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Japanese Coloni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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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서울 지역사회와 의례 주도 집단의 변화 -장충동 지역과 관성묘 영신사를 중심으로- (The Study of the Regional Community and the Main Group of Ritual in Seoul during the Period of Japan's Colonial Rule of Korea - With Emphasis on Gwanseongmyo in Jangchung-dong -)

  • 김태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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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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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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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이 연구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서울 지역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지역 의례의 주도 집단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하는 점을 장충동 지역과 관성묘 의례 주도 집단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일제가 식민지 수탈과 군사 기지화를 위해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던 도시 계획 사업은 거의 모든 지역에 영향을 미치며 지역사회를 재편해 나갔다. 특히, 장충동 지역은 일본인 중심 지역으로 변모하면서 전통적인 지역사회의 구조가 크게 흔들리고 새롭게 재편되었다. 일제의 문화정치하에서 지역 공동체 의례의 경우 지역 신사로의 병합을 위해 지역 의례를 의도적으로 활용한 경우나 친일 인사들의 지원하에 지역 의례가 시행되면서 일제의 정책에 일정 정도 부합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의례의 전반적인 현황은 일제강점 전과 다름없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 중에 장충동 지역에서는 관우 신앙 집단인 '영신사'가 관성묘 의례를 주도했으며 차츰 장충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의례의 성격도 지니게 되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는 지역 공동체 의례를 주도하던 세력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과거 지역 토착 세력에 의해 주도되던 지역 의례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과 도시화, 상업의 발달, 지역의 분화 등을 거치면서 다양한 세력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특히, 관성묘 영신사의 사례는 관우 신앙을 매개로 한 신앙 집단이었다는 점에서 주도 세력의 다변화가 한층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이후 석탑(石塔) 조사연구사 (A Study on the Research History of Stone Pagoda after Japanese Colonial)

  • 지성진;서치상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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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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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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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This study aims to investigate the changing aspects about research methodology of stone pagoda from the period of Japanese colonial to now. There were the differences in purpose, method and analysis of the research according to each period. In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purpose of research was to make lists of almost stone pagodas in Korea. Following this, Japanese researchers conducted detailed research for academic purpose. They took measurements of stone pagodas and made drawings. After liberation the research was focused on the relics contained in pagodas. They proceeded to investigate the inner relics in order to attract the attention of the people. In the late 1900's, the repair works of cultural heritages were increased. Many reports of the repair works were released and sent to administration offices. The reports contained the change aspects of situation between before work and after with drawings or simple investigation documents. In the 1990's, the restoration works for important stone pagodas were started by the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Since then, researches from various way - architectural and conservational researches about historical interpretation, shape, structure, proportion, technique, etc. - progressed for careful restoration and accurate study. In Recent years, various professional organizations(in the field of structure, physics, chemistry, biology, lithology, etc.) started to join the researches. Researches conducted studies directly with the stone pagodas, as well as conducting indirect studies with the stone pagodas, such as the structural stability of stone pagodas, the characteristics of rock, and conservation chemicals. Today the research project 'The preservation project of stone cultural property' is being conducted by the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The purpose of this project is to gain more detailed and accurate investigation documents to be provided for the people. In conclusion, researches from various fields must be included in the research. Furthermore, a synthetic study should be done through comparing similar characteristics or different characteristics among many research results.

일제강점기 문화재 법제 연구 -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1933년)」 제정·시행 관련 - (A Study of the Cultural Legislation of Historic Propertie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 Related to the Establishment and Implementation of the Chosun Treasure Historic Natural Monument Preservation Decree (1933) -)

  • 김종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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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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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6-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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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보존령(1933년)」은 식민지 조선의 문화재 보존에 관한 기본 법령으로서 앞서 시행된 일본의 근대 문화재 법제인 「고사사보존법(1897년)」, 「사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법(1919년)」, 「국보보존법(1929년)」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실제 그들 법령의 해당 법조문을 원용하였다. 이로써 「보존령」이 조문 구성에 있어서 일본 근대 문화재 법제를 이식 또는 모방하였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입증된다고 할 수 있다. 「보존령」의 주요 특징과 성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화재 보존 측면에서 볼 때, 「보존령」은 기존 「보존규칙」보다 보존을 강화하고 확대하였다. 「보존규칙」에서는 문화재 범주를 고적과 유물로 한정했으나 「보존령」에서는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등 4가지로 문화재를 분류하였다. 또한 「보존령」은 문화재 보존 기준을 설정하고 문화재 범위를 확대하였으며, 소유권 제한에 대한 명시적 규정과 문화재 지정제도를 도입함과 동시에 국고 보조 지원 근거를 규정함으로써 문화재 보존 법제로서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둘째, 그러나 「보존령」은 식민지 문화재 법제로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보존령」 제1조에서 보물의 지정 기준으로 "역사의 증징(證徵) 또는 미술의 모범"이란 기준을 설정하였으나 이 기준은 일제의 관점에서 총독부의 동화정책에 입각하여 문화재를 취사선택하는 기준으로 작용하여 문화재 보존 기준으로서 한계를 드러내었다. 또한, 일제는 「보존령」의 시행으로 문화재 법제가 완비되어 문화재 도굴이 감소하였다고 평가하였으나 「보존령」 시행 이후에도 도굴과 밀매매 그리고 일본으로의 반출 등 문화재 약탈과 반출은 끊이지 않았다. 이것은 일반적인 도굴과 밀매 외에도 법령을 준수하고 수호해야 할 총독과 총독부 관료들이 약탈과 반출의 당사자가 되거나 그들의 묵인하에 일본인들에 의한 문화재 약탈과 반출이 지속적으로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문화재 법제가 총독부가 허용한 또는 묵인한 반출과 약탈에는 법적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의 문화재 법령은 문화재 지정과 보존에 있어서 총독부의 시각에서 선택되고 적용된 식민지의 차별적 법제였으며, 일제의 문화재 정책 또한 그들의 동화정책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문화재를 이용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문화재 법제는 일제의 조선에 대한 문화적 식민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고 총독부의 동화정책을 실현하는 기제로 활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부여고적의 재해석과 고적관광의 성격 (A Study on Characteristics of Reinterpretation and Tourism on Historic Sites of Buyeo Region during Japanese Colonial Era)

  • 김종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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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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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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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일제는 일선동조론에 바탕을 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우리의 역사를 식민사관에 맞춰 재구성하는 한편 고고학적 조사와 고적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이를 증명하려고 하였다. 경주, 부여 등 고도(古都)에 대한 고적조사 및 고적의 재해석 그리고 고적관광은 이러한 맥락에서 추진되었다. 특히, 부여지역의 경우 고적조사와 고적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백제 사비기와 일본 고대 아스카(飛鳥)시기와의 밀접한 관련과 친연성을 강조하고 이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고적을 식민지 조선인에게 보여주는 고적관광을 실시하였다. 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부여지역에 대한 고적조사와 고적의 재해석 및 고적관광이 어떤 맥락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이 일반 대중들에게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고찰하였다. 첫째, 부여지역의 고적조사는 1909년 세키노 다다시에 의해 처음 시도되어 일제강점기 동안 고분과 사지(寺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세키노는 부여의 고적조사 결과를 토대로 고대 중국(梁) 한국(百濟) 일본(倭)간의 문화적 관계와 영향을 설정하였고 사비시기의 백제문화가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다시 일본에 전달하여 아스카 문화를 형성하게 했다는 문화 전달 자설을 역설하였다. 이는 우리문화의 고유성을 부인하고 백제문화를 중국문화의 아류 또는 단순 전파자 역할로 왜곡 해석한 것으로 이러한 세키노의 관점은 일제강점기 내내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둘째, 1915년에 발족한 부여고적보존회는 부여고적에 대한 탈맥락적 해석을 통하여 고대 일본과 백제와의 관계를 동화론적 관점에서 재정립하였다. 특히 낙화암, 고란사, 청마산성 등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일본과의 친연성을 강조함으로써 일제의 동화정책을 역사적 사실관계로 확정지으려고 하였다. 셋째, 부여지역의 고적관광은 부여고적보존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주된 관광대상과 코스는 고적의 재해석을 통해 재구성된 고적들이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부여를 일본 고대문화의 원형 또는 본향으로 이념화된 공간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부여의 고적조사와 고적에 대한 재해석 그리고 고적관광은 서로 밀접한 관련하에서 추진되었고 그 추진 주체가 조선총독부와 친일 관변단체였다는 점에서 타자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지고' '보여진' 것이었으며 그것은 식민지 표상공간으로서 부여의 재발견이었다.

일제시대의 두 간호단체에 관한 고찰(考察);조선간호부회(朝鮮看護婦會)의 간호수준 향상 노력과 조선간호부협회(朝鮮看護婦協會)의 사회 활동 (A Study on Two Nursing Organization;Choseon Ganhoboohoi(賴健看議婚會) Tried to Improve the Standard of Nursing and Choseon Ganhoboohyophoi (朝鮮看護婦協會) Tried to do Social Activities)

  • 이꽃메
    • 간호행정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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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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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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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Two nurses' assications were organized in Korea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 One was Choseon Ganhoboohoi(朝餘看護續會, the Korean Nurses' Association)started in 1923 and the other was Choseon Ganhoboohoiphoi started in 1924. Two nursing associations were very different in their members and activities. Choseon Ganhoboohoi was organized and lead by Western missionary nurses in Korea and their Korean pupil nurses. The aim of Choseon Ganhoboohoi was to become a member of ICN. Choseon Ganhoboohoi united with the Western Graduate nurses' Association in Korea, tried to raise the standard of nursing education, and became a branch of Japan Imperial Nurses' Association. All was to become a member of ICN. It continued 15 years and was quite active. But after the half of 1930s Japan's ruling policy became more and more suppressive and western missionaries were expelled from Korea so it could not but discontinue it's activities. Choseon Ganhoboohoiphoi(朝鮮觸護續協會) was organized and lead by Korean nurses. The aim of it was to do the role of nurses by social activities. So it tried health education for the public, It continued only about 2 years, But the leaders of Choseon Ganhoboohoiphoi moved to women's liberation movement and Korean liberation movement and tried to solve the problems of colonized women. The organizations and activities of Choseon Ganhoboohoi and Choseon Ganhoboohoi were two trends to develop Korean nursing during Japaneses Colonial period. The former asked for international cognizance by the raise of nursing standard, and the latter asked for national cognizance by social activities. Although two nurses' associations were different in their ways but quite same in the aspect that both tried for the development of nursing in Korea. But the colonial situation prevented them from continuing their activities. This means that the colonial situation of national level influenced deeply on the development of nursing prof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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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근대 문화공간 표현 특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Characteristic of the Modern Culture Space during Japanese Ruling Era of Korea)

  • 이근혜;오인욱
    • 한국실내디자인학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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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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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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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Most of these cultural spaces are Western architecture which is completely unrelated to our traditional style. In Japan's colonial rule of Korea these Western formation flowed in and passed on by them. Therefore before the understanding of modem cultural space built in Japan's colonial rule of Korea, it's essential to study about the background of the western period in that time, architecture and trend of interior. Due to Great Depression and other reasons the economical modernism of architecture raised in this period. In this thesis, based on such background of period, cultural space has been divided into assembly, theatre and exhibition spaces. Those spaces were studied according to its expressional characteristics and brought to following conclusion from the analysis. The cultural spaces were created around 1930 due to an increase of demand when the modernism started to establish. Like other buildings cultural space expressed modernized elevation and space formation with ferroconcrete building. However until Japan's colonial period the cultural areas were not used for public but for Japanese authority class's social gatherings only. Consequently, unlike other buildings the classical elements that could express these characters were more used in cultural spaces especially in theater and exhibition areas. This distinctiveness didn't appear separately but according to type of rooms in one space. Once more, place like assembly space was expressed with modernism, special or recreation rooms where people pursue a comfort were expressed with decorative style. Also a special theater which was used for only one person was generally expressed with western style to represent the stem character such as power.

일제강점기 간호학의 보급과 간호사 양성 정책 (Dissemination of Nursing Science and Nursing Training Polic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 정은영
    • 한국융합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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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권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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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9-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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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에 다양한 사건들 속에서 간호의 주체성을 지켜내기 위힌 노력의 과정들을 살펴봄으로써 미래의 간호 발전을 위해 현재 간호학이 갖추어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시도되었다. 일제강점기 간호의 역사는 크게 3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근대 간호의 태동기인 1910년부터 1919년에는 간호교육기관이 확장되고, 간호 관련 제도를 만들었다. 1920년부터 1937년은 근대 간호의 발전기로 간호의 영역 확대될 뿐 아니라 간호 관련 법령을 개정하고 2개의 간호협회를 조직 하였다. 근대 간호의 정체기인 1938년부터 1945년은 전쟁이라는 사회적 재난 속에서 전쟁인력 동원을 위한 간호사 양성 정책이 펼쳐지면서 또다른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변화 속에서 시대적 사건들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지만 그 시대에 정립된 간호제도는 현재 간호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은 공통된 해석이다 간호의 영역 확대와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과거부터 현재까지 사회적 다양한 사건들 속에서 변화되는 간호의 역할과 보급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

일제강점기 라디오 요리프로그램의 특성과 내용 (A Study on Radio Cooking Program in Kore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 이규진
    •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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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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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87-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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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This study was conducted to examine the 2nd broadcasting cooking program of Gyeongseong Radio from April 26th 1933, when the 2nd broadcasting for Koreans started, to December 1941. From its opening date, there were continuously regular cooking programs such as 'Recipes' and introducing 'Japchae'. Analysis of names broadcasted in cooking programs included a total of 452 foods (328 types); specifically, 332 Korean foods, 71 Western foods, 24 Japanese foods, 18 Chinese foods, and seven other foods. Korean foods included 35 staple foods, 223 side dishes, 64 deserts, and 11 sauces. Western foods included seven soups, 25 main dishes, and 25 deserts. Main dishes included many deep-fried dishes, while diverse types of desserts were also introduced. In the case of Japanese food, there were many foods combined with Western food. Chinese food included many types of dumplings and fried rice, as well as many dishes using pork. Among people broadcasting cooking programs, there were 11 whose names were shown in the schedule, all of whom were recognized as the best cooking specialists and educators of the time.

변화와 변용으로 본 근대기 서울 남산의 공원 (The Change and Transformation of Namsan(Mt.) Parks in Early Modern Seoul)

  • 박희성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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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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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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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남산은 수도 서울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여타의 다른 산과 달리 도심의 공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본 연구는 남산이 공원으로 인식되는 시점인 대한제국기와 식민지기를 주요 배경으로 변화와 변용의 과정 및 내용을 살폈다. 남산이 공원이 되고 공원이 다시 종교시설로 변용되는 일련의 과정이, 실은 일본의 도시 식민지화 과정과 식민지적 공간 통치와 연관되어 있음을 밝혔다. 일본이 왜성대공원(矮城臺公園)을 시작으로 경성공원(京城公園), 한양공원(漢陽公園)에 이르기까지 도성 안 남산을 모두 공원화한 것은 한성부에 대한 일본의 세력 확장과 관련한 것으로, 여기서 공원은 일본이 한성부를 점거하는 전략적 도구가 되었다. 그러므로 남산의 공원화는 단순히 위락과 여가시설의 확보가 아니라 공원 조성을 명분으로 한 타자의 공간 점유로 보아야 한다. 이 시기 남산의 공원 가운데 왜성대공원과 한양공원은 각각 경성신사(京城神社)와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변용되는데, 주체와 목적에 따라 그 양상은 점진적이기도 하고 폭력적이기도 하였다. 공원에 일본의 문화가 이식되고 공원이 지배자의 공간으로 치환되는 이러한 사실은 일본이 공원을 이용해 남산을 물리적으로 점거한 것과는 또 다른 공간 지배 양상을 의미한다. 즉 남산의 공원화가 한성부 내 일본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이후의 변용은 식민지 지배를 공간의 양태로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남산은 공원이라 불렸지만 실제로 공원으로 이용된 시간은 매우 짧았다. 그나마 남산이 공원으로 인식될 수 있었던 것은 경성공원 일대의 산림자원 덕분인데, 그 배경에는 신사와 신궁을 위한 신원의 보존과 관리가 있다. 이 또한 식민 공간 통치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1930~40년대 경지정리사업의 특징과 사회⋅경제적 배경 (Features and Socio-Economic Background of Farmland Consolidation Project during the 1930s and 1940s in Korea)

  • 김진수
    • 한국농공학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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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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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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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The study is aimed to investigate the features and socio-economic background of farmland consolidation project with medium-sized paddy plot at irrigation association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Korea. Most of farmland consolidation works in the 1940s was composed of independent irrigation and drainage ditches along the short side of field plot. However, the number of farm roads at farmland consolidation zone was much smaller than number of irrigation ditches to decrease reduction in farmland area. The standard field plot was medium-sized (about 20-40 ares) in Korea but small-sized (about 10 ares) in Japan in this period. As the result of farmland consolidation works, the unit water requirement was increased to 0.0035 m3/s/ha, and the unit area drainage discharge was over 2.0 m3/s/km2 in many cases. The farmland consolidation with medium-sized plot have been spread under the colonial landlord system, where major landlords occupied a large share of farmland and managed corporate farming to gain more benefit. The reasons for spread of farmland consolidation with medium-sized plot may be as follows: high net profit ratio, an increase in land price, and labor savings in rice farming. The farmland consolidation with medium-sized plot in the colonial period showed intermediate features between the farm consolidation with small-sized plot for an increase in land productivity in Japan and the farm consolidation with medium-sized plot for an increase in labor productivity after the 1960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