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King Danj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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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제향 복원을 위한 재관(齋官) 복식 고증 (A Study on the Historical Research on the Costume of Memorial Service Officials at Yeongwol King Danjong Cultural Festival)

  • 이은주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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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2권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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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8-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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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A historical research on the costume of memorial service officials during the period of late 18th century, King Jeongjo period, is performed for an accurate reconstruction of the memorial service for King Danjong, which is a part of King Danjong Cultural Festival held at Yeongwol. This paper summarizes the results of the research as follows: 1. Jangneung memorial service is held only on Hansik day and the procedure follows the rule based on Gukjooryeui(國朝五禮儀). The service was first held in 1791 for King Danjong and his royal followers. 2. The rule based on Chunkwantonggo(春官通考), defines the king's tomb memorial services and attendees. King Danjong's memorial service follows the rule regarding its attendees and the attendees include high-ranking local government officials, local confucian scholars, and service men. 3. The costume of attendees for the King Danjong's memorial service is as follows: 1)Dangsangkwan(堂上官) and Danghakwan(堂下官) wear Sangbok(常服), which consisted of Samo(紗帽), Heukdanllyeong(黑團領), Pumdae(品帶), and black boots(黑靴). 2)Local confucian scholars wear their uniform consisting of Yukeon(儒巾), Dopo(道袍), Sejodae, and black boots. 3)Service men wear their uniform consisting of Jeonjakeon(典字巾), red-robe with rounded collar called Hongui(紅衣), Kwangdaw hoe(廣多繪), and Uuhae(雲鞋).

조선 단종의 가봉태실에 대한 문헌·고고학적 검토 (A Historical and Archaeological Study on Gabong Taesil of King Dangjong in Joseon)

  • 심현용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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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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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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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의 가봉태실이 현재 두 곳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즉 하나는 경남 사천시의 소곡산에, 다른 하나는 경북 성주군의 법림산에 있는 것이다. 한 임금의 가봉태실은 두 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학계에서 논란이 되었다. 필자는 경북 성주에 있는 태실이 단종의 가봉태실이며, 경남 사천에 있는 단종 태실은 예종의 장자인 인성대군의 태실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현존 유물에 대한 세밀한 검토를 하지 못하여 이번에 문헌기록과 유물을 비교 연구하게 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1. 단종의 태실은 아기태실과 가봉태실로 두 개가 있다. 즉 최초 단종의 아기태실은 1441년 윤11월 26일에 성주 선석산 태봉에 조성되지만, 1451년 성주 법림산으로 이안되어 2차 아기태실이 조성된다. 그후 세조에 의해 1458년 태실이 철거된다. 그러나 법림산 태봉에는 가봉태실석물이 잔존하고 있어 이를 근거로 단종이 임금으로 등극한 후 재임기간(1452~1455)에 가봉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2. 사천의 태실이 단종의 태실로 정착하게 된 이유는 숙종 때 단종 복위과정과 관련성을 두었다. 복위되면서 왕의 격식에 맞게 태실도 보수되는데, 이때 사천의 소곡산 태실을 단종의 것으로 잘못 알고 보수하였다고 보았다. 또 가봉시기는 단종이 복위되어 장릉 개수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1699~1719)으로 추정하였으며, 의궤와 가봉석물에 난간석이 없는 것은 추봉된 임금의 무덤에 난간석을 하지 않고 간략히 조성하는 왕릉의 예처럼 태실도 난간석을 설치하지 않게 되었다고 보았다. 3. 지금까지 사천의 태실을 단종 태실로 알고 있던 것은 오류이며, 1462년에 장태된 인성대군의 태실로 결론지었다. 이는 서삼릉 태실에 있어야 할 단종 태실은 없고 인성대군 태실이 조성되어 있는 점에 착안을 하였다. 즉 1928년 이왕직이 사천의 단종 태실을 봉출하여 서울에 보관하다가 1930년 서삼릉으로 옮겨 갈 때 태지석의 명문에 단종이 아니라 인성대군 태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게 되어 서삼릉에는 단종 태실이 아닌 인성대군 태실을 조성한 것으로 보았다. 이를 위해 일제강점기 때 서삼릉 태실을 조성하면서 남긴 "태봉"과 사천 태실 서삼릉 태실에서 출토된 유물을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

장릉(莊陵)과 사릉(思陵)의 석물 연구 - 추봉과 석물 간소화를 중심으로 - (A Study of Stone Sculptures of Jagneung and Sareung - The Reinstatement and Stone Sculpture Simplification -)

  • 김이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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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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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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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단종(端宗, 1441~1457) 장릉과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 사릉은 매우 간소하게 조성되어 있다. 1698년에 단종을 복위하면서 원래 묘제로 조성되어 있던 무덤을 능제로 추봉하였는데, 특이하게도 석물의 크기가 작을 뿐 아니라, 왕위에 오른 적이 있는 왕의 무덤임에도 불구하고 무석인이 설치되지 않았으며 석수도 1쌍씩만 조성되어 있다. 이렇듯 장릉과 사릉은 매우 간소하게 조성된 탓에 석물연구에서 그간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두 능의 추봉과정 및 석물 조성과 관련된 문헌기록을 검토하고 현장답사를 통해 석물을 면밀히 분석하였는데, 이와 더불어 본고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내용은 조선시대 왕릉석물 간소화의 문제이다. 그간 조선 왕릉석물의 축소는 1701년에 조성된 명릉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 간소화의 계기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논의되지 못했다. 본 논문에서는 간소화가 장릉과 사릉에서 이미 시작되었으며, 간소화가 일어난 것은 단순히 서인으로 폐위되었던 왕의 무덤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두 능이 추봉될 당시의 시대적 상황, 즉 오랜 기근과 역병에 따른 피폐된 경제와 혼란에서 기인했음을 밝혔다.

단종애사(端宗哀史)의 후광효과를 적용한 영월팔경의 스토리탤링 전략 (A Study on Storytelling of Yeongweal-palkyung Applied by Halo Effect of King Danjong' Sorrowful Story)

  • 노재현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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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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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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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본 연구는 단지 지명도 부족과 관광 여건의 변화에 따른 홍보 전략용으로 급조, 지정된 신영월십경 지정에 따른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영월의 관광 문화자원의 대부분이 단종과 관련되어 었다는 사실에 착안하였다. 이에 따라 익히 알려진 '단종에 대한 슬픈 역사'와 유배지 영월의 문화자원이 갖는 지명도 등의 후광효과를 통해 미개발 관광콘텐츠 영월팔경의 형식과 내용을 검토하여 "문화경관 영월팔경"이라는 경관콘텐츠의 스토리텔링 방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영월팔경이라는 문화경관 텍스트와 <단종애사> 라는 역사콘텐츠의 조응적 관계성 모색을 통한 장소와 역사적 현장 경관의 동일성을 통한 의미와 이야기 전달과정에 주목하였다. 이를 위해 영월의 자연문화경관을 공간적 텍스트화하기 위한 틀 짜기(framing)와 켜 짜기(layering)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스토리뿐만 아니라 텔링이 텍스트 향유의 지배적 요소가 되도록 하기 위한 에피소드 등의 이야깃거리를 탐색하고 경관 주제의 모티브로 발굴하고자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스토리텔링 방식을 다양화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텍스트의 구조 안에서 재맥락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몰입 경관요소를 장소, 대상 그리고 시점으로 구분하여 현장화 하였다. 또한, 경관 몰입요소를 인포테인먼트(Infortainment)와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 요소 등의 미시 콘텐츠를 제시함으로써 '영월팔경-단종애사'의 이야기성, 현장 장소성 그리고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공유하기 위한 상호관계성을 고려한 영월팔경 스토리텔링 전략을 제시하였다. 제안된 스토리텔링 방안이 실제 영월 관광의 대안이자 전략으로 실용화되기 위해서는 경관 연출의 리얼리티를 역동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시점의 설정과 경관 루트 연계방안 그리고 내레이션 시나리오가 갖추어져야 하며, 영월의 자연 및 풍수적 관점에서의 형국 인식과 단종 관련 역사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경관해설가의 양성이 필요하며 인터넷과 디지털상용화 전략이 병행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조선시대 공신초상(功臣肖像)의 관복(제1기) 고찰 (A Study of the Gwanbok (1st period) of Meritorious Vassals' Portraits in the Joseon Dynasty)

  • 김미경;이은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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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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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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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연구는 공신초상의 관복 제1기를 하향뿔의 사모와 잡색 단령 시기로 규정하고 성종 7년(1476) 이전에 그려진 조선 초 개국공신(1392)에서 성종 초 좌리공신(1471)까지의 공신초상 관복의 특징을 고찰한 것이다. 관복 제1기에 속하는 공신초상(이모본) 중 이제(개국), 이천우(정사·좌명), 마천목(좌명), 신숙주(정난), 설계조(정난), 그리고 이숭원(좌리) 공신초상 등 관복 표현이 비교적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6점을 선정하고 관복 구성품별 조형적 특징을 살펴보았다. 조선 초 삼공신(개국·정사·좌명)의 사모는 모체는 낮고 모정은 둥글며, 사모의 하향각(下向角)은 좁고 짧은 형태였으나 단종대 이후 정난·좌리공신 사모는 모체가 높아지고 사모의 하향각도 두 배 정도로 길어졌다. 그리고 관복 제1기 공신초상의 사모뿔에는 무늬가 표현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개국 초에는 단령의 색상 규정이 없었으나 대체로 옅은 색의 단령으로 표현되었다. 세종대 이후 예복용 흑단령 제도가 시작되었으나 공신초상 관복에는 흑단령 제도가 반영되지 않았으며 단종대 이후에는 담홍색 단령으로 표현되었다. 단령 겉감에는 무늬가 표현되지 않았으며, 옆트임에는 '안주름무'가 표현되었다. 단령 받침옷 답호와 철릭 역시 통일된 색상은 없었으나 정난공신 이후에는 청색 답호와 초록색 철릭을 착용하는 경향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품대는 공신의 품계를 나타내는 역할을 하였다. 단종대 이후 흉배제도가 제정되었으나 제1기 공신초상 중에는 정난공신 신숙주 초상에서만 유일하게 흉배가 표현되었다. 단령에 신는 화자는 조선 초 삼공신 초상에서는 흑화가 확인되었으나 단종대 이후 정난·좌리공신 초상에서는 백화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일부 공신초상의 흑화와 백화 솔기선 부분에 연금사로 장식한 휘(揮)가 확인되었는데 휘 장식의 화자는 3품 이상이 신던 협금화를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조선 세조대 기후특성과 재해 경감 노력 (Weather Characteristics and Efforts to Reduce Disasters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in the Chosun Dynasty)

  • 이욱;홍윤
    •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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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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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9-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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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This study was conducted in order to analyze weather characteristics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in the Chosun Dynasty based on The Annals of the Chosun Dynasty. For this purpose, first of all, we need to determine whether The Annals of the Chosun Dynasty is a reliable material for research on weather characteristics. Thus, we compared weather phenomena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with those in China and Japan in the same period. From the results, it was found that The Annals of the Chosun Dynasty is a useful material at least to grasp macroscopic trends in weather phenomena. Based on this assumption, we analyzed weather characteristics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using data from The Annals of the Chosun Dynasty. During the days of King Sejo, the climate was not changed violently and there were not many disasters caused by abnormal climate such as bad harvests. This suggests that the climate was relatively stable during the period of King Sejo. As a consequence of stable weather, famine decreased markedly. However, this was not only because of stable climate but also because of the government's active efforts to reduce disasters. As droughts and floods were not frequent, social costs for recovery from disasters also decreased considerably and the saved money could be invested in the construction of social safety nets for the prevention of disasters. One of factors supporting the enthronement of King Sejo was a series of heavily damaging bad harvests during the reign of Kings Munjong and Danjong. The prevention of bad harvests was a historical mission given to the regime of King Sejo. During his reign, King Sejo promoted various policies in order to stop bad harvests. Such efforts included the government's active construction of embankments, introduction of seeds suitable for reclaimed lands, and inspiration of the consciousness of forceful farming enduring natural disasters such as floods. As a result, abnormal weathers such as floods and droughts did not lead directly to bad harvests.

조선조 역대왕의 수명과 그 사인 (Longevity of Kings and their Causes of Death during Yi Dynasty -Based on Review of Historic Royal Archives-)

  • 홍성봉
    • 한국인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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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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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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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
  • Improvements in various health indices have been ushered in, along with soaring economic growth in the last few decades in Korea. Life span of Koreans at present stands at somewhere around age of seventies. It seems of worth to elucidate some facets of health profile of historic Koreans during Yi dynasty encompassing about five hundreds years between the 14th and 19th century. Datas on health of historic Koreans are meager with exception for sovereigns for whom royal archives have been preserved intact through centuries. Though the health environments for monarchs are, no doubt, incomparable to that of the grassroot levels during the same period, health profile of monarchs would facilitate to assess health indices for historic Koreans during Yi dynasty. Arithmetic average of life span of 25 consecutive Kings(omitted the last two Kings under Japanese control) is 44.6 years of age 81 year old for King Yongjo and 16 year old for King Danjong, representing two extremes. The principal causes of death are septicemia, subsequent to infections of soft tissue and ether organs(8 in number, one-thirds of all). Secondly, both epidemic disease and vascular accidents caused deaths of three Kings each. Two kings succumbed to diabets and one suicide. The causes for the remainder, eight kings are hardly ciarified. The monarchs who contributed in establishment of new Yi dynasty with highspirited and disciplined survied beyond their fifties and sixties. In contrast, those who reigned during mid - era of the dynasty at its culmination succumbed to death in their young adulthood, most likely due to their indulgence in court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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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五禮)」에 기록된 배표의 절차와 복식 연구 (A Study on the Bapyo Ritual Procedures and Costumes Recorded in the Five rituals of Sejong-Silok)

  • 김진홍;조우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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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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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2-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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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배표의(拜表儀)는 황제에게 보내는 외교문서인 표문(表文)에 치르던 의례로, 세종 대에 행하여진 배표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직책과 그에 따른 복식을 살펴보았다. 의례 주체자인 왕은 최고 법복인 면복을 착용하였고, 면복은 구류평천관에 구장복으로 구성된다. 왕세자와 종친, 문무백관은 조복인 양관과 적라의를 착용하였다. 왕세자의 조복은 세종 10년에 오량관에서 육량관으로 바뀌었고, 문종 즉위년에 왕세자의 면복을 받아서 단종 이후에는 팔류평천관과 칠장곤복을 착용하였다. 사행원인 사자와 종사관은 상복을 착용하였다. 사자가 착용한 상복은 사모에 흑단령, 서대, 협금화이고, 종사관이 착용한 상복은 사모에 흑단령, 흑각대, 흑피화이다. 왕의 측근에서 시종하는 별감은 공복과 상복을 착용하였다. 공복은 자건에 청단령과 흑피화, 상복은 주황초립과 직령에 조아, 흑피화로 구성되었다. 의장군은 황의장과 왕의 의장이 진열되었고, 산과 개, 수정장, 금월부를 들고 있는 자는 자건에 청의를, 전도황기는 피모자에 청의를 착용하였다. 선과 금은횡과·금은입과·금은장도는 피모자에 홍의를 착용하였다. 시위군은 갑옷과 투구에 검 또는 궁시를 갖추어 착용하였다. 공인 중 악사의 복식은 복두에 비공복, 금동혁대, 비백대대, 오피리로 구성되었고, 악생은 개책에 비수란삼, 협고, 말대, 말, 오피리로 구성되었다. 이상의 결과로 세종 대에 의례복식이 의제화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배표의에 참여하는 왕 이하 왕세자, 문무백관, 사자, 별감, 시위군, 공인 모두 각 품계에 맞는 최고 등급의 예복을 착용하였다. 세종은 유교를 바탕으로 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거듭된 논의를 거쳐 각 의례와 그에 따른 복식을 정비하였고, 배표의 복식도 직책별로 체계적으로 갖추어졌다. 세종 대에 정리된 의례복식은 예전에 규정화되어 조선 후기까지 이어질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서울시 가로수 역사와 수목 고찰 (A Study on the History and Species of Street Trees in Seoul)

  • 송석호;김민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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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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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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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는 서울시 가로수의 역사적 가치를 지닌 수종 선정을 위한 기초연구로써 고문헌에 기록된 가로수 역사와 수종을 고찰하였다. 또한 다양한 수종 대안을 위해 전통조경수목을 고찰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가로수 역사는 고구려 양원왕(陽原王) 2년(546), 고려 명종 27년(1197) 등에 가로수로 추정되는 기록이 남아있으나 사료적 명료성은 부족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조선 초 세종 23년(1441)에는 국가의 역로(驛路)에 표목(標木)으로 가로수를 심은 것이 확인되며, 표목으로 식재된 가로수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가 확인된다. 조선 초 가로수제도의 시행은 단종 1년(1453) 기록으로 알 수 있으며 큰길 좌우로 소나무, 잣나무, 배나무, 밤나무, 회화나무, 버드나무 등이 식재되었고, 세조 5년(1459)에는 길가에 뽕나무를 심었다. 영조 연간에 그려진 정선의 『압구정』이나 『진헌마정색도』에는 가로수가 열식되어 있으며 이는 왕들의 행차, 한양 출입의 주요 도로, 마장(馬場)의 장소성, 수해에 따른 도로 보호와 표식 등의 복합적인 요인이 고찰되었다. 정조 연간에는 왕의 능 행차에 연관되어 소나무, 전나무, 버드나무 등의 가로수를 열식한 사례가 두드러지며, 이는 왕이 지나는 연도(輦道)와 해당 능역을 성역화하려는 가로수 식재기법으로 보았다. 개항 이후 고종 32년(1895)에는 국가에서 도로 좌우에 가로수를 심을 것을 장려하였고, 근대적 가로수 식재개념이 도입되었다. 당시 한양의 가로수는 사시나무가 속성수로써 주요하게 식재되었다. 서울시 가로수로 활용 가능한 고문헌 출현 교목은 삼국시대 17분류군, 고려시대 31분류군, 조선시대 55분류군이 추출되었으며, 16분류군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모두에서 중복적으로 3회 출현한 수목으로 역사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우수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외래수종이 유입되고 법제가 변화하면서 가로수제도의 현대적 수용이 이루어졌다. 1936년 경성부 권역의 확대에 따른 가로수 6개년 식수계획(1934-1940)이 시행될 당시 경성의 10대 가로수 수종은 '모니리페라'로 불린 현재 미루나무의 아종, 이태리포플러, 사시나무, 은백양 등의 포플러류가 1~4순위로 가장 많이 식재되었으며 수양버들, 아까시나무, 버즘나무, 양버즘나무, 은행나무, 네군도단풍이 5~10순위로 나타났다. 1930년대 중후반부터 버즘나무와 양버즘나무가 새로운 가로수로 소개되며 대규모 식재되기 시작하였고, 1942년부터는 피마잠의 장점이 있는 가죽나무를 가로수로 권장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1957년 가로수 수종은 양버즘나무, 은행나무, 이태리포플러, 가죽나무, 미루나무, 수양버들 순으로 나타나 일제강점기 수종들의 순위변화를 보였으며, 양버즘나무와 은행나무의 비중이 높은 점에서 당시의 식재 경향이 현재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은둔과 문화경관 (The Eyogye Cho Lyeo and His Secluded Cultural Landscapes)

  • 이행렬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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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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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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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어계 조려 선생의 시작품과 그의 세거지 및 후대에 조성된 문화경관 요소들을 통하여 조선전기 은둔자로서, 선비로서 지켜 나갔던 은둔문화 경관의 특징을 파악하는데 연구의 목적을 두었다. 연구대상지로는 그의 세거지였던 원북재, 채미정, 고마암, 묘소 등을 중심으로 하였다. 연구방법으로 "어계집(漁溪集)" 등과 같은 관련 고문헌의 조사와 현장조사를 통하여 세거지에 나타난 경관요소의 파악, 그리고 조려의 은둔문화 경관 특정 분석, 시문에 나타난 의경미학의 분석 등으로 구분하여 진행하였다. 연구의 결과, 1) 조려는 단종의 폐위와 함께 성균관에서 고향으로 은둔하여 세상과 결별하면서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2) 그의 출처관에 영향을 주었던 인물로는 성균관 동학이었던 류계분, 배중후 등과 생육신으로 교분을 나누었던 원호, 김시습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과 은둔관을 같이 했다. 3) 조려의 은둔이 갖는 의미는 호 '어계'에서처럼 어부로서의 은둔관을 표명한다. 이러한 은둔문화는 독특한 행동양식으로 나타나는데, 행동의 집중화 현상, 절대 은둔의 기행, 산천유람과 풍수지리학의 조예, 은둔의 고집스런 지속성, 실천효행의 유가적 자세 등이 있다.4) 은둔문화의 경관영역을 네 곳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특징을 살펴본 바, 조려 당대의 은둔문화 경관과 후손과 사람들에 의해 전승되어진 경관전승으로 파악할 수 있다. 5) 시문에 나타난 의경미학을 분석한 결과, 경물로는 식물, 자연요소와 인공요소 등이 있었으며, 표현되어진 주제의식으로는 '유가적 은둔', '아취있는 은둔', '충절의 은둔' 등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