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Gwanghaegun

검색결과 8건 처리시간 0.024초

광해군 대(代)의 종교지형 변동 -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양상을 중심으로 - (Changes in the Religious Topography of the Great Gwanghaegun: Policies towards Buddhism and the Affected Buddhist Community)

  • 이종우
    • 대순사상논총
    • /
    • 제36집
    • /
    • pp.227-266
    • /
    • 2020
  • 본 논문의 목적은 광해군 대(代)의 불교정책과 이것의 영향을 받는 불교계의 양상을 검토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통해 조선불교를 "숭유억불"이라고 규정지음으로 인해 드러나지 않았던 광해군 대의 불교가 가진 나름의 영향력과 역동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삼았던 조선 시대에 불교는 성리학의 벽이단을 내세운 지배층에 의하여 배척되어야 했고, 이것은 광해군 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배층이 이중적 불교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지배층의 이중적 불교관은 광해군 대의 불교계의 상황에 영향을 끼쳤다. 임진왜란에서의 전공으로 지배층은 불교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조선에서 불교의 위상이 일정부분 상승했다. 상승한 위상과 임진왜란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불교계는 보사(報謝)와 구호 활동에 종사했다. 그 결과, 승려의 수는 증가했고, 사찰과 승려의 토지 소유가 허가됨으로써 경제적 상황도 좋아졌다. 이 과정에서 임진왜란은 광해군 대의 불교정책을 좌우하고 불교지형을 변동시킨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광해군 대에 지배층은 불교를 이단으로 간주하면서도, 임진왜란에 공이 있는 승려들에게 시호를 하사했고, 승려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등 일부 승려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다. 또한, 승려들은 국방, 건축 등 조직력과 물리적 힘을 요구하는 역을 부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광해군 대까지는 승려들이 부담하는 역에 대하여 일정 부분 보상해서, 승려가 역을 부담하는 것이 불교에 대한 탄압의 면보다는 불교에 대한 용인의 측면이 강했다. 불교정책에 대하여 불교계는 지배층과의 유착과 사찰의 창·재건, 그리고 불교 예술품 제작이라는 양상을 보인다. 지배층과의 유착을 통해 불교계는 광해군 대 불교정책에 적극 호응했고, 이것을 통해 교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이러한 모습 속에서 부휴 선수(浮休 善修)와 제자인 벽암 각성(碧巖 覺性)의 부휴계가 불교계에서 주도권을 가지기 시작했음도 확인된다. 광해군 대의 불교정책은 지배층의 이중적 불교관과 좋아진 측면과 악화된 측면이 공존하는 불교계의 상황을 배경으로 시행되었다. 지배층은 불교의 조직력을 전후(戰後) 복구와 국방, 토목 공사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이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시행했다. 불교계 역시 지배층과의 교류를 바탕으로 불교정책에 호응하였고, 사찰과 예술품을 보수하고 제작하였다. 광해군 대의 불교정책과 대응을 살펴보면, 조선 불교에 대한 일반적 묘사인 "숭유억불"로 설명할 수 없는 불교의 조직력과 영향력이 확인된다.

왕의 즉위와 대동법 시행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Throne of Kings and Implementation of Daedongbeop)

  • 최학삼
    • 문화기술의 융합
    • /
    • 제5권4호
    • /
    • pp.147-155
    • /
    • 2019
  • 광해군 즉위 후의 경기대동법(선혜법), 인조 즉위 후의 강원도대동법, 효종 즉위 후의 충청도 및 전라도 대동법의 시행은 새로이 즉위한 왕에게 기대를 걸어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개선시키려 했던 위대한 경세가(輕世家)의 대단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세 왕의 즉위 후 시행된 대동법은 그 시행과 관련하여 큰 위기에 당면하게 된다. 시행과 관련된 위기의 차이점은 광해군 때와 인조 때의 대동법은 시행결정 후 시행은 즉시 이루어졌으나 얼마 안가서 폐지위기에 놓였다는 것이고, 효종 때의 충청도 및 전라도 대동법은 시행 전에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으나 그 반대를 극복하고 시행된 이후에는 폐지위기를 맞지 않고 계속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세 왕의 즉위와 그 새로운 왕에게 기대를 걸어 백성의 편안한 삶을 위한 대동법의 시행을 성공시킨 경세가(輕世家)들의 노력에 대하여 검토해 보았다. 광해군 때의 한백겸과 이원익 및 황신, 인조 때의 조익과 이원익, 효종 때의 김육 등은 공물방납의 폐단을 개선하여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개선시켜 주고자 하는 공통적인 생각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성리학의 이론적인 해석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닌 그 해석을 바탕으로 백성을 위한 올바른 정치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경세가(輕世家)적인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대동법 시행을 위한 정책입안과 시행인 것이다.

조선 후기 시복 제도 연구 (A Study on Sibok in the Late Joseon Dynasty)

  • 박현정
    • 한국의류학회지
    • /
    • 제36권7호
    • /
    • pp.767-777
    • /
    • 2012
  • This study analyzed the system and arguments on the light-pink official uniforms and investigated the backgrounds and principles on the changes of the Sibok system. A study on light-pink danryeong in the latter part of the Joseon Dynasty is a de facto study on Sibok since the name of the light-pink official uniforms (implemented at the time of King Seonjo) changed from Sangbok to Sibok. Sangbok is discussed to explain the name change from Sangbok to Sibok and distinguish their usages; in addition, Gongbok is examined to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Sibok system.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books written by scholars) and related laws are used as research materials. The research results are as follows. The name of the light-pink uniforms (a custom before the Japanese invasion in 1592) changed from Sangbok to Sibok at the time of King Gwanghaegun and the light-pink uniform was used as a relatively light formal uniform compared to Sangbok. Sibok was added to the law Sok-dae-jeon at the time of King Yeongjo (because the king respected the custom) and its color rank system was denoted from light-pink and red. Sibok was revised to light-pink, blue, and green under the law Dae-jeon-tong-pyeon that was promulgated at time of King Jeongjo. In the development of the Sibok system in the latter part of the Joseon Dynasty, the color rank system of Gongbok was reflected. The sovereign ideas in the official uniforms in the latter part of the Joseon Dynasty (revealed in the study of the system and arguments on the light-pink official uniforms) were the thoughts that respected the custom and the principles that distinguish ranks to establish a Confucian based hierarchy.

조선시대 궁원 내 친잠(親蠶)문화의 배경과 공간적 특징 (Backgrounds and Spatial Characteristics of Sericulture in the Rear Garden of Palace in Joseon Dynasty)

  • 허선혜;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0권3호
    • /
    • pp.12-20
    • /
    • 2012
  • 본 연구는 조선시대 궁궐 내에서 일어났던 친잠문화의 배경과 공간적 특징에 대한 탐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조선은 유교적 중농주의 국가로서 국초부터 농업 못지않게 양잠업 장려에 열의를 보여 양잠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진행해 왔다. 그러한 노력의 일면으로 조선 왕실은 궁궐 내에서 친잠활동을 하게 되었다. 조선은 초기 태조 연간부터 궁원 곳곳에 뽕나무를 심었으며, 세조는 동궁(東宮) 근처에 잠실(蠶室)을 설치하여 세자를 비롯한 궁중 사람들에게 양잠의 중요성을 수시로 알게 했다. 성종 연간에는 조선 최초로 창경궁 후원에 채상단을 만들어 친잠례를 거행하였고, 이후 채상단은 위치를 달리하며 광해군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 후 영조 연간에는 경복궁에 채상단과 정해친잠비(丁亥親蠶碑)를 건립하였는데, 이는 경복궁 유지에 대한 영조의 애착과 양잠의 권면에 대한 적극적 의지의 산물이었다. 경복궁 유지에서 터가 고르고 뽕나무를 심기 적합한 동편이 선택되어 채상단을 축조했으리라 가늠해 볼 수 있는데, 이 장소는 세종 연간 잠실이 있던 장소이기도 하다.

창경궁 영춘헌과 집복헌의 건축과 변화 (A study on the construction and change-over of Yeongchunheon and Jipbokheon in Changgyeonggung Palace)

  • 이종서;김버들
    • 건축역사연구
    • /
    • 제31권5호
    • /
    • pp.35-44
    • /
    • 2022
  • Although Changgyeong-gung was devastgated by Japanease invasion in 1592, it was restored during the reign of Gwanghaegun, had remembered of early Joseon danasty's architecturural order. It was destroyed several times by fire after that but was rebuilt immedieately. There are Donggol-do and Donggol-dohyeong, so we can fine the change of architectures in Changgyeong-gung. Jibbokheon(集福軒) and Yeongchunheon(迎春軒) are marked in another location and architectures in Donggon-do and Donggon-dohyeong. The reason has been known that it was rebuilt after the fire in 1830. As a result of reviewing the record of birth of crown prince Sado and movement of coffin of King Jeong-jo in funeral ceremony, it was confirmed that notation of Jibbokheon and Yeongchunhyeon was misprinted. In particular, Yeongchunheon confirmed the possibility that the existing building was built by extending it while applying the asymmetrical building with four-purlins structure method during the reign of King Jeongjo, and that it was reconstructed by moving Yeonyeonghap when it was destroyed by fire 1830. And although now Jibbokheon and Yeongchunhyeon(延英閤) are connected, nothern part of Jibbokheon did not burn in the fire, so it was judged that original architectural plan were maintained until now. The current building north of Jibbokheon was built before 1695 (21st year of King Sukjong), which was first identified in the Gunggeolji(宮闕志), and there is a possibility that it may have been a part of Janggyeongmun(長慶門) inner corridor built before 1633. The present building north of Jibbokheon has great architectural significance in that it maintains the structural method of the early Joseon Dynasty which was often applied to buildings with a small scale of inner palace.

창경궁 명정문 목부재의 수종 및 연륜연대 분석 (Species Identification and Tree-ring Dating of Wooden Elements in Myeongjeong-gate of Changgyeong-palace, Seoul, Korea)

  • 이광희;조상윤;김수철
    • 보존과학회지
    • /
    • 제38권2호
    • /
    • pp.87-95
    • /
    • 2022
  • 본 연구에서는 창경궁 명정문 목부재에 대해 수종과 연륜연대분석을 진행하여 재질과 건축역사를 조사하고자 하였다. 명정문 목부재(79점)의 수종은 소나무류 78점, 전나무속 1점으로 확인되었다. 연륜연대분석은 코어링법을 이용하여 시료를 채취하였으며, TSAP 프로그램으로 크로스데이팅을 하였다. 연륜연대분석 결과, 소나무류 목부재 58점에 대한 최외각 연도는 1604년 초봄-1615년 늦가을, 1706년 늦가을-1707년 초봄, 1828년 늦가을-1834년 늦가을로 총 3개의 벌채시기가 확인되었다. 1600년대와 1800년대 벌채시기들은 조선왕족실록, 광해군일기, 창경궁영건도감의궤의 수리기록과 일치한 것을 확인하였으나 1700년대 벌채시기는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아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은 수리기록을 연륜연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밀양 칠탄정 경영과 칠리탄 16경의 경관특성 (A Characteristics of 16 Scenes of Chilitan and Management of Chiltanjung, Milyang)

  • 김수진;정해준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7권3호
    • /
    • pp.22-36
    • /
    • 2019
  • 본 연구는 오한 손기양이 경영한 칠리탄 일원의 경관특성을 고찰함으로써 조선 16~17세기 선비가 지향했던 출처관과 이상적인 경관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연구의 방법으로는 「칠탄정십육경도」에 묘사된 그림과 시문 그리고 현장답사를 진행하여 각 경의 구조와 해석을 진행하였다. 오한은 광해군 4년 조정의 정치가 날로 문란해지자 은거를 결심하고 낙향하게 되는데, 평소 엄자릉의 은일적 삶을 흠모하여 엄자릉이 칠탄을 경영한 것과 같이 원래의 종천을 칠리탄이라 이름하고 그 주변 정자에 짓고, 낚시하는 장소를 마련하는 등 자연에 귀의하는 삶을 살고자 하였다. 하지만 은거를 하고 있음에도 임금과 조정을 걱정하는 등 도학적 출처관을 지향하고 있으며, 칠탄정 원림 건물의 각 기둥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수신, 안빈낙도 등의 성리학적 사유와 무위자연을 표상하고자 하였다. 현재의 모습은 1936년 모습이며, 읍청당을 중심으로 운강루, 벽립재, 칠탄정 등이 위치하고 있다. 원림 주변에는 '진암수석', '기암', '오한손선생장구지소', '조기' 등의 각자가 남아있어 당시의 장소정체성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중건기 등의 기록에 의하면 칠탄정 주변으로 소나무를 비롯한 전나무, 오동나무, 은행나무, 연꽃, 복숭아, 대나무 등이 식재되었다고 하며, 현재 은행나무와 배롱나무, 소나무와 밤나무가 발견되는데, 식물의 상징성과 실용성을 고려하여 식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칠탄정 16경의 경관묘사 방법은 '장소+경관(행위)'의 구조로, 칠탄정을 중심으로 근경, 중경, 원경이라는 장소적 특징을 분류하여 해석하였으며, 칠탄정 일원의 각 경관을 은자를 비롯한, 군자, 신선사상, 향토경관, 태평성대 등을 상징화하여 유교적 이상향을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희궁 별원(別苑) 함춘원의 실지(實地) 경역 고찰 (A Study of the Impractical Area and Boundary of an Outer Royal Garden "Hamchunwon" Attached to Gyeonghuigung Palace)

  • 정우진;홍현도;소현수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40권1호
    • /
    • pp.26-42
    • /
    • 2022
  • 본 연구는 러시아공사관 부지 이전에 존재하던 경희궁 별원 함춘원의 경역과 본래의 외곽 경계를 고찰한 것이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러시아공사관 부지확보 및 신관 건립을 위해 작성된 3종의 도면을 살펴보면, 부지 내부에 함춘원의 원지형으로 보이는 2개의 낮은 봉우리가 남북 방향으로 존재했음이 확인된다. 공사관의 초기 계획안에는 출입문이 북서쪽 새문안로와 연결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러시아 임시공사 베베르가 공사관 부지를 매입할 당시의 보고서에는 이미 좁은 출입구와 흙길이 있어 새문안로와 통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점은 공사관의 출입문으로 계획한 부지 북서쪽에 함춘원으로 진입할 수 있는 관리 동선과 원문(苑門)이 위치했음을 알게 해준다. 둘째, 공사관의 건립 당시 높은 언덕 상부를 절토하여 대지가 조성되었고 그 결과 2단의 계단식 지형이 만들어졌다. 본관 및 서기관동 등이 세워진 지반은 가장 높은 봉우리를 깎아 평평하게 다짐하여 만들어졌고 이때 다량의 토량이 정지작업에 사용되었다. 본관 북쪽 영역의 경우도, 산지를 깎아 평평하게 지형을 고른 흔적이 역력하고, 조망이 수월한 물리적 환경을 활용하여 산책로와 정자가 있는 전망형 정원이 조성되었다. 이는 궁궐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지형에 민간의 조망을 막기 위해 별원을 조성했던 지형 조건과 상통한 이용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미국, 영국, 러시아공사관 주변의 공간 변화를 보여주는 1880~1890년대의 사진에 함춘원 담장이 부분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사진분석 결과 함춘원은 러시아공사관 부지 북측 영역을 차지하고 있으며, 공사관의 북쪽, 서쪽, 동쪽 담장이 함춘원의 담장과 근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공사관 남쪽 영역은 본래 민간의 가옥이 있던 곳으로서, 여러 자료에서 수십 채의 민가와 농경지를 매입한 정황을 살필 수 있었다. 넷째, 광해군 연간 경덕궁의 별원으로 조성된 함춘원은 경복궁 중건 때 경희궁의 전각을 뜯어서 공사 부재로 사용하면서 별원으로서의 장소성을 상실했으며, 1885년경 러시아에 매각됨으로써 멸실되었다. 함춘원이 있던 경역은 신관의 건립 뒤로 주요 건물과 정원이 있는 러시아공사관의 핵심적 공간으로 변용되었다. 따라서 러시아공사관 북측 영역에 한정된 함춘원은 1897년 이후 조영된 경운궁 및 선원전과 시간적, 공간적 맥락이 닿아 있지 않으며, 선원전의 배후림 또는 배경림으로 보는 시각도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