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상정조대 장용영(壯勇營)은 정조 즉위 후에 신변안전(身邊安全)과 왕권강화(王權强化)를 이룩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 친위부대(親衛部隊)였다. 이는 경호학적 관점에서 볼 때 경호제도 발전과 호위(扈衛) 성과, 경호환경(警護環境)조성의 문화적 가치가 있다. 장용영은 조선 후기의 호위제도의 변화 속에서 정조의 정치적 개혁을 실천해 나가는 데 있어서 합당한 제도로 거듭났다. 인조반정 이후에 역 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호위청(扈衛廳)과 어영청(御營廳) 발족, 그리고 효종 때의 군사력 증강을 목표로 금군을 발전 시켰던 제도들은 임시변통적인 것이다. 그러나 장용영은 숙위소${\blacktriangleright}$장용위${\blacktriangleright}$장용영의 과정을 거치면서 보다 지속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제도로 거듭나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지키면서 왕권강화와 민생안정에 대한 정치적 포부를 실현하는 데 실질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친위부대로 발전하였다. 장용영의 제도에는 효율적인 조직과 운영이 내포되어 있다. 장용영 조직의 특성은 통합성, 전문성, 대규모성을 지닌 것으로서 현대경호의 특성을 드러냈다. 장용영의 군사훈련(軍事訓鍊)과 호위(扈衛)는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호위 작용에서도 정적인 신변보호(身邊保護)와 숙소경비(宿所警備)의 임무에 충실했으며, 이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폭넓은 활동의 범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돌발 사태에도 충분히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잦은 능행과 대규모의 화성행차 및 병사들의 훈련 참관 등의 폭넓고 자유로운 활동을 뒷받침할 수 있었다. 장용영은 단순히 군사적 기능만을 발휘한 부대가 아니고 문화적 기능을 발휘하여 왕실과 백성들이 위기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어 왕의 행차(行次)에 참여하고 왕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왕과 병사가 하나가 된 장용영은 정조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부대로서의 위용(偉容)을 보여줌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국왕과 신하와 백성들이 하나가 되는 경호문화행사(警護文化行事)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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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태액지의 조영사적 특성 (Historical Studies on the Characteristics of Taeaek Pond at Changdeok Palace)

  • 정우진;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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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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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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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궁원의 복원 및 창덕궁 태액지의 원형경관 규명을 위한 기초연구로 창덕궁 주합루 일대에서 시대상이 투영되어 형성된 독특한 경관과 한국 전통수경관의 특수성을 규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창덕궁 태액지는 인조 연간에 용지(龍池)라는 명칭으로 축조되었으며, 숙종 이후 태액지로 개칭되어 불려졌다. 태액지에는 신선도를 의미하는 섬과 청서정, 택수재, 부용정의 수경을 감상하기 위한 정자가 조영되었으며, 방지라는 형태적 특징에 의해 사방에는 건물군락이 비대칭적 균형구조로 배치되었다. 이 일대의 배치에는 정형적 축선구조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열고관 개유와, 정자, 다리, 섬, 어수문, 주합루가 남북 중축선상에 위치하고, 섬과 어수문은 동서축을 이루는 분기점이 된다. 본 연구에서는 태액지 섬과 정자의 변천과정을 분석하여 섬과 정자를 조영하는 방식에서 일정한 규칙성이 제시되었다. 또한 태액지 일대의 이용분석에서는 조망에 의한 정적인 감상이 주를 이루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정조 시대에는 직접 지당에서 다양한 뱃놀이와 낚시하는 동적인 유희활동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태액지의 공간구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이 당시 배를 타는 행위가 비중 있게 행하여지자 배의 운행을 위해 태액지와 섬을 잇는 다리가 철거되었고, 섬의 크기도 작아지게 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편, 태액지 일대에 표현된 상징체계는 어변성룡과 군신주합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이야기 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공간구성요소로 택수재, 물고기 조각, 어수문, 주합루 등이 도출되었다.

조선왕조(朝鮮王朝) 궁중식(宮中食)에 관한 문헌학적(文獻學的) 연구(硏究) (Bibliograchical Study on the Food used in the Royal Palace of Chosun Dynasty)

  • 이성우
    •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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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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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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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
  • The food used in the royal palace of Chosun dynasty(朝鮮王朝) are viewed from various aspects of the dishes for ordinary meal, royal banquet, reception for the foreign representatives, wedding feast, and ancestral rites. Unfortunately most of knowledge on the food used in the royal palace is not accurate as it had been delivered orally and includes only that of the late Chosun dynasty era. Accordingly more accurate knowledge on its historical change could be illustrated by the ancient literature, including uigue(full account, 儀軌), dungrok(memorandum, 膳錄) or balgi(list, 件記). Though it is different from the preparation of King´s dinner table in kitchen, the uigue on ordinary meal, while King Jungcho(正祖) and his troupe visited the Hwasung(華城) has been handed down as the literature on the ordinary meal of the royal palace. Twenty seven kinds of uigue and dungrok on royal banquet for a celebration, from the 45th year of Sook Jong(肅宗, 1715) to the 6th year of Kwang Moo(光武, 1902), remain & reveal the change of features on dishes and food materials for royal banquet. Twenty kinds of uigue and dungrok on foods for reception of Chinese representatives, from the first year of Kwang Hae Koon(光海君, 1609) to the 21st year of Injo(仁祖, 1643), remain and antedate those on foods for royal banquet approximately 100 years. These have been precious materials for historical view on foods used in the royal palace. Twenty kinds of dungrok and uigue of karaedogam(嘉禮都監), in which dishes, food materials, and table setting diagram for dongrae feast (同牢宴) were put on record, remain as the litherature of wedding feast. Wangchosilrok(dynastic record, 王朝實錄) and numerous kinds of uigue have been helpful for study on foods used in ancestral rites. Detailed kinds and cooking procedures of foods for ancestral rites were clearly explained in Taesangji(太常志). A full view on foods used in the royal palace will be reproduced only through analytic study of these ancient lither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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