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Joseon Dynasty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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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한양도성의 개축과 축성기법 (Repair and Construction Methods of Hanyangdoseong in 18th Century)

  • 송인호;김영수;문인식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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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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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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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Since its construction in the late 14th century, Hanyangdoseong had been carried out three major repairs and reconstructions during the 500 years of the Joseon Dynasty. In addition to the large-scale construction, small-scale construction continued until King Gojong era. In particular, in the 18th century, systematic construction management was implemented by the craftsmen and the military participated in the renovation of Hanyangdoseong in earnest, and the construction methods also developed rapidly. In the early 18th century, new construction techniques were attempted in various sections of the reconstruction work, and gradually became a common technology for repairing Hanyangdoseong in the late 18th centur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characteristics and period of changes in the 18th century's construction technique, when the rapid development of Hanyangdoseong took place. To this end, the excavation results related to Hanyangdoseong, the remaining city wall, and the inscribed stones were used to identify and demonstrate the characteristics and change of the construction method.

『한방의약계(漢方醫藥界)』 제2호 '사진삽입(寫眞揷入)'에 소개된 한의사들 연구 (A Study on the Korean Medicine Doctors introduced in 'Photo Insert' of 『HanBangEuiYakGye』 No.2)

  • 김남일;국수호;정지훈
    • 한국의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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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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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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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The figures listed under the title of 'Photo Insert' in 『HanBangEuiYakGye』 No.2 are all those who were engaged in East Asian medicine, but they can be divided into several groups depending on the areas in which they were more focused. First, he served as a royal physician at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or was an oriental medical doctor with outstanding medical skills during the family service. Second, he is an East Asian medicine doctor who established a school for Korean medicine education or conducted various academic activities. Third, he is an East Asian medical doctor who worked hard to lead a group of East Asian medical doctors by organizing Korean medical doctors. Looking at the reality of the oppression of ethnic medicine committed b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they continued to seek a way to live in national medicine, which played a major role in continuing the existence of Korean medicine without destroying it. In this paper, we analyzed the 13 Korean medical doctors introduced in the "Photo Insertion" and examined the activities of modern and contemporary East Asian medical doctors.

경복궁(景福宮) 향원정(香遠亭)의 조성시기(造成時期)와 취향교(醉香橋)의 원형(原形) (A Study on the Original Form of the Chwihyanggyo Bridge and the Creation of the Hyangwonjeong in Gyeongbokgung Palace)

  • 남호현;김태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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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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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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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경복궁의 후원에 위치한 향원정과 취향교는 고종 연간의 관련 사료와 조선 후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몇몇 도면에 의지하여 연구되고 있었다. 현재의 취향교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전소된 것을 종전 후 임시적으로 재건한 것이기 때문에 형태를 비롯하여 재건 위치도 정확한 고증을 거친 것이 아니다. 구한말~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사진과 이를 묘사한 그림엽서 따위가 일부 남아있지만 촬영 주체나 시기에 대한 정보가 부재하여 어떤 사진이 취향교의 원모습을 담은 것인지 판정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2017년 취향교 복원에 필요한 기초자료 확보를 위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조사를 통해 취향교의 원위치와 교각 주춧돌의 형태가 확인되었으며 이를 통해 취향교의 변화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취향교는 상판이 약한 아치를 그리는 3렬의 교각열을 가진 형태였으며 시간의 경과에 따라 교각열이 늘어난 평교형태로 변화한 것이 밝혀졌다. 또한 향원지 내 가도(假島)의 성토층에 대한 AMS연대측정을 통해 향원정이 임란 이후에 조성되었음이 판정되어 기존에 제기되던 '조선 전기 취로정 전신설'은 근거가 없음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및 사료검토 결과를 토대로 종합적으로 판단한다면 취향교와 향원정의 조성 시기는 조선 후기 건청궁의 건립연대와 평행할 가능성이 높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공연예술아카이브와 창조적 활용 (A Study of the Creative Application of Performing Arts Archives in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 최해리
    • 트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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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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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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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공연은 현시되는 순간에 즉시 소멸하며, 오직 공연자의 몸과 관객의 기억 속에서만 남는 무형의 예술이다. 사라진 공연의 동일한 반복, 복원, 재현은 불가능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공연을 유형의 형태로 남기고자 당대 첨단의 기술을 동원하여 다양한 기록술(記錄術)을 시도해왔다. 이러한 기록술로 공연예술을 보존 및 활용하는 곳이 공연예술아카이브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여 선진국들의 라이브러리 기관들은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창조적 행위를 후원하는 기관으로 변모하고 있다. 한국의 공연예술아카이브 기관들 또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발맞추어 공연자료를 보존하고 서비스한다는 고루한 사료보관소의 역할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창제하는 플랫폼으로 변환해 가야 할 것이다. 이 논문은 한국 공연예술아카이브의 변화양상을 요약하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응하는 공연예술 아카이브의 창조성에 대해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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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산형도(山形圖)로 본 왕릉도(王陵圖)의 표현방법(表現方法) -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始祖) 이한(李翰)의 조경단(肇慶檀) 관련 그림을 중심으로- (The Way of Expression of Wangreungdo(王陵圖: A Kind of A Royal Mausoleum Map) Reflected on Sanhyoungdo(山形圖: A Kind of A Mountain Map)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 Centering the Drawings Relevant to Jogyoungdan(肇慶壇) of Lee Han, the Founder of Jeonju Lee Family -)

  • 김정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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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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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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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대한제국기에 그려진 '완산도형(完山圖形)', '조경단비각재실도형(肇慶壇碑閣齋室圖形), '전주건지산도형(全州乾止山圖形)' 그리고 '조경묘경기전도형(肇慶廟慶基殿圖形)' 등 4매 고지도의 제작의도 및 각 도형의 경관, 조망, 시점, 경물 등의 표현내용 및 방법의 특성을 고찰하고 도형 상호간의 관련성 분석을 통해 지형표현의 특질과 조망구도 그리고 내포된 상징경관의 의미를 고찰할 목적으로 시도되었으며, 문헌조사와 병행, 지도를 통한 관찰조사를 수행하였으며 현장조사 위성사진 인터넷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전주가 조선왕실의 본향이라는 역사성을 확보하는데 중심적 공간인 경기전(1410) 조경묘(1771) 조경단(1899)은 왕조의 정통성 부여와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건립 중건되었고 조선왕조 초기부터 대한제국시기까지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유지 및 관리되었다. 4개 도형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한 후 황실과 황제의 위엄성과 당위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집중적으로 그려진 조선왕실의 시조 이한(李翰)의 묘소를 알리는 산형도(山形圖)와 그에 부속되는 보조도면으로 파악된다. 즉 완산도형은 전주부에서 조경묘, 경기전, 조경단의 존재를 알리고 그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키맵(key map)이며 건지산도형은 풍수국면도로서 시조묘의 풍수적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조경단비각재실도형은 이를 보다 세밀히 보여주기 위해 상세부분도로서 그려졌다. 전주건지산도형과 조경묘경기전도형은 공히 이원적축적과 부감법을 사용하고 주산을 건지산으로 삼고, 왕자봉과 의묘소(疑墓所)를 중심으로 중요지형을 실제 지형보다 과장해서 표현하였다. 또한 묘지에서 관찰되지 않는 중요 지형은 시점 이동을 통해 관찰하고 이를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4벌 1조의 지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완산도형'은 군현도이며 위치도의 성격을 보이는 반면 '조경묘경기전도형'은 부분상세도로서 배치도로써의 기능을 보인다. 또한 '전주건지산도형'과 '조경단비각재실도형'은 산형도로서의 기능을 갖는 풍수형국도이자 상세도인 것이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특성으로 볼 때, 기존 고지도와는 달리 연계도면(serial map)으로서의 기능성이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회화심미(繪畵審美) 고찰 (A Study on the Painting's Aesthetic of Gongjae Yoon Duseo)

  • 김도영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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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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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5-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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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조선 후기 해남(海南) 출신의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는 숙종년간 활동한 선비화가로서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교체되는 전환기에 조선 후기 사실주의 회화의 선구자로서 그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그는 남인(南人)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당쟁에 휘말려 출세길을 접고 서화와 학문에 몰두하였다. 조선 후기가 시작되는 18C는 실학(實學)이 대두되고 민족주의에 대한 자각으로 진경(眞景)시대가 열린 시기였다. 이러한 때 실학사상을 예술세계에 접목하여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이며 현실개혁적(現實改革的) 심미의식을 발휘하여 서민풍속화 개척, 서양화법의 적용, 사실주의적 기법 추구, 남종문인 화풍 도입 등을 도모하였다. 철저한 학고(學古)를 통해 변통(變通)을 도모했던 그의 회화관은 학(學)·식(識)의 학문과 공(工)·재(才) 기예적 요소를 두루 갖추어야 화도(畵道)를 이룰 수 있다는 형신(形神) 겸용을 강조하였다. 그는 다양한 화목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특히 인물화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의 사실주의 표현을 심미 특징으로 한다. 대표작인 「자화상(自畵像)」은 극사실적 묘사력과 구도의 혁신성이 탁월하며, 자신의 울분을 비장감있게 전신사조(傳神寫照)한 파격적 실험정신이 돋보인다. 그의 산수화는 형사적 진경과 신사적 관념을 융합하여 형상으로써 도를 아름답게 구현한 망적지적(忘適之適)한 이형미도(以形媚道)를 이루었다. 한편 개방적 사고로써 다양한 서민 생활을 소재로 삼은 서민풍속화는 이형사진(以形寫眞)의 실득(實得)으로 파격을 도모하였는데, 이는 부패한 권력에 대한 소극적 항거이자 애민정신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후 그의 화풍은 장남 윤덕희(尹德熙), 손자 윤용(尹愹)에게 가전되어 전해져 조선 후기 서화예술의 변화와 부흥을 선도하였다.

조선시대 궁궐정원의 원형경관 복원을 위한 제안 (A Proposition on Landscape Restoration of Joseon Dynasty's Palace Gardens)

  • 안계복;이원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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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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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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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는 궁궐의 원형 복원문제와 관련된 논리적 판단의 준거들을 추출하고, 이를 경복궁과 창덕궁에 적용시켜 봄으로써, 그 효용성을 확인하는데 있다. 또한 궁궐의 원형 복원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 방향을 제안하는데 의의가 있다. 우선 원형을 판단하기 위한 준거로는 "통시성과 공시성, 시원성과 시대성, 불변성과 변형성"의 6 개념을 추출하였다. 현재 경복궁은 1888년을 시대성 기준으로 복원하고 있지만, 1395년의 시원성을 갖는 원형에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또한 현재 경복궁의 복원은 건물 위주로 복원하고 있지만, 추후 연구에서는 근대 촬영된 경복궁 사진을 밑바탕으로 경복궁의 원형경관이 복원될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창덕궁 존덕정 일원은 약 240년 동안 통시적 불변성을 지닌 원형이 1884년경에 변형된 것이다. 1884년이라는 시대성보다는 통시적 불변성을 더 중요하므로 동궐도의 원형대로 복원되어야 한다. 창덕궁 연경당 일원 원형에 대한 문제는 효명세자의 시원적 원형과 고종 때의 시대적 원형이 동일한 지역에 중복적으로 나타나는 지역이므로 복원을 위해서는 새로운 해결 방안을 모색하여야 한다. 옥류천 지역은 1636년(인조 14년)에 시작하여 숙종, 정조를 거치면서 적어도 1884년(고종 21년)까지 약 250년간 불변성(不變性)과 통시성이 돋보이는 원형이다. 1884년 이후 옥류천 지역에 이루어진 변형은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옥류천 지역의 원형 회복을 위해서는 동궐도를 기준으로 변형된 경관을 복원해야만 한다. 그 밖에 옥류천을 건너는 다리, 샘, 담장, 초가들도 동궐도 기준으로 원형을 복원해야만 한다.

경주읍성 성곽시설의 원형고증에 관한 연구 (A Study on Historical Research of Archetype of Kyeong Ju Castle)

  • 김홍곤;김영모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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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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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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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에서는 경주읍성의 성벽과 성곽시설을 대상으로 그 간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고 구체적인 규모와 구조를 밝히기 위하여 원형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확인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경주읍성의 위치와 규모를 고증하기 위하여 일제강점기 지적도 현재 지적도 현재 수지형도 발굴조사 유구 현황도를 도면중첩(over-lay) 한 결과 정확한 성곽유적의 위치와 규모를 확증할 수 있었다. 둘째, 문헌적 고증과 근현대의 연구사료 일제강점기의 유적조사 기록 보수정비 기록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 고증한 결과 체성과 치의 규모 및 구조를 고증할 수 있었다. 셋째, 조선시대의 여장규식과 관련 문헌기록을 통하여 여장의 원형을 고증한 결과 문종원년(1451)의 초기 경주읍성의 여장과 임진란 전후(16세기 경)의 경주읍성 여장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었다. 넷째, 성곽 유적 대부분이 멸실된 상태이나 경주읍성의 문헌적 고증과 근현대 연구 사료(발굴조사 보수 수리기록 현장조사)의 조사내용을 토대로 규모를 산정하고 구조를 추정하였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향후 복원정비의 기초자료로서 개별 유적의 원형복원도를 작성 제시하였다.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삼세불상을 통해 본 17세기 조선시대 불상의 제작기법 연구 (On the Research of 17th Century Joseon Dynasty's Bulsang, a Buddist Statue, Manufacturing Technique by Examining the Daeungbojeon Hall Samse-bulsang, The Buddha of the Three Words, at the Haenam Daeheungsa Temple)

  • 이수예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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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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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4-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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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배치한 형식의 석가삼세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동안 이 삼세불상은 목조불로 알려져 왔으나 X-선 촬영 결과, 본존불을 제외한 좌우불에서 나무 위에 입힌 소조층이 함께 관찰되었다. 따라서 대흥사의 삼세불상은 조선시대 목조불상 및 소조기법이 적용된 불상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접목조불상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본존 석가모니불상은 크게 5개의 목재를 접목하여 형상을 완성하고 있으며, 약사와 아미타불은 10개 이상의 목재를 접목하여 외형에 가깝도록 조각한 뒤 그 위로 점토를 발라 소조기법으로 형상을 완성하고 있다. 즉 내부의 목재가 심(芯)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는데, 목재의 접목방식이 조선시대의 목조불상보다는 소조불상의 기법에 가깝다. 그러나 목심 위에 새끼줄을 감고 그 위에 점토를 두껍게 바른 것이 아니라 나무 위에 직접 점토를 얇게 발랐으며, 얼굴 부분이 완전히 목조로만 이루어진 것이 특징적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애초 작가의 조성의도가 목불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복장기록에 '소성(塑成)'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불상 조성이 완료된 시점에 이들 불상을 소조상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대흥사 좌우불은 조선시대식 소조기법의 한 예로 보아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대흥사 삼세불상의 X-선 촬영을 통해 얻은 화상정보를 바탕으로 이들 불상의 내부구조와 접목방식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조선시대 불상 제작기법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북한산성 지명의 분포와 변천: 『북한지(北漢誌)』 수록 지명을 중심으로 (The Distribution and Changes of the Place Names in Bukhansanseong : Focusing on the Place Names in Bukhanji)

  • 김순배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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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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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5-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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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글의 목적은 북한산성 안에 분포하는 지명들의 지리적 분포와 문화적, 역사적, 상징적 의미를 살펴보고, 나아가 지명 변천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특성을 기초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현존하는 지명 자료 중 가장 많은 북한산성 지명을 담고 있는 문헌으로 평가받는 "북한지(北漢誌)" (1745)를 중심으로 시대별 지명 자료를 수집하였고, 후부 지명소에 따라 자연 지명과 인문 지명으로 나누어 지명의 분포 및 유형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북한산' 등의 주요 지명들을 선정하여 지명의 의미와 그 변천 양상을 전부 지명소를 중심으로 기초적으로 분석하였다. 그 결과 삼국시대에 활발하게 통용되던 북한산이란 지명은 고려시대에는 삼각산, 조선시대에는 다시 '북한산' 및 '북산' 이란 지명으로 적극적으로 사용되었고, 1711년 북한산성이 축조되면서 북한산이란 지명 통용이 공식화되면서 지명 언중들에 의해 활발히 인식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한편 "북한지"에 수록된 지명들이 자연 지명 중 산지와 하천 지형을 가리키는 지명들과 이러한 지리적 환경에 자리 잡고 있는 산성 관련 각종 인공 시설물 명칭들, 특히 이 책을 편찬한 승려 성능을 통해 동일시된 불교적 정체성과 이데올로기를 담은 불교 관련 지명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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